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봉무지방산업단지내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및 현장설명회 개최
일 시 : 2005. 12. 29(목) 10:30
장 소 : 대구시 동구 봉무동 360번지 일원 발굴조사 현장
조사기관 : 영남문화재연구원
발굴기간 : 2004.12.20~현재
대구 봉무지방산업단지 1단계 조성공사부지내 대구 봉무동유적 발굴조사
Ⅰ. 조사개요
1. 유적위치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360번지 일원
2. 조사기간 : 2004. 12. 20. ~ 2006. 6. 17.
3. 조사면적 : 29,979㎡
4. 조사기관 : (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 이백규)
5. 조사의뢰기관 : 대구광역시종합건설본부
Ⅱ. 조사경과
조사대상지역은 대구광역시종합건설본부에서 추진하는 대구 봉무지방산업단지 1단계 조성
부지로서 본 연구원에서 사전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지표조사 결과(영남문화재연구원, 2000) 지상에 드러난 유구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주변에 불로동 고분군·봉무동 고분군 등 많은 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이 일대에는 매장문화재가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판단되었고, 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2004년 5월 6일부터 9월 10일까지 본 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시굴조사 결과 봉무지방산업단지 진입도로의 동쪽 Ⅰ구역 전체구간과 Ⅱ구역 남쪽일부구간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원삼국시대 주거지·삼국시대 생활유구 및 고분군, 그리고 조선시대의 생활유구에 이르는 대규모 생활유적이 확인되었다. 이번에 실시하고 있는 발굴조사는 봉무지방산업단지 1단계 조성공사부지내에서 확인된 유적 중에서 시굴조사시 Ⅰ구역의 중앙부분을 조사대상으로 하는 발굴조사이며, 본 연구원에서 2004년 12월 20일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Ⅲ. 조사내용
1. 유구
이번 조사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는 도로유구 및 수레바퀴자국, 목탄요 2기, 고상식건물지 10동, 수혈유구 22기, 구상유구 13기, 석실묘 17기, 석곽묘 2기, 습지 등 총 71기이다.
도로유구는 유적 내에서 시기차이와 방향성, 축조방법 등을 토대로 하여 1호와 1-1호로 구분하여 조사하였다. 도로유구 1호는 북동-남서방향으로 진행하는 직선도로이며, 남서쪽은 봉무지방산업단지 진입도로 확장구간내 유적(영남문화재연구원, 2004,「대구 봉무지방산업단지 진입도로 확장구간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에서 조사된 도로유구와 연결된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143m, 너비 300~520㎝ 정도이며, 생토층인 명황갈색 사질점토층에 15~40㎝ 내외의 천석·할석과 비교적 작은 돌을 1~2단 정도 깔아서 조성하였다. 도로는 지속적인 사용으로 인해 유실된 부분을 보강하였는데, 1차적으로는 5~10㎝ 정도의 밤자갈을 덮어 노면을 편평하게 다져 사용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에는 황갈색 사질토를 깔아서 도로의 경도를 강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면과 도로의 주변으로는 수레의 하중으로 인해 생긴 폭 200㎝ 정도의 수레바퀴자국이 확인된다. 도로유구 1호는 도로면의 지속적인 보수흔적과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삼국~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어 고려시대 이후까지 계속적으로 사용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로유구 1-1호는 남서쪽의 도로유구 1호를 따라서 진행하다가 북쪽부분에서 동쪽방향으로 꺾여서 확인되며, 현재 조사중에 있다. 도로면과 바퀴자국 내부에서 청자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목탄요는 유적의 남서쪽 사면에서 2기가 조사되었다. 기왕의 조사·보고된 목탄요와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다. 구조는 연소부와 장방형의 소성부, 터널식의 연도부로 조성되었으며, 점토를 덧발라 축조하지 않고 기반층을 굴착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다. 목탄요 2호의 경우, 경사면 아래인 소성부의 남쪽 중심부에 2개의 측구가 확인되었고, 측구를 기준으로 볼 때 왼쪽에는 연소부가 있고, 오른쪽에는 연도부가 위치하는 전형적인 목탄요의 구조를 보인다. 목탄요 2호의 연도부 내에서는 옹편 1점이 비스듬히 세워져 출토되었다.
고상식건물지는 10동이 확인되었으며, 유적의 남쪽에 조성되어 있다. 고상식건물지는 평면형태 방형·장방형·세장방형이고 구조는 4주, 8주, 9주, 12주식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혈은 평면형태가 원형·타원형·부정형이고 단면형태는 ‘U'자형과 이단굴광형태를 혼용하였다. 일부 주혈은 토층상에서 목주흔이 확인된다.
수혈유구는 22기가 조사되었으며, 주로 구상유구, 고상식건물지 등과 함께 유적의 남쪽에 위치한다. 수혈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부정형을 보이며, 규모는 길이 67~1732㎝, 너비 46~936㎝, 잔존깊이 12~144㎝ 정도로 다양하게 확인된다. 수혈 내에는 별다른 내부시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7Grid 수혈유구 1호 내부에서 뻘층과 함께 참나무 수종의 목재가 출토되었다. 시대별로는 삼국시대의 수혈유구가 20기, 조선시대의 유구가 2기 조사되었다.
석실묘는 유적의 남동쪽인 봉무동 고분군의 서쪽 능선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확인된 유구는 대부분 평면형태가 횡장방형이고, 우편도의 연도를 가지며, 벽석은 1~3단 정도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구나 봉토의 흔적이 확인되거나, 한 봉분내에서 배묘의 성격을 가지는 석곽묘가 축조된 경우도 확인되었다. 이 밖에 구상유구, 습지 등이 확인·조사되었다.
2. 출토유물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물은 현재까지 토·도류 189점, 와·전류 3점, 자기류 19점, 기타 13점 등 총 224점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형성된 복합유적이므로 유물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 유물은 주로 수혈유구와 습지 상층부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까지 토기 187점, 어망추 및 방추차 등의 토제품 6점과 철기류 4점이 출토되었다. 수혈유구 일부와 습지 상층부에서는 유적의 동쪽에 위치한 봉무동 고분군(영남문화재연구원, 2004,「대구 영신 초·중·고등학교 이전예정부지내 대구 봉무동 고분군 발굴조사 약보고서」)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슷한 시기의 개, 고배, 완, 호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물은 주로 도로유구와 바퀴자국에서 출토되었다. 주로 호·병·파수 등의 토기편과 청자류이고 선문·어골문 기와편과 동곳 등의 금속류도 일부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의 유물은 수혈유구에서 자기편이 일부 출토되었다.
Ⅳ. 조사결과 및 의의
1. 현재까지 진행된 조사에서 생활유구는 수혈유구 22기, 고상식건물지 10동, 구상유구 13기, 도로유구와 바퀴자국 4개소가 확인·조사되었으며, 생산유구는 목탄요 2기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저습지 1개소와 석실묘 17기, 석곽묘 2기가 확인되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2. 도로유구는 유적의 서편에서 남서-북동 방향으로 진행하며, 5m 내외의 너비로 20㎝ 내외의 천석과 할석들이 깔린 상태로 조사되었고, 유구의 북동부에서는 5㎝ 내외의 밤자갈을 한층 더 깔아서 도로를 보강하였다. 바퀴자국은 도로유구의 바닥면과 내부, 상면에서 중첩되어 나타나며, 도로의 주변에서도 일정한 간격을 가진 바퀴자국이 확인된다. 또한 바퀴자국만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곳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도로면과 도로 내부의 바퀴자국에서는 호편, 병편, 기와편 등의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도로면을 보강한 고려시대 이후 층에서는 청자편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보았을 때, 도로유구는 삼국~고려시대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의 도로유구에 대한 조사결과, 도로유구의 방향은 남서-북동향으로 남서쪽으로는 금호강을 향하고 있고, 북동쪽으로는 봉무동고분군과 단산고분군 사이의 계곡부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운송수단인 수레의 이동을 전제로 도로를 축조하였기에 도로의 축조목적도 일부분이나마 알 수 있었다. 수레의 이용은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금호강을 통해 타 지역에서 물자를 들여오거나, 반대로 고대인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던 불로·봉무동에서 생산된 물자를 금호강을 통해 내보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사대상지역내의 도로유구를 해석해 본다면 이동 및 운송의 용이성을 위한 편리한 포장도로의 기능 뿐 아니라 강안과 강밖을 이어주는 중요한 수송로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이들 도로유구의 존재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이 고대로부터 주변 지역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3. 목탄요는 유적의 남서쪽에서 2기가 확인되었는데, 기왕의 조사·보고된 목탄요와 비교하면 소규모이다. 유구의 장축은 경사면과 평행하게 조성되어 있다. 구조는 연소부와 장방형의 소성부, 터널식의 연도부로 조성되었으며, 점토를 덧발라 축조하지 않고 생토면을 굴착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다. 목탄요 2호는 경사면 아래인 소성부의 남쪽 중심부에서 2개의 측구가 확인되었고, 측구를 기준으로 볼 때 왼쪽에는 연소부가 있고, 오른쪽에는 연도부가 위치하는 전형적인 목탄요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유물은 목탄요 1호에서는 출토되지 않았으나, 목탄요 2호의 연도부 내에서는 피열흔이 있는 옹편이 비스듬히 세워져 출토되었다.
4. 수혈유구와 고상식건물지, 주혈군, 구상유구와 같은 생활유구들은 유적내에서 고분과 도로의 가운데 부분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며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수혈 등의 생활유구들은 유적 남서쪽에서 조사된 목탄요와의 연계성을 생각해 볼 때 생산을 위한 공방지 및 저장의 시설로 추정된다.
5. 석실묘는 유적의 남동쪽, 봉무동 고분군의 서쪽 능선사면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 확인된 유구는 대부분 평면형태가 횡장방형이고, 우편도의 연도를 가지며, 벽석은 1~3단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구나 봉토의 흔적이 확인되거나, 한 봉분내에 배묘의 성격을 가지는 석곽묘가 축조된 경우도 확인되었다.
6. 조사된 유구들은 일정한 구역을 차지하면서 성격이 다른 유구들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유적의 동쪽 능선사면에는 봉무동 고분군과 연결되는 석실묘와 석곽묘가 축조되었고, 고분에서 약간의 간격을 둔 서쪽에는 수혈유구와 구상유구, 고상식건물지군, 목탄요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유적의 서편에는 남서-북동방향으로 천석·할석이 깔린 도로유구와 바퀴자국이 중첩되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유구들의 공간배치를 통해 볼 때, 봉무동지역은 삼국시대의 불로동고분군(사적 262호), 봉무동고분군의 축조이후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생활터전으로 크게 활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유적 내 유구의 배치상태는 고대인이 생활터전을 어떻게 구성·배치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개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온 문화재 체계,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제정된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60년간 지속된 문화재 체계가 국가유산 체계로 변화한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고정된 가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국민의 참여로 새로운 미래가치를 만드는 ‘국가유산’.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은 국민과 함께 누리는 미래가치를 위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국민과 공감하고 공존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를 지키며 과거와 현재, 국내와 해외의 경계를 넘어 다양성의 가치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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