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 김 신조 청와대 침투사건 다룬 소설 당선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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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07-01-01 19:15
서울--(뉴스와이어)--창조문학신문은 <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 소설부문(B틀)의 당선작을 발표했다.

그런데 창조문학신문의 그 소설부문(B틀)에 당선된 작품은 1968년 간첩, 김 신조 청와대 침투사건과 그 유족의 이야기를 유골(遺骨)의 아픔으로 다룬 것으로서 2007년 신춘문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작품은 조 용균이 쓴 「친구」이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다룬 이 단편 「친구」는 마치 자신의 친구와 자신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하는 것처럼 논픽션적인 전개로 확실성을 주고 있기에 감동이 깊다.”며 문학평론가 박인과는 작품을 소개한다.

이번 신춘문예에 당선된 조 용균의 작품 「친구」와 당선소감, 심사평 등은 다음과 같다.
(참조 : www.sisarang.co.kr)

▣ 소설부문 조 용균 : 당선작 「친구」

프로필 : 서울産, 고려대 졸업, 현 강사. 서울시 서초구 거주.


― ♣ 「친구」 / 조 용균의 단편소설(B틀).

참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기억력이다. 특히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나의 생각보다도 쉽게 잊혀지곤 해서 스스로 놀랄 때가 많았다. 어제 저녁 전화만 해도 그랬다. 어젯밤 나는 대학원 수업을 마친 후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고3학생에게 과외지도를 하고 있었다. ‘엔트로피와 우주’에 관한 언어영역 수능 기출문제를 풀어주고 있었다.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기에 끝날 시간만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수업이 거의 끝날 무렵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 액정화면을 보니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일단 받아 보았다. 그런데 50대 후반 정도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찾고 있었다.

“저, 조 성민이 맞는가?”

일단 전데요 라고 대답했지만, 난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친척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정도 연배의 아주머니가 내게 전화할 일은 없기 때문에.

“우리 형석이 수첩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다 전화를 걸어보고 있는데 ……,”

그 때 내가 그 이름을 듣고도 왜 당장 기억이 안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지금 전화 받는 사람이 자네가 처음이네, 우리 형석이가……,”

전화기 저 편에서는 형석의 사망을 알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형석의 사망 소식을 들으니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던 형석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움찔하니 고개를 들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형석이는 내가 고시 공부하던 시절에 함께 소위 ‘스터디’를 하던 같은 과 동기였다. 지금 나는 고시를 접고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바꿨지만, 그가 계속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몇 년 전 까진 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몇 년 전까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그때까지는 그와 연락을 취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의 병이 심각해져서 내가 대하기 부담스러워지자 내 스스로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렸었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당시엔 잘 몰랐다. 그냥 정신이 조금 이상한가보다 했다. 학교에서 얼핏 지나가다가 만나서 직접 들은 이야기도 그렇고 다른 지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특히 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의 강의실에서 쉬는 시간이라고 넋 놓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승철의 희야라는 노래를 마구 절규하듯 불렀는데, 동기들은 처음엔 기절할 듯이 놀랐다가 나중에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나중엔 그냥 놔두고 우리끼리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고 두꺼운 편이어서 절대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노래로 강의실이 온통 점령당할 때면 나가버리는 친구들도 많았다.

간혹 가다가 성격이 좀 급한 녀석이 그에게 화를 내면 그는 화내지도 않고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또 유난히 많이 먹고 유난히 잠을 안 자는 편이었다. 그리고 과에서 엠티를 갔을 때는 내내 안 자다가 남들 다 잠든 새벽에 느닷없이 일어나서 악마가 자기를 삼키려 한다는 둥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악마소리가 나왔으니 말인데, 악마 소리를 할 때면 사실 좀 무서운 데가 있었다. 다들 얼큰하게 술 한 잔 하다가 기분이 좋아지고 할 무렵에, 느닷없이 낮은 목소리로 악마여 하고 중얼거리는 그를 오면 상당히 오싹해지는 데가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악마여 나를 데려가라, 고 외우고 있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게 조증과 울증이 교차하는 조울증에서 울증이 도진 상황이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었다. 그저 무섭고 오싹하기만 했고 약간 미쳤나보다 했다.

그는 기분 좋을 때면 정말 목소리가 굉장히 크고 말의 숫자가 많아진다. 그리고 이 얘기 했다가 저 얘기 했다가 화제의 전환이 너무 빨라서 듣는 사람의 기분을 굉장히 묘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낙천적이고 자만심이 강해서 어이없을 때가 많았다. 그의 좋은 기분에 휘말려서 내가 고생한 적은 많지만 대표적인 사건은 롯데호텔 스카이라운지 사건이다.
어느 날 늦은 저녁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내게 롯데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전화를 한거다. 늦은 시간에 다짜고짜 나오라고 나를 불러내서는 가보았다.
가 보니까 무슨 극장식 주점이었다. 무대에서 가수가 노래하고 테이블에선 손님들이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듣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는 가수가 노래하는데 맨 앞에 앉아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어찌나 크게 부르는지 기타 치며 노래하는 강 은철이라는 가수가 흘낏거리며 눈치마저 보는데, 나는 그가 당황해서 삼포로 가는 길의 가사를 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것으로 끝나면 괜찮을 텐데, 노래 끝나고 나서 여자들이 네 명이나 있는 다른 테이블에 가서 희희낙락하는 것이었다. 소위 헌팅이구나 싶어서 나는 당장 자리를 피하고 도망가려고 했다. 왜냐면 급히 이루어지는 만남 같은 상황을 나는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렁찬 “성민아!” 소리에 난 얼어붙고 말았다. 이 사람 많은 데서 그렇게 크게 내 이름을 부르다니. 결국 난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생면부지의 여자들과 수다를 떠는 그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들의 수다가 끝난 뒤엔 모든 술값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냈고, 찻집으로 또 옮겨서 다시 얌전히 찻값을 내가 치렀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그를 제지하지 않았냐고? 제지했다. 아니 제지하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붕 떠서 일을 계속 일으키는 그를 막기란 어려웠다. 어쨌든 기분이 너무 고조된 조증상태에서 사람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몇 푼의 돈을 치르고 난 뒤 내가 그의 호출에 더 이상 응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특히 그와 전화할 때 커다란 음악소리가 같이 들려오면 술집이구나 하고 끊어버렸음도 물론이다.

그래도 그는 동문수학한 같은 과 동기인데다가 나름대로 내가 신경도 많이 써준 각별한 친구에 속했다. 함께 같은 고시반에서 공부할 당시만 해도 연락을 일부러 끊을 정도는 아니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주로 내가 잘 챙겨주는 편이었다.

한 번은 나를 보고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가 보았다. 그의 입에서 대뜸 나온 소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영문을 모르는가 했는데, 길에서 마주친 어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가 학교 정문까지 따라오면서 고시공부를 그만두라고 종용했다는 거였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영문을 모르겠다고 할 법 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럴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어서 젊은 사람 몇 명이 독일어로 이야기하면서 자기를 줄줄 따라왔다는 대목에 이르자 나의 인내심은 모두 증발해버려서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그 독일어의 내용이 바로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살짝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환청 내지는 환각이구나. 드디어 이 녀석이 공부하다가 정신이 완전히 이상해졌구나 싶었다. 계속 ‘영문을 모르겠네.’를 반복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마음이 아주 답답해졌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수염은 안 깎아서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나 있었고, 눈은 잠을 적게 잤는지 심하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눈이 충혈된 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울증 환자들은 잠을 많이 안 자도 괜찮다고 우긴다고 한다. 3시간 정도만 자도 충분하다고 강변하고 그것을 철썩 같이 믿는다고 한다. 그리고 굉장히 원대한 계획을 세우느라고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안 그래도 모든 면에서 내게 기대기만 하는 그에게 진저리가 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나도 사법시험에 불합격을 몇 번 하다 보니 점점 먹어가는 나이와, 주변의 기대 등으로 마음이 시커먼 먹구름 모양으로 불안하게 부풀고 있던 차에, 이 친구의 이런 모습은 상당히 내게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시험을 포기하고 다니던 대학의 고시반에 나가지 않게 되면서 그 친구와의 연락을 자연스럽게, 그러나 다분히 의도적으로 끊어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친구는 친구라고 여기지 않는 이기적인 생각을 내가 갖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런데 연락을 끊어버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새벽 두시에 빈소로 가보니 어머니랑 이모부라는 분이 단 둘이 지키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연락이 안 되어서 아무도 오지 않았단다. 전화해도 결번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긴 몇 년 이상을 친구들과 연락도 안하고 살다보면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이사를 갔는지 어떤지를 알 방법이 당연히 없을 터였다.
빈소의 분위기는 슬프다기보다는 조용히 가라앉은 그런 분위기였다. 슬퍼하기보단 그의 죽음이 최소한의 슬픔을 남겨둔 그런 분위기였다. 4년, 5년 이상의 그의 마음의 병이 가족에게 지워준 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무거운 짐을 덜었다는 강한 안도감이 상대적으로 슬픔을 밀어둔 분위기라고나 할까.
어머니가 먼저 날 알아보면서 형석이가 실족했다고 하면서 우신다. 일단 안아드리고 위로를 해드렸다. 형석이네는 수서동의 영세민 임대아파트에서 살았다.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 어머니를 뵌 것이 한 5년 전인데 거의 10년 만에 뵈는 것처럼 많이 늙으셨다. 이모부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살던 집 아파트 난간에서 실족했다고 하지만, 지난 저녁에 사망했다는데 오늘 아침에 화장한다는 걸 보면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올 사람도 없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라고 하지만 죽음의 형태가 남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명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빨리 덮어두려는 인상을 받았다.

모든 분위기를 종합해서 보면 이건 자살이었다. 시험의 실패와 조울증이라는 병이 그를 죽음으로 내 몰은 것이 사실상 분명했다.

벽제 화장터로 형석이를 넣은 관과 함께 가니 해가 완전히 중천에 떠 있었다. 이젠 운구를 해야 되는데, 나하고 형석의 이모부외엔 운구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둘이서는 형석이를 들 수가 없었다. 관 무게까지 해서 100킬로그램이 훨씬 넘었으니. 그래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화장터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관 한쪽 편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어휴, 덩치가 꽤 큰가보네.”

만만치 않은 무게에 인부가 투덜거렸다. 사실 나도 그 무게에 깜짝 놀랐었다. 단순한 중량에도 놀랐고, 형석의 구체적인 존재감에도 놀랐다. 마치 형석이 자기는 아직 살아있노라고, 내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건장한 애입니다.”

얼결에 그런 말을 했다.
하긴 그 녀석은 체격이 꽤 당당했다. 엉덩이도 예쁘게 빠지다 못해 오리궁둥이 같았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관을 손으로 들고서 살짝 웃을 뻔 했다.
고시공부를 안 했다면 탤런트를 했을 거라고 흰 소리를 자주 하던 형석이가 생각이 났다.
이윽고 불가마 속으로 형석이가 집어넣어졌다. 불가마는 서랍식으로 드르륵하고 받침대를 뺐다가 형석이를 올려놓고 다시 드르륵 하고 형석이를 받아들였다.
얼핏 어림짐작으로 눈으로 보기에도 엄청난 온도의 불길이 형석이를 휩싸고 삼켰다.
잠시 후 다 태운 그를 꺼내니 하얀 재만 남았다. 하얀 재가 누워있는 사람의 형상대로 서랍 같은 긴 대에 조용히 누워 있다. 그것을 부서지면 부서지는 대로 뭉쳐진 건 뭉쳐진 대로 다 상자에다가 모아 담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재는 그냥 청소할 때 쓰는 빗자루로 담아서 아무데나 버린다. 어이없었지만 이것이 화장터 관례일지도 모르니, 관례 같은 것을 사전에 알 리가 없는 어리숙한 나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망자의 소지품을 챙겨서 따로 버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 가보니 모든 망자의 유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유족들이 여기에 와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는 듯 했다. 형석의 어머니는 내게 그가 가지고 다니던 무겁고 큰 가방을 주려고 했다. 나는 그런 물건을 갖고 다니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거절했다. 또 망자의 물건을 쉽게 소지하고 다니기가 꺼려지기도 했지만.
하지만 어머니께서 형석이가 좋아하던 친구한테 꼭 주고 싶다고 하시는 데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된 권유에 그가 차던 손목시계만은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들였다. 손목시계는 줄이 헝겊으로 된 것이어서 그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참 묘했다.
모든 게 다 재로 변한 친구가 이젠 냄새만 남았구나 싶었다. 그 냄새는 말할 수 없이 이상한 냄새였다. 존재하지 않는 친구의 남은 냄새치고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더욱 이상했다.
그 때 난 그를 마지막 만나던 날이 생각이 났다. 이 안 좋은 냄새가 내 후각을 뒤집어 놓더니 이젠 기억까지 들추어 내나보다.

4년 전, 그날 나는 갑작스럽게 걸려온 그의 전화에 양재역 부근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당시에도 그를 안 본지가 일 년이 넘었었기 때문에 그간 살이 엄청나게 많이 오른 그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친구가 만나자마자 자기 시계자랑을 하는 거였다. 시계자랑을 해서 시계를 들여다보려고 하니까 또 급히 화제를 시계 줄에 땀 냄새가 배어들었다며 땀 냄새로 화제를 급히 전환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는 순간에 내 코에 이미 시계줄을 들이댄 거다. 결국 나는 안 좋은 냄새를 강제로 맡고 조금 불쾌해져 있었다.
하지만 놀라고 불쾌하면서도 진저리가 났던 것은 그의 여자 친구 소개였다. 여자 친구를 소개한다기에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그는 지갑을 열어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당시 인기가 높던 이승현이라는 탤런트의 것이었다. 월간 여성 잡지류에서 오린 것 같은 사진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 친구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며 그 사진을 보았다. 친구는 대단히 진지했다.

그리고 치킨을 시켰는데, 친구는 너무 맛있게 먹었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나는 식욕이 별로 생기지가 않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같이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으면 보기 좋은 게 맞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든지, ‘난 너를 다 알고 있어’라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한다든지, 음식에 지나치게 몰두해있다든지 하는 행동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사람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쩝쩝거리면서 맛있게 먹는 녀석을 앞에 두고 나는 언제 나갈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고시를 연패하는 등 나의 불안한 처지에 스스로 함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이때부터 형석이를 이제 다시 안 볼 거라는 모진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는 먹다 말고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 조울증이 시작되었는지 아니?”

“아니, 몰라.”

그건 잘 몰랐기에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이 자기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용산시장에서 행상을 하면서 자기와 남동생 두 형제를 길러주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냐고 물어보니, 그는 덤덤하게 당신이 60년대 말에 있었던 유명한 청와대습격 사건 때 순경이셨는데,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 친구가 마음에 병이 생긴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였다고 한다.
게다가 남동생마저도 정신병이 있는 듯했다. 내가 전화해서 형을 바꿔달라고 할 때 그 둔한 말투나 기계적인 단어구사가 정신치료약을 많이 복용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이었다. 자는 동안 치료가 되게 하려고 수면제를 정신과의사들은 곧잘 처방을 한다고 한다.
나는 이 친구가 가끔 거짓말도 잘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딱 반 정도만 믿었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까지만 믿고, 사건에 관련되었다든지, 경관이었다든지 하는 것은 믿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은 간첩들이 그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미수에 그친 사건이지만, 민간인 5명 사망에 경관3명이 사상을 입은 피해가 있었다. 그의 아버님이 이렇게 큰 사건의 피해자에 속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남루한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미화해서 포장하고 싶은 그의 바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매사에 너무 자주 거짓말을 일삼는 그를 알기에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었을 뿐이다.
특히 탤런트 사진을 내게 보여준 것은 사실 그가 전에 이야기했던 무용담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가 대학교 2학년 때 자신의 용감무쌍한 활약상을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용산역 지하상가를 지나갈 때였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인적은 거의 없었고 마치 끔찍한 범죄가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음습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거의 모든 가게가 셔터가 내려가 있는데 유독 한 가게만 셔터가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이상한 소리까지 들렸다. 그래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남자 둘이서 여자를 추행하고 있었다. 그는 큰 덩치를 믿고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남자 둘이 전혀 당황하지 않는걸 보고 하는 수 없이 격투를 벌였단다. 당연히 무쇠와 같은 주먹 몇 방으로 적을 무찌르고 여자를 안심시킨 후 집까지 데려다 주었고, 열심히 만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용산역 지하상가라는 그 첫 마디를 듣자마자 이건 허풍이구나 싶었다. 탤런트가 자기 애인이라는 것과 있지도 않은 무용담을 들먹이는 것과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있지도 않은 여자 친구를 가공했다는 점에서 다른 게 없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내게는 그에게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있었다. 어쨌든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고시공부를 하느라 애쓰는 것도 안쓰럽고, 정말 경관이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버님도 안 계신 것 같고, 동생도 아프고, 또 대학 와서 그 흔한 미팅 한 번 못 해보고 여자 친구도 못 사귄 것도 보기에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고시를 준비하는 공부모임에 타 구성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넣어주었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최대한 그를 챙겨주려고 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연민의 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를 꼭 챙겨주어야겠다는 묘한 사명감도 있었고, 조울증인 그는 조증인 상태에서는 나름대로 절정의 쾌활한 성격을 발산하는데, 그럴 때는 나름대로 나의 기분을 유쾌하게 전염시키는 그런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정에는 그와 내가 잘 가던 나무 아래 벤치가 있었다. 식사 후 잠깐 쉬곤 할 때 찾던 곳인데, 봄이 되면 주변에는 철쭉꽃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탄하곤 했었다. 그가 그 곳에서 잘 암송하던 시가 있었다. 그것도 전체를 외우진 못하고, 일부만 감정을 듬뿍 넣어서 읊곤 했다.

『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땐 그게 백석 시인의 시인 줄도 몰랐고, 특별히 시적인 정황이나 담긴 의미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시를 생각해보니, 그는 이미 자신의 삶에 가해진 정신적인 압력에 대해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많지 않았나보다 싶었다. 자신의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의 절망. 내가 너무 몰랐었다.

그 때 나는 오랜만에 만난 형석이를 챙겨주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안위에 정신이 팔려 마음에 병을 가진 그를 귀찮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죽기까지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모진 친구가 되어버렸다.

군복무시절 얻은 안구건조증이라는 병으로 눈물이 거의 없는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안 나올 눈물이건만 무언가 뜨거운 것이 핑 고이는 것 같았다.

형석의 어머님이 유골이 들어 있는 상자를 가지고 오셨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내가 뿌려주기를 원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던 장소에서 뿌려달라고 형석이 유서를 썼다고 한다.
그게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어머님이 청와대 부근이라고 한다. 그리고 국가유공자증도 같이 태워서 버려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머니의 뜻이었다.

“아버님이 청와대부근에서 돌아가셨습니까?”

“68년에 돌아가셨어요.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결국 형석의 말은 사실이었나보다.

“그런데 유공자증은 왜 태우세요?”

“아무 도움이 안 되어서. 일 년에 이삼 만원 나오는 걸 갖고 뭐하라고.”

어머님의 분노가 작지만 강한 목소리에 충분히 묻어 나왔다.
청와대 부근으로 어머니와 함께 유골함을 들고 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따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려는데, 이 사람도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해서 어머님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모르신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았다.

“저기, 혹시 형석이랑 아는 사이세요?”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형석 씨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설마 그가 말했던 것이 사실인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그럼 그 용산역 지하상가에서?”

내 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녀도 같이 청와대 부근으로 갔다.
청와대 주변의 야산 한쪽이 형석이 뿌려지기 원한 곳이면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장소라는데, 야산입구에 들어서자 예상대로 경호원이 제지하였다.
사정을 이야기했는데도 ‘안 됩니다.’를 반복한다.
아무래도 억지로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어머님과 그녀가 경호원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나는 야산으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다른 경호원이 뒷덜미를 잡았다.
뿌리치고 다시 올라가려 하는데 다시 붙잡아서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 와중에 형석의 유골함이 떨어졌다. 뼛가루가 온통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나는 경호원의 턱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뼛가루를 주워 담았다. 형석이가 말한 장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경호원은 멀거니 뒤에서 보기만 하였다. 뼛가루를 뿌리는 그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 때 과외 지도하다가 보아두었던, 백석의 시의 나머지 부분이 내 마음 속 우물 깊은 데서 떠올랐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형석의 영혼이 저 세상에서나마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소설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김 신조 청와대 침투사건, 유족의 이야기를 유골(遺骨)의 아픔으로 그려”

최종심에서 정 서정 씨, 김 정란 씨, 한 계인 씨, 김 보라 씨, 조 용균 씨 등 다섯 분의 작품이 올려졌다. 모두 한결같이 탄력 있고 단단한 필력을 소유한 훈련받은 문학도들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김 신조 청와대 침투사건이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생생하고 조 용균 씨의 작품이 그 아픔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단편 「친구」를 당선작으로 밀게 되었다.

조 용균은 우선 문법적인 부분을 통과해야 하는 심사에서 문장들이 튼튼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확한 문장의 형태에 의해, 그의 문학성이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작품 속에서 느껴져 기쁨을 주었다. 문법적으로 깔끔한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긍정적인 기대치를 상승시켜 주게 되고 그가 가진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는 문법적 도구는 단어들의 새로운 어울림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독창성을 띠고 명료하고 정확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화적인 감동과 호기심을 일으켜 끝까지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가게 하는 독특한 마력 같은 것에 끌리게 하는 힘이 있으면서도 객관성을 충분히 획득하고 있었다. 플롯 자체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잔잔하게 펼쳐 보이는 작가의 소박한 필력이 선자의 마음에 끌리기 시작했다.

점점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주제에 대한 감동의 농도가 짙어져 갔고 그에 따라 나타나기 시작하는 반전의 힘도 독자들에게 생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완성도 면에서도 탄탄하다. 마무리의 부분도 안정감이 있고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중간 중간에 삽입한 두 번의 백석의 시도 무리 없이 작품과 조화를 이루며 한 층 더 심도 있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데에 일조를 한 것으로 일단은 시의 도입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 용균은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뼛가루를 뿌리며” 형석이가 고통의 산만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형석이가 “저 세상에서나마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하기를” 바라는 참된 자유에의 꿈을, 나뒹구는 유골함의 하얀 뼛가루의 구름이 파란 하늘에 흩날리는 아픔으로 엮어가고 있는 웅숭깊은 고통의 작품이다.

1968년도에 일어난 김신조 청와대 침투사건과 그 유족, 고시공부하는 사람들, 마음이 아픈 이들(정신병자로 호칭되는)을 소재로 하여 한반도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현실을 짚어내고 있는, 단편으로서의 무난한 분량과 무게의 한 편이다.

죽음에 대한 모티브로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형석에 대한 회상과 화장터, 뼛가루와 유골함, 단호하게 출입을 거절하며 만류하는 청와대 부근의 경호원 등에 관한 상황 묘사가 적절하게 연결되어 작품의 무게를 유기적으로 충전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추측과 판단이 독자들을 믿게 해버렸기 때문에 그 주인공도 모르는 사실이 반전되어 드러날 때는 극적 효과가 배가되었다. 그 이야기들에 대한 복선도 무리 없이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아버님이 자기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용산 시장에서 행상을 하면서 자기와 남동생 두 형제를 길러주셨다고 한다.”는 문장과 멀리 떨어진 문장에서 형석이가 용산역 지하상가에서 한 여자가 추행당하는 것을 구해주었다는 설정이 나중에 사실로 드러나는 효과는 어머님의 “용산시장에서의 행상”과 형석의 “용산역 지하상가”와 같이 같은 지역대에 속하도록 철저하게 묘사함으로서 사실감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도록 조 용균의 소설은 앞뒤의 사건과 묘사가 일치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욕심 내지 않고 담담하게 펼쳐내는 구성에 내밀한 힘이 느껴지는 조 용균의 소설처럼 담담하게 민족의 끓는 아픔을 정화시키는 문학적 도구로써의 승리의 방패와 창을 소유하길 빈다. 쓰고 또 써서 길이 남는 작품을 탄생시키리라 믿는다.


― ♣ 소설부문 당선소감 : 조 용균
“마음 달래주는 부드러운 죽과 같은 소설 꼭 쓰고 싶어”

군에 있을 때 후배가 제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데 소설 같은 것이 무슨 힘이 있을까요?”
힘도 힘 나름인 것.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움이 가진 힘의 존재를 저는 믿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미(美)라는 것은, 힘들고 지친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그런 면이 있다고 봅니다. 매일 마시는 커피를 담는 잔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심지어 방송광고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삶의 약자인 사람의 마음을 위무(慰撫)하는 그런 아름다움이, 보다 더 윗길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거기에 더해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장점은, 이야기 속으로 한 독자를 초대하여 이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이야기 속의 인물과 사건의 교직을 통해서 새로운 관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을 사랑합니다.

하나의 이야기 형태를 통해서 끓여내는, 마음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죽과 같은 소설, 흔하지만 귀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런 소설을 언젠가는 꼭 써내고 싶습니다. 아직 부족한 저의 글을 좋게 읽어주신 창조문학신문의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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