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은 호조를 지속하고 있지만 내수 흐름을 결정하는 소비는 2003년 초 이후 2년 6개월이상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예년의 경우 소비하락 국면(정점~저점)이 1년 6개월~2년에 그친점을 감안할 때 이번 하락 국면은 이례적으로 길다. 소비 장기부진에는 고용 불안, 경기 전망의불확실성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 추세와 고령층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노후불안 심리,그리고 이에 대한 고령층의 대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0대 이후의 저축률 증가 현저
한국 가계의 가구주 연령대별 저축률을 살펴보면 대체로 시간이 흐를수록 저축률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추세가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저 연령층보다 50대 이상 고령자의 저축률증가가 눈에 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나 도시근로자 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2004년의 경우 55~59세와 60세 이상의 저축률이 각각 29.2%와 32.9%로, 30세 전후연령층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1969년에 25~29세였던 사람은 2004년에 60세이상이 되어있을 것인데, 나이가 들어서도 저축률이 꺾이기는 커녕 그래프의 모양이 N자형을 띠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 한 개인의 부(富)의 수준이나 저축률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역(逆)U자형을 나타낸다고 보는 생애주기가설과 달리, 고령층의 저축률이젊은 층에 비해 낮지 않은 현상은 다른 나라의 가계 저축률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이나 대만의 경우 가구주가 중장년기에 접어들 때 가계 저축률이 정점을 이루지만 그 후에도 별로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처럼 저축률 곡선이고령층에 들어서면서 눈에 띄게 감소하는 경우는오히려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처럼 40대 중후반에 저점을 찍은 저축률이 그 이후 시기에 다시 증가하는 모습은 발견하기 어렵다.
자녀교육비 지출 일단락
저축은 가처분소득에서 소비지출을 뺀 나머지 부분으로 정의된다. 우리나라에서 50대 이후에는 대체로 일생에 걸쳐 있는 대규모 지출이 일단락되는 반면 소득 활동은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자연히 저축률이 상승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우선 지출 항목 가운데 비중이 가장 높은 교육비를 점검해 보자. 통계청이 도시근로자 가구를 대상으로 한 가계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지출항목 중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기준8.6%이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사교육비 지출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한국은행이 조사한 2004년의 사교육비 규모는 7조 9000억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를 가구당으로 환산하면 가구당 44만여원이다. 이 금액을 교육비 지출에 전액 포함시킬 경우 도시근로자가구의 교육비 지출 비중은 2004년 현재 24.9%가량으로 단일항목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크다. 그만큼 교육비가 가계 지출이나 저축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것이다.
한편 가계의 소비지출 항목 중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35~49세연령대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 2004년 기준으로 한 가구의 가처분소득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비중을 보면 35~39세(9.1%)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40~44세에 13.8%로 정점을 이룬 다음45~49세 13.1%, 50~54세 8.4% 등으로 급락한다. 이는 자녀의 교육 사이클(유치원 입학~대학교 졸업)에 해당하는 기간이 가구주 연령대로 보면 30대 초중반에서 50대 중후반까지라는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2004년 저축률 곡선을 보면 30~34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가 45~49세에 반전된다. 이는 교육비의 지출패턴과 대칭을 이룬다. 요컨대 50대 이후 자녀에 대한 교육비지출 비중의 하락이 해당 연령층이 저축 여력을 회복하게 되는 한 가지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자녀 결혼비용 부담교육비 지출은 10년 이상에 걸쳐 장기적으로 나타난다. 반면 자녀의 결혼비용은 한꺼번에 많은금액이 소요되는 특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녀의 결혼비용은 다른 나라에 비해 과다하게 지출되는 경향이 있다. 2003년 한국결혼문화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평균 결혼비용은 1억3,484만여원으로 나타났다. 이 중 신랑측 집안에서 부담하는 금액이 5,304만여원으로 전체의38%를 차지하며 신부측 집안에서도 19%인 2,510만여원을 부담한다. 신랑과 신부가 직접 부담하거나 대출로 해결하는 부분은 43%에 그친다. 결국 결혼으로 인해 새로 탄생하는 가구의 부의 절반 가량(결혼식이나 신혼여행경비 등을 무시할 경우 57%)이‘세대간 부의 이전’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조사 당시의 평균결혼연령이 남자의 경우 30.1세임을 감안할 때 부모 세대인 가구주는 50대 후반이나 60대초반에 자녀의 결혼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이렇게 자녀의 결혼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지출은부모세대 자산의 상당 부분을 처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에 따라 부모들이 결혼 전에는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결혼 후에는 줄어든 자산을 회복하기 위해 저축률을 높이려고 하는 심리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층의 완전은퇴 지연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커다란 지출이 완료됐다하더라도 이미 은퇴를 했거나 은퇴을 앞둔 50대중반 이후에 새로 생기는 소득이 없다면 저축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OECD가 발표한 2003년 각국의 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55~64세의 경제활동참가율은 72.6%로 일본과 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50대 중반 이전에 주요 소득원(main job)에서 퇴직을 하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제2의 소득원을 찾아 소득활동을 계속하는 인구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식 은퇴 연령과 실제 은퇴 연령 간의 차이를 국제비교한 OECD 자료에서도 이를 확인할수있다. 이에 따르면 유럽의 대다수국가의 근로자들은 공식 은퇴 연령이 되기 전에 노동시장에서 빠져 나오는‘조기 은퇴’경향이 여전히 뚜렷하다.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부국가에서는 근로자들이 공식 은퇴 연령을 한참넘겨서도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공식 및 실제은퇴(완전은퇴) 연령 간의 격차는 멕시코와 일본을 제외하면 우리나라가 8년으로 가장 길다. 이처럼 고령층이 공식은퇴 이후에도 돈벌이를 지속함으로써 이전의 저축을 헐어쓰기(음의 저축, Dissaving)는 커녕 오히려 저축률을 높이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평균수명 증가와 사회안전망 미비에 따른 노후불안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에 갈수록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요인은 노후불안이다. 우리나라는평균수명 증가와 출산율 감소에 따른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2000년에‘고령화 사회’(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전체 인구의 7%)에 진입했다. 이후 18년 뒤인 2018년에는‘고령 사회’(14%), 다시 8년 후인2026년에는‘초고령 사회’(20%)가 될 전망이다. 선진국들이 수십 년 동안 고령화를 겪으면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가졌던 반면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회안전망인 국민연금은 시행된 지 17년 만인 현재 파산 경보가 울리고 있다. 현재의 급여 및 보험료율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2036년에 당기 재정수지가 적자로 전환하고 2047년엔 적립기금이 완전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퇴직금 제도는 조기정산, 조기퇴직 등으로 인해‘노후자금 밑천’으로서 본래 의미가 퇴색된 채 퇴직연금제도로 전환될 운명이다. 한 마디로 고령층이 자력 구제를 하지 않고서는 노후생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는 이 같은 자구책 차원의 대응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높을 때 미리돈을 모아두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예비적 저축(precautionary saving)’이다. 앞으로 20~30년의 여생을 남겨둔 50대 이후 연령층에게 가장 큰불확실성은 노후불안일 것이다. 실제로 나이가들수록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예비적 저축 동기가 강력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3년 사회통계조사의 주요 저축 용도 항목을살펴보면‘질병이나 재난에 대한 대비를 위해 저축을 한다’는 응답이 30~39세에서 8.8%가 나온반면, 65세 이상에서는 18.5%로 나타났다. 그리고‘노후대비를 위해 저축을 한다’는 응답도 각각 14.2%와 60.9%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두가지 저축 용도를 넓은 의미의 예비적 저축이라고 정의할 경우 50세 이상에서 그 비중은 68%가량에 이르는 셈이다.
일본과 미국의 유산 행태
자녀에게 가급적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애써 저축을 하는 것도 고령층의 저축률이 떨어지지않는 한 가지 배경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증적으로 확인된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초 기준으로 세대 간에 이전된 부가 당시 평균적인 가계의 전체 부의49.1%에 이르며 나머지 50.9%만이 스스로 축적한 부분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의 경우1980년대 초 가계자산 축적이 적게는 45%에서많게는 80%까지 세대간 이전을 통해, 즉 유산 상속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들은 생애주기 가설에 대한반박으로 자주 거론된다. 미국인과 일본인의 유산에 대한 태도 조사에서도 같은 맥락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어떠한 경우에도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2.94%와 4.18%에 그쳤다. 반면, ‘부모에 대한 자녀의 태도에 관계 없이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응답이 각각 42.6%와 19.29%, ‘유산을 많이 남기기 위해 특별히 노력을 하진 않지만 쓰고 남은 재산은 자녀에게 물려주겠다’는 대답이 51.14%와 70.10%에 이르렀다. ‘자녀가 어떻게 나오든 유산을 물려주겠다’는‘이타적 동기’의 유산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조사 결과를 통해 통념과 달리 유산에 관한 한 서양인들도 동양인 못지 않게 관대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조사에서‘자녀의 부양을 전제로 유산을 넘기겠다’는 사람도 각각 3.32%와 6.43%로 나타났다. ‘자녀가 나한테 잘 하면 유산을 남기겠다’는‘이기적 동기에 따른 전략적 유산(strategic bequest)’도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우리나라의 유산 행태
우리나라 고령층들이 유산을 마련하기 위해 저축을 한다는 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없다. 일부 관련 자료를 통해 몇 가지 정황을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2004년 사회통계조사’에수록된 주택 마련 방법에 대한 설문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문항에 대한 응답을보면‘증여 및 상속’과‘부모 및 친척의 보조’를통해 주택을 구입했다는 사람의 비율이 30~39세 연령대에서 각각 9.2%와 22.1%를 나타냈다. 거액의 부동산 자산 가운데 상당부분이 유산 등 세대 간 부의 이전으로 축적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모름지기 자식에게 집 하나쯤은 물려줘야 한다’는 우리나라 부모 세대의 통념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문화가 서구 국가들에 비해 그다지 널리 퍼져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내가 모은 자산은 내가 다 쓰고 간다’는 의식도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서구 사회에 비해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나이 들어서도 저축을 늘리고, 또 실제로 유산을 남기는 경향도 상대적으로 강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층 저축률 증가의 영향과 시사점
고령인구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노후보장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면 개인의 급속한 수명 증가가 노후 불안감을 야기시킬 게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령층이 저축률을 계속 높여가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현명한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경제 전체의 입장에서는 꼭 바람직하다고 만은 볼 수 없다. 무엇보다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가 소비 위축을 초래해 구조적인 내수부진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한국에서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베이비 부머 세대(1955~63년생)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50대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 현상이 지속된다고 할 때 인구 비중이 큰 세대가 고령화함에 따라 우리나라 가계의 전반적인 저축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경제성장 잠재력이 점점 위축되어 간다면 가계소득 증가 속도 역시 둔화될 것이다. 소비 주체들이 저축을 늘리고 소비를 줄여간다면 내수부진은 불가피해진다. 자칫 만성적인 소비 부진이 장기간 지속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 현상에 따르는 이 같은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우리 사회의 노후 안전망을 튼튼히 할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연금의 재정 안전성을 위한 구조 개선을 서둘러야 하며 퇴직연금제가 노후자금의 건전한 운용수단으로 기능할수 있도록 조기 정착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것이다. 또한 50대 이후 고령층이 저축한 돈을 투자하는 과정에서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특정 자산시장에 일시적으로 투자자금이 몰릴 때 수급불균형에 따른 국지적인 버블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투자 수요가 급증하는 자산의 공급을 적정 수준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장기 투자상품을 적극 개발하는 한편 해외투자를 활성화해 국내 자산시장에 대한 버블 압력을 완화시키는 방안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 현상은 기업들에게도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고령층이 전반적인 소비의 향방을 좌우하는 주도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동안상당수 기업들이 들뜬 마음으로 고령층을 주 고객으로 하는 시니어 마켓(senior market) 진출계획을 세워왔다. 하지만 고령층의 저축률 증가현상이 한국 사회 고령화의 한 트렌드로 굳어질 경우 시니어 마켓 규모에 대한 전망을 하향조정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령층의 허리띠졸라매기 식 내핍 생활이 확산된다면 실버 마케팅(silver marketing)의 중심을 프레스티지(prestige) 마켓에서 매스 마켓으로 옮기는 등 고령층의 기호나 취향에 대한 선입견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LG경제연구원 윤상하 정책분석그룹 연구원
웹사이트: http://www.lge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