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뉴스와이어)--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상설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향촌 선비인 부친 이행우와 모친 벽진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화학파의 양명학을 수학하고, 청년기에는 수학·물리학·화학·경제학·국제법 등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신구학문을 겸전하게 되었다.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균관 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궁내부 특진관·학부협판·법부협판·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6월 토지를 침탈하기 위해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상소를 올려 반대하고, 보안회 등과 함께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선전하는 활동을 펼쳐 철회하게 만들었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가 민영환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하자 종로거리에서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운동을 촉구하면서 자결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1906년 국외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여기서 신학문을 전수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펴던 중,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외교특사로 임명되어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일본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헤이그에서 이준·이위종과 함께 각국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언론인들에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널리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이후 1908년 미국을 방문하여 재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촉구한 뒤 노령 연해주로 돌아와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1910년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의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고, 경술국치 직후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일제 강점 이후에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1914년 만주·노령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하였고,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3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2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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