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랑, ‘순수가곡작곡가상’에 박이제 작곡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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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06-08-14 08:17
서울--(뉴스와이어)--"소리의 산맥, 그 오선지의 신경조직에 흐르는 그리움의 튼튼한 음표(音標)의 뼈대들"

도서출판 시사랑(대표: 박인과)에서 2006년 8월 14일 ‘순수가곡작곡가상’에 박이제 작곡가(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선정했다.

시사랑에서는 시와 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순수가곡문학상’ 혹은 ‘순수가곡작곡가상’을 선정하여 시사랑의 문예지 ‘사각의 자유’에 발표한다.

도서출판 시사랑(www.sisarang.co.kr)에서는 또한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작품력으로만 신인들을 문단에 데뷔시키기 위해서 항상 “시사랑 신인문학상” 작품을 공모하고 있으며, 당선작이 있을 경우 수시로 매스컴에 발표하고 있다.

이 “신인문학상 공모”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로 돌아가는 사회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작품이 있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 문단에 데뷔를 못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시켜 이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시사랑에서는 “창조세계문학상”과 “횃불문학상” 등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번 ‘순수가곡작곡가상’에 선정된 작품, 박이제 작곡가(중앙대 작곡과 교수)가 작곡하고, 송문헌 시인(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이 작시한 “내 가슴의 그대여”의 곡과 ‘순수가곡작곡가상 선정평’ 등은 다음과 같다.

▣ 곡

다음의 유알엘에서 들을 수 있다.
http://jaksaga.net/sub05/include/audio/listen.html?music_no=154

▣ 시사랑 순수가곡작곡가상 선정평: 박인과 문학평론가
―소리의 산맥, 그 오선지의 신경조직에 흐르는 튼튼한 음표(音標)의 뼈대들

박이제 작곡가는 56년 경남 의령 태생으로 중앙대학교 작곡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 극동문화예술대 대학원(박사) 등을 졸업했다. 독일 바덴뷰르템베르크 현대음악제에 당선하는 등 2004년까지 13회의 각종 수상 경력이 있고, 가곡 60 여곡 등 140 여곡을 작곡하였다. 후반기악회 회장, 작곡21 회장 및 한국 작곡가협회 이사, 19 권의 작품집을 출판하는 등 왕성한 음악성으로 곡(曲)을 창작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대만 국제 불교음악 경연대회 심사위원 등 각종 음악제 심사위원으로도 힘쓰며 끊임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적 음의 미학(美學)의 세계를 창출하는 그는, 21 세기가 낳은 음악가이다.
2006년 6월 16일에 개최된 제7회 서울창작가곡합창제에 발표한 그의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를 감상하며 그의 음악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육체에 내재하는 음악의 코드(code) 깨우기

다음은 박이제 교수의 창작곡 ‘내 가슴의 그대여’의 가사이다.

♠ 내 가슴의 그대여 ♠
― 박이제 작곡 / 송문헌 작시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메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가랑잎: 활엽수의 마른 잎.
*불현듯: 불을 켜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길을 가다가 혹은 어떤 일을 하다가 갑자기 어디에선가 흘러나오는 노래나 음악에 휩쓸려서 심취해본 경험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육체에 음악의 코드(code)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육체라 함은 정신과 영혼과 몸 등 우리의 존재를 대변하는 본질적인 차원의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의 육체에 음악의 코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항상 우리의 자아가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우리에게 맞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 소리의 근원을 찾은 작곡자나, 작사자나, 가수는 우리에게 그 근원의 깊이를 전달해준다. 그런 울림이 우리에게 전달이 되면 우리의 내면의 은밀한 곳에 있는 음악의 코드(code)가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작곡가들은 바로 그런 음악의 금맥을 찾아 음표들을 캐내는 광부가 되는 것인데 박이제 작곡가는 이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에서 황금의 음맥(音脈)을 찾은 듯하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우리들 존재의 시원함과, 그리움과, 풍요로움이 우리의 영혼에 금맥이 되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2. 맑고 시원한 음계(音階)가 한민족의 우물물 소리로 승화

박이제 작곡가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의 송문헌의 시어에서 보여 지듯이 그렇게 ‘불현듯이’ 우리의 육체에 맞는 소리들을 오선지(五線紙)의 그물로 건져 올리게 되는데 그때부터 가곡의 맑고 시원한 음계(音階)가 한민족의 우물물 소리로 승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를 들으면 우리의 육체가, 잠들어 있던 우리의 영혼이, ‘불현듯이’ 깨어나는 것이다. 자의식의 범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순수한 소리의 물결들이 우리 존재의 주위로 몰려오는 것이다. 그 소리들의 부딪침으로 인하여 옛적 시골 외할아버지 댁의 하얀 박이 여물던 초가지붕 아래 툇마루에서 낮잠 자던 어린 아이의 귀에 익은 듯한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영혼의 깊은 평화의 골짜기를 두드리며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박이제의 음악정신이 청자빛 멜로디의 우물물 깊이 잉태하고 있는 하얀 달처럼 유영(游泳)하는 한민족의 그리움의 정서이다. 우리의 가곡은 이렇게 한민족의 깨끗한 음악적 감각에 충실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음악과 영혼의 보물섬이다. ‘윤이상의 음악에 나타난 한국적 표현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과 ‘가곡의 형식과 시(詩)의 음수율’ 등의 연구 발표도 하면서 꾸준히 한민족의 음표(音標)들을 추적하는 박이제 작곡가가 이루어 내는 이러한 가곡의 특성은 풍요로운 영혼의 미적 감성으로 싱그럽게 흐르는 음표(音標)들의 샘물이 되는 것이다. 이 영혼의 미적 감성은 육체의 감각과 동일하다. 육체 없이 영혼의 정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육체 통신, 그 화음의 레이더로 우주의 에너지를 수신

우주와 개체(箇體)의 음악 통신에 있어서 우리의 육체의 감각은 음표들의 길고 짧음, 높고 낮음, 강하고 약함, 부드럽고 거친 등등의 모든 소리의 데이터들을 수신하고 분석하여 우리 몸의 각 부분에 전달할 수 있게 하는 통신프로그램으로 입력되어 있다.
소리의 데이터들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몸은 그 정보들을 활용하여 다시 생리적인 음악의 오선지를 형성하게 되고, 육체 안에서 생명의 화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화음이 빚어질 때 우리는 기쁘고 평화롭고 행복한 감정의 레이더를 힘 있게 곧추세우고 온 몸이 안테나가 되어 강인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우주의 에너지를 우리의 존재 가득히 수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수신되는 음의 파동이 긍정적인 생명의 코드를 함유하고 있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긍정적인 음의 파동이 산들바람처럼 박이제의 창작곡에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박이제의 음악적 구도의 행위는 생명력 있는 기의 운행을 음의 성질대로 다스려 마음의 오선지에 프로그램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음악 인생의 여정에서 보여 지듯이 그가 평생 이루어오는 음악에 대한 강렬한 믿음과 도전이 오랜 시간과 함께 깊고 높고 넓게 성숙되어 옴의 행위가 전제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4. 음률(音律)적 감각과 그리움의 고밀도집적회로를 내장한 사랑의 칩(chip)

그런데, 우리가 어느 날 소리들의 의미를 캐낼 수 있게 될 때, “과연 소리들의 부딪힘만으로 우리의 영혼의 비무장지대의 차가운 음표(音標)들의 사슬이 풀리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육체 통신이 소리들의 부딪힘만으로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육체통신은 소리들의 부딪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그리움의 코드(code)가 우리의 본질적 내면에 최첨단의 마이크로 칩(microchip)으로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태초에 잊어버렸을 초감각지대의 신경세포들을 형성하며 감각의 고밀도집적회로가 우리의 영혼의 내면에 장착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육체의 코드에 소리들이 부딪쳐 오게 될 때, 육체에서 꿈틀거리는 신호는 그 정보들을 내면화하여 우리의 영혼과 두뇌와 감성에 내재하고 있는 음악의 선율들을 자극하여 소리의 경락(經絡)을 치고 들어가 나태하고 죄성에 젖은 절망의 껍질 속에 잠자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게 되는 것이다.

신은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가 고장 났을 때 회복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도 따르지 못하는 사랑의 칩(chip)을, 그 그리움의 음표들로 응축된 고밀도집적회로를 우리의 존재 깊숙이 내면화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신(神)은 작곡가에게 그리움과 생명의 감각신경을 두드리는, 육체에 잠겨있는 음악적 코드(code)의 고밀도집적회로를 자극하는, 음가들을 찾아내도록 하명한 것이다. 그래서 박이제 작곡가는 찾아내서, 그 역동적인 생명의 음가대로 오선지의 강에 음표들을 방생(放生)시키는 것이다. 그의 악보에서 보여 지듯이 방생(放生)된 음표들은 자유로이 자생하며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때부터는 그 음표들이 박이제 작곡가의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이미 그들은 오선지 위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현악기나 관악기, 타악기, 전자악기 등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자가 다를 때마다, 노래하는 자가 다를 때마다, 제각기 다른 음감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박이제 작곡가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미 방생(放生)한 음표의 물고기들이 자유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떠나는데, 발표한 악보는 그때부터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는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자유의 유기체는 필자의 앞에까지 도달하여 생명력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일까.

5. 희망의 턱뼈에 존재하는 가곡의 혈(穴)자리

“우리 몸에는 기와 혈이 흐르는 통로가 있는데 이를 경락(經絡)이라고 부른다. 이 경락(經絡)은 전깃줄처럼 온 신체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양지경희한의원 정용현 한의학 박사는 “그리고 경락(經絡)이 이어지면서 부분 부분에 경혈(經穴)이 있다. 이 경혈(經穴)을 혈(穴), 또는 혈(穴)자리라고도 한다. 그래서 치료효과를 보기에 정확한 곳에, 즉 혈(穴)자리에 침(鍼)을 놓게 되면 병이 낫는다. 침(鍼)을 놓아서 몸에 흐르는 기운을 다스려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이다. 기를 잘 흐르게 함으로써 생명의 박동이 싱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체 전체의 리듬을 조화롭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한의학의 묘법이다.”라고 자연의 이치를 풀어낸다.

박이제가 작곡한 이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에서 그러한 많은 소리들의 경락(經絡)에 돋고 있는 혈(穴)자리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더 강렬한 느낌으로 두드러진 혈(穴)자리들을 다음과 같이 ‘/’로 표기해 본다. ‘/’로 표기한 왼쪽 시어(단 한 개의 글씨)의 부분에 이 가곡의 혈(穴)자리가 존재하고 있다.
오선지에 흘러넘치는 가곡으로 이루어진 산맥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을 흐르는 이 혈(穴)자리에 음표들이 강하게 꽂히고 있다. 이것은 박이제 작곡가가 악보의 오선 위에 침(鍼)을 놓는 행위이다. 이렇게 이 음(音)의 침(鍼)을 놓는 것은 가곡의 힘을 다스려 선율의 흐름이 고르게, 탱탱한 생명력으로 꼬리를 치는 음표들이 ‘그대’와 ‘나’의 사랑의 경락(經絡)을 오가며 싱싱하게 순환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음침(音鍼)을 적당한 선율의 혈(穴)자리에 놓는 박이제의 행위는 가곡의 전체적인 리듬을 조화롭게 해주는 음학(音學)의 묘법이다.
가곡을 들으면서 이 혈(穴)자리들을 감지해 보자. 이 혈(穴)자리들은 가파른 가곡의 산에 오르는 희망의 턱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소리의 강을 견뎌내는 싱싱한 기다림의 성대를 수시로 자극하고 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메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
~~~~~~~~~~~~~그리움/을 어이해

이 가곡은 음의 혈자리 부분(위에서 보이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음표들이 서서히 튀어오르다가 혈자리에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 그 정상(혈자리)에서부터 서서히 낮게 낮게 가락의 높고 낮은 경락(經絡)을 두드리며 하산한다. 그러한 가곡의 흐름에서 우리는 역동적인 멜로디를 감상하며 눈물과 기쁨과 격정적인 고통과 분노와 환희 등의 감정들을 우리의 내면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육체에 박혀 있는 음악의 코드(code)가 열리는 것이다. 박이제의 창작곡에 상응하는 감성의 칩(chip)이, 음표들이 흐르는 선율로써 우리의 육체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이제가 창작한 음가들은 자연에서 추출한 것이지만 이것은 창조주가 만든 신비, 그 자체인 것이다.

6. 푸른 선율로 흐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숨골과 혈맥을 두드리는 음표(音標)들의 환희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 시와 곡이 푀엔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데, 가곡의 뼈대도 한민족의 지리적 특성이 되는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속성을 닮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의 정서가 시인과 작곡가의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박이제가 작곡한 이 시 “내 가슴의 그대여”에 나타나 있는 음(音)의 혈자리들을 중심으로 깔끔한 가락들의 행렬이 서쪽에서 서서히 접근하여 오르다가 동쪽의 정상에 이르면 다시 급히 내려오거나, 동쪽에서 급하게 오른 정상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 가곡의 선율의 흐름은 높새바람처럼 가곡의 산맥을 서서히 오르거나 급히 오른 정상에서, 다시 급히 내려오거나 서서히 내려오면서 한반도의 기후적 특성처럼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은 고저장단의 음악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락의 시냇물이 점점 거세지는 파도소리로 혹은 점점 약해지는 바람소리로 흘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즉, 음악의 연주가 이 시의 혈자리를 중심으로 여울지거나 흩어지면서 한반도의 숨골과 혈맥을 짚으며 풍수지리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7. 악보의 심장에 일침(一鍼)을 가하는 음침(音鍼)의 생명력

특히, 이 가곡의 혈자리 중에서도 “그리움”이라는 부분(제1연과 제2연 두 군데에 나타남)에서는 한방에서 말하는 일침을 가하는 곳, 즉 가곡의 흐름의 정상에 있는 음률의 정수리를 단 한 방의 음의 침(鍼)으로 뚫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가곡의 유연한 흐름 속에서 높은 음표가 튀어나와 일침(一鍼)을 가하고 있는 곳이다. 즉, 소리의 침(鍼)을 강력한 탄력으로 투입시키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의 혈(穴) 부분에서 단계적으로 높게 그리고 깊게 음침(音鍼)을 찌르면서 ‘리’의 부분에서 더 깊게 찌른다. 그러면서 ‘󰁒’가 붙어있는 ‘움’의 부분에서 격동(激動)하는 선율(旋律)의 자궁(子宮), 그 아픔의 혈(穴)자리에 음침(音鍼)을 2~3배 더 길고 깊게 찌르고 있다. 그야말로 탱탱하게 물오른 악보의 심장에 일침(一鍼)을 가하는 것이다.
이 가곡은 바로 여기서 모든 음(音)의 기운을 생명력 있게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일침(一鍼)을 가한 후에 즉시 서서히 풀어내고 있는데, 음계(音階)는 그렇게 은밀하고 감미롭게 표현되고 있다. 음계(音階)를 자연스럽게 하강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연주도 “그리움/을 어이해” 부분을 한 번 더 반복함으로써 싱그럽게 낮아지는 음감의 다리미질로 가지런히 정서의 자락을 펴서 안정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일침(一鍼)을 가하는 것은 박이제가 그리는 곡의 곡선 전체가 그런 치밀하고 튼튼한 음정과 화음을 목적으로 악보 전체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음감이 앞에서도 음결 속에서 준비되고 예고되었고 음가가 음표로서 예시(예: ‘아’ 부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소설문학의 창작 기법의 하나인 ‘복선(伏線)’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이 부분에서만 이렇게 곡조가 이루어지고 전체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균형이 잡혀있지 않게 되면 조화로울 수 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침(一鍼)의 행위이다. 박이제는 곡의 파노라마(panorama) 속에서 앞으로 연주될 음감의 세계에 대해서 예고하고 준비하며 전주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자연의 에너지의 흐름은 준비된 곳으로 흐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조직에 있어서 지도자가 한 마디로 일침을 가할 때 전체가 받아들이며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이 조직이 흐트러져 있고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균형이 깨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박이제의 악보에 포진(布陣)하고 있는 음표군단(音標軍團)은 화성과 화음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작곡가가 작전참모(作戰參謀) 역할을 잘 수행했을 때 또한 가능한 것이다.

8. 소리의 산맥, 그 오선지의 신경조직에 흐르는 튼튼한 음표(音標)의 뼈대들

그러기 때문에 음표군단(音標軍團)의 작전참모(作戰參謀)인 박이제 작곡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복되는 “그리움/을 어이해”의 부분에 이르러서는 급상승하는 소리의 혈을 죽여서 감미롭고 낮게 표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가곡은 이렇게 음표들이 흐르는 산맥의 혈맥들을, 그 우주의 음향이 소리의 에너지로 흐르는 경락(經絡)의 적당한 경혈(經穴)의 위치에 박혀 있는 그 소리의 칩(chip)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만물의 생리적인 기의 흐름을 다스리는 음악적 효과로서 적당히 올려주고 내려주듯이, 또한 강하게 때려주고 어루만져 주듯이, 우리의 심신의 건강한 신경조직에 충만한 에너지의 흐름에 꼭 필요한 화음의 튼튼한 음(音)의 뼈대들을, 즉 소리의 뼉다귀들을 우리의 텅 빈 내면의 초가집 앞으로 흐르는 싱싱한 산골물소리로 세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의 형상을 닮아있다. 추울 때 춥고, 뜨거울 때 뜨겁게 달구어 줌으로써 우리의 피부가 윤택하고 탄력이 있게 되고 신체적 기능의 강·약이 조절되어 건강해지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으로 인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인데, 그 건강한 삶은 바로 장수의 길이다. 음악, 그것이 어떤 음악이 되든지 상관이 없다. 우리가 건강하고 풍요로운 정서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음악이 얼마나 인간의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정서에,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감각에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음악적 코드가 생리적 감각에 맞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인간의 건강의 혈을 두드릴 수 있는 음표들로서 이루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이제의 곡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는 반복적인 음이 가락의 앞뒤에 붙어서 이 멜로디가 마치 음표의 꼬리들을 물고 우주 밖으로 날아다니듯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감성적으로 형상화시키며 진행되고 있다. 청각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예를 들면 이 가곡의 문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위치한 시어의 위치에서 귀를 기울여볼 때 그 음가를 발견할 수 있다. 앞부분에서는 제1연에서 “내~, 내~, 내~, 아~, 가~, 이~”와 같이 제2연에서도 “내~, 내~, 내~, 아~, 별~, 이~”로 진행되어 있는 것과 같이 작곡자는 미려한 음의 효과를 확장시키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문장의 뒷부분에서도 제1연에서 “다~, 다~, 오~, 여~, 까~, 해~”와 같이 제2연에서도 “다~, 다~, 오~, 여~, 까~, 해~”로 진행되는 음의 맛에 따라 우리의 찢어진 정신과 영혼의 틈새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곡은 박이제가 황금의 선율의 금맥에서 채취한 싱싱한 화음의 생명력으로 그윽한 선율을 타고 우리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다시 흘러나감을 반복하며 마치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역할처럼 우리의 소리의 바다에서 파란 희망의 하얀 포말(泡沫)을 흔들며 혼란된 영혼의 정서를 가지런히 쓸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9. 시와 음악의 특수한 기능으로 형상화되는 그리움의 혼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송문헌의 위 시어의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는 부분에서 ‘내 가슴’은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그대’는 우리의 육체 안에 장착되어 있는 그리움의 코드의 소재 역할을 한다.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아직 사랑의 향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박이제는 이곳에서 그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풍성하게 여울지는 가락의 절규로 극한 고독의 음향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송문헌이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라고 표현할 때 박이제의 곡은 여기에서 살아있는 음표의 꼬리들을 길거나 짧게 투입시키면서 그 묵상의 어깨에 날개를 달게 한다. ‘내 가슴’에 잠겨 있는 자유와 그리움의 혼을 깨워 거리낌 없이 날아오르도록 음(音)의 생명력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와 음악의 특수한 기능으로 형상화되는 특출한 음가의 향기들을 맡아볼 수 있고 들어볼 수 있는 것이다.

10. 극한 심혼(心魂)의 낭떠러지에 붙어있는 절대음감(絶對音感)에 대한 사랑의 노래

“내 마음 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기어이는 사모하는 정이 깊어 마음에 뜨거운 불이 지펴지고 있다고 송문헌 시인이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에서 시어의 형식은 능동적 입장에서 ‘그대 찾아 헤매이오’에서 보여 지듯이 ‘그대’를 찾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그대’라고 불려지는 사랑의 대상이 어떤 여인이든 신(神)이든 진리의 실체이든 관계가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 그 앞부분에 있는 ‘내 마음 속에 촛불을 켜고’라는 시어를 보면 사실은 ‘그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대’가 찾아와 달라는 것이다. 촛불을 밝히는 것은 ‘그대’가 나의 불빛을 보고 찾아와 달라는 것이다. 나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웅크리고 있는 고독의 실체에 영원한 음감(音感)으로 젖어드는 생명의 계시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송문헌의 시와 같이, 박이제가 생산해내고 있는 음의 향기와 맛들은 “내가 이렇게 악기가 되어 노래하고 있을 때, 나의 몸 전체가 음(音)의 화신으로 상승하게 될 때, 그리움의 실체가 나를 찾아와 달라”는 절규이다. 박이제가 오선의 콩나물시루에서 싱싱하게 키우고 있는 이 쓰리고 달콤한 음률의 콩나물 뿌리들이 빽빽이 자라는 음파(音波)의 세계는 바로 참나무들이 빽빽한 깊은 산맥에서 불러대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어서, 이 음감의 절대고독의 무풍지대에서 불러대며 불려 보내는 모든 멜로디들은 다시 엄청난 축복의 희망으로 우리의 존재의 뿌리에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줄 것을 고대하며 부르는 극한 심혼(心魂)의 낭떠러지에 붙어있는 절대음감(絶對音感)에 대한 우리 인간의 사랑의 노래인 것이다.

이것은 송문헌의 이 시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에서 노골화되어 나타난다. ‘가랑잎을 앞세운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은 촛불로 타고 있는데 ‘가랑잎을 앞세우고 오시는 그대’라고 하는 것은, 촛불에 의해 가랑잎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게 되고 그로 인해 그대도 거세게 타버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에게 오기만 하면 나의 사랑으로 불타버릴 것을 암시하고 있는 엄청난, 그야말로 태풍노도와 같은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더군다나 ‘가랑잎’은 그대의 기다림의 뿌리로 샘물이 솟기를 그리움의 잎맥으로 목마르게 기다리다가 바삭바삭 말라버린 불쏘시개의 운명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시인의 의도를 감지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작곡가도 이 시인의 의도를 깊이 건져내고 있는 듯이 그가 창출해내는 음의 세계는 거세게 일렁이는 불꽃의 행렬처럼 장렬(壯烈)하게, 렬(壯烈)하게, 행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불현듯이’의 사전적인 의미도 “불을 켜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라는 표현에 쓰이는 것이니 이 ‘불을 켜서 일어나듯이’ 사랑의 불을 켜고 ‘불현듯’이 ‘가랑잎’을 앞세우고 ‘그대’가 오시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시어들은 팽팽한 긴장으로 튕겨나며 진행되지만 가곡의 음감은 거꾸로 그것들을 조절하며, 서서히 가라앉히며(때로는 상승시키며)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사와 곡조는 서로 상충(相沖)되는 어울림으로 한민족의 서정의 금맥으로 반짝반짝 흐르고 있는 것이다.

11. 사랑의 경락(經絡)으로 몰려다니는 음표(音標)들의 반란

산불이 일어날 때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서는 맞불을 놓아야 한다. 그야말로 이(齒)는 이(齒)로 맞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산에서 불이 일어났을 때 마을에 불이 번져오지 못하게 할려면 마을 주위의 삼림(森林)을, 즉 타야 할 것들을 미리 다 태워서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주위가 불꽃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식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산불이 마을에 번져오지 못한다.

그런데 이 시의 작자는 ‘가랑잎을 앞세워 오시는 그대’를 향하여 ‘촛불을 켜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촛불마저 켤 수 없을 만큼 사랑이 식어져 있으면 사랑의 불이 당겨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내 마음의 촛불’에 가까이 오는 ‘그대’의 불이 사랑의 불꽃의 촉매 역할을 하는 ‘가랑잎’을 앞세우고 오게 되면, 오시기만 하면,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며 사랑의 경락(經絡)은 연결되어, 우리의 영원한 시간을 싸고도는 음표들의 반란은 우리의 존재의 불꽃에 몰려다니며 영원하고 달콤한 생명수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짧은 시어가 사랑의 강렬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기쁨과 환희의 박자 속에서 가곡의 신경조직을 형성하는 그리움의 톱니바퀴로 맞물리는 사랑의 코드가 마주치기만 하면, 그리움의 코드가 실행되기만 하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불꽃이 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문헌의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가 촛농이 녹는 뜨거움으로 우리의 마음의 혈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또한 박이제의 용수철처럼 튕겨나는 음표들의 탄성력이, 기쁨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내재된 설레임의 태고적 우물물 소리로 일렁이는 이유이다.

12. 음표들이 뒤집어진 생태계(生態系), 그 짝사랑의 우물물을 거꾸로 바라보기

이제 방생된 음표들이 자생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주의 구멍, 그 갈라지는 시간 너머로 존재하는 우물물의 생태계에 던져진 음표들의 행방을 추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제1연이 끝나면서 보이는 하얀 블랙홀의 시의 구멍, 그 갈라지는 시행(詩行) 너머로 존재하는 우물물의 생태계에 던져진 시어들의 행방을 추적해 보아야 한다. 그 제1연을 넘어서 하얀 존재의 우물물 밑에 낮은음자리표로 높은음자리표의 받침돌로 존재하는 송문헌의 시 제2연을 살펴보기 위해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향하여 거꾸로 바라보아야 한다. 송문헌의 시가 제2연은 제1연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시적 그리움의 대상이 낮은음자리에, 즉 제2연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합니다 ”

여기에서 아직도 내 마음 속에 타고 있는 촛불의 촛농이 뜨거움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은 송문헌의 시에서 살펴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고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하는 상황을 그가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대’는 눈물처럼 내 가슴에 와 촛농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모하는 그대’는 불현듯이 언제부턴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미 낮은음자리표로 오선지 안에 가라앉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높은음자리표(=이상)의 ‘그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대’는 ‘내 가슴’(=낮은음자리표, 현실)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인에게 혼란이 온 것인가? 아니다 사실은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는 이 악보에서 같이 있는 것이다. 이 악보의 평면 위에서, 하얗게 다림질 된 시간의 평면에 존재하는 것처럼 같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박이제 작곡가는 ‘그대’를 낮은음자리표로 위치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뛰어오르는 시어들을, 자꾸만 튀어 오르는 음표들을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미 내 안에 있다는 또 다른 이유는 다음의 시어에서도 밝혀진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이곳의 시어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가사의 동일한 위치에서 시어가 1연의 ‘가랑잎’ 대신 2연에는 ‘별빛’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이렇게 낮은 곳에 있는 ‘가랑잎’과 높은 곳에 있는 ‘별빛’을 번갈아 사용한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박이제 작곡가도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를 아주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화음을 위해서다. ‘별빛’과 ‘가랑잎’의 화음을 위해서다. 그래서 극과 극은 만나 통하게 되는 것이다. 시 한 편에서 제일 낮은 곳에 위치하는 가랑잎(낮은음자리표)과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는 별빛(높은음자리표)을 송문헌 시인이 번갈아 사용하는 것처럼 박이제 작곡가도 똑같이 악보 한 편에서 낮은음자리표와 높은음자리표를 함께 사용하여 시의 곡조와 가곡의 곡조는 동일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한 몸이듯이 시와 곡조가 만나 가곡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와 음악의 앙상블(ensemble)이다.

그리고 제2연의 ‘별빛’의 소재는 제1연의 ‘가랑잎’이란 소재와 같은 목표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별빛은 머나먼 우주 밖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그 별빛은 이미 그 별에서는 떠나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 그 별빛은 별빛이 아니라는 억지 같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 별빛이 이미 별빛이 아닌 것은 ‘가랑잎’이 타버리면 가랑잎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랑잎이 불에 타서 흔적도 없이 없어지는 것은 별빛이 지구에 도달하자마자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이치와 같다. 사랑의 표현으로 제1연에 나오는 가랑잎을 제2연에서는 지워버리고 별빛을 세웠는데 그 별빛마저도 지워져버리게 될 상황이다. 그것은 ‘이 한밤’(=송문헌의 다른 시 ‘검은 바다’의 이미지)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송문헌의 다른 시 ‘검은 바다’는 아무런 빛도 허용치 않는 이미지이다. 송문헌의 문학적 정신에 있어서 사랑은 그리움의 소재(촛불, 가랑잎, 별빛)를 지우는 것이다. 그렇게 지우기 위해 ‘한밤’이 온다.
이 ‘한밤’이라는 시어의 색깔을 음색(音色)의 정서로 표현하기 위해 박이제 작곡가는 피아노곡의 콩나물 대가리들을 들고(=하늘 향해, 높은음자리를 향해) 전주(前奏)되던 그 음표들의 껍질들을 벗겨내며 언제부턴가 음표들의 대가리들을 활딱 활딱 뒤집어 놓고(=땅을 향해, 낮은음자리를 향해) 음표의 꼬리들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그리움과 사랑의 차이를 지우는 사랑의 완성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에서 송문헌 시인의 다른 시 <검은 바다>에서 보여지는 시어들 “사라짐과 생겨남의 경계를 지우고 / 생과 死의 모든 차별을 다시 지우고 / 타오르던 불꽃 사그라지면 그는 / 어둠 속에 혼자가 된다 / 혼자 속에 어둠이 된다”를 떠올리게 한다. 송문헌 시인은 ‘생과 死의 모든 차별을 다시 지우’듯이 그리움과 사랑의 차이를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촛불이 타는 것으로, 혹은 가랑잎이 타는 것으로, 혹은 별빛이 소멸하는 현상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소멸의 아름다움을 위해 박이제 작곡가는 음표들에게 ‘대가리 올려, 대가리 올려’, ‘대가리 내려, 대가리 내려’ 혹은 ‘뒤집어져, 뒤집어져’라고 하명하며 곡조의 빠르고 느림, 그리고 길고 짧은 효과를 투입시키며 적당한 위치에서 아주 적절하게 음표들을 배치하여 그 음표들이, 혹은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가, 소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연주의 끝이 되는 것이며 사랑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완성의 음값은 ‘0’이다. 그러므로 박이제 작곡가(=송문헌 시인)가 완성하는 사랑의 방정식은 ‘높은음자리표+낮은음자리표+시간=0’이다. 여기서 ‘높은음자리표=0, 낮은음자리표=0, 시간=0’이다. 결국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는 ‘높은음자리표=낮은음자리표’가 되어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는 동격이 된다.

송문헌 시인도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사랑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그의 시 <검은 바다>에서 “어둠 속에 혼자가 된다 / 혼자 속에 어둠이 된다”에서 보여 지듯이 ‘이 한밤’은 <검은 바다>이고 그 <검은 바다>는 이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되는 충만함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둘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자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혼자라는 것이 ‘어둠 속의 혼자’인 것이다. 그리고 ‘혼자 속의 어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혼자이면서 어둠과 동격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어둠’(=낮은음자리표)의 속성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것이다. 물소리들이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겸손히 흐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사랑의 완성의 음값으로서의 낮은음자리표는 결국 음값이 ‘0’로 비워져 있으므로 얼마든지 다른 음값을 포용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으로 ‘내 가슴’을 포용하는 ‘어둠’(낮은음자리표) 속에는 모든 것이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도 그리움의 그 실체도 절망의 ‘어둠’(=낮은음자리표) 속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손만 뻗으면 바로 그 위치에 실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송문헌의 시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박이제의 곡이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전체 속의 한 원소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전체 속에서 분리되어 우주의 미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혼자 속의 어둠’이기 때문에 그는 혼자이면서 우주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스런 사랑의 실체로 말미암아 그는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은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할꺼냐며 그리움에 못박힌 오선지를 뜯으며 싱싱한 음표들에게 채찍질 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음표들의 튼튼한 채찍을 맞는 송문헌의 시어들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박이제의 곡들은 영혼과 시간 사이 혹은 우주와 본질의 비밀의 문(門) 사이를 오가듯이,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의 사이사이로, 오선과 오선 사이 음계(音階)들의 행렬과 행렬의 사이사이로, 반전과 반전으로 거듭되며 살아있는 멜로디의 산맥과 산맥의 사이사이로, 화려한 그리움과 환희로 간지러운 음표들의 현(絃)을 뜯으며 굳게굳게 잠긴 육체의 음악(音樂)의 코드(code)를 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송문헌의 시와 박이제의 곡이 붙여진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는 깊고 오묘해서 한 마디로 딱히 어떻다고 단정하긴 섣부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감회를 돌이켜본다면 이 가곡은 그리움이란 실체를 끌어당기며 사랑의 불꽃으로 활활 타기 위해서 촛불, 가랑잎, 별빛을 가져와 오선지 위에 올려놓고 사모의 애정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현대적 정서의 금 가고 고정화된 존재상실의 판넬에 한민족의 화려한 한복처럼 고즈넉하고 충만한 여유로움을 가미한 전통적 음악의 미학을 완성함으로써, 사랑하는 님에 대한 연민의 뼈다귀로 절규하는 음표들의 반란을 방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창조문학신문사는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역량 있는 문인들을 배출하며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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