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들은 “고달픈 현실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선인들의 지혜와 같은 작품들로서 세태를 풍자하거나 풍요로운 가을과 이별의 계절에 대한 단상이 단풍처럼 물들어 있는 상념들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 日曜日 / 천천히
아무 할 일도 없다.
할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사타구니 안쪽살집이 파르르 떨릴 만큼
오르가즘이 솟구치는 희열인지 몰랐다.
저만치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가락들을 하나씩 세어본다.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더듬거린다.
리모컨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빛의 색깔이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이 순간, 하나라도 내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 할 일도 없는데
바람은 덤불속에 숨어있던 오랑캐처럼 불어와
계절을 가늠할 수는 없다.
창밖 하늘가엔 꽃 떨어진 연잎들이 자궁부터 시들어가고
연이어 가을꽃들이 우박처럼 피어대건만
침대 말미에 놓인 발가락은 한 방울도 射精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여자가 웃으며 다가왔지만
가을 들판 끝, 팔 벌린 허수아비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까닭이 不姙의 그 까닭인지?
오늘쯤은, 무엇이든 내 것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어젯밤 마지막 잔을 털어 넣을 때만해도
무언가 힘주어 결심한 것이 있었는데
오늘아침, 그게 무언지 하나도 모르겠다.
분명한건, 내일이면 또다시
위태로운 둥지 속에서 검붉은 혀 남실대는
어린 새들의 겹 주둥이 속에
꿈틀대는 벌레들을 찢어 넣어야 할 것이다.
참새의 살찐 소리에 놀라 소스라치는 계절,
오늘만이라도
무엇이든 내 것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자유의 햇발 같은 언어로 유배되는 싱싱한 기억상실증>
먼저 '日曜日'이라는 시어에는 해가 둘이 보인다. 왼쪽과 오른쪽의 창틈에서 햇빛이 드는 오후 한낮 시인은 사유의 바다에 오르가즘으로 번지는 벌레들을 찢어낼 궁리를 한다.
이번 2006년 추석은 유달리도 창틈(日)이 많다. 임경구 시인은 추석 연휴가 마치 방학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꽉 조여진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느슨해져버린 햇발의 유배지에서 위태로운 사유의 공간을 즐긴다는 건 그만큼 스릴 있는 것이다.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으로 유배된 이 현실, 주위는 시끄럽지만 우리의 사고는 조용하다.
"연잎들이 자궁부터 시들어가고"라고 표현하면서 오히려 싱싱한 자유의 날개를 추구한다. 자유의 날개의 추구가 썩어가는 것들에 대한 회상이다. 왜냐하면 '나'의 자유는 '내' 안에서 싱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의 관심 밖으로 버려진 가을의 사유는 회색빛 여운의 그리움 같은 것이다.
"바람은 덤불속에 숨어있던 오랑캐처럼 불어와" 시인의 마음을 깨운다. 어떤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는가. 그저 그렇게 햇빛 드는 창밑에서 발가락 리머컨을 까딱거리며 지난 밤 쐬주 생각 한 잔 가득히 부어보는 것이다.
술탄 해의 발바닥과 혓바닥이 벌겋게 달아 오를 때까지 오늘 이 막사발 같은 시간의 파편들이 쏟아지고 '나'는 내일 아침 또 오늘의 결심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할 것이다. 내일이면 또 다시 싱싱한 자유의 햇발 같은 언어로 아침은 일어서기 때문이다.
▣ 누가! 저 고요한 새벽에 얼룩을 묻혔는가? / 나무늘보 박민철
타석으로 축조된 생선 대가리가
입을 쩍 벌리고 서있다
아스팔트위에 쓰러진 민심은
아이 조각난 휴지들이고
저벅저벅 달려오는 쏜살같은 놈은
대처(大處), 한끼를 처먹은 놈이다
미쳐진 빈혈에게
내밀어 주는 따뜻한 손,
소금기 하나 없는 김치쪼가리는
그것도 아침이라며 쩔쩔맨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난해성으로 인해 시적 긴장미가 상승되는 시>
세태 풍자시이다. 시인이 보는 서민들의 한쪽을 그리고 있다. 약간은 난해한 구절들이 시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 난해성으로 인해 이 작품은 시적 긴장미가 상승되고 있다. 민심과 ‘한끼를 처먹은 놈’ 사이의 줄다리기가 ‘소금기 하나 없는 김치쪼가리’와 ‘입을 쩍 벌린 생선 대가리’라는 소재들에 의해 구조적 긴장감을 조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빈혈’은 희망이 있다. ‘따뜻한 손’이라는 암행어사를 두고 있어 이 시의 결말은 독자의 소망대로 풀릴 것 같다.
▣ 영혼 그 가벼움에 대한 우울 / 레르
태양이 지구를 삼키려 했던
빨간 혓바닥으로
저 미친산 중턱에 걸린
구름들을 핥을 때
흔들 의자에 앉은
노파 바느질이 빨라진다.
공포로 먹고 사는 귀신들은
회오리에 날아가는 비닐처럼
가볍게 무덤에서 튀어 나오고
한쪽 눈을 인간에게 팔아버린
개 한마리가 꼬리를 질질끌며
두개골로 걸어온다.
차선처럼 그려지는 피가
용암처럼 끓으며 개 뒤를 잇고
던진돌에 머리가 터진 아이가
내 옷을 입고 웃고 있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공포의 심장부는 오히려 편안한 공간인 것>
시인이 핏빛 언어를 쏟아붓는 것은 그 핏빛 언어를 저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려움의 대상을 커버하기 위해 그 두려움의 대상을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면역체계의 매커니즘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존재 안에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반응의 형태이다.
그래서 시인이 구체화시키는 절망의 언어는 그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어의 망태기에 귀신들도 잡아다 넣는다. 구름도 잡아넣고 근심에 빠진 태양도 건져 놓는다. 그러면서 그러한 소재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재조합되고 재창출되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전체적인 유기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시인의 심상을 그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상력은 창조의 원천이다. 상상하지 않으면 작품이 탄생하지 못한다. 아무리 위대한 논픽션의 상황전개라 할지라도 그 작품 전체를 상상력이 지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섬뜩한 상상력의 세계를 연출하면서 그 섬뜩한 공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피하는 것과 지배하는 것은 달라서 피하는 것은 소멸의 이미지이며 지배하는 것은 창조적이며 환경보존의 차원의 일이다. 그러한 특성을 갖춘 인간이 우주의 지배자라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다.
"태양이 지구를 삼키려" 한다는 것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공포를 먹고 사는 귀신들"이라 표현하는 데서 공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귀신의 나라가 된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누군가 말했다.
작가는 드디어 자기 자신이 사건의 현장에 빠져버린다. "차선처럼 그려지는 피가 용암처럼 끓으며 개 뒤를 잇고 던진 돌에 머리가 터진 아이가 내 옷을 입고 웃고 있다." '머리가 터진 아이가' '내 옷을 입고 웃고 있다'며 작가는 이미 머리 터진 아이 되어 옷을 입고 웃고 있게 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을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공포를 잡으려면 공포의 늪에 빠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태풍의 심장부는 고요하듯이 공포의 심장부는 오히려 편안한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항상 기뻐함'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한 상황이 돌출되었을 때, 인간은 슬픔에서 기쁨을, 기쁨에서 기쁨을 선택할 권리가 신으로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다. 슬프면 슬픔의 심장부에 가보라, 거기에는 기쁨이 흰 이빨 드러내며 웃고 있을 것이다.
▣ 눈을 크게 / 이정선
참과 거짓이 뒤엉킨 세상
원과 한으로 가득찬
혼돈의 형국
희망잃은 나그네
주체가 개체個體로 흩어지니
흐느끼며 몸부림치는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망의 날개 날 깨운다
꿈은
꿈꾸는자에게 있어
내가 나를 허물고
저 바닥 끝으로
던져 놓아
한줄기 빛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올라 이글거리 듯
오직
참 사람만이 살수 있는
색다른 의미의 삶
우주의 주인되어
신명과 하나되는 세상
천상의 세계로
눈을 크게 떠 보자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내가 나를 허물고 존재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항상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두고 근시안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다고 한다.
"내가 나를 허물고 / 저 바닥 끝으로 / 던져 놓아"야만이 참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작가는 기술하고 있다. 내가 나를 허물지 않고는 거대한 세계 내에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전체의 존재에서 이탈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에는 많은 별들이 있고 그 중의 어떤 별들은 궤도를 벗어나 자신과 다른 별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에 지구에 거대한 별이 부딪쳐 온다면 지구의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작가가 고백하듯 "내가 나를 허물고 존재"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조직에서도, 삶의 여정 속에서도 이러한 조직적인 희생이 없이 '나'를 너무 주장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 시는 그래서 나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나를 거부함으로 인해 '나'라는 개체는 전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의 한 덩어리가 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체의 한 덩어리인 나, 이것이 바로 우주의 비밀인 것이다.
그러한 거대한 시각이 우리의 정신 속에서 눈 뜬다면 그러한 우주의 질서가 나와 함께 융합된다면 그때 바로 하늘나라(='천상의 세계')는 우리 안에 침투되어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정확한 진리에의 눈뜸의 행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듯이 우리의 죄성의 눈이 맑아지고 밝아져서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튼튼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새참 / 청아
꼬르륵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주위를 휘 휙 둘러보았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의식한 탓
초침소리가 가늘게 들려오고
시선은 그곳에 향하고 있다.
아직은 이른데
주책스런 배 골이
새참 먹거리가 아른거린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꼬르륵' 소리로 방황하는 인류의 결핍을 묘사>
항상 인류의 관심은 먹거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가 왕이 되면 먹을 것 걱정 않고 배두드리며 행복하게 살 것으로 기대했었던 것 같다. 좀 저속한 표현 같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따지고 보면 먹을 것 때문에 인류는 전쟁을 하고 죄를 짓고 하는 것 같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은 극히 원초적인 생물적 본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아직은 이른데 / 주책스런 배 골이 / 새참 먹거리가 아른거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식적으로는 아직 음식을 원하지 않는데 배에서 먼저 음식을 보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은 극히 본능적인 것이다.
배고프다는 것, 그것은 결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엇이 부족하다는 전제가 있은 뒤에 나오는 말일 것이다. 결핍, 이것은 우리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행동반경과 성격과 결과가 차이가 나겠지만 인간은 결핍을 느낄 때 스스로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것처럼 그 결핍을 채우는 데는 원초적으로 자연스러운 자연의 풍요의 질서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언가의 결핍의 보완을 위해서 인간의 문화와 예술과 사회 활동의 모든 면이 이루어지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어젯밤에 무척이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무엇의 결핍이 그렇게 밤새도록 꼬르륵 거리게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린 모두 창작에 결핍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쓰고 또 쓰지 않으면 언제 누구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또 들릴지 모른다.
이 시의 작가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 '배'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전체적인 면을 가리킨다. '배'라는 것이 인간의 신체의 일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라는 한 신체의 일부분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면에서 다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꼬르륵 거리게 되어있다. 결국 배고픔이 충족되지 못하면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인간은 졸도하거나 사망하게 되고 말게 될 것이다.
이로서 단순한 시적 발상 같지만 작가는 이 시 속에서 인간 전체의 고독을 내포하고 있다. 항상 배고픈 인류! 항상 뭔가에 결핍되어 진리를 찾아가는 인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주적 진리와 인간의 생리적 구조가 맞닿아 있게 하는 것이다.
▣ 기찻길은 설 잠을 잔다 / 이소천
시골 가는 길에 기차를 탄다
바람도 구름도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한다
해님은 세수했는지 방긋 웃고
모두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는데
기찻길만은 아직도 꿈나라
나를 태운 기차가 지나가고
이제야 기찻길은 눈을 깜박깜박
기적소리가 메아리칠 때
기찻길은 또 스르르 잠이 든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기찻길이 설 잠을 자는 이유>
기찻길은 각목을 머리 밑에 놓고 항상 잠을 잔다. 기차가 지나가고 각목들이 흔들려야 조금 잠에서 깨어난다. 하루 빨리 기찻길도 북쪽으로 향하여 수많은 세월 잠자던 기지개를 깨우는 아침의 기적소리 한 번 울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기찻길은 단잠도 자고 살도 찔 것이다.
모두 분주히 움직이는데 “기찻길만은 아직도 꿈나라”라고 표현하는 시인의 가슴에서 진한 앙금을 발견할 수 있다. 항상 기찻길이 잠자는 이미지로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기찻길은 번영의 힘찬 혈맥이 되어 힘차게 살아있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녹슨 기찻길이 이제 튼튼한 민족의 힘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야단 났네 / 임경구
아빠의 회초리 앞 엄마의 미소 작전
눈싸움 팽팽하면 종아린 후들후들
쌀쌀한 갈바람 속에 벌거벗고 땀난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미소'는 고전압선으로 긴장된 시조의 혈에 장착된 휴즈>
하하하, 필자도 경험한 바이다. 아, 이 극한 정형의 현이 긴장하고 있다. "쌀쌀한 갈바람 속에 벌거벗고 땀나고" 있다. 완강한 아빠의 회초리와 엄마의 구출작전은 마치 태풍전야의 고요함 속의 불꽃튀는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고전압선으로 긴장된 시조의 혈에 휴즈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시조에는 회초리로 돌아올 시간의 전깃줄에 '미소'라는 휴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조의 마지막을 보지 않아도 엄마의 미소작전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원래 남자는 여자의 미소작전에 약한 법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여성 상위 현상의 시대야 더 말 할 것이 없다. 더 말하면 매 맞는 남자, 혹은 쫓겨난 남자, 또는 아침밥 못 먹는 혹은 깊은 저녁밥 못 먹는 남자로 변신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조의 작가는 무던히도 쫓겨나지 않기 위해 휴즈를 장착하며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 향긋한 이별 / 청무
새벽 어스름
가랑잎들 틈새
풍경소리가 상념에 빠져든 나를 깨운다
한 여름내
꿈속 길 찾지 못해
그 꿈속에서 헤매다
바짝 하니 말라버린 가슴
활활 태워버리려 깊은 산중으로 찾아든 밤
달빛을 지운 바람 탓에
비가 내렸다
밤새
동자승 하품소리
한 여름내
무성해진 잡풀 더미
불목하니 잰 발걸음 소리
훌쩍 키를 넘긴 잡풀 더미 속
보시락 보시락 도란거리는 이별
등 굽은 늙은 보살님 바지런한 예불소리
풍경소리에
길 떠나는 향긋한 이별이다
까치가
솟구쳐오르는 햇살에 울어대고
속세를 등져봐도
그 또한 한 세상이로다
▣ 시감상 : 창조문학신문 제공
<향긋한 이별은 피동적인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우리는 언제나 이별의 연속이다. 사실, 새로운 만남 혹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이별'이란 희생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의 욕심은 바로 그 '이별'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행복과 기쁨과 모든 성공의 부산물들은 생물, 무생물들에 대한 살생의 광란의 질주를 벗삼아 집중하지 않고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별'을 강요하지 않고 '향긋한 이별'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앞에 불가능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포기해야 할까.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인간 정신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 불가능에 도전하여 승리하는 것, 혹은 패배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그것이 한 인간의 승리와 패배를 좌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우리 인간의 숭고한 정신은 도전하는 것만이 전부이다.
한계상황의 인간이 무한궤도의 우주의 질서에 도전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자체가 영원한 승리,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시에서의 고백대로 능동적이 아닌 피동적으로 "풍경소리에 길 떠나는" "향긋한 이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자가 능동적이라는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구도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고 피동적인 것은 상대가 무생물일지라도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제물 위에서는 증오와 번뇌의 눈동자가 이글거리지 않고 향긋한 희생의 즐거움, 바로 "향긋한 이별"이 꽃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 우주의 질서는 내가 도전하며 희생되어 줄 때 사랑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것이다. 내 이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우주가 바로 나인 것과 마찬가지 인 것이다.
우주의 내밀한 질서는 바로 동자승의 하품소리에 실려오는 바람과 같은 어떤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깊은 산중에서 자연과 일치되어 체험하게 되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며 창조주의 꿈인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꿈의 엘레지로서 고통받는 이 땅에서의 우리에게 사랑과 희생과 아름다운 향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청무님의 깔끔한 시상이 우리의 부패된 시간을 씻어주고 있음을 본다.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창조문학신문사는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역량 있는 문인들을 배출하며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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