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랑 횃불문학상 논픽션 부문 대상에 안상수 의원의 ‘안검사의 일기’ 선정
박인과 문학평론가(비평 전문인)는 “우리 민족의 현실은 어렵지만 안상수 의원 같은 사람이 있어서 믿음직하고 풍요로운 한반도를 기대한다. 그의 저서 ‘안검사의 일기’에서 보여 지듯이 항상 그는 ‘생활’과 ‘문학’과 ‘인간애’가 융합된 튼튼한 언어의 불빛을 발산하며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횃불잡이’와 같다”며 안상수 국회의원의 저서 “안검사의 일기”를 횃불문학상 ‘대상’으로 선정하게 된 소감을 밝힌다.
도서출판 시사랑에서 발표하는 ‘횃불문학상’ 논픽션 부문 안상수 의원의 ‘안검사의 일기’ 선정평과 안상수 의원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참조 : http://cafe.daum.net/msi
▣ ‘횃불문학상’ 선정평(논픽션 부문) : 박인과 문학평론가
“역사의 혈(穴)자리에 언어(言語)의 침(鍼)들을 놓는 언어학(言語學)의 묘법(妙法) 표출”
안상수 국회의원(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명예 법학박사)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에 의하면 초등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만 나가면 상을 탔다고 한다. 시인 이은상 씨가 ‘가고파’라는 시를 지을 만큼 아름다운 마산은 그에게 언제나 ‘맑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영원한 고향이라고 한다. 그가 다닌 마산고등학교는 무학산(舞鶴山) 기슭에 포근히 자리를 잡고 멀리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봄이 되면 교정에 가득 찬 벚꽃이 백설처럼 흩날려 그 풍경에 도취되곤 했다고 한다. 고향 주변의 수려한 장관은 그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고, 잔잔하게 그려지는 미지의 세계는 시인이 되고 싶은 그의 꿈을 더욱 강렬하게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안상수 국회의원(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명예 법학박사)은 1968년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계명대학교에서 형법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주요 일간지와 TV를 통한 논설이나 칼럼, 토론 등으로 합리적 비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안검사의 일기’ 책 표지 중에서). 그런 그는 그의 저서 ♣안검사의 일기♣에서 검찰을 비평하고, 사회문화와 우리의 사랑과 슬픈 역사를 비평한다. “한양대 부속병원의 부검실. 그는 몸으로 호소했고, 나는 눈으로, 가슴으로 그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시신으로밖에 만나지 못한 사이이지만 이미 내 운명 속에 들어와 버린 박종철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애틋한 아픔을 느낀다. 그를 죽게 했던 우리 모두의 무기력과 무관심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 ♣안검사의 일기♣는 그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를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지 3년이 넘어 절판이 되었을 때,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책의 제명을 바꾸어 재출판한 것이다. 표지를 빼고 내용만 352페이지로 구성된 이 책은 운명과의 만남, 하늘이 무너지다, 고독한 싸움, 사자(死者)의 종, 검사복을 벗다, 태풍은 또 다시, 박종철 그 뜨거웠던 삶으로 나누어 집필되었다.
이미 안상수 의원은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로 인해 논픽션 작가가 된 것이다. 그의 문학 분야의 결실이 논픽션에서 이루어져 왔던 것처럼 현실적 아픔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미 진한 사랑과 아픔과 그리움과 숭고한 인류애, 특히 우리 한민족적인 정서의 뿌리를 통한 인간애를 그의 문학과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안검사의 일기♣에 나타난 사건의 전말과 결과를 탐색해 보려는 것이 아니고 그의 문학성, 또는 그의 문학적 표현 감각이 가지는 의의와 문학사적 가치 평가에 대한 담론을 도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 1. 도입부
“87년 1월 15일. 출근길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서소문에 있는 서울지방검찰청의 우중충한 건물은 내가 들락거린 2년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가라앉아 있었다.”(p. 20)
이것은 “안검사의 일기”의 도입부분이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고 서술해 나가는 표정에서 벌써 안상수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이 암울한 암내를 풍기며 우리의 마을과 도시에서 단잠을 설치게 할 것이라는 예고이다. 그리고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는 구절에서 이 시대의 태풍의 눈을 심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파괴력과 운동력을 지닌 문장이다. 그 구절대로 우리 민족은, 우리의 한반도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분노와 아우성으로 거리를 날아다니는 민중과 학생들로 들끓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들은 어떤가.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굴욕적인 자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안상수는 글의 서두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안검사의 일기” 자체가 다분히 폭로나 혹은 진실 규명 내지는 양심선언 같은 차원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꿈꾸었던 문학에의 에너지를 이 작품에 쏟아 넣기 위한 것이었음을 필자는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안검사의 일기”는 사건이 전개되기도 전에 벌써 논픽션을 근거한, 살아있고 현장감 있는 창작물로서 영원히 죽지 않는 유기체(有機體)로 역사와 진실과 안상수 특유의 문학성이 녹아있는 튼튼한 애마(=문장)의 산물인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검사생활 9년째, 온갖 사건을 처리하면서 형성된 나의 육감은 이 사건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p. 20)
이 구절 역시 후에 이어질 사건들의 꼬리를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독자들이 긴장의 현을 늦추지 않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펼쳐낼 사건들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한 충격 완화의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사건을 처리하면서 익숙해져 온 영감과 판단력에 의한 어떤 사건에 대한 신호와 암호를 해독한 것으로써 그 상황이 이제 곧 펼쳐질 것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어떤 사건의 상황 설명이나 진행과정에 대한 보고성의 글은 그런저런 문구가 삭제되어 버린다. 그리고 오직 사건에 대한 명확한 정황과 판단을 곁들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저 평범한 문장인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안상수는 그런 보고서를 쓴 것이 아니고 문학적 창작품인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형사 2부 소속이 아니거나 그날 당직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을 맡게 되었을까? 우연 치고는 참으로 기이한 우연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것이 필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p. 23)
‘당직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을 맡게 되었을까?’라는 의문부호를 붙이며 독자들이 안상수와 그때의 사건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어떤 신의 섭리 같은 것이었다고 상상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것은 이제 자신이 이 작품의 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표현한 것으로서, 다른 인물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품 속의 주요 인물로서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이 작품에 대한, 그리고 깨끗한 국민의 정서와 한민족의 불굴의 의지에 대한 역사적 사명감이 깊은 곳에서 불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불타오름, 이 에너지의 흐름이 바로 안상수가 “어둠을 밝혀주는 횃불과 같은 사랑의 문체들로” 이 땅의 일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다.
♣ 2. 논픽션+픽션+시+자서전적 기능이 어우러진 기묘한 문학 기법에 드러나는 사람 사랑
다음의 글은 이 땅의 일들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지혜롭고 힘차게 투쟁했는지 알려주는 단편적인 부분이다.
“그에 맞서려면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 ~ 나는 일부러 기자들을 찾아 오늘 저녁 부검이 있다고 슬쩍 귀띔해 주었다.”(p. 31~32)
이런 말은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어느 기관이 부검결과를 왜곡할 가능성이 다분한 상황에서 역사의 진실이 매장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하고 주도하는 그의 추진력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안검사의 일기”는 사실 안검사가 주도하고 추진하는 진실규명에 대한 의지의 실체들을 튼튼히 세우며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검찰의 역할의 완성을 꿈꾸며 그 완성의 실체를 또한 창작품으로 결론 지음으로써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일을 처리해 나가며 그 일들을 또한 문학작품으로 창작하는 즉, 안(=현실의 사건)과 밖(=창작품 속의 사건)의 일을 하나로 묶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상수의 “안검사의 일기”는 그 전개와 구성의 특성상 논픽션과 픽션의 종합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많은 시들을 적절히, 아주 간절한 곳에, 올려놓고 읊게 함으로써 이 또한 시와 소설과 비소설이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체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고 이미 시도된 것이었다. 그 작품에 또한 자신의 가정사 이야기와 자신의 주변의 상황에서 끌어온 논픽션도 곁들이고 있어서 자서전적 역할도 하고 있는 기묘한 문학 기법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안검사의 자라온 가정환경과 詩들은 이후의 본고에 제시된다.
“영안실 안으로 들어섰다. 시신은 부검대 위에 뉘어 있었다. 키 170cm 정도에 알맞은 체격, 곱상했을 얼굴, 선홍색으로 변한 얼굴에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혀가 입 밖으로 약간 나와 있었다.”(p. 33)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혀가 입 밖으로 약간 나와 있었다’고 서술하는 안상수의 이런 보고는 사건의 배경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감성적, 추리적 상황 묘사로서 어느 언론 보도에도 확신되지 않는 즉, 단서가 명확하지 않은 ‘심증’ 그 자체인 것이다. ‘혀가 약간 입 밖으로 나온 것’을 크게 의식하지 아니하고 무심코 지나버릴 상황인데도 안상수는 그 무언의 절규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상수는 사건 보고서를 쓰는 것이 아니고 그는 하나의 문학작품을 완성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증명된다. 말하자면 추리소설의 기술적 측면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예리하고 정감 있는 표현이다. 이런 것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안상수의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주는 예리한 칼과 같은 문장으로서 이 “안상수의 일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 ‘170cm 정도에 알맞은 체격, 곱상했을 얼굴’이라고 표현하는 이면에는 안상수의 사람에 대한 사랑, 그 거룩한 인류애가 담겨져 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가슴 찡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혀가 입 밖으로 약간 나와 있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안상수 스스로가 이 죽음의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대쪽 같은 의지가 서려있는 문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혀가 약간 나와 있는 시신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그럴만한 일이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지나쳐 버리겠지만 안상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시신으로 밖에 만나지 못한 인연의 한 사람이지만, 생시에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못하고 간 말을 들을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품과, 현실의 사건과, 그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있는 안상수의 필연적인 결합의 하모니를 이루어 내는 “안검사의 일기”의 생명의 코드이다.
♣ 3. 역사의 혈(穴)자리에 언어(言語)의 침(鍼)들을 놓는 언어학(言語學)의 묘법(妙法) 표출
"한 대학생이 경찰에서 조사받다 죽었는데 어쨌든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신에 칼을 대기 앞서 우선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리고 나서 부검에 임하도록 합시다. 일동 묵념!"(p. 35)
실제로 부검 현장에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압력과 굴욕의 언저리에서 그 상황을 역전시켜서 국민들에게 납득이 가는 진실을 보여주기란 얼마나 참담한 현실과 싸워야 했을까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늘어서 있는 경찰들의 거센 눈초리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안상수는 이런 임기응변의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다. 우선 안상수는 이런 급박하고 숨막히는 분위기를 바꾸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기선을 제압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기싸움에도 안상수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묵념의 시간도 길게 했다. 그만큼 경찰들에게 학생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많이 준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시간의 침(鍼)을 쏜 것이다. ‘일동 묵념!’이라는 말로써 시간의 침(鍼)을 길게 쏜 것이다. 이렇게 묵념의 시간의 침(鍼)을 길게, 그 묵념의 침(鍼)을 길게, 이 사건의 마디에 꽂아버렸던 것이다.
그런 후에 또, ‘경찰들이 같이 있으면’ 고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국민들이 믿지 않을 우려가 있으니 경찰들은 나가주십시요’라고 하면서 말(言)머리와 말(言)꼬리를 휘어잡고 힘들게 부검실의 압력적인 상황의 언저리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묵념’이라는 단어와 ‘나가달라’는 말을 적절히 교체시키며 공권력의 강압적인 상황의 반전을 위해 급박한 시간의 혈(穴)자리에서 말(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방에서 환자에게 침(鍼)을 찔러 넣을 때 태양과 별의 궤도를 따라 그 침(鍼)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혈(穴)자리에 투입시키는 행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안상수는 사건의 진행 상황의 위치에 따라서 언어의 침(鍼)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안상수의 이런 언침(言鍼)의 행위는 병든 역사의 경락(經絡)을 짚어내며 경혈(經穴)을 찾아 일침(一鍼)을 가하는 것이다.
‘묵념’은 대단히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 언어의 침(鍼)의 효과는 강력했다. 경찰들이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던 결과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제부터 안상수가 그리는 역사의 기운은 흐르게 되어있는 것이다.
양지경희한의원 정용현 박사가 “한방의 원리는 침을 놓아서 기운을 잘 다스려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이다. 신체에 기를 잘 흐르게 함으로써 생명이 싱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체 전체의 리듬을 조화롭게 해주는 것이 한의학(韓醫學)의 묘법(妙法)이다.”라고 역설하듯 이젠 안상수가 역사의 혈(穴)자리에 정확하게 일침(一鍼)을 가하여 흐르는 시간과 역사의 유기체(有機體)에 민족정신과 혼의 기운이 잘 흐르게 함으로써 역사의 생명이 싱싱하게 살아나게 해주는 것이다. 묵념과, 진실과, 국민의 믿음이라는 언어(言語)의 침(鍼)들을 적당한 곳에 적당한 시간에 잘 꽂아 넣어서, 대한민국 역사의 전신(全身)의 리듬을 조화롭게 해주는 언어학(言語學)의 묘법(妙法)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단 몇 마디의 말로 상황의 반전을 엮어내는 심리학의 정수리에 있는 안상수, 그가 바로 언어학 즉 언어의 마술사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효능을 “안검사의 일기” 전체에서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전국은 희망과 용기와 기쁨의 물결들이 솟구치는 샘터가 됐던 것이었다. 그 사실은 바로 “노대표는 이날 오전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을 통해 직선제 개헌 · 김대중 씨 사면 복권 · 언론자유 및 기본권 보장 · 지방자치 및 교육 자치 실시 등 8개항의 민주화 조치를 선언했다.”(p. 254)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그날 온 국민이 뉴스를 듣고 환호했던 것이다.
“자정을 훨씬 넘겨서야 귀가 길에 오를 수 있었다. ~ 언제나처럼 거리의 신호등은 제 규칙대로 점멸했고 한강변의 아파트 불빛들은 겨울 강물 위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모든 게 달라지리라. 만감이 교차했다. 착잡했다.”(p. 41)
안상수는 고향의 마산고등학교의 정경(情景)을 이야기 하면서 “마산고등학교는 무학산(舞鶴山) 기슭에 포근히 자리를 잡고 멀리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봄이 되면 교정에 가득 찬 벚꽃이 백설처럼 흩날려 그 풍경에 도취되곤 했다. / 고향 주변의 수려한 장관은 나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고, 잔잔하게 그려지는 미지의 세계는 시인이 되고 싶은 나의 꿈을 더욱 강렬하게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안상수는 아마도 서울의 한강변을 바라보며 고향 마산의 풍경을 오버랩 영상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고향 마산의 ‘호수 같은 바다’, ‘교정에 가득찬 벚꽃이 백설처럼 흩날리’는 풍경들이 ‘서울의 한강 그 겨울 강물’, ‘아파트 불빛들이 강물 위로 반짝거리’는 풍경들을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한 상황의 전개 속에서도 이런 추억 속의 고향의 풍경을 잠시라도 맡아보고 만져보는 그는 그가 말한 “마산은 나에게 ‘맑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고 싶은 고향”의 아름다움 그대로 삶의 여정에서 항상 ‘맑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야 함을 다짐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는 또 “내 고향 마산에 대한 향수(鄕愁)는 내가 실의에 젖어 삭막한 도시의 뒷골목을 방황할 때나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을 때 나의 메마른 영혼을 푸근히 적셔주고 새 힘을 넣어 주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었다.”(p. 99)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만감이 교차했다. 착잡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감이 교차하지만 역사의 법칙대로 살아야 함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거리의 신호등은 제 규칙대로 점멸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규칙이란 것, 혹은 역사의 법칙이란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맑고 바르고 정의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안상수의 문장은 이렇게 감성적인 언어로 혹은 정확하게 질서를 부여하는 규칙의 언어로 상처난 역사의 몸통을 싱싱하게 기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의 심오한 문학성에서 기인된 것이며 초등학교 때부터 시인이 되리라고 강력하게 꿈을 불태웠던 그리움이 자라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미 시인, 그것도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인이 되었고, 소설가가 되었고, 문장의 대가가 되었으며, 언어의 마술사, 멍이 든 역사의 치료자가 되어있는 것이다.
“석간신문들은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대로 부검에 참여한 박월길 씨 등의 말을 인용하여 ‘오른 쪽 폐에 탁구공 크기 출혈’, ‘목과 가슴 주위 출혈 많았다’는 등 가혹행위의 의심이 있다는 내용으로 보도하기 시작하였다.”(p. 45)
위의 문장은 안상수가 기대한 대로, 혹은 의도하고 기획한 대로, 언어의 침(鍼)을 놓으며 그 효과들을 기대한 대로 효능이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안상수는 실제적으로 이 사건의 해결의 중심부에서 각 네트워크를 통하여 국민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안상수의 침(鍼)을 받은 언어의 혈(穴)자리(문장으로 말하면), 혹은 사건의 혈(穴)자리(현실적 사건으로 기술하면)에서 기운이 투입되어 망으로 조직된 각 매스컴의 경락(經絡)을 통하여 시간의 경락(經絡)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의 신경망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의 신경망은 서로 불꽃이 튀며 자생하면서 일반 대중과 학생들의 사이에서 스스로 이 새로운 문화의 질서 운동, 참역사의 튼튼한 민중운동에 참여하도록 서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4. 언어의 직공이 된 국회의원 안상수
“그거야 직접 사인이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 ‘그렇지 않아,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시신을 보지 않았는가? 중앙대부속 용산병원의 의사 오연상 씨와 응급실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부검에 참석한 유족 대표 박월길 씨와 의사 박동호 씨 등이 직접 보았고, 기자들도 얘기를 다 들었어. 그걸 무슨 수로 막겠나? 차라리 깨끗하게 하는 게 낫네. ~ 그냥 묻으면 더 큰 후유증을 남기게 되니 사실 그대로 공개하는 게 최선이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진실을 영원히 묻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 설명을 계속하면서 나는 침이 마르고 가슴이 타들어 갔다. 여기서 잘못 되면 이 사건은 영원히 묻힐 수도 있기 때문에 극도로 초조하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p. 45)
J단장이 ‘그거야 직접 사인이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라고 안상수 검사에게 마음을 바꿀 것을 요구할 때, 안상수 검사는 ‘그렇지 않아, 이미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J단장의 말을 뱅뱅 돌린다. 이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J단장의 말을 뱅글뱅글 돌려놓으면서 또한 그를 계속 설득하면서 ‘나는 침이 마르고 가슴이 타들어 갔’고, ‘극도로 초조하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결과 J단장은 안상수 검사의 주장이 옳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 J단장이 안상수 검사의 주장이 옳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쓰게 되자 안상수 검사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침을 놓는 한의사가 정성을 들여 침을 놓은 다음 한숨을 풀어 내쉬는 경우와 같다.
“J단장”의 ‘J’자는 이 문장에서는 안상수가 낚시바늘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이다. 이 ‘J’의 낚시바늘에 ‘J단장’, 즉 ‘단장’이 걸려있는 것이다. 안상수의 언어의 낚싯줄에는 ‘J단장’이 걸려있다는 표현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J’라는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J단장이 안상수의 마음의 코를 꿰러 왔다가 도리어 안상수의 낚싯줄에, 그 언어의 낚싯줄에 그의 코가 걸린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이렇게 상황을 바꾸어 놓는 것이 바로 침(鍼)을 놓는 처치법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침(鍼)을 놓는 방법은 침(鍼)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이다. ‘J’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밑부분이 침(鍼)을 돌리는 동그라미의 형상을, 그 길쭉한 몸체가 침(鍼), 밑으로 내려갈수록 가늘어지는 그 침(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J’ 문자는 침(鍼)을 꽂아 빙글빙글 돌리는 역동적인 시침(施鍼)의 행위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안상수는 이렇게 문장의 혈(穴)에 침(鍼), ‘침이 마르듯이’ 침(鍼)을 놓는 것이다. ‘침이 마르고 가슴이 타들어가듯이’ 언어의 침(鍼)을 찔러넣는 것이다. 안상수는 정신을 집중하여 침(鍼)을 빙글빙글 돌리며 언어의 혈(穴)자리에 꽂아 넣는 것이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혹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한의사가 침(鍼)을 돌리는 방향이 다르듯이 안상수의 언어의 침술(鍼術) 기법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안상수의 화술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침(鍼)을 놓는 방법을 달리하며 빙글빙글 돌리면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의 혈맥에 고름으로 뭉쳐있던 사기(死氣)가 풀리고 싱싱한 시간의 생기(生氣)가 도는 것이다. 희망의 정수리에 생기(生氣)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고문이란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며 피해자는 물론 그 가족과 사회까지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그들은 정말 모를까. 고문을 한 후에도 자기들 가족과는 정답게 웃으면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가족들이 아버지의 고문 행위를 알면 어떤 충격을 받을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p. 77)
이런 구절, ‘가족들이 아버지의 고문 행위를 알면 어떤 충격을 받을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라고 하며 우리 사회의 출발점이며 각 개인의 근본적인 삶의 테두리를 형성하는 가정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가 이렇게 안상수의 글에서 드러난다. 가정은 서로 믿음과 사랑과 존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충고를 이 사회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안상수의 사회치료법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큰 뜻도 이루지 못하고 가치 있는 생활도 하지 못한 채 젊음과 꿈만 시들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닌가. ~ 이제 더 이상 그런 후회의 길은 가지 말자. 인생에는 왕복표가 없지 않은가.”(p. 95)
안상수 검사의 글에서 특히 ‘인생은 왕복표가 없지 않은가’라는 글에서 인간 안상수의 깊고 내밀한 삶에 대한 진지한 도전의식과 성취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성취욕은 ‘고문을 한 후에도 자기들 가족과는 정답게 웃으면서 식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참다운 인간의 삶과 정의로운 사회의 사랑에 대한 자각과 희구에 의한 그의 끊이지 않는 집념에서 도출되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삶의 모든 여정은 그의 고향 마산의 호수 같은 바다를 닮아있는 것이다. 바다처럼 넓은 인간애와 호수처럼 잔잔한 그의 심성이 문장과 어울려 이루어 내고 있는 조서(調書)의 형식을 빌어, 문학의 형식을 빌어, 일기의 형식을 빌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는 눈물의 심금(心琴)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안상수의 사회 개혁 내지는 정화 차원의 환경운동이며 인간의 아름다운 생태계(生態界), 특히 한민족의 싱싱한 역사의 생태계(生態界)를 보존하기 위한 그의 노력의 씽씽한 심줄이다.
“대학시절 어느 여름날 달밤에 나는 여자친구와 돛단배를 빌려 타고 마산 앞바다로 나간 적이 있었다. 뱃전에 나란히 앉아 발목까지 물에 잠그고 항해를 할 때 발목에 와서 부서지는 은빛 구슬들의 아름다움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달빛이 바다 위로 길게 흘러 긴 빛의 줄기를 물결 위에 드리울 때 우리는 아무 말이 필요 없었고 그저 감동과 환희로 벅차올라 몇 시간이고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졸업 후 바로 시집을 가버렸지만 그 황홀한 추억은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아 있다. / 내 고향 마산에 대한 향수(鄕愁)는 내가 실의에 젖어 삭막한 도시의 뒷골목을 방황할 때나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을 때 나의 메마른 영혼을 푸근히 적셔주고 새 힘을 넣어 주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었다.”(p. 99)
‘새 힘을 넣어주는 생명수’, 그것은 그의 마음 깊이 가라앉아 있는 마산 밤바다의 아름다운 풍경, 여자 친구와 단둘이 돛단배 위에서 하얀 파도를 맞는 풍경, 또한 어머니의 죽음보다도 귀한 사랑에 대한 간절함에서 출발되는 것일 것이다. ‘뱃전에 나란히 앉아 발목까지 물에 잠그고 항해를 할 때 발목에 와서 부서지는 은빛 구슬들의 아름다움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라고 고백하듯이 그가 인생의 항로를 개척하며 도전해갈 때 여기저기서 부딪쳐오는 많은 어려움들마저도, 그것들은 파도 되어 ‘발목에 와서 부서지는 은빛 구슬들의 아름다움’으로 추억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난과 역경, 고통과 괴로움의 일상을 견뎌내는 힘을 얻어내는 것이다. 고향 마산에서 늘 보아왔던 삶의 그물을 던지고 희망의 낚싯줄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달빛이 바다 위로 길게 흘러 긴 빛의 줄기를 물결 위에 드리울 때 우리는 아무 말이 필요 없었고 그저 감동과 환희로 벅차올라 몇 시간이고 바다만 바라보’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건져내기 위해 현실의 아픔을 딛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소망 부재(不在), 허탈 충만(充滿), 그리고 절망만 만연한 거리에서 미래의 희망을 건져내는 그물코를 끼우고 있는 어부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언어의 그물코에는 미래의 소망의 해가 덜커덕 걸려 올려지는 것이다(그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의 언어의 직물을 짜는 언어의 직공(김지찬 박사의 저서 “언어의 직공이 되라” 참조)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가 깁고 있는 그물코는 바로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말뚝이 박혀있는 각각의 낱말과 낱말 사이, 혹은 구절과 구절 사이의 푸르고 푸른 사유(思惟)의 공간에 숨겨져 있는 천국의 비밀이다. 그래서 그 그물코, 즉 천국의 비밀의 코에 걸리기만 하면 구원은 어쩔 수 없이 걸려들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안상수의 그물로 포획되어 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안상수 그는 그가 이루어 내고자 하는 소망의 미끼를 문학적 언어의 낚싯바늘들에 끼워 푸른 바다, 망망한 삶의 바다, 회오리치는 역사의 깊은 밤바다로 던져 넣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마리 대어(大魚)의 역사적 유기체를 튼튼하게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안상수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삶의 그물의 기능이다. 누가 뭐라 해도 ‘맑고 바르고 정의로운’ 낚시의 바늘에 살맛나는 역사의 시간을 끼워내고자 하는 안상수 검사의 삶의 농도인 것이다.
“하늘은 말하지 않지만 선인에게는 승리를 주고 악인은 망하게 한다. 사람이 청하지 않아도 하늘은 그렇게 일을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선악의 인과법칙이라는 그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그렇다. ~ 정의는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경우가 있으나 종내는 승리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p. 103)
이것은 유교나 불교, 기독교 등의 선악에 대한 결과의 예시(豫示)이다. 사전에서 “유교나 불교의 사상에 근거한 도덕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도 권선징악의 내용이 나오며, 또한 이런 심상은 인류 모든 이의 마음속에 이미 신께서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느 종교의 전유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바로 그것은 모든 인류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것들은 기독교적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표현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용이다. 하늘로 은유되어 있는 듯한 온 우주의 창조주는 사람이 원하지 않아도 선이 승리하도록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만물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그 神께서는 세상의 일을 방관하고 계신 것 같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슬픔이 기뻐하는 세상의 눈물의 깊은 어둠에 구원의 그물을 던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던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깊숙이 복음의 메시지는 구원의 서정으로 튼튼하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하듯 안상수 검사가 얘기하고 있는 ‘선악의 인과법칙’은 ‘神의 법칙’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의 법칙’에 맞닿아 있는 것임을 안상수 검사는 현장에서 온갖 추한 인간의 죄의 습성들을 다스리며 뼈저리게 체험한 결과물로서의 확신에 의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안상수가 오늘의 위정자들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묘사하고 있는 문법의 규칙에서 발현되는 선악의 종언(終焉)에 대한 ‘언어의 법칙’인 것이다.
안상수의 글이 기독교적 정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은 다음의 내용에서도 발견된다.
"삶은 고해인가 아니면 신이 준 축복인가. 죽음은 다른 세계로 가는 과정인가 아니면 삶의 종점인가. 잘 모르기는 해도 나는 4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하여 삶이라는 것은 고통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올바르게 밟아 나가야 할 과정이라는 것,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p. 127)
여기에서 안상수는 어렵고 어려운 인간의 구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의 깊은 신앙은 이런 것이다. 즉, 삶은 ‘고통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올바르게 밟아 나가야 할 과정이라는 것’, 또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기에서 안상수의 기억과 확신의 저편에 있는 확장된 알레고리를 추적해 본다면 삶은 ‘신이 주신 축복’이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올바르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길이 바로 충만한 구원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 끝이 아니다’는 사실은 역시 구원을 염두에 두고 나온 확신의 언어이거나 혹은 잠재의식의 극한 밑바닥에서 일깨워주는 구원의 시간의 우물물에서 솟아나오는 생수와 같은 언어의 빛깔이다.
이로서 안상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깊은 존재의 허탈감을 벗어버리고 더 깊고 높고 넓고 무한한 우주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복음(福音)의 메시지를 인식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루어내는 문장의 낱말과 낱말 사이에서, 혹은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절규하고 있는 영혼들의 소리, 혹은 한민족의 깨끗한 민족성의 노래와 같은 것이어서 우리는 그의 글을 접하게 되면 존재의 자각에 깊이 빠져 행복과 평화의 우물물을 길어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문장의 그물에서 건져 올리고자 하는 안상수의 언어의 유희의 독한 묘약이다.
♣ 5. 용비어천가에 표현되는 안상수 의원의 고향 풍경
“고교동창 김길태 군, 친구인 이한구 교수 등과 집에서 가까운 청계산(淸溪山)에 올랐다. /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봄날의 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햇살, 굳은 가지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초록의 어린 잎들, 골짜기마다 터져 나오는 생명의 함성, 우리를 평화롭게 감싸주는 새소리, 물소리……. /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축복들을 외면하고 온갖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사는 얼마나 추하고 덧없는가.”(p. 155)
참으로 안상수 검사는 또 우리에게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청계산(淸溪山)은 이름에서 뜻하고 있는 것처럼 계곡에서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정상에 있는 망경대 주위는 바위로 이루어져 튼튼한 힘을 과시하기도 하는 우리나라의 명산이다. 이런 청계산 풍경은 안상수 검사의 ‘맑고 바르고 정의로운’ 기상과 절개로 통한다. 이 청계산(淸溪山)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안상수 검사는 조건반사적으로 고향 마산의 풍경, 특히 무학산(舞鶴山)을 기억하며 추억의 계곡을 학(鶴)처럼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봄날의 산”을 보며 “봄이 되면 교정에 가득 찬 벚꽃이 백설처럼 흩날려 그 풍경에 도취”되었던 고향 마산의 무학산(舞鶴山)을 추억하는 것이다. 무학산(舞鶴山)은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최고봉이며 마치 학(鶴)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산의 형상이 나는 학과 같다 하여 무학산(舞鶴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학이 춤추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무학산(舞鶴山)의 그 풍경은 바로 안상수 검사가 학(鶴)과 같은 고고한 자태로 역사의 계곡에 우뚝 날아오를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듯하다. 안상수 검사가 꿈을 꾸며 치열하게 공부했던 마산고등학교가 바로 이 무학산(舞鶴山)의 자궁에, 맑은 물이 흐르는 생명의 젖줄에 포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또한 용비어천가의 깊은 뜻이 다음과 같이 전달되어 온다.
QQQ 뿌리 깊은 나무
뿌리, 그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네
바람, 큰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참 좋고
열매가 많이많이 열린다네
샘,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 근원이 끊어지질 않는다네
근원, 그 근원이 소멸되지 않으므로
그 근원이 흐르고 흘러
냇물처럼 흘러 바다가 된다네
< 용비어천가 中에서, 평론을 위한 박인과 번역>
무학산(舞鶴山)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들은 바람에도 아니, 주변의 바다에서 몰려오는 큰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이 튼튼함의 뿌리를 안상수 검사는 그 무학산(舞鶴山)의 혈맥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안상수 검사는 바로 그 땅에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기지 않듯이 무학산(舞鶴山)의 샘(泉)이, 학(鶴)의 엉덩이와 같은 샘(泉)이 깊은 수심과 지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마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용비어천가에서 “그 근원이 흐르고 흘러 냇물처럼 흘러 바다가 된다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무학산의 샘의 근원은 흐르고 흘러 냇물처럼 흘러 그 마산의 바다로 흘러가 바다가 되는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그래서 바로 이 마산의 안상수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뜻을 살펴보면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씌어진 맨처음 노래로서 ‘용비어천’은 ‘용이 날아 하늘에 오름’이라는 뜻으로 천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름’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안상수의 문장 속에 깊이 희망의 그물코로 숨겨져 있는 그의 마음을 살펴보자. 안상수의 감회가 부르는 언어 “목덜미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햇살”은 마치 학(鶴)이 창공을 날아올라 유영(游泳)하는데 그 학(鶴)의 목덜미를 상쾌한 바람과 햇살들이 휘감고 즐기고 있는 평화로움을 나타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학(鶴)은 바로 안상수 의원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굳은 가지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초록의 어린잎들”은 이제 민주주의의 새싹이 고목나무의 말라버린 부패의 그 역사의 가지를 뚫고 나오기를 안상수 검사는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갓 태어나는 어린잎과 같은 것이어서 왕성한 역사의 여름을 향하여 커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터져 나오는 생명의 함성”은 역시 새시대의 환호성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서 마을마다 산마다 도시마다 터져 나오는 민족의 함성은 생명에의 함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롭게 감싸주는 새소리, 물소리…….”라고 안상수는 언어의 직물을 짜고 있다. 역시 안상수의 관심의 끝에 달려있는 그 마음의 그물코는 항상 ‘평화로운 민족사회’를 염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평화롭게 감싸주는 새소리, 물소리…….’라고 회상하며 그 가슴 알찬 평화를 기대하며 안상수는 무학산(舞鶴山)의 그 산새들과 물새들의 노래를, 그 맑고 싱싱한 참자유의 노랫소리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 6. 대나무의 강직하고 곧은 속성을 닮은 “안상수의 일기”
무학산(舞鶴山) 계곡에 날아오르는 학(鶴)과 같이 마음은 창공처럼 넓고 청렴하게, 뜻은 높이 두고 살아가는 안상수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치료약도 변변치 못해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어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우리 남매들은 모두 극적으로 살아났다. / ‘생활 형편이 아무리 나아져도 늘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새삼 다지게 되는 것도 지난 날의 어려웠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나의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안상수 의원의 홈페이지 참조), “청렴한 검사로서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아내의 조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한집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산지 어언 20년이 되어간다. 나는 장모님을 통해 일찍 세상을 떠나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안상수 의원의 홈페이지 참조).
여기에서 ‘생활 형편이 아무리 나아져도 늘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대나무의 무(無)의 욕심을 닮아 있다. ‘검소하고 청렴하게’라는 언어의 표출이 바로 그것을 얘기해주는 것이다. 대나무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온몸을 비우고 산다. 그렇게 대나무처럼 안상수는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마음을 비우고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 것을 이 문장들이 증명하는 것이다.
“피고인들의 입만 막으면 되는 줄 알고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큰소리치던 그들은 얼마나 단세포적인가. / 우리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된 이 순간, 가슴은 왜 이리 쓰라린가. 이제 엄청난 폭풍이 몰아닥칠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p. 189)
안상수 검사의 말대로 세상에 비밀은 없는 것일까. 이제 안상수 검사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되는 순간 그는 ‘가슴이 쓰리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이 입증이 되었지만 그렇게도 입막음을 하려던 권력자들의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궁지에 몰리며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 아픔을 감지하고 애달파 하는 것이다. 그 신호로 안상수 검사의 위장에는 위산(胃酸)이 뜨고 있는 것이다. 안상수 검사의 아픔의 이유는 그자들도 다 같이 우리 한민족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역사 공동체의 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단세포적’인 발상으로 전전긍긍 했지만 안상수 검사는 그러한 공동체적 다세포적인 발상으로 그들을 아픔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상수가 위산과다증으로 가슴이 쓰릴지라도 홍익인간 사상을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 민족 공동체적 사랑의 뿌리이다. 이렇게 안상수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있는 것이다. 한없는 사랑으로 흘러내리는 ‘샘이 깊은 물’이 되어있는 것이다.
“~ 이 두 가지가 모두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명예가 손상당하는 것보다, 하루라도 더 있기 싫은 검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보다 더욱 견뎌내기 힘든 일임이 틀림없었다. /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에 대한 의리, 내가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면 내 명예와 감정과 이익이 아무리 중요해도 남자로서 이를 저버릴 수 없다.”(p. 228)
여기서 또 한 가지 대나무의 속성을 얘기할 수 있다. 대나무는 그의 군락이, 그 식물공동체가 생명의 위기에 처하면 얼른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난 후 ‘스스로’ 말라 죽어버린다. 그것은 훗날에 다시 비옥한 토지가 되었을 때 대나무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혹은 땅 속 줄기에 영양분을 채워 여린 잎을 내며 대나무숲이 번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전보다 더 새롭고 힘차고 싱싱한 대나무의 생태세계(生態世界)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공동체 즉 식물공동체의 조직의 생명력을 위한 것이다.
안상수 검사는 검찰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내 명예와 감정과 이익이 아무리 중요해도’ 다 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죽고 검찰의 명예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토록 사표 수리를 받아달라고 검찰에 요구했지만 이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나무숲의 속성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나무의 속성으로 안상수는 자신이 ‘침이 마르도록’ 대나무 침(鍼)이 되어 역사의 혈(穴)자리에 언어의 침(鍼)들을 꽂고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죽었으므로 이제 때가 되면 무성하고 튼튼한 꿈의 대나무숲을 안상수 검사는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구리가 웅크리고 있다가 튀어나가는 탄력보다 강하게 대나무는 한껏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질려는 탄성으로 더 높이 더 거세게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굽히면 굽힐수록 탄력성이 배가 되는 대나무의 끈질긴 인내의 속성 때문이다. 굽혀질수록 곧게 서려는 대나무의 강인한 질감은 안상수를 닮아있다. 아니 어쩌면 대나무의 탈력 강력한 대침을 안상수가 닮아있다.
“나는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 개인을 위해서만 살 것이 아니라 박군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약자나 소외된 민중과 아픔을 같이 하는 풍부한 인간애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높은 뜻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대한다.”(p. 352)
이 부분에서는 안상수의 희생적인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는 대나무숲의 속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박군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살아가라고 자녀들에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박군의 삶이 또한 바로 대나무숲의 생태를 닮은 삶이었던 것이다. 박군은 죽어갔지만 더 울창하게 자라는 대나무숲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싱싱하게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 많은 인파의 물결, 함성의 파도들이 백두대간을 뒤흔들어 놓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바로 진보된 생태계(生態界)의 생명의 노래였던 것이다. 진보된 민주주의의 꽃이었던 것이다. “소외된 민중과 아픔을 같이 하는 풍부한 인간애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높은 뜻”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했던 것이다.
♣ 7.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이 신념(信念)의 정치에 대한 생명력(生命力)으로 작용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다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류가 그리는 어머니는 생명의 자궁이었고, 믿음의 근원이었고, 사랑의 본체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을 거슬러 흑암 같은 무지의 어둠을 뒤로하고 소망의 밝은 태양이 뒹구는 이 땅에 나오게 된 것이다(참조: 창세기). 또한 확장된 의미의 ‘어머니’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회귀(回歸)해야 할 구원의 산성이신 것이다.
이 어머니에 대한 갈망(渴望)은 우리 인간에게 신(神)의 섭리에 의해 필수적으로 입력되어 있는 구원의 프로그램에 담겨진 소스(source)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그리움의 모체는 근본적으로 신적인 영역의 구원의 그물에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메시지로 떠오르게 되는 영원한 세계에 관한 것을 이끌어오는 생명의 회로(回路)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창조하신 神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그 그리움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원초적으로 그 그리움의 뿌리는 신적인 영역에서 발출된 것이다.
그래서 안상수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정들을 이 “안검사의 일기”에 붙여놓은 것들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 전혀 신(神)에 대한 이야기나 종교에 대한 논리를 풀어놓지 않으면서도 존재의 깊은 존재에 의한 성찰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의도가 그에게 있다. 그것은 사건을 다루면서 많은 죽음들을 보아오면서 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과 본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사유의 결과인 것이다. 그 존재의 자각에 대한 행위선상에서 ‘어머니’를 등장시키는데 그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모든 인류가 자신의 생명의 고향에 대한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는 인류 최상의 언어이다.
“안검사의 일기”에서 그 어머니는 바로 종교인들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적인 명칭과 동등하게 사용된다. 왜냐하면 ‘아바 아버지’는 신(神)을 호칭하는 것인데 그 ‘아바 아버지’, 즉 신(神)이(기독교적 한국의 명칭은 하나님) 모든 인류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8:6).
이제, 안상수가 “안검사의 일기” 안에 풀어놓는 지극히 인간적인 언어 그 ‘어머니’에 대한 본질적인 에너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머니는 17세에 아버지와 혼인하셨다. 두 분은 온갖 노력 끝에 마산에 기와공장을 차렸는데, 6·25가 끝난 후 남도를 휩쓸던 돌림병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기와공장은 사기꾼들에게 날아갔다. 내가 일곱 살 되던 때였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온갖 노동을 하면서 2남 4녀의 어린 자식들을 어렵게 키웠는데, 아버지 사망과 사기당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6남매 중 5남매가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앓아눕는 일을 또 당하게 되었다. / 6·25사변 직후라 치료약도 제대로 없었고 돈도 없었으므로 그저 떼죽음만 기다리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밤낮 없는 자식들의 간병에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극도로 지쳐버렸다. 절망감에 빠진 어머니는 ~ 깊은 밤에 집 옆을 지나는 마산―창원간 기찻길 철로에 누워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다.””””””(p. 60)
안상수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절망을 본다. 자식들이 틀림없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마산―창원간 기찻길 철로에 누워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다”고 그 사건을 진술한다. 어쩌면 기차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오래였을지 모른다. 그만큼 어머니는 이 자식들의 죽음의 상황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신(神)의 사랑도 유추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안상수 검사는 은연중(隱然中)에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근거는 “나는 4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하여 삶이라는 것은 고통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올바르게 밟아 나가야 할 과정이라는 것,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p. 127)라는 문장에서도 비쳐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열심히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신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신(神)의 완벽한 사랑도 유추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될 때 너무나 인간적인 ‘어머니’라는 실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이 적나라한 문장 뒤에 숨겨놓은 안상수의 인간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뇌와 우수(憂愁)의 빛깔을 비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기를 각오하는 아픔의 가슴을 가진 ‘어머니’, 그것은 바로 신의 사랑의 표상의 한 부분인 것이다. 예수가 인간의 죽음을 바라만 볼 수 없어서 자신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는 것은 바로 그의 우리에 대한 간절한 사랑 때문이다.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신(神)의 사랑이 죽음보다도 더 높이 고통과 죽음 속에서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철로에 누워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는데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자 어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셨다. / 약 한 첩 쓰지 못했어도 어머니가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한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기적적으로 모두 살아났다. / 어머니가 그때 먼저 ~ 떠나셨다면 우리 가족은 아무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못했으리라. 그 이후 어머니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식구들을 불러놓고 가끔 그 얘기를 하면서 ‘그때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때도 이겨냈으니 이 난관도 이겨내자’고 격려하시곤 했다. / 우리 가족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생존을 위해서 싸우는 전우가 되었고 그 전우애로 굳게 뭉쳐 모진 세상을 헤쳐 나갔다. 아무리 고생을 하고 살아도 살아있다는 것과 더구나 가족과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p. 60~61)
“약 한 첩 쓰지 못했어도 어머니가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한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기적적으로 모두 살아났다.”는 구절에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상식적인 범위에서 우리는 약을 먹지 않고 그 무서운 장티푸스가 나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장티푸스는 티푸스균이 인간의 창자에 들어가서 급성전염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병은 고열과 설사, 그리고 두통과 식욕부진, 장출혈, 뇌증 따위의 증세가 나타난다. 그때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병으로 즐비하게 죽어갔는데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이 급박한 병증을 다스렸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우리 형제들은 기적적으로 모두 살아났다.”고 안상수 검사는 진술한다. 이 또한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안상수 검사는 위증(僞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할 때 약 한 첩 없이 병을 낫게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식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받아들이고 ‘어머니가 지극한 정성’을 다한 사랑의 처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예수의 처한 상황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죄(罪)라는 병이 깊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류는 어떤 약을 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극단의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인류는 비로소 무서운 죄(罪)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죄(罪)라는 글자는 그물망 部의 13획의 글자이다. 그 죄(罪)라는 죽음의 그물로 포진하고 있는 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인류의 생명과 자신을 통째로 맞바꾼 예수의 희생의 역사가 없었다면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안상수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때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때도 이겨냈으니 이 난관도 이겨내자”라고 한다. 그렇다. 인간이 장티푸스균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이겨냈으니 더 절망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장티푸스는 마치 사망과 같은 것이어서 그때 그 병에 걸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살았다는 것은 믿음과 신념과 사랑으로 사망을 이기었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안상수의 문장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마치 예수가 인류의 죄를 삭제해버린 것, 또한 예수가 사망을 벗겨내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을 추상할 수 있게 한다. 과연 예수가 사망을 이겨냈는데 더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안상수의 그 글들은 예수가 우리에게 날마다, 내가 사망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겨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라며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용기와 희망과 믿음과 신념의 권면은 오늘날과 같은 기갈과 번뇌의 시대에 청량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오죽하면 “내 고향 마산에 대한 향수(鄕愁)는 ~ 나의 메마른 영혼을 푸근히 적셔주고 새 힘을 넣어 주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었다.”(p. 99)”라고 안상수는 고백한다. 이 ‘생명수(生命水)’라는 단어는 사전에 “② ≪기독교≫ ‘복음(福音)’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물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이라는 뜻도 있으나 전자의 의미가 이 문장에서는 더 깊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혼을 푸근히 적셔주고”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도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낯익은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방적으로 기독교적인 색체를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특별한 의도는 없다. 단지, 안상수 검사의 문장의 흐름이 가히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안상수의 어머니에 대한 향수(鄕愁)를 엿보고자 한다.
“부모님 생전에 잘 모시지도 못한 자식이 부모된 게 뭐가 자랑스럽다고 카네이션을 꽂겠는가.”(p. 175)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래 전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며 지내던 일들이 떠오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어머니, 마산에 내려와서 산소도 자주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p. 260)
“사실 내가 마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여 어머니를 모시면 어머니는 혼자 사시는 외로움을 잊고 호강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한사코 내가 객지로 다녀도 좋으니 명예롭게 검사직을 수행하길 바라셨다. 다만 한 번쯤 마산으로 와서 근무하는 것이 소원일 뿐이었다. / 그러던 어머니께서 내가 대구로 간 지 몇 달 후에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 마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오기를 그렇게 기다리셨던 어머니의 조그만 소원 하나 들어드리지 못한 이기심이 가슴에 사무쳐 나는 땅을 치면서 수개월간 눈물과 회한으로 나날을 보냈다.”(p. 270)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나는 변호사가 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 박군에게 부끄럽지 않고, 명예를 생명만큼이나 존중한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한다.”(p. 348)
위의 글들은 모두 “다만 한 번쯤 마산으로 와서 근무하는 것이 소원일 뿐이었다.”라는 문장 속의 ‘어머니의 소원’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산에서 공장을 사기꾼들에게 당하여 날려버리고 자식들과 죽을 고비를 넘긴 어머님께서는 마산에서 한 번 쯤 아들이 검사로 보란 듯이 근무해주길 바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원을 들어주기 전에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안상수 검사는 자녀들이 꽂아주는 ‘카네이션’도 가슴에 꽂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땅을 치면서 수개월간 눈물과 회한으로 나날을 보냈다.”고 하는 고백에서 안상수 검사의 인간미 넘치는 정서를 우리는 만져볼 수 있다. 요즘 같이 ‘효(孝)’의 개념이 침몰되고 ‘현대판 고려장’이란 말까지 난무(亂舞)하는 시대에 효성 지극한 한 아들의 눈물, 그것도 ‘수개월간’ 흘리는 눈물은 불효한 우리의 역사에 청량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음이 우리의 심장(心腸)에 각인(刻印)된다.
이러한 눈물, 이러한 안상수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눈물이 이 사건을 희망의 기쁨과, 우리에게 아직 남은 생명수의 환희로 유화(乳化)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딱딱한 조서로 일관될 수밖에 없는 안검사의 사건의 진술이 사랑과 회합의 정서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안상수 검사의 능숙한 필력에 의한 문장력과 문학적 감성으로 인한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 8. 긴장된 사건의 혈(穴)자리에 찔러놓은 감성의 침(鍼), 그 시어(詩語)들의 효능
안상수는 그의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안검사의 일기)”에 나오는 사건의 진행 중(中)에 여러 곳에서 끼워 넣고 있는 신문 방송 등 매스컴의 보도사실, 편지글, 전지적작가시점에서의 자신의 느낌과 설명 및 자신의 일상생활 소개, 수필 형식의 글, 일기 형식의 글, 詩 등을 통해 자신의 인류와 문화에 대한 관점과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기 위한 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끼워놓은 문장들 중에서 특히, 시(詩)들이 혹은 한의 노래들이 안상수 의원에게 있어서 그의 마음 중심에 평화와 자유, 인류의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런 시구들이 군데군데 필요적절하게 들어앉아 감성의 침(鍼)을 놓고 있는 것이다. 위기의 문구들로 얼룩진 딱딱하고 살벌한 사건의 심장과 정수리에 패여 있는 사기(死氣)의 혈(穴)에 시(詩)의 생명을 부어댐으로써, 시(詩)의 생기(生氣)를 꽂아둠으로써, 그 서릿발 돋는 문장들의 절망을 평화와 사랑의 맥(脈)으로 흐르도록 처치(處置)한다. 그래서 살벌한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독자들은 따뜻한 인간애를 짙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들은 많은 상황적 진술들을 끌어들여 사건의 이면에 있는 한민족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안상수의 문학적 기술이다. 그러한 안상수의 감각적인 문학적 기술들은 그의 마음과 정신 속에 가라앉아 있는, 혹은 한겨레의 상처의 현장과 역사의 정신 속에 올곧게 박혀 있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과 생명의 가치의 표출의 기능을 한다.
돌출된 사건의 감성의 표현 방법의 하나로 사용한 시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제목 옆의 숫자는 책 페이지를 나타내준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68>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중략…………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며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는 추모시를 한 여학생이 낭독하면서 이 사건의 현장의 감각은 ‘타오르는 분노’의 거대한 산맥을 맞이한다. 이렇게 “안검사의 일기” 68페이지에서 사건의 핵을 건드리는 듯한 긴장감을 주고 있다. 이 긴장감의 현실적 역사의식을 감지하도록 안상수 검사는 이 시(詩)를 붙여 놓은 것이다. 즉 사건의 혈맥을 긴장감으로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건의 분노의 구멍에 이 ‘추모시’라는 시(詩)의 침(鍼), 눈물의 시로 흐르는 감성의 침(鍼)인 시의 노래를 찔러 놓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사건은 결국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는 추모의 마지막 시어(詩語)처럼 안검사의 투혼에 의해 거짓으로 얼룩진 사건의 진상이 벗겨지고 마침내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것은 이 자리에 놓은 시(詩)의 침(鍼)이 효능을 발휘한 것으로 풀이된다.
<꽃상여 타고 70>
(이것은 박군이 생시에 즐겨 부른 노래라고 한다.)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 어이 큰 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안검사의 일기”에는 사건의 극점이 여러 군데 존재한다. 그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 사건 자체가 절벽을 타는 듯한 텐션(tension)과 급속한 전염력으로 연속하여 되풀이되며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박군 사건의 제일 처음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답게 박군이 생시에 즐겨 부른 노래를 군중이 대신 부르고 있는 실황을 안상수는 실감나게 중계하고 있다. “그대 잘 가라 /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 꽃상여 타고 / 그대 잘 가라”라며 군중의 힘의 침(鍼), 그 힘찬 역사의 침(鍼)을 박군이 없고 한 구석이 구멍 난 그 자리에, 그 혈(穴)자리에, 이 사건의 팻말처럼 박아놓고 있는 것이다. 안상수의 이런 문장 배열 효과로 탄력을 얻는 이 “안검사의 일기”는 더욱 요동을 하며 역사의 강을 힘차게 유영(游泳)하게 되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시 93>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중략…………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안상수는 이 책의 93페이지에 천상병 시인의 시를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 뼈있는 말을 다 한다. 그것은 바로 박군의 “살과 뼈는 알고 있다”는 것이고, “진실과 고통”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아이론 및 와이셔츠”는 전기고문을 일삼는 아이론의 압력 밑에서 꼼짝 못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써 와이셔츠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아이론이 주름을 펴면 펴는 대로, 겹쳐 누르면 눌리는 대로 아무 반항도 할 수 없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서 현실비판의 뼈있는 말인 것이다. 안상수는 이 시를 빌려 바로 그런 뼈있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마음대로 글로써 표현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이 시를 끌어와 감성적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은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쯤에서 뼈있는 말로 뼈있는 시(詩)의 침(鍼)으로, 멍든 시간의 혈(穴)자리에서 된서리를 맞는 것이다. 이런 류의 문장의 표출이 안상수가 놓는 침의 색깔인 것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고름의 역사는 회춘(回春)의 침(鍼)을 제대로 맞게 되는 것이다. 뼈있는 시(詩)의 침(鍼)을 제대로 맞아 역사의 봄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헤르만 헷세의 시 242>
(안상수 의원이 좋아한 시)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시키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이는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
안상수 의원이 좋아한 이 헤르만 헷세의 시는 242페이지에 올라가 있다. 그때는 안상수 검사가 명동의 밤 속에서 1만 5000여 명이 부르는 애국가 합창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것을 본 후였고, 6 · 10대회 이후 몇 일째 전국 각지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지는 때였다고 한다. 그럴 때에 안상수 검사는 춘천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이 나 춘천지방검찰청 구내에 있는 청사 직원용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 대충 짐을 풀어 놓고 고독을 씹을 때인 것이다.
“어둠을 전혀 모르는 이는 /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는 헤르만 헷세의 시, 그렇다 이 시대의 어둠을 모르는 이는 그 어둠 속에 있는 몰지각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을 전혀 모르는 이는’ 현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안상수 검사가 헤르만 헷세의 시를 인용하여 불투명한 이 시대의 영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상수 검사의 “안검사의 일기”가 어두운 시대의 횃불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의 청년들과 사람들에게도 “안검사의 일기”가 횃불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시를 두고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는 헤르만 헷세의 시가 왜 안검사의 손에서 선택되어 이 책에 올려졌을까. 그것은 안검사의 생활환경이 좋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안개가 내리는 미궁(迷宮)의 시간 속에서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다는 솔직한 심경을 헤르만 헷세의 시를 인용하여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진실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시키는 / 어둠”에 의해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도 감지된다. 안상수 검사는 “헤르만 헷세의 시구처럼 안개 속에 홀로 내던져진 것 같아 외로웠다.”라고 고백한다(p. 242). 그런데 안개, 즉 어둠 속에 홀로 내던져진 그는 시대의 횃불로서 던져진 것이었다.
“안검사의 일기”를 집중하여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신의 시를 올려놓는 것보다 타인의 시(혹은 글)를 올려놓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의외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감성의 긍정적 감각이 안상수 검사의 형편과 어우러져 두 배의 효과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안검사만의 생각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감회도 그와 같다는 공감대가 먼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안검사의 일기”를 자세히 훑어보면 곳곳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법들로 인해 안상수 검사가 공감대 형성의 대가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게 해준다. 이 “안검사의 일기” 전편에 흐르는 것은 바로 설득력 강한 그 안검사의 공감의 언어의 문학적 표현 감각으로 인한 진한 인간애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추구와 갈망의 시원한 산골물소리이다. 그 안검사의 고향 무학산(舞鶴山) 계곡의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흘러내리는 이빨 시리고 가슴 서늘한 산골짝물소리인 것이다.
<김준태 시인의 시 255>
이제 아무나 보듬고 싶다.
무식하게 정말 일자무식하게
사람이여 환장하게 좋은 사람이여.
…………중략…………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김준태 시인의 이 시는 87년 6월 29일에 민정당에서 발표한 내용 즉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및 기본권 보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등 8개항의 민주화 조치를 선언했을 때 “국민들이 오랜만에 진한 승리의 감동”(p. 254)으로 환호하며 기뻐하는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안상수 검사가 끌어와 붙여놓은 시이다.
그야말로 적절한 시를 뽑아서 올려놓았다. “이제 아무나 보듬고 싶다. / 무식하게 정말 일자무식하게 / 사람이여 환장하게 좋은 사람이여.”,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라고 환호하는 것이 바로 국민들의 기쁨이었음을 안상수는 묘사하기 위해 이 시를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사건의 마디마다, 혹은 역사의 진행의 각 단계의 고비마다 안상수 검사는 지극히 알맞은 시들을 배치하여 분노와 고독과 슬픔과 환희 등 그 감정과 감성과 감각의 표출을 담당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들을 사건의 자궁에 찔러 넣는 안상수의 행위는 바로 시어의 침을 놓는 것이다. 죽어가는 한반도의 역사의 진실에 안상수 검사 자신만이 구성할 수 있는 특이한 알레고리로 형성된 글의 쐐기를 박고 시의 감성의 샘물을 품어 올려 갈증 난 역사의 심장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긴장된 사건의 혈(穴)자리에 찔러놓은 감성의 침(鍼), 그 시어(詩語)들의 효능은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생수의 역할을 하며 바삭바삭 마르고 금이 간 한반도의 절망의 땅바닥에 흘러들어 희망의 풀뿌리들을 싱싱하게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검사의 일기”에 나타나는 사건의 진술의 과정에서 안상수 검사가 시들을 심어놓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어둠을 향하여 횃불을 들고 물 오른 빛의 침(鍼)을 놓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언어로 형성된 문학성 짙은 감성의 침(鍼), 시어의 침(鍼)이 되는 것이다.
♣ 9. 100분 토론과 “안검사의 일기”에 대한 연관성
“이제 광화문 거리에서 공산당 만세, 김정일 만세를 외쳐도 처벌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국가 정체성에 대해서 국민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라고 안상수 의원이 100분 토론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때 당시에 필자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정말 이 사회적 현상이 필자의 기억과 판단력에 많은 혼란이 일게 했다.
“안검사의 일기”에 나오는 박군에게 국민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끌려가서 조사 받다가 죽음을 당했었던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로서의 안상수, 그가 이렇게 발언하는 것은 뼈아픈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인 것이었다. 안상수 의원은 “안검사의 일기”에서 밝혀지듯이 학생의 신분으로 아무 죄 없이 끌려가 숨을 거둔 박군의 사건의 진실을 목숨 걸고 밝혀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죄 없는 사람은 끌려가 조사 받다 죽고, 죄 있는 사람은 끌려가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사회라고 믿고 싶지 않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헌법과 양심에 따라 수사하라는 것이다.”라고 또 100분 토론 중에 안상수는 역설하였다. 필자는 이 ‘헌법과 양심에 따라 수사’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행에 대한 정확한 발언이라고 본다. ‘헌법과 양심에 따라 수사’한다는 말에서 우리가 수호해야 할 ‘헌법’은 바로 우리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명확하고 튼튼한 우리의 틀인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권력의 실행 방법은 헌법에 의해서인 것이다. 그래서 ‘헌법’에 따른다는 것은 국민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에 따른다는 것은 수사하는 자는 혹 어떤 권력의 압력이 가해질지라도 수사에 대해서는 공정하게 자신의 법리적 양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양심에 따라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법리적 양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양심에 따라 목숨 걸고 박군의 사건을 수사했던 안상수 의원으로서는 당연한 발언인 것이다.
이 바다, 말씀의 바다에서 이 발언, 이 언어의 낚싯바늘에 걸려 퍼덕이는 싱싱한 유기체들이 있다는 것은 안상수가 거는 미끼가 그토록 유혹적인 데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상수는 그의 삶의 바다 어디에나 탱탱하게 물 오른 언어의 그물을 치며 튼튼하게 성숙되는 민주주의를 건져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안상수 의원은 그렇게 법리적 양심의 침(鍼),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양심의 침(鍼)을, 혹은 언어의 낚싯바늘을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고도의 기술로 응집된 그의 문학성과 아름다움을 극한 서정성으로 표현할 줄 아는 감수성,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을 환희의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언어적 기능을 잘 살리며 지금도 준비하고 있다. 언어의 낚싯바늘로 아름다운 시들을 걸어오기도 하고, 침(鍼)을 놓아야 할 곳을 발견하게 되면 정확하고 민첩하게 언어의 침(鍼)을 찔러 넣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안상수의 신념의 정치로서 주름진 역사에 생기를 펴서 투입시키는 것이다.
♣ 10. 맺는 말
어둠을 밝혀주는 횃불과 같은 사랑의 문체들로 따뜻하게 기록된 ‘안검사의 일기’에 나타나는 안상수의 문학성은 그가 고민하며 고통의 강을 건너는 삶의 여정 속에서 발현되는 뜨거운 인류애에 대한 추구와 어떤 압력과 회유에도 굽히지 않는 끈질긴 신념의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옹고집과 같은 것이다. 그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향수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죽음의 상황을 벗어나던 가족 간의 뜨거운 사랑에 그 원천이 있다.
그 가족의 그러한 사랑은 마산의, 그가 다니던 마산고등학교의 황금 같은 풍수지리적 풍경, 즉 무학산(舞鶴山)의 깨끗한 물과 원무(圓舞)를 그리는 청학(靑鶴)의 넓은 날개와 같은 여유로움의 유영(游泳)에 의해 그의 삶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엮여지게 되고 그러한 어릴 적 배경은 그에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을 품게 해준다. 그것이 그가 검사로서 시대의 아픔을 진단할 때 역사의 진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따뜻한 인간애를 발산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책으로 엮여진 “안검사의 일기”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무한한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과 이성의 아름다운 추억에 의한 상상력을 지배하며 세상을 부드럽게 묘사할 수 있는 그의 문장력과 감성과 감각적인 임기응변의 지혜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그의 언어들, 특히 시적인 감성의 축으로 돌리고 있는 언어들은 멍든 시간의 유기체인 역사의 한반도에 대한 치료의 행위로서의 침(鍼), 한 마디로 언어의 침(鍼)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사실은 “안검사의 일기”에서 나타나는 긴장된 사건의 혈(穴)자리에 찔러놓은 감성의 침(鍼), 그 언어(言語)들과 시어(詩語)들의 효능에 의해 한반도의 역사가 ‘맑고 바르고 정의롭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역사적 진실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어릴 적 기억의 창고에 축적되어 있는 인류애의 에너지, 그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이 신념(信念)의 정치에 대한 생명력(生命力)으로 작용하여 그의 삶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서 그 생명력 있는 에너지의 중심은 역시 ‘어머니의 사랑’으로 여겨지며, 또한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생각되어진다.
안상수의 검사시절, 혹은 국회의원 시절의 감각적이고 문학적인 언어 발산의 행위, 그것은 기진맥진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 적절한 삶의 개척의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안상수는 민족의 아픔으로 물드는 어두운 골목에 횃불을 드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둠 속으로 빛은 치열하고 치밀하고 완전하게 침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안검사는 그 빛의 침투성을 활용하여 그 빛의 기능을 담당시킨 힘찬 언어의 화살들을 어둠의 세계에 발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치밀하고 문학적인 언어 발산의 행위는 어둠의 형상에 물 오른 빛의 침을 놓는 것이다. 암울한 시간으로 마음 조이는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침을 놓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행위, 암울한 역사의 혈(穴)자리에 언어(言語)의 침(鍼)들을 놓는 언어학(言語學)의 묘법(妙法)의 표출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살아나는 것이다.
누가 안상수의 이 문학여정의 결과에 대해서 칼을 댈 수 있겠는가. 그는 그만큼 이 역사와 한민족의 인류애에 대한 서정에 접근하여 언어의 도구를 가지고 ‘언어의 직공’(김지찬 박사의 저서 ‘언어의 직공이 되라’ 참조)이 되어 한겨레 사랑에 목숨을 걸었었기에, “안검사의 일기”에 대해서 그의 숭고한 인품에 고개 숙여지듯이, 아무도 안검사의 언어에 대해 반발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언어가 이미 한민족 정신의 튼튼한 맥이 되어 살아있는 역사의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상수의 문학은 한 마디로 병들어 있는 한반도의 역사적 수맥과 지맥의 혈(穴)자리에 ‘맑고 바르고 정의로운’ 꿈을 꾸는 대나무의 대침(大鍼)을 놓는 행위의 발산이다. 그것은 대나무처럼 강직하고 곧은 속성을 닮은 안상수의 불굴의 신념이 만들어 내는 걸작품이다. 꼿꼿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자라는 대나무가 휘어질 줄 알듯이 자신도 부드럽게 진실 앞에서는 휘어질 줄 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여러 가지 문학적 표현 방법들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그의 정서가 박혀있는 문학적 재료는 마치 대나무 침을 찔러 환자들의 환부를 고쳐 전신을 회복시키듯이 청정한 대나무 잎처럼, 맑고 깨끗한 대나무의 표상처럼, 우리의 슬픈 마음 한 쪽을 도려내는 대쪽 같은 무기가 되는 것이다.
“안검사의 일기”는 그 자체가 단순한 일기 차원이나 논픽션의 한계에서 논의되길 거부한다. 그것은 “안검사의 일기”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친밀한 유기성과 메시지 전달을 위한 의도적인 입력 프로그램에 의해서 문학의 다양한 형태를 침투시켜 특유한 알레고리적 구성력으로 치밀하게 형성된 기록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대쪽 같은 안상수 국회의원(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명예 법학박사)의 “안검사의 일기”는 당대의 뜨거운 역사에 대한 꿋꿋하고 냉철한 판단과 따뜻한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그려지고 있는 현실(現實)적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역사 기록으로서의 사료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의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능숙한 필력과 문학성으로 사건과 시, 사건과 수필, 사건과 안상수 국회의원 자신의 개인생활, 사건과 한민족의 정서 등을 접목하여 고정관념의 틀을 뛰어넘은 문학적 행위로서의 문학사적 가치로서도 중요한 창작품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 안상수 국회의원 약력
경남 마산 출생, 마산고, 서울대 법대졸업
사법고시 합격, 전주, 대구, 마산, 서울, 춘천 등의 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
서울지검 재직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힌 후 스스로 검사직 사임
계명대학교에서 형법을 교수하고
주요 일간지와 TV를 통한 논설이나 칼럼, 토론 등의 활동(‘합리적 비판자’로 알려짐)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공보이사(대변인), 경향신문 객원 논설위원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당직변호사제도 창설 (3천여명 무료접견 시행)
서울지방변호사회 외국인 노동자 법률상담소 창설, 상담소장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입법위원,
한국유권자운동연합 발기인 공동대표
15ㆍ16ㆍ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부총무, 대변인, 총재특별보좌역, 인권위원장, 공천심사위원장, 대표특보단장
국회 법사위, 재경위, 행자위, 교육위, 운영위, 건교위, 예결위
장애인ㆍ남북관계발전ㆍ정치개혁 특별위원회 위원, 미래전략 특별위원회 위원장
국회 인사청문 특별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헌법재판소장, 대법관)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옷로비의혹사건,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 한빛은행대출관련의혹사건)
저서 “안검사의 일기”(박종철 사건 수사검사의 일기) 집필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국가정치부분 율곡대상 수상
도서출판 시사랑에서 ‘횃불문학상’ 논픽션 부문 ‘대상’ 수상
(現) 국회의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現) 한-인도네시아 의원친선협회 회장, 극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창조문학신문사는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역량 있는 문인들을 배출하며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sisar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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