들어가는 말: 위기관리 국가체계 재정비는 시대적 요구
위기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그 원인과 유형은 오히려 점점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 변화속도를 국가의 대응체계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관리의 모든 과정에 대한 국가체계의 전반적인 재정비는 시대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32가지 유형의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정부 각 기관이 어떤 절차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은 ‘위기관리 매뉴얼’은 이 같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위기관리센터 신설로 국가위기관리 체계 정비 본격화
2003년 2월 18일 발생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는 국가 위기관리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참사 직후 출범한 참여정부는 즉시 NSC를 확대·개편하면서 그 안에 위기관리센터를 신설했다. 정부 수립 후 최초로 국가 위기관리체계 문제를 종합적이고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전담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위기관리센터는 발족 즉시 국가안보종합상황실을 설치·가동했다. 상황실은 전통적 안보, 대형 재난, 국가핵심기반 분야의 제반 상황정보들을 24시간 모니터하고, 위기징후 포착 시 정확한 정보를 국민과 관계기관 책임자에게 신속히 알릴 수 있는 첨단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로써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그리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기본적인 위기관리 태세가 구축된 것이다.
NSC 위기관리센터는 지난 2년 8개월여 동안 재난위기를 전담하는 소방방재청 신설과 국가 사이버 안전 문제를 전담하는 ‘사이버안전센터’ 신설을 기획·조정했다. 2004년도에는 국가위기의 개념을 정의하고 국가위기관리의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을 제정했다.
‘표준매뉴얼’ 이어 270여권 ‘실무매뉴얼’ 수립
또한 우리 사회에 대두될 수 있는 32개 위기 유형을 도출해 이에 대한 평시 ‘예방’, 사전 ‘대비’, 발생 시 ‘대응,’ 마지막 ‘복구’ 단계에 이르는 위기관리 전 과정에 걸쳐 관련 기관이 어떠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를 규정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을 수립했다.
2005년 11월에는 이미 수립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에 의거, 위기가 발생했을 경우 각 기관들이 즉각 수행하여야 할 구체적인 행동절차와 조치사항들을 규정한 270여권의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을 수립, 완료했다.
이밖에도 위기관리센터에서는 국가의 모든 위기 분야에 관심-주의-경계-심각의 4단계 위기경보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이러한 경보제도는 이미 테러, 산불, 조류인플레인자(AI), 원유수급 등 제반 위기분야에서 적극 운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비로소 효율적인 국가위기관리를 수행할 수 있는 기본 체계와 제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앞으로 위기관리체계의 효율적인 운영과 지속적인 보완·발전을 통해 기본권으로서의 국민 안위를 완벽하게 보장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음에 소개되는 몇 가지 사례는 지난 2년 8개월여의 참여정부 기간 동안 실제 일어났던 것으로 일부 단편적이고 임기응변적이었던 위기대응 방식이 어떻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제도적인 혁신으로 마무리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사례 1 : 태풍만 지나가면 기상예보 문제가
2003년 9월 130여명에 이르는 인명피해와 5조원 가까운 재산피해를 가져온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이후 며칠 동안 강풍에 엿가락처럼 휘어져 쓰러져 내린 부산항의 항만크레인 모습이 TV화면을 채웠다. 또 10여명이 수몰된 마산 부두, 노래방 사고 기사와 함께 태풍의 육지 상륙시간과 경로 관련 기상 예보의 부정확성 문제가 연일 신문지상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기상청 외 16개 기관의 기상관측, 통합 안돼
그 시간, 위기관리센터 내에서도 기상예보와 관련한 몇 가지 의문점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것은 태풍 상륙지점(경남 사천)에 위치한 공군 비행장과 인근의 또 다른 해·공군 기지(김해 공군기지, 진해 해군기지)의 군 기상대에서는 태풍 접근에 대해 어떻게 예보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군에서 파견된 직원들은 과거 근무 경험에 의해 군기지의 자체적인 국지 기상정보가 매우 정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만약 군기지 기상정보가 기상청에 전달된다면 어떻게 거대한 태풍의 접근 시간이나 경로에 대한 예보가 틀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해당 군기지에 관련사항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 결과, 이들 군기지에서 자체적으로 관측한 기상정보는 기상청에 전달되지 않았다.
50년대 사라호 이래 큰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여지없이 기상예보의 부정확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인력과 장비부족이 원인으로 거론됐다. 다른 기관과 분야에서 보유하고 있는 기상관측 능력을 최대로 종합하여 정확성과 효율성을 높여보려는 노력은 없었다.
군부대처럼 자체적인 기상관측 업무를 갖고 있는 다른 정부 기관이 더 있는 지를 파악해 보았다. 육·해·공 각 군을 국방부 1개 기관으로 간주하고도 무려 16개 국가 기관이 나름대로의 기상관측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철도청에서는 전국 선로 매 20km 마다 강우/풍속 자동 관측장비를 설치하고 있으며, 수자원공사에서는 주요 댐 유역에, 산림청은 주요 산림 지역에, 건교부(도로공사)는 전국 주요 도로상에, 행자부(지자체)는 전국 동 단위 지역에까지 각각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2003년 초 기준으로 2800여개의 기상관측 장비가 설치되어 운영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기상정보도 기상청에 전혀 통합·활용되지 않고 있었다.
기관마다 관측장비, 단위·기준 제각각
위기관리센터는 곧 16개 기관 기상업무 관계자 회의를 소집해 각 기관의 기상정보와 자료를 기상청에 자동 전달·종합하는 방안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관측장비 시스템이 제각각이어서 정보를 자동적으로 전송하기가 어려우며, 관측자료의 단위와 기준도 달라 그대로는 서로 공유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회의에 참석한 기상관계자들 모두가 문제점에 공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도 뜻을 같이 했다. 이제라도 관측 단위와 기준을 표준화하고 향후 도입될 장비를 정보교환이 가능한 제품으로 선택해 나간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기상관측 표준화법’ 국회심의 중
현재 서 있는 지점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다면 목적지 도달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센터가 주재한 2차례의 회의에 이어 국무조정실 주재로 몇 차례 회의가 더 개최되었고 마침내 법 제정을 통해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또한 법제정 이전의 기간 중에라도 새로 설치되는 기관의 관측장비도 호환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기상관측표준화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이 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이미 3차례에 걸쳐 새로 설치되는 장비의 표준화 문제를 심의했으며, 2005년 11월 마침내 ‘기상관측 표준화법’이 정부입법안으로 발의돼 국회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례 2 : DMZ 내의 산불은 어찌할 것인가
산불은 아이러니 하게도 식목일을 전후로 해서 유난히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위기관리센터 상황실은 식목일이 다가오면 평소보다 더욱 긴장해야 한다.
‘강 건너 불구경’ 해야 했던 DMZ 내 산불
2005년 4월 4일에도 어김없이 산불이 발생했다. 낙산사를 전소시킨 양양 산불과 비슷한 시점에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은 산림청 및 군부대 등을 비롯한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모두 진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고성지역 DMZ 내 산불만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지난 50여년의 분단시기 내내 그래왔듯이 DMZ 내 산불은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이 팔짱끼고 지켜보아야만 하는, 그러다가 DMZ를 넘어 남쪽이든 북쪽이든 그 불길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는, 그야말로 하늘의 처분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DMZ 내 산불은 종종 일어났다. 건조기의 낙뢰, 수목 간 마찰에 의한 자연발화, 또는 경계감시 구역 시계 확보를 위한 인위적 화공작전과 그에 대한 상대방의 맞불작전 등이 원인이었다. 이때 간혹 예기치 못한 강풍이 불면 DMZ 밖으로 산불이 퍼져 남북 모두 의외의 피해를 입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내 매설된 지뢰와 상대방에 대한 민감한 반응 유발 가능성 등으로 인해 인원을 투입하거나 산불진화 헬기를 투입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연 소화되기를 기다리거나, 불길이 바람을 타고 행여 철책을 넘을 경우에 대비하여 소화도구를 지참한 군 병력을 철책 남쪽에 배치하여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책이라면 대책이었다.
고정관념 깬 발상의 전환, 소방헬기 투입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기관리센터는 수십 년간의 고정관념을 깨는 발상의 전환으로 문제해결에 접근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그저 산불을 진화하기 위한 것인데 DMZ 내로 헬기가 들어가지 못할 일이 없지 않은가. 북한으로서도 바람 방향에 따라 언제라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불씨를 원천적으로 제거해버리겠다는 일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생각은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통일부와 국방부는 각각의 채널을 통해 북한 당국에 소방헬기 투입 의사 통보와 협조를 요청했다. 산림청과 해당지역 군부대는 즉각 소방헬기 비행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기대한 시간보다 상당히 이른 시간에 북한으로부터 응답이 전해졌다. 진화작업을 하되 DMZ 내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을 넘지 말아달라는 내용이었다.
2005년 4월 8일 오후 6시, 일몰을 1시간 남긴 시각에 마침내 분단 이후 최초로 우리 산림청 헬기가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군 안전요원을 동승시키고 DMZ 안으로 비행해 들어갔다.
간단한 작업 끝에 산불을 완전히 진화했다는 보고가 상황실에 들어왔다. 항법 착오 등에 의해 DMZ 내로 잘못 들어갔던 우리 헬기에 툭하면 격추 사격이 가해지곤 했던 지난 세월과 비교하면 남북 분단사에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위기관리센터 요원들에게는 또 하나의 매뉴얼(‘DMZ 산불 대응매뉴얼’) 수립이 업무과제로 부여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맺음말: 새로운 위기대응 노력 계속할 것
이외에도 ‘재외국민 보호 표준매뉴얼’을 적용한 2004년 12월말의 동남아 지진해일(쓰나미) 사례에서는 이미 준비해놓은 매뉴얼의 위력이 크게 발휘되었다. 매뉴얼이 없던 옛날에는 소관 부처가 어디이며,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등을 놓고 초기대응에 자칫 혼란과 공백, 지연 등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또한 ‘폭설 재난 표준매뉴얼’을 가동시킨 2005년 3월의 영남지방 폭설 사례는 바로 1년 전 폭설로 벌어졌던 고속도로 상에서의 차량 고립사태 때와 비교해보면 국가의 대응조치가 정말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유형의 위기가 새로운 형태로 우리 사회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위기관리에 대한 인식과 발상을 혁신적으로 전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제도적 개선으로까지 마무리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류희인 위기관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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