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랑 가곡 선정 ‘삶의 형상체에 청량제 침을 놓을 수 있는 그리움의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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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06-08-07 17:43
서울--(뉴스와이어)--도서출판 시사랑(대표:박인과)에서는 2006년 8월 7일 ‘시사랑 가곡’에 안재동 작시/최삼화 작곡의 “누군가 나를 부르네”를 선정했다.

시사랑에서는 수시로 시와 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언제든지 해당 작품이 있으면 ‘시사랑 가곡’ 혹은 ‘시사랑 시와 음악’을 선정하여 시사랑의 문예지 ‘사각의 자유’에 발표한다.

도서출판 시사랑(www.sisarang.co.kr)에서는 또한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작품력으로만 신인들을 문단에 데뷔시키기 위해서 항상 “시사랑 신인문학상” 작품을 공모하고 있으며, 당선작이 있을 경우 수시로 매스컴에 발표하고 있다. 이 “신인문학상 공모”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로 돌아가는 사회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작품이 있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 문단에 데뷔를 못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시켜 이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시사랑에서는 “창조세계문학상”과 “횃불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번 ‘시사랑 가곡’에 선정된 작품 안재동 시인/수필가/문학평론가가 작시하고 최삼화 교수(동의대)가 작곡한 “누군가 나를 부르네”의 곡과 가사 및 선정평 등은 다음과 같다.

▣ 곡

다음의 유알엘에서 들을 수 있다.
http://www.forever.info/ajd/whocallme-ahnjaedong.mp3

▣ 가사

♠ 누군가 나를 부르네 ♠
― 안재동 작시 / 최삼화 작곡

갑자기 누군가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
님인가 했네.

돌아보니, 대숲이었네.
아니 바로 나였네.
난 늘 나를 부인하네.

노을이 지네.
무덤 같은 중산을 휘덮는
붉고 큰 수의 하나 보이네.

땅거미가 점점 짙어가네.
바람이 부네.
점점 세차게 부네.

구름이 달을 가리고
몇 줄기 별빛만
주름진 이마를 때리네.

곧 장대비라도 내릴 듯하네.
괘념치 않고
마냥 걷고만 싶네.

또, 누군가
정답게 부르는 소리.
이젠 님이었으면 하네.

▣ 대나무 그림

1. 한의학적 평론을 위한 서화로서 곳곳에서 마디와, 꽃과 가지의 경락(經絡)과 경혈(經穴)을 보여주고 있다.
2. 가늘고 길게 뻗은 글씨와 그림의 선은 삶과 죽음의 혈(穴)에 박히는 침을 상징한다.
3. 그림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댓잎의 흔들림은 혈(穴)자리를 두드리는 음악의 마디마디를 표현한다.

▣ 양지경희한의원 원장 정용현 한의학 박사의 한의학 용어 해설

경혈(經穴): 침을 놓는 자리, 뜸을 뜨는 자리.
혈(穴): 혈자리를 말하는데, 경락으로 흐르는 기와 혈이 모여 있는 자리이다. 그 혈자리를 자극해서 질병을 고치는 것이다.
경락(經絡): 우리 몸의 기와 혈이 흐르는 통로. 경락은 온 신체에 연결되어 있다. 정확한 곳에 침을 놓게 되면 병이 낫는다. 침을 놓아서 기운을 다스려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이다. 기를 잘 흐르게 함으로써 생명이 싱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체 전체의 리듬을 조화롭게 해주는 것이 한의학의 묘법이다.
혈(穴)자리: 우리 몸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나타내주는 곳이다.

▣ 시사랑 가곡 선정평: 문학평론가 박인과

― 삶의 형상체(形象體)에 청량제(淸凉劑) 침(鍼)을 놓을 수 있는 그리움의 멜로디

안재동의 시는 삶의 고독을 대숲 바람이 빚는 풀피리소리로, 그 깊은 희망의 선율로 흐르는 멜로디로 승화시키고 있다.

안재동의 시가 흐르는 가곡을 들으면 깊은 대숲 사이사이로 바람들이 몰려와 댓잎, 그 나란히맥의 숨소리를 고르며 뜯는 현, 그 싱그러운 풀피리소리가 풀꽃향과 함께 파도처럼 몰려옴을 감상할 수 있다.

“갑자기 누군가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
님인가 했네.”

이 안재동의 시와 함께 최삼화 교수의 곡이 전주(前奏)에서부터 깔끔한 그리움을 부르는 설레임의 연주로 단소의 맑고 깊은 맛처럼 진행된다. 함께 어울리는 소리들의 향연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깊고 거대한 강과 바다의 물살이 휘감아 도는 힘줄기처럼 잔잔한 우리의 존재에 늘 붙어있는 쓸쓸한 허공의 막을 두드려 온다. 거기에 가녀리면서도 굵직하게 음성을 피워 올리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음감이 마치 깊고 높은 대숲이 댓잎들을 한들거리며 흔들리는 맛과 유사하게 음악의 꽃을 피우며 진행된다.

“갑자기 누군가 /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처럼 우리의 영혼에 다가오는 이 가곡의 힘찬 형상이 우리의 근본적인 그리움에 잇닿아 있는 꿈의 희망과 같이 거세게 몰려온다.

“돌아보니,
대숲이었네.
아니 바로 나였네.
난 늘 나를 부인하네.”

무심코 깨달음을 얻어 돌아보니 보이는 것이 대숲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작자의 표면에 가리워진 본질의 청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 인간이 늘 ‘난 늘 나를 부인하네’에서 고백하는 처럼 간과하고 있는 순수하고 힘찬 내면의 뿌리이다.

대나무들의 몸뚱아리처럼 비고 비인 마음의 공간이 ‘빔’으로써 충만해질수록 아름답고 싱싱한 댓잎들이 한들거리는 대숲, 가늘면서 높고 높게 하늘로 올라가야만 부드럽고 숭고한 대나무꽃을, 봉황이 좋아하는 그 대나무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가곡의 시문학성과 음악성은 바로 이런 점에 충실해 있다. 비워냄으로써 귀족스러운 그 아름다운 꽃과 맛깔스런 열매를 맺는 대나무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작시자와 작곡자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을이 지네.
무덤 같은 중산을 휘덮는
붉고 큰 수의 하나 보이네.

땅거미가 점점 짙어가네.
바람이 부네.
점점 세차게 부네.”

이 시와 함께 음악도 계속 진행되면서 이 시의 부분에서는 시어와 음의 확장성과 함께 힘찬 멜로디로 극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곳이다. 그런데 힘찬 화음이 그 극적인 카타르시스 부분도 잠재우듯 다스리고 있다. 이 가곡의 특별한 맛은 바로 이런 점에 있는 듯하다. 음악의 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에 다다라 힘찬 태풍을 한 번 맞았으면 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욕구인데 반해 이 곡과 시는 그 욕구를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음의 밝기와 정서의 톤을 잔잔하게 조율(調律)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류의 음악성은 아마 태교음악에도 좋을 것 같다. 이 가곡은 바로 그렇게 깊은 음률의 심미적인 호흡과 함께 인간미 물씬 풍기는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극한 서정의 태풍과 같은 음악의 충돌을 피하고 한 번 더 “바람이 부네. / 점점 세차게 부네. // 구름이 달을 가리고 / 몇 줄기 별빛만 / 주름진 이마를 때리네. // 곧 장대비라도 내릴 듯하네. / 괘념치 않고 / 마냥 걷고만 싶네. // 또, 누군가 / 정답게 부르는 소리. / 이젠 님이었으면 하네.”를 반복함으로써 그 잔잔한 음악의 바다에 태풍 아닌 태풍의 효과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노을이 지네.
무덤 같은 중산을 휘덮는
붉고 큰 수의 하나 보이네.

…… 중략 ……

구름이 달을 가리고
몇 줄기 별빛만
주름진 이마를 때리네.

곧 장대비라도 내릴 듯하네.
괘념치 않고
마냥 걷고만 싶네.”

이 부분에서 인간의 깊은 고뇌가 표출될 듯 하는 곳이다. “노을이 지네. / 무덤 같은 중산을 휘덮는 / 붉고 큰 수의 하나 보이네.” 아마도 이 수의(壽衣,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는 떠나간 어떤 진실에 대한 그리움의 실체일 것이다. 이 이미지는 청청하고 차가운 대숲 사이로 젖어오는 따뜻한 붉은 노을이 무덤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땅거미가 짙어가는 형상인 것이다. 이것은 대숲으로 상징되는 인류의 ‘참된 어떤 것’의 떠남에 대한 처절한 절규와 같은 것이다. 이런 부분은 많은 현 시대적 비합리성의 표출로 보여진다. 그래서 대숲은 이미 푸른 대숲이 아니고 푸름과 붉음이 섞여있는 피의 숲이 되어버린 현실의 혼란의 상황을 비유해주는 것이다. 아니면 떠나가 버린, 혹은 죽은 애인을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 속 무덤을 그렇게 무질서 속의 질서의식으로, 타기 시작하는 노을빛으로 형상화시키기도 한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 몇 줄기 별빛만/ 주름진 이마를 때리네.’로 시인은 노래하고 멜로디는 두드리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네 삶의 많은 부분의 고난과 역경이 주름진 세월과 함께 각인되는 곳이다. ‘구름이 달을 가렸으니’ 인간의 모든 어두운 면을 대면하고 있는, 마치 하늘로 하늘로만 키를 세우고 높아만 가는 대나무의 마디와 같은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디에서 가지가 자라는 것인가. 고통의 극한 함수(函數)의 결과만이 우리의 삶과 시간의 죽음(=결과, 열매 등등)에 대한 이유를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수적 계산의 수치로써 설명되어질 수 없는 부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21세기의 인류의 문명의 문맹적 시대에서야 말할 수 없겠지만 이 음악은 적어도 이 수적 긴장관계의 진행에 의해서 산출되는 자연스런 내면의 음향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더 ‘곧 장대비라도 내릴 듯하네.’라며 더욱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 긴장의 중심을 ‘괘념치 않고 / 마냥 걷고만 싶네.'라고 하며 그 깊은 함수의 긴장의 의미를 가볍게 넘어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그 긴장을 잊어버리라는 암시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의 지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그 긴장하여 주름진 의식의 폭을 느슨하게 펼치라는 것이다. 모든 생물과 자연 현상도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싱싱한 생명력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너무 긴장의 시간이 오래 되어도 병이 생긴다. 또한 너무 이완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도 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와 같은 것이어서 자연은 스르로 자신의 쇠하고 승함을 조절하고 있다.

이러한 효과를 연출하는 것은 바로 침의 효과에 대한 기대치를 발산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양지경희한의원 원장 정용현 한의학 박사는 바로 이런 침의 효과를 배가 시키는 소외 침을 통하여, 끌어온 자연의 힘을 환자에게 투입시키는 연구와 함께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실현시키는 침의 기법에 관한한 선두의 위치에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양지경희한의원 원장 정용현 한의학 박사는 또한 “기의 흐름의 지도에도 뭉친 곳이 있는데 이 뭉친 곳을 어떻게 풀어주느냐가 한의학의 한 관건이다.”라고 역설한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바로 이 뭉치는 기의 흐름을 풀어주는 곳이 이 시와 음악의 마디마디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와 음악의 경혈이다. 이 기의 다스림이 한껏 두드러진 시어들을 살펴보면 이 시의 “아니 바로 나였네”와 “바람이 부네. / 점점 세차게 부네.”의 부분에서의 태풍의 눈의 다스림, “곧 장대비라도 내릴 듯하네. / 괘념치 않고 / 마냥 걷고만 싶네.”에서의 ‘ 괘념치 않고 / 마냥 걷고만 싶네.’와 “또, 누군가 / 정답게 부르는 소리. / 이젠 님이었으면 하네.”의 ‘이젠 님이었으면 하네’의 부분이다. 이 시어가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음악도 마디마디를 형성하며 풀림과 조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체의 리듬이 조화롭게 흐를 때 우리는 건강하고 튼튼한 생명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도, 음악도, 시와 음악의 합성체도 전체적인 흐름이 조화롭게 화음을 이루어야 좋은 창작물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싱싱한 창작물은 또한 다른 새로운 창작물을 낳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들으면서 삶에 대한 깊은 영감을 얻게 되고 어떤 사람은 우주의 질서와 모정에 대한 간절한 생명의 그리움으로 깨끗하고 조화로운 음악에의 영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한의학적으로 풀이하면 마디마디에서 기를 풀어주고 진행시켜주며 분산시켜주는 침의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가곡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그리움의 혈자리에 아름다운 시와 음악으로 침을 놓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시어들 속에서 또한 음악의 흐름 속에서 마디가 되어, 끊어주고 풀어주며 이어주는 대나무의 속성으로 대나무의 튼튼한 탄성을 붙들고 있는 그 마디마디가 생명력이 돌출되는 생명의 정수리인 것처럼 시어의 분기점, 음악의 돌출점, 그 마디마다에서 힘차게 풀려오는 대숲의 풀피리소리처럼 우리의 내면의 질서에 흐르는 영혼의 노래로 미칠 듯 진한 그리움의 휴식을 얻게 하는 모티브(motive)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안재동이 작시하고 최삼화가 작곡한 이 가곡 “누군가 나를 부르네”는 복잡다단(多事多端)한 삶의 형상체(形象體)에 청량제 침을 놓을 수 있는 그리움의 멜로디를 함유함으로써 흐르는 시간의 마디마디에 인간의 깊은 향수에 의한 영혼의 기쁨이 설레임으로 가미된 창작물이다. 이 창작품은 유한한 시간의 질서에 순응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면에 부드러운 선율(旋律)의 침(鍼)을 놓아 영원한 그리움의 노래를 발산시키고 있는 것으로서, 충만한 생명의 젖을 달라고 보채는 삭막한 사막과 같은 죽음의 도시를 향하여 우리의 깨끗한 눈망울로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는 영원한 생명에의 힘찬 노래인 것이다.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창조문학신문사는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역량 있는 문인들을 배출하며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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