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함성, ‘부산항일학생의거’ 어린이대공원내 부산학생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려
이날 기념식에서는 지난 11월 17일 제67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독립운동 포상대상자 154분 중 부산지역 포상자 두 분(권차응(애족장), 조익준(애족장))에 대한 포상전수식도 거행될 예정이다.
또한 오후 1시 30분 부산광역시청 국제회의실에서는 광복 61주년 기념 전국학술세미나 『부산항일독립운동가의 재조명』이 열린다. 부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의 흐름과 백산안희제 선생, 박재혁의사, 박차정의사와 같은 부산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사항과 부산항일학생의거의 의의 등의 주제로 발표 및 토론을 거치게 될 이번 세미나는 부산지역 항일운동의 이해를 높이는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사건)은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인 동래중학(현 동래고등학교)이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더해 동래중학과 부산 제2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 학생들의 항의는 번번이 묵살당하여 대회장에는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하오 5시경, 폐회식에서 노다이 심판장(乃台兼治, 육군대좌 ; 부산병참기지사령관)의 강평에 이어 일본인 학교가 우승교로 발표되자, 판정의 부당함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리하여 6시경, 양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 1,000여 명이 시가행진과 노다이 거소 습격을 결의하고 학생들은 공설운동장을 출발하여 당시 금지곡이던 「아리랑」, 「도라지」등의 노래를 고창하면서보수동 네거리에 이르자 대열을 나누어 대청동과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시가행진은 계속되었다.
7시경, 4, 5학년생 400여 명이 재집결하여 영주동 노다이 거소에 도착하니,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투석으로 외등과 노다이 거소의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밤 10시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검거하였다.
11월 24일, 양교는 일본경찰의 취조장이 되었고, 매일 수십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나 학생들은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때 일경과 헌병들에 의해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의 투옥과 징계(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가 이어졌다. 특히, 의거에 가담하였던 김선갑 · 김명수 두 분은 출옥 2주일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공설운동장에서 촉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최대규모의 항일학생운동으로, 발생 당시 일제의 보도관제로 인하여 다른 지방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일제의 삼엄한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보도가 되었더라면 광주항일학생운동 못지않게 전국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항일의거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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