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우리나라 지하경제 비중 줄고 있다’
경제개발 시대 제도금융시장과 나란히 기업과 소상공인의 자금줄 역할을 수행한 사채금융을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하경제로 꼽을 수 있으며 기업이나 자영업자의 탈세, 관료와 정치인들이 연루된 비자금과 뇌물 등도 우리사회에서 지하경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들이었다.
한 나라의 경제에서 지하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대개 그 나라 경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 규모와 폐해를 줄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경제의 체질을 개선한다는 맥락에서 중요한 정책과제로 요청된다.
최근 우리나라도 지하경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는 듯하다. 다만 과거처럼 어떤 대형비리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순간 국민적 관심사로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률 둔화와 세수부족에 대한 우려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 보다 차분하게 검토되는 양상이다. 지하경제를 공식경제의 장으로 이끌어냄으로써 성장률을 제고하고 동시에 세수의 기반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하경제를 하나의‘숨겨진성장잠재력’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하경제의 규모 비교
지하경제는 기본적으로 은닉된 경제활동이기 때문에 그 실체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다양한 추정방법들이 시도돼 왔으며, 연구에 따라 추정치의 편차도상당히 큰 편이다. 이 분야의 주요한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F.Schneider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금수요함수 접근법으로구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규모는 2002∼2003년 기준으로 GDP의28.8% 정도로 다소 높은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Schneider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선진국에 비해서는 크고 저개발국에 비해서는 작다.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와 더불어 가장 높다. GDP 대비 지하경제의 규모가 가장 작은 것으로알려진 미국, 스위스 등에 비하면 거의 3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물론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특히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미만의 저개발국들은 대부분 지하경제의 규모가GDP의 30~40%를 훨씬 상회한다. 볼리비아나나이지리아, 아이티, 콩고 같은 나라들의 사례는이들의 경제적 빈곤이 단지 경제문제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이나 부정부패에도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지하경제 규모와 소득수준이 밀접한 음의 상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않게 확인할 수 있다(상관계수 -0.718).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들 대부분이 지하경제의 비중이 높은 반면,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는OECD 국가들은 지하경제의 비중이 상당히 낮다. 다시 말해, 소득수준을 향상시키고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지하경제의 비중을 낮추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경제의 고도성장을 달성해 온 우리나라가 지나 온 궤적 역시 이러한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듯하다. 다만 1인당 국민 소득 2만 달러 부근의 몇몇 나라들(이스라엘, 그리스, 체코, 슬로베니아)가운데서 지하경제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점은 여전히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현금수요함수 접근법에 의한 지하경제 규모 추정>
지하경제의 규모를 추정하는 방법에는 소득-지출격차 분석, 탈세조사, 노동시장조사, 직접적인 설문조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 중의 하나이면서 장기시계열 추정이 가능한 현금수요함수 방식을 사용했다. 현금수요함수 방식은 지하경제가 납세나 세무추적을 회피하기 위해어음, 수표, 예금 같은 통화보다는 현금통화를 선호한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세율과 범죄 수준 두 변수가 지하경제행위의 여부에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이 둘과 국민소득, 이자율, 노동소득분배율 등의 변수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현금수요함수를 추정한다.그래서 세율과 범죄가 포함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 즉,세율과 범죄수준이 현실에서의 관측치일 때와 0일 때의 차이가 바로지하경제가 유발하는 현금수요로 보고, 여기에 통화의 유통속도를 곱해 지하경제 규모를 추정한다.
지하경제 규모 감소 추세 지속
지금까지 나온 다양한 연구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현재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대략 GDP의 10~30% 사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좀더 장기적인 추세를 살펴보기 위해 현금수요함수 접근법을사용하여 우리나라 지하경제의 규모를 추정해 보았다.
현금수요함수 접근법(박스기사 참조)으로 추정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규모는 2005년 현재를기준으로 GDP의 20%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160조원 내외)이다. 우리나라의 GDP대비 지하경제 규모는 1980년대 평균 37%, 1990년대에는 24%, 2000년 이후는 20% 등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감소추세 속에 도전요인도 많아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1970년대 말을 정점으로 이후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 왔다. 특히 외환위기가 계기가 되어 촉발된 구조조정과 그에 뒤따른 투명성을 증대시키고자 행해졌던 일련의 노력들과 규제완화는GDP 대비 지하경제의 규모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외신인도 회복을 위해서는 기업과 금융기관을 중심으로한 우리 사회 전반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30대 기업집단에 대해 결합재무제표작성을 의무화했고 전자공시시스템을 구축하는등 공시제도도 강화했다. 따라서 내부거래를 통한손익조절이나 기업자금을 변칙적으로 유출하는것을 막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었으며 소액주주의 권한 찾기가 활성화되었다. 사외이사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외부감사제도도 강화되었다.
한편, 1993년 실시된 금융실명제 역시 지하경제의 폐해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는 각종 가, 차명계좌를 통해 공식경제부문에 참여하고 있던 지하자금을 지하경제의 영역으로 은닉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겪은 바 있다. 지하경제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풀이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금융시장이 발달하고 또 정부는 세수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종전에는 지하경제의 영역에 속해 있던 부분이 공식경제의 테두리 안으로 편입된다.
최근에는 신용카드 사용이나 전자상거래등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자영업자의 소득이 상당 부분 세원으로 포착되고 있다. 또 지하경제를 척결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와 대응도 주목할 만하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재정건전성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국세청을 중심으로 세원확보노력과 탈세에 대한 감찰활동이 대폭 강화되었다. 또 최근에는 부동산가격 상승과정에서 발생한 탈루세액의 적발 및 추징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으며, 얼마 전 있은 외국계사모펀드들에 대한 세무조사 및 2,000억 원대의세금추징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는 지하경제가 더욱 늘어날 가능성과 그로 인해 우리경제가 받을 도전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우선 조세부담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정부의 과세로부터 회피하려는 노력은 지하경제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국민들이 조세부담이 불공평하거나 그것이 과도하게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납세의식이 떨어지게되고, 스스로를 지하경제 부문에 편입시키려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연 10%가 넘는 1인당 조세부담액의 증가율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실 지하경제와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세수 측면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지하경제를 공식경제의 테두리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세수를 증대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납세자인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납세부담의 증가로 인해 지하경제에 편입하는 유인이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큰 폭으로 줄어들었던 행정규제 건수가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규제개혁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외환위기 후 큰 폭으로 줄어들었던 중앙부처의 규제가 지난 2000년을 지나면서 소폭이긴 하지만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정부규제의 이러한 증가 또한 지하경제를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물론 규제 자체는 시장질서의 미비 또는 훼손을바로잡고, 더 나아가 지하경제를 공식경제의 범위 안으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는경우가 많다. 하지만, 규제는 그 속성상 규제대상의 반작용을 야기하면서 처음에 목적했던 규제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채 또 다른 규제를 낳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은 것도 도전요인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고용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34.95%로 터키와 멕시코 다음으로 높다. OECD 평균인 13.76%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농업부문을 포함한 자영업자의 비중 자체는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자연적으로 감소하고있는 자영농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꾸준히 30% 내외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서비스업이 충분히 경쟁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고용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전혀 반가워할 만한 소식이 아니다.
올해 9월까지의 도시가구 가계수지동향을 보면 비슷한소비수준을 누리고 있는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 사이에 소비 대비 납세액의 비율은 두 배가 넘는 차이가 난다. 내수경기 부진으로 자영업 전반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세금은 임금근로자의 절반 수준으로 내고 있는 것이다. 임금근로자와 대비한 조세의 형평성까지 중요한 사회갈등으로 부각될 조짐이다.
중장기적이고 세심한 대응 필요
지하경제 문제는 단기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또 성장률 하락, 세수기반 약화로 인한 재정건전성 악화, 자영업자-서비스업의 경쟁력, 조세의 형평성 문제 등의 문제를 제치고 경제정책의가장 다급한 1순위가 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지하경제 문제는 열거된 경제과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다 세심한 해결방안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세정집행만큼이나 납세자들의 순응, 조세형평성에 대한 공감도 중요하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경제가보다 높은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그 만큼의 투명성도 함께 제고되어야 한다는 점 만큼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 중장기적인 안목과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한층 세심하게 기획된 정책이 요구된다.
정부가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하면서 거래과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세수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지하경제의 규모를 줄인 공로가 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도가 지나쳐 카드사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을 초래했고 그 결과 사채금융이 다시금 기승을 부린 경험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LG경제연구원 배민근 정책분석그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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