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 전부문 당선작 발표

서울--(뉴스와이어)--창조문학신문사(대표 박인과 www.sisarang.co.kr)는 <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 전부문 당선자들을 발표했다.

창조문학신문의 <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는 창조문학신문사에서 독특하게 개발된 A틀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와 B틀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의 두 가지의 신춘문예의 틀로 심사되었다.

A틀은 패기 있는 개척정신으로 기발한 발상과 함께 새로운 문학 세계로의 환골탈태를 꾀하고 있는 작품만을 대상으로 심사하였고, B틀은 기존의 우리 문학텃밭을 이루고 있는 한민족의 깊은 정서의 우물과 맞닿아 있는 작품들이 심사 대상이 되었다.

A틀의 당선작 선정에 대한 방법은 우리 한국문학의 새로운 패턴을 구상하는 작가들에게 알맞은 것이고, B틀의 당선작 채택에 대한 방법은 새로운 시도를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으면서도 3천년 역사의 한반도의 감성의 맥을 이어오는 민족혼이 깃든 작품을 치열하게 쓰는 작가들에게 안성맞춤이 될 것이다.

창조문학신문사에서는 애초부터 A틀과 B틀을 분리하여 A틀은 문학의 새로운 실험정신과 패기 발랄한 자유 의식에 가까운 작품들을, B틀은 한민족의 정서와 문학성의 가치 보존과 발전 쪽으로 깊이 있는 작품들을 심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 또한 모호할 수도 있다. 어차피 갈라놓아도 그 해의 응모작들이 비슷한 취향들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우리 고유한 민족적 자긍심과 문화적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는 환경적 요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문학평론가 박인과 씨는 주장한다.

그러한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 성격대로 처음부터 작품들을 분류하여 심사하는 창조문학신문만의 특별한 방법은 신춘문예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 <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에 응모해주신 수많은 문학도들에게 대망의 2007년도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금번 <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 공모에 당선된 작가들의 당선작과 프로필, 거꾸로 매달린 사진의 의미, 당선소감 및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 거꾸로 매달린 사진의 의미 / 박인과 문학평론가

사진은 아래의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시조 당선자 정기환 씨(80세), 시 당선자 고기리 씨, 소설 당선자 정학모 씨, 소설 당선자 조용균 씨, 시조 당선자 민병관 씨, 시 당선자 최성훈 씨, 시 당선자 강봉덕 씨이다.

빈 허공에 거꾸로 존재하고 있는 이 사진들, 이 사진들은 시각적으로 편협된 사각의 레이어를 벗겨버린 것이다. 이 사진들 각자가 우루루 떨어져서 제 각각 흩어질 위기에 놓여있다고 우리의 시각을 통한 인지감각은 정보를 처리하고 우리의 육체에 운동명령을 하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서 전혀 흩어질 염려가 없다. 우리의 의식이 또한 그렇다. 우리는 추측하건데 우리의 의식이 산만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주의 정기를 받은 우리의 의식은 흩어지기 위해 뭉쳐있지 않는 것이다. 아예 ‘뭉친다’는 인식 자체가 허울일 뿐인 하나의 우주의 본체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신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다. 아니, 모방 받은 것이다. 만물, 유형의 무형의 거대한 존재물들 자체가 신에게서 흘러나온 신의 속성을 닮은 것이다. 문학 또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온 신의 문으로부터 나온다고 인식하게 될 때, 역시 문학의 산출에 있어서도 우리가 문학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안에서 혹은 우주 안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을 우리는 주워 담을 뿐인 것이다. 어떻게 선별하고 불러 모아 담아야 하는가 하는 방법과, 그릇의 크기와, 각기 다른 모양새에 대한 깊은 사고가 우리의 삶이라는 도구로써 요구될 뿐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진실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이성의 눈동자를 아무리 굴려 봐도 역시 사실적이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거꾸로 보는 세상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니 기존의 방법 혹은 생각의 보자기나 본질적인 자아의식 자체를 투명하게 뒤집어보기도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보는 우리의 눈동자에 박혀 있는 경직된 시야는 떠나고 새로운 렌즈로 보여지는 신비의 각도가 우리에게 뇌로 반사 신경의 실핏줄을 타고 수신되어 오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사진을 보면 어지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저 사진의 실체들은 전혀 어지러움증을 호소하지 않는다. 아니, 어지러움증 자체가 없다. 어지럽다는 인식 자체는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직립보행의 결과가 낳은 최대의 실수이다. 우리의 우주는 어떤 때는 짐승처럼 엎어져서 기어가며 물속에 잠겨서 축축하게 반사되는 영상으로 보거나 단절된 의식의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떨어지면서 강제적으로라도 거꾸로 볼 때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문학신문은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하고자 한다. 직립보행의 렌즈와 위험스러울 것처럼 느껴지는 의식적 불안감을 예리한 꼭지점으로 수렴하고 있는 역삼각형의 렌즈, 그 두 렌즈를 통하여 우주를 보고자 한다. 수많은 문학도들이 끙끙 앓으면서 출산한 우주 같은 작품들을, 충분히 넘치는 화소를 장착한 신개념을 창조하는 전자 디카로 사로잡아 찍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창조문학신문사에서는 <1. 작품력 + 2. 작가와 작품의 사회친화력 및 사회공헌도>를 따져서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을 채택한다.

창조문학신문 2007년도 신춘문예의 A틀의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와 B틀의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의 각 부문 당선자들은 다음과 같다.

▣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A틀

1. 시조부문 민 병관 : 당선작 「달세 광고지를 붙이며」

― ♣ 프로필 : 39세, 경남 산청産,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전망』 시부문 등단, 3인시집 『낙하산을 펴다』 출간, 「그리고 시」, 「雨酒會」 동인, 현 금성고등학교 교사, 부산시 수영구 거주.

― ♣ 「달세 광고지를 붙이며」 / 민 병관의 시조

민락동(民樂洞)
백산(白山) 어귀
파란 대문을 찾으셔요

네모진 홑이불 줄기차게 걷어차도 따습게 맨살 부빌 햇누런 구들방과 하늘채 가차운 다락방(多樂房)이 있어요 천장에 붙여놓은 몽금포 모래알이 코 앞에서 보풀보풀 솜털되어 쌓여가죠 솥단지만 안쳐도 넘쳐나는 부엌과 무릎 내음 너풀대는 뒷간이 가붓대죠 함박웃음 머금은 구름장도 보이고 집 떠나 온 씨톨까지 채마밭이 싹 틔우죠 이제는 훌쩍 커버렸을 경은, 영광, 다연 … * 풋풋한 아이들 손 맞잡고 오셔요 푸드득, 첫 눈 맞으며 어서어서 오셔요

화들짝 찾아주셔요
두근새근
기다릴게요

* : 몇 해 전 실종되어 지금도 찾고 있는 어린이들의 이름.


― ♣ 시조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어울림의 파격을 통한 시조의 중흥을 꿈꾸는 율격의 자유”

이렇게 많은 시조들을 응모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 그 중에서 당선작을 고르기란 매우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마치 시조의 갑작스런 부활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5편이었다. 5편 모두 고르게 시조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4편 모두 시조의 초·중·종장의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았다. 어떤 작품은 종장이 중장에 비해 너무 가볍고 어떤 작품은 초장의 식상한 표현이 시조의 질감을 훼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법적 오류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두 작품이 수작으로 남게 되었는데 그 중의 민 병관의 시조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이유는 겨레말의 유용한 사용과 보급에 그 근거를 두었다. 전실아, 김용매, 이기연, 박태수 씨 등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기술과 기질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민 병관은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네모진 홑이불 줄기차게” 걷어차며 네모진 원고지 칸에서 자유하고 싶다. 조그만 달세 방이라도 좋다. 이 고통의 네모난 감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운명의 삼각형 두 개가 겹쳐진 네모난 고통에서 자유할 수 있다면.
민 병관의 <창조문학신문 2007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달세 광고지를 붙이며」는 고풍스런 시조의 흐름을 씻어내고 겨레말의 적절한 사용을 통한 시조의 중흥을 꿈꾸며 새로운 창작법을 도출해 내고자 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장에서는 시조 율격의 자유를 위한 풍성한 전개로서의 다양한 확산을 보이는 반면 종장에서는 시조의 정형을 유지하며 수렴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중장에서의 그의 시조의 얼개를 뒤집어 펴는 행위의 목적은 자유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다양하고 질 높은 자유의 수렴을 위한 진정한 시조적 자유를 그려내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적 감각의 시조 창출을 통한 어울림의 파격의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 병관의 시조가 초장에서 정형을 유지하는가 싶다가 중장에서 보따리를 잔뜩 풀어놓고 종장에서 다시 정형의 율격으로 계산되어 응집되고 있는 것은 그가 안정된 시조의 참신한 부활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조가 초장에서 머리 끈을 풀었다면 초장부터 맥이 빠져 산발한 두통을 가져다주었을 것이고, 종장에서 바지를 내렸다면 막판에 화장실에 갔다 와야 될 형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신춘문예에서 떨어져 술 퍼담고 뒤가 마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절히 중장에서 허리 끈을 풀고 채워두는 것은 나중에 다시 되새김질하기에 알맞도록 구성하기 위한 그의 시문학적 영적 템포에 의한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인 것을 선자는 감지하였다. 중간에서 허리끈을 풀고 시조의 영양분을 호흡할 때도 잘 살펴보면 민족적 정형의 리듬을 잘 구사하고 있다. 특히 중장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푸드득, 첫 눈 맞으며 어서어서 오셔요”는 3/5/4/3의 시조의 튼튼한 종장의 현(絃)을 건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작법은 시조의 맛과 멋과 질감과 리듬감을 잘 알고 충분한 훈련을 거쳐왔기 때문인 것으로 확신된다.

시조의 시조어(필자는 시어에 대해 시조에서는 ‘시조어’라 명명함)들의 잎사귀들 몇 몇을 뜯어보면 ‘民樂洞’, ‘白山’,‘파란 대문’, ‘多樂房’, ---- ‘채마밭’, ‘풋풋한 아이들’, ‘푸드득’, ‘화들짝’, ‘두근새근’, ‘몇 해 전 실종되어 지금도 찾고 있는 어린이들의 이름’ 등이다.

이 ‘시조어’들에서 유추해 보면 평온한 마을의 격렬한 이별의 아픔의 서정을 눈물빛 언어로 빚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조가 특별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민락동은 ‘民樂洞’이다. 그 동네는 부산 남구에 속해 있는 갯마을이다. 민 병관이 살고 있는 부산 수영구의 옆 동네이다. 그러면서 ‘民樂洞’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 즉 白山처럼 깨끗하고 여유로운 ‘樂’의 ‘함박웃음’ 머금은 백성이 사는 나라의 부드럽고 온화하고 평화로운 정체성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 민족에겐 한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 시조에서 ‘몇 해 전 실종되어 지금도 찾고 있는 어린이들의 이름’을 언급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실종된 ‘어린이’의 ‘시조어’는 문자적 의미로 실제적인 ‘어린이’들을 의미하면서 그 심층 깊이에 실종된 아니면 퇴색된 한민족의 사랑과 혼, 그리고 영원성과 민족성, 또한 진취적인 기상과 평화의 꿈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民樂洞’, ‘白山’, ‘파란 대문’, ‘多樂房’과 ‘실종된 아이들’이란 ‘시조어’들로 이 시조의 주제를 직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희망한다. 그 ‘풋풋한 아이들’이 돌아올 것을, 첫 눈 내리는 한겨울이 돌아와도 한반도의 잠 못드는 들녘에서 ‘푸드득’ 하고 ‘파란 대문’에 희망의 날개 하나 돋아 올라야 할 것을 간절히 희구하고 있다. ‘맨살 부빌 햇누런 구들방’과 ‘채마밭’을 준비하고 있으니 ‘화들짝’ 우리의 그리움 열어젖히고 와 달라는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두근새근’ 기다린다는 것이다.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시조의 리듬을 중장에서도 ‘보풀보풀’, ‘너풀대는’, ‘가붓대죠’의 시조어가 활기를 주기 시작하고 ‘푸드득’의 시조어가 시조의 맛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연이어서 종장에 이르러 ‘화들짝’이라는 시조어로 이 시조에 폭포수와 같은 격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면서 그 격동하는 리듬감을 다시 ‘두근새근’이라는 시조어로 서서히 잠재우며 차분히 다스려 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민 병관의 시조 창작법은 시조의 음악성을 정형의 리듬에서만이 아니라 감각적인 시조어의 사용으로 정형의 폭력적인 형상화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화들짝’이란 시조어는 이 시조의 매우 중요한 혈자리에 얹혀져 박힌 것으로서 그 ‘화들짝’이란 시조어는 무겁게 침체되어 있는 우리 민족성의 혈에 시침하며 생명화의 과정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네모진 홑이불’이 싫어서, 초장과 종장이라는 시조의 피륙을 만들어 그 사이의 중장에 ‘보풀보풀’거리는 ‘솜털’들을 가득 채워 넣고 누비는 이불처럼 형상화되는 특수한 창법으로 시조의 에너지를 충분히 충전한 그의 솜씨는 누가 뭐래도 2007년 신춘문예의 일품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각오로 시조어의 조탁의 과정을 꾸준히 연습해 더욱 많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풍성한 기쁨을 주길 소망한다. 그렇게 될 때 시조새의 부활을 우리는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람찬 시조새의 부활을 완성해 주길 빈다.

*누비다 : 피륙을 두 겹으로 포개어 안팎을 만들고, 그 사이에 솜을 두어 죽죽 줄이 지게 박다. ¶ 누빈 바지. 누빈 이불(야후 인터넷 사전 참조).


― ♣ 시조부문 당선소감 : 민 병관
“겨레시가 세계적인 위상을 획득할 수 있는 날을 위해”

먼저, 졸시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세상에 내 놓기 부끄러운 작품이지만 더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여 담금질을 계속 하고자 한다.
인문학의 위기와 문학의 죽음을 얘기하는 21세기에, 그것도 서구적 자유시의 주도로 우리 시조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이 시대에 나는 왜 시조를 부여잡고 있는가. 우리 겨레의 정서와 우리의 생래적인 감각을 가장 적확히 표현할 수 있는 문학 형태가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의 소네트나 일본의 하이쿠 못지않게 우리 겨레시인 시조가 세계적인 위상을 획득할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가며 문학문화의 선구역을 맡고 있는 ‘창조문학신문’의 제1회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은 더없는 영광이다. 창조문학신문의 도전 정신과 문학에 대한 가열찬 애정에 걸맞는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꿈꾸면서 우리 민족시 시조의 영속성을 위해 매진할 것을 약속드린다.
오늘까지 기다리던 비가 어제부터 오고 있었다.


2. 시부문 고 기리 : 당선작 1. 「지하철」(대표작) / 2. 「母情」 / 3. 「山寺에서」

― ♣ 프로필 : 62세, 서울대 졸업, 교육계 정년 퇴직, 현 청솔아카데미 부원장. 서울시 강동구 거주.


― ♣ 「지하철」 / 고 기리의 시. A틀.
…… 버전 : 성적 판타지아

계표기와 카드의 입맞춤 값 팔백 원을 지불하고
하루 몫의 등짐 추스르며 플랫폼에 선다
형광빛 광합성으로 젖무덤에 핀 광고판 속 장미꽃처럼
어제 놓고 내린 꿈 수정란의 꽃으로 다시 피우고 싶어
열차를 기다리며 괄약근을 조이는 사람들
뜨거운 입맞춤 후 쓰레기통에 버려진 종이컵들
빠듯한 일인분의 산소량을 아껴 호흡하며
몇 모금의 액체 속에 용해된 카페인을 아가미로
분리수거해 하품을 쫓는 사이
잠들었던 푸르른 성감대의 선로 우르르 울리며
바닥을 향해 비어가는 종이컵 속으로 열차가 도착한다

선에서 선으로 색에서 색으로
모든 오고 감의 끝이 무엇인가를 학습하기 위하여
해웃값 따질 겨를도 없이 암수 몸 맞대고 땅굴을 달린다
휴대전화 핸드폰 휴대폰 셀폰 모바일폰 DMB폰 …
육성과 기계음이 서로 접붙어 변종 불협화음을 산란한다
혼자서 인공호흡을 하는 노숙자의 가위눌린 숨소리가
카드 빚 쳇바퀴에 치인 누군가의 신음소리에 꺾꽂이 되고
선따라 색따라 타고 내리는 정거장마다
밤새 숙성된 수정란 좌석마다 포기 나뉘어 착상되는데
액정화면에서 무리지어 짝짓고 허공으로 날아간
메시지의 자음과 모음이
년상과 년하가 자리 바꿔 앉는 의식에 꽃가루처럼 날리고
통화중 튀어나와 광고지처럼 나눠지는 웃음소리가
벗은 제 허물을 먹고 몸을 풀어 날개를 짓는
우화(羽化)의 과정에서 잘린 더듬이
아, 손금을 고쳐 환승하고픈 한숨소리에 휘묻이되고 …
소리보다 더 옹골진 삶의 바탕인 침묵이 깨질 때마다
우연히 같은 지하철을 탔을 뿐인 사람들끼리
때론 눈을 흘기고 때론 빙긋 웃음을 흘리며
동승자의 대가를 치른다

― ♣ 시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생명적 순수함으로 지하철의 일상을 환골탈태시킨 욕정의 기술”


시부문의 응모작이 쌓인 속에서 두더지처럼 돌아다녔다. 그럴 때에 보물들은 있었다. 많은 작품들이 잘려져 나간 다음 고 기리, 강 봉덕, 안 장환, 박 민철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그리고 고 기리와 강 봉덕을 공동 당선자로 선정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다 좋았다.

고 기리는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지하철의 선로 위를 달리는 네모난 방들의 행렬은 날마다 푸른 들판으로의 탈선을 꿈꾼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형광빛 광합성으로 젖무덤에 핀 광고판 속 장미꽃처럼 / 어제 놓고 내린 꿈 수정란의 꽃으로 다시 피우고” 싶다며 각진 고통의 삶에서 자유하고 싶다. 그래서 “선따라 색따라 타고 내리는 정거장마다 / 밤새 숙성된 수정란 좌석마다 포기 나뉘어 착상”되고 싶은 것이다. 이 시간의 네모난 그리움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고통의 사각지대인 360°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의 시어들은 튼튼하고 정교하고 색정의 욕을 풍기고 있다. 그만큼 숙성되어 있고 시어의 수정란이 잘 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시어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접붙게 되는데, 무생물과 생물까지도 접붙여 생명 창조에 관여한다. 이것은 고 기리가 그리고자 하는 원대한 생명에 대한 환희적 기쁨의 완성을 위한 언어의 칼날들을 그의 시의 자궁에 깊이 착상시켜 놓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착상시켜 놓은 시어의 수정란들 중에서 살펴보면 “아, 손금을 고쳐 환승하고픈 한숨소리”라는 시의 자궁 위치에서 돋보이는 ‘환승’이란 단어가 붙어있는 곳이 이 시의 혈자리이다. 이 시에서 이 ‘환승’이란 단어가 없어지면 이 시는 맥이 풀려버리고 만다. 단지 성적인 흥분제 정도의 역할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어 ‘환승’이란 시침의 시어는 손금으로 이어지는 생명이 흐르는 정확한 혈자리에 꽂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생명력 있게 하는 기술을 고 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환승’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 시의 전체 행에 생명의 뼈다귀들과 욕정의 숨소리들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 기리가 형상화 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부제를 붙이고 있는 것처럼 지하철 버전 ‘성적판타지아’에 대한 생명력 있는 기대치의 발현으로서의 그의 오래된 꿈의 알의 부화의 모습이다. 그것은 바람직하고 진정한 생명의 모습이다. 우리의 어머니의 자궁에서 꿈꾸며 꿈틀거리며 키워왔던 우리의 절실한 자화상이다. 지하철이 깊은 굴속으로 진입하며 오고가는 것처럼, 성적인 튼튼하고 당연한 모럴(moral)을 우화의 더듬이의 촉감으로 잉태해 내고 있다. 그의 시어들이 수정되어 잉태되고 깨어지기만 하면, 서로 갈아타야 할 새로운 정거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남녀노소가 구분 없이 필요에 의해 죽음과 생명으로 팽팽히 다가오는 두 선로를 달리며 정거장에 일찍 내리기도 하고 늦게 도착지점에 당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생로병사에 관한 형상화로 발전되어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시어들을 살펴보면 ‘입맞춤’, ‘젖무덤’, ‘꿈 수정란’, ‘괄약근’, ‘뜨거운 입맞춤’, ‘푸르른 성감대’, ‘색에서 색으로’, ‘해웃값’, ‘암수 몸 맞대고’, ‘접붙어 변종 불협화음을 산란’, ‘수정란 좌석마다’, ‘짝짓고 허공으로 날아간 / 메시지의 자음과 모음’, ‘벗은 제 허물을 먹고’, ‘우화(羽化)의 과정에서 잘린 더듬이’, ‘우연히 같은 지하철을 탔을 뿐인 사람들’ 등이다. 그야말로 인터넷의 성감대 키워드들이다.

그는 생명적 순수함으로 존재 되어지는 자아 탄생의 과정을 지하철로 비유하여 이야기하며 지하철의 일상을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그래서 길쭉한 지하철이 드나드는 땅굴을 성적인 모럴해저드(moral hazard)화 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극적인 반전의 효과를 비벼내고자 한 것이다.

생명의 원류를 타고 흐르는 창조적인 성이란 기능을 재창조의 꿈으로 깨어 내놓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시의 기능과 기술이 있다. 기존의 관념을 깨어버리고 새로운 믿음을 창출하는 것이다. 역시 그가 “우화(羽化)의 과정에서 잘린 더듬이 / 아, 손금을 고쳐 환승하고픈 한숨소리에 휘묻이되고”라고 묘사하는 곳에서 그의 시의 부활을 본다.

“우연히 같은 지하철을 탔을 뿐인 사람들끼리”, ~ “동승자의 대가를 치른다”고 하는 구절에서 우리는 그의 날개 돋친 희망을 본다. 그의 꿈은 바로 우리의 꿈이고 인류의 희망인 것이다. 인류는 우연히 같은 지하철을 탄 존재들이다. 이 시 “지하철”은 같은 시간대의 세월을 타고 오르며 생명과 미래의 선로 위를 팽팽한 긴장력으로 달리고 있는 공동체적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이 도태된 일상사의 ‘잘린 더듬이’의 의식의 틀에서 해방될 때까지 지구라는 지하철은 수많은 우화의 생명들을 잉태하며 사랑하며 신의 계시가 이를 때까지 계속 질주할 것이다.

고 기리의 생명과 환희와 역동(逆動)의 삶의 중앙에서 흔드는 바람이 거세어질수록 우리는 희망 부푼 꿈의 알을 깨는 연습을 할 것이다. 그의 역설적 시어들이 우리의 가슴에 꽂힐 때마다 우리는 ‘잘린 더듬이’로 부화하는 꿈을 꿀 것이다. 건강한 필력으로 건강한 에너지로 파란 하늘 한 점의 자유를 소유하길 빈다.

― ♣ 시부문 당선소감 : 고 기리
“사선을 넘나들며 하루에도 몇 번 씩 ‘사망연습’을”

병상에서 시 몇 편을 쓰고 고치고 다듬었다. 내면의 빛을 찾아 자의식 속을 자맥질한다. 퇴직 후 자유를 꿈꾸었으나 오히려 새장 속에 갇힌 기분이다. 머리카락 하나 흔드는 바람결에도 미모사 잎처럼 움츠러든다. 무심코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허용치를 넘어 집사람은 수술을 두 번 받았고 나는 약물치료 중이다. 지쳤으나 포기할 수 없는 게 또한 삶이다. 그래서 붙든 게 詩다. 사선을 넘나들며 하루에도 몇 번 씩 “사망연습”을 겪은 후, 과거에 써 놓은 글은 찢어 버렸다. 더 이상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 남은 몇 편은 완전 개작을 했다. 이제야 시간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 소중한 생명을 붙들어 주신 하느님의 체온을 온 몸으로 느끼며 감사한다.
기뻐도 슬퍼도 눈물을 먹고 가슴에서 피는 꽃이 있다.
그 “눈물꽃” 한 송이, 심사위원과 여러분께 바칩니다.


3. 시부문 강 봉덕 : 당선작 1. 「아내의 불면」(대표작) / 2. 「비밀의 문」 / 3. 「고래박물관」

― ♣ 프로필 : 37세, 경북 상주産, 「믹스앤매치문학동인회」 회원, 현 회사원. 울산광역시 중구 거주.

― ♣ 「아내의 불면」 / 강 봉덕의 시(A틀).


가파른 한의원 계단을 오르며 바스락거리는 호흡들
딸아이를 생산한 이후로 십여 년 동안 아내는
깊은 강이 되어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밤마다 강의 적요가 지나는 소리 들린다
가끔 연어의 몸살 앓는 소리도 난다
물의 기원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것이리라

한의원에서 강의 몸이 열리자 화석 같은 통증 묻어나온다
수척한 팔다리며 가슴 아래 캄캄하게 돋은 가시들
오래도록 부드러운 물길이 식탁이며 침실을 흐르는 동안
가시는 안으로 날카롭게 이빨을 들이댄 것이리라
그녀의 몸은 잘못 들어선 길처럼 토라져 있다
너무 오래 걸어 들어가 돌아오는 길 버렸을 것이리라

몸은 수위를 낮추며 나이테를 키우며 줄어든 바닥으로
아내의 부장품이 보인다. 닳아버린 나의 구두며 녹슨 반지가
골다공증 걸린 흰 뼈처럼 바람의 길 만들고 있다
길 위로 낡은 복사기며 서류뭉치들이 눈치를 살피면
물수제비뜨던 딸아이의 돌이 초생달처럼 웃고 있는데
아내는 어디를 갔을까.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작한
삶의 원류을 찾아간 것일까

마른 물줄기의 혈에 박힌 시침, 명치끝에서 타는 약쑥 같은 시간
야위어 가는 봄 강처럼 마른나무로 선 나는 짙은 그늘을
그녀에게 드리우고 싶은데, 그녀는 어디쯤 지나는 것일까
홀로 어두운 길 돌고 돌다 흐르는 강이 되려나 보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친 내 손에 길을 만든다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물길, 환한 시간이다.

― ♣ 시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시의 경락(經絡)의 혈자리에 생명의 강이 흐르도록 시침(施鍼)할 줄 알아”

강 봉덕은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그의 시 「비밀의 문」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면에서 사각지대로 스며든 사람도 있네요 / 가끔 자신의 문패를 단 집들은 수취 거부를 하지만 / 마지막 주소지에 편지가 닿으면 집으로 돌아가지요”라고 짜내고 있는 시어에서도 알 수 있다. ‘사각지대’로 스며든 사람도 있지만 ‘마지막 주소지에 편지가 닿으면’ 우리의 영원한 ‘집’으로 본래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원초적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향유하는 것이다. “살아온 집과 살아갈 집이 티격태격하는 날이면 / 고독한 신전, 은밀히 당신과 내통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사유하고자 하는 ‘신전’은 모든 인류의 의식 맨 밑바닥에 사각으로 혹은 삼각으로 기울어져 있는 존재의 일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의 발상기호(發想記號)이다. 또한 그것은 인류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고독으로 채색된 본질적 자아의 뒷모습이다. 이 잠재의식의 뒤뜰쯤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정확하게 85°의 각을 이루는 한 응집점에 있는 풍경을 따내기 위해 강 봉덕은 시의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신의 신앙의 잣대와 현시적(顯示的)인 알레고리(allegorie)로 구성되는 렌즈를 통해 투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85°의 각은 강 봉덕이 만들어 내고 있는 사각 중의 한 각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강 봉덕의 시 「아내의 불면」을 보고자 한다. 살벌하고 낭자한 죽음의 각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한의원을 찾는다. 우리의 생명의 혈자리에 병이 깊으면 사망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혈자리, 그것은 바로 우리 몸에서 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혈액이 원활하게 도는 길, 그리고 우리의 기운이 줄기차게 통행하는 길을 따라서 강은 흐른다. 생명의 강이 흐르고 존재의 강이 흐른다. 그 흐름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열려진 육체 너머로 신에게 향하는 “비밀의 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히 여겨야 할 생명의 신경이 육체 안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신께서 부여하신 삶의 분량대로 건강하게 살아야 할 강물이 우리의 몸 안에 “비밀의 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생명의 강의 의식과 존재와 삶의 진한 고통의 길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간의 길로 오버랩되는 레이어들을 강 봉덕은 그의 렌즈로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신앙하는 신전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가 강처럼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육체에 본향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놓으신 신에 의해서 태초 전부터 이미 심어져 있음을 강 봉덕은 사유한다. “물의 기원의 기원까지 거슬러” 사유의 끈, 혹은 믿음의 실한 밧줄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각의 탈출을 위한 그의 묘안으로서 출발되는 행위인 시적 창작력에 대한 시행들의 신경줄에 해당하는 진술인 것이다.

“연어의 몸살 앓는 소리”를 들으며 사각의 밤바다가 끓어오르고 있음을 그는 영원의 소리의 카메라에 잡는다. 삶의 고통이 그만큼 우리에게 가시가 되어 “안으로 날카롭게 이빨을 들이대고” 있는 고통 깊은 층을 찍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어들을 살펴보면 “불면”, “화석 같은 통증”, “캄캄하게 돋은 가시들”, “마른 물줄기의 혈”, “홀로 어두운 길” 등의 시어들로 인해 시를 다 마쳐갈 때까지 다 어둡다. 거의 몰사 상태에 이를 지경에 있는 아내의 건강에 대한 표현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바탕에 죽음의 그림자가 바짝 마른 절망의 뼈다귀들로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바짝 마른 강줄기를 살려내는 비법의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아내의 손가락”인 것이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친 내 손에 길을 만든다 /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물길, 환한 시간이다.”라며 이 시를 단 번에 살려내고 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친 내 손에 길을 만든다’며 이 시에 강물이 흐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물길, 환한 시간이다.’라고 하며 그의 시가 마지막에 푸드득 살아난 것이다. 이제 이 시의 경락에 물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시의 생명의 혈자리인 ‘내 손’, 그 위치에 그녀의 사랑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강물이 이제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가락’은 이 시의 정확한 혈자리에 단 한 번 시침하는 일침의 도구로서의 침(針), 이 시의 생명의 침(針)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빈사 상태에 이른 건강하지 못한 ‘아내’를 걱정하고 있는 작가에게 오히려 그 ‘아내’가 생명의 물이 되어주는 사실로 강 봉덕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반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강 봉덕이 이 시의 마지막 카드로서 “아내의 손가락”을 준비해둔 것처럼 한 작품에서 적어도 한 개 정도의 혈을 짚어줄 수 있는 시침의 시어를 준비해둘 때 그 작품은 더욱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림을 그릴 때 마지막 점하나 찍는 것(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은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강 봉덕은 깊은 시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과 우주를 사랑하는 뚝심이 있는 귀한 시인이다. 아직은 시어와 시행의 연결과 앞 뒤 행의 유기적인 관계성에서 놓치는 것도 있다. 그러한 부분들은 특히 그의 다른 응모작들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좀 더 시행의 압축에 대한 애정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의 시의 우물은 희망이 있다. 그 우물에 고이는 샘물이 우리의 가슴이고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가 더욱 우리의 고통과 환희와 고독과 신의 계시를 잘 표현할 수 있게 될 때 그는 진정 우리의 극심한 슬픔을 대신 지워줄 수 있는 그리움의 지우개를, 생명의 시침의 시어들을 말씀 안에서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꾸준한 필력의 성장을 믿는다. 대성하길 바란다.


― ♣ 시부문 당선소감 : 강 봉덕
“착한 아내와 예쁜 딸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한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시간, 새로운 시작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내 사랑이 부족하기에 삶을 더욱 사랑하라고 이렇게 큰
기쁨이 주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기쁘거나 슬픈 모든 일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더 많이 사랑하고 겸손히 살아가겠습니다.
아직 내 글이 부족하고 서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작은 달란트라 생각하며 꾸준히 걷겠습니다.
항상 옆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착한 아내와 예쁜 딸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창조문학신문사에
감사드리며, 이는 우리의 이웃을 더 사랑하라는 격려로 알고 새해에는
열심히 사랑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4. 소설부문 정 학모 : 당선작 1. 「파란나라 입문서」(대표작) / 2. 「달래」

― ♣ 프로필 : 43세, 전북 전주産, 시사랑 신인문학상, 인천시 연수구 거주.

― ♣ 「파란나라 입문서」 / 정 학모의 단편소설(A틀).(창조문학신문 홈 참조 www.sisarang.co.kr)

― ♣ 소설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두꺼운 얼음장처럼 튼튼하며 살얼음처럼 예민한 문장의 팽팽한 긴장력"

많은 단편들 속에서 중편도 보였다. 그런데 중편은 일단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이 문제가 되어 제외되었다. 단편들 중에서 끝까지 올라온 작품들은 신청진의 「황우석 신드롬」, 배상현의 「가상현실」, 정학모의 「파란나라 입문서」 등이었다. 세 작품을 두고 고민하다가 정학모의 「파란나라 입문서」를 채택하게 되었다. 선 되지 않은 두 작품은 작품의 완성도와 문체, 그리고 문장의 문법적 기능면에서 다소 미흡한 부분들이 있었고, 작품의 일관성과 정보부족으로 인해 명료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어설픈 주입식 문장이 삽입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정 학모는 사각의 자유를 희망한다. 그의 작품 「파란나라 입문서」에서 밝히고 있는 “철창 안에서 진수를 살피던 자가 철문이 떨어져나간 직사각형 어둠의 틀 안에 하얀 한복을 입고 서 있었다.”의 문장에 있는 “직사각형 어둠의 틀” 안에서 하얗게 자유하고자 한다.

정 학모의 응모작 「파란나라 입문서」는 첫 장부터 개성 있는 독창성이 돋보였다. 단어의 적절한 화법에 의해 작가의 세계관이 잘 드러나고 있었고, 진부하지 않고 역동성 있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의 빛깔이 작가의 개성으로 나타나면서 어조가 어둑한 것 같아도 그 단어들의 조화가 새로운 힘을 분출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정 학모가 터득한 독특한 주제의식의 영역의 빛깔을 채색하는 그만의 기술에 의해서다.

플롯(Plot)의 탄탄함도 작품의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탁월한 인물 묘사나 사물에 대한 표현법이 갈등 구조를 조이고 있는 긴장의 끈을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절정에 이를 때에도 미적이고 심미안적인 예술적 감각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것은 “긴장감의 척도는 마구 감아 돌린 6번 기타 줄처럼 터지기 직전의 예리한 쇳소리를 내는 듯 했다.”고 하는 그의 문장에서 더욱 극명해지기도 했다. 이 문장은 이 작품의 절정에 이르는 복선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 이 문장은 후에 “차려, 안 혀! 이 새끼들아.”의 문장과 소설적 경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문장은 “2배식이 진수의 불가당한 행위를 저지하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곤잘레스와 깜상이 삽시간에 달려들어 무작하게 밟은” 후의 일이다.

정 학모의 문장은 두꺼운 얼음장처럼 튼튼하며 개울물 곁 살얼음처럼 예민하다. 이 견실한 필력으로 우리의 어둠을 희망의 불쏘시게로 묘사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욱 건강한 글쓰기를 부탁한다.


― ♣ 소설부문 당선소감 : 정 학모
“서툴지만 부끄러운 마음으로 올려”

쓴다는 행위가 내겐 늘 의미 없는 낙서처럼 여겨져 아주 오래 전에 포기하여 잊힌 일들이었다. 생명을 불어넣지도 못하는 무색한 글을 무턱대고 쓸 만큼 세상은 내게 여유를 주거나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40을 훌쩍 넘은 인생은 여전히 삶의 고단함만을 타박하고 주위나 과거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하며 살고 있다.
많이도 변해버린 세상, 그 세상 일편에 서툴지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을 발견하고 어설픈 글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올려보았다.
나에게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B틀

5. 시부문 최 성훈 : 당선작 1. 「낙엽의 마지막 비행」(대표작) / 2. 「단풍길 隨想」

― ♣ 프로필 : 53세, 경기도 용인産, 충북대 과학교육과 졸업, 한양대 교육철학과 졸업, 『용인문학』 신인상, 「용인문학회」회원, 현 용인의 나곡중학교 교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거주.

― ♣ 「낙엽의 마지막 비행」 / 최 성훈의 시

행림(杏林)에 든
갈색 바람이
꽃물 들어 양금(兩琴)같았던
나뭇잎의
수고로운 삶의 창을 닫는 날,

잎새의
슬픈 이탈을 해연히 굽어보던
산새 한 마리가
홀연히 날아올라
구슬픈 축가를 부른다

이제 더는
실바람에 두방망이질 칠 날 없으며
장대비에 애타하지 않고
햇살 보듬으면 짓던
청록의 밝은 미소도 없겠지만

본래 절로 받은 삶이니
나누임도 정한 이치라
헤어짐이
곧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사명을 다한 장한 스러짐이니
대지의 청혼(請魂)에 응하여
가벼웁게 날아,
산천에 귀의(歸依)함을 기꺼워하며
시든 몸과 마른 마음을
편안히 눕히라고.


― ♣ 시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백두산사슴 같은 깨끗하고 고고(孤高)한 심성으로 퉁겨내는 이별의 변주곡”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분들은 최 성훈 씨, 김 성식 씨, 이 기남 씨, 하 미애 씨 등 4분이었다. 여기에서 최 성훈 씨의 작품들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분들은 좀 더 풍성한 시각을 가지고 시어의 조탁의 과정을 밟는다면 머지않아 좋은 시들을 탄생시키리라 믿는다.

최 성훈은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산천에 귀의(歸依)함”을 원하며 “홀연히 날아오르기를” 꿈꾼다. 그러면서 “헤어짐이 / 곧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최 성훈이 꿈꾸는 사각의 자유에의 희망은 나뭇잎이 떨켜 밖의, 그 생명의 사유 밖의 공간으로 이탈되는 순간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시의 혈자리는, 이 시에서는 감추어 두고 있는 그 떨켜의 자리에 있다. 그런데 그 시의 경락은 바로 “나뭇잎의 / 수고로운 삶의 창을 닫는 날”에 있다. 그래서 ‘창을 닫는 날’이 나뭇잎이 떨켜의 자리와 분리되는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그날, ‘삶의 창을 닫는 날’에 나뭇잎으로 비유되어 있는 시인의 고독은 자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슬픈 이탈’의 자유는 ‘구슬픈 산새의 축가’로 청각화 되어 나타난다.

이 시는 강 봉덕의 시에서 추구하는 물줄기에 대한 희망과는 달리 물줄기 세차게 흐르던 잎맥이 마르고 생명의 떨켜 부분이 마를 대로 말라 죽음의 지대, 오히려 그 사각의 지대로 흡수되면서 시는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하고 온전한 생명력이 있어지는 것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뒤집기이다. 창조문학신문사의 신춘문예 뒤집기와 같은 것이다. 정 반대의 측면에서 사각의 렌즈로 원형의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각의 렌즈로 본 것이 원형인데도 사각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최 성훈의 시는 바로 강 봉덕의 시를 뒤집어 놓은 형상이다.

강 봉덕의 시 「아내의 불면」이 강물의 흐름을 애타게 갈구하며 강물이 흐름으로써 그의 시에 생명력이 있게 되었다면, 최 성훈의 시는 강물이 말라가고 있음에 대해 그대로 순응하면서 나뭇잎의 날갯짓에 자신의 의지를 맡겨두는 것이다. 그의 시는 일종의 방임형이다. 그런데 그것은 민족문학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소스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의 미덕을 실행하면서 최 성훈의 시는 “대지의 청혼(請魂)” 즉, ‘대지가 혼을 부름’에 당당하게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긍정의 미학이다. 강 봉덕의 시적 렌즈의 정 반대 쪽에서 들이댄 최 성훈의 시어의 렌즈를 통하여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렇게 숭고하고 아름답도록 다르다. 하지만 자유하기 위한 목적은 같은 것이다.

강 봉덕의 작품의 행이 긴 반면 최 성훈의 시의 행은 짧다 의도적으로 서술어까지 잘라놓았다. “헤어짐이 / 곧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시든 몸과 마른 마음을 / 편안히 눕히라고.” 등이 그것이다. 서술어를 갈라내 없애버렸다고 해서 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함축미와 여운의 층이 두텁게 쌓이게 되는 것이다.

최 성훈이 잘라내 버린 시어의 행방은 바로 ‘낙엽의 마지막 비행’에 있다. 그가 버린 시행들은 바로 그 ‘낙엽’이 되어 시의 대지에 귀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 성훈이 이 시에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카드는 그가 마지막에서도 제시하고 있는 시어 ‘고’ 밑에 붙어있는 ‘점(.)’에 있다. 그 곳이 바로 떨켜의 자리인 것이다. 서술어의 나뭇잎의 시행들이 이탈해 나간 떨켜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최 성훈의 시가 자유하고 있음의 증거는 바로 두 곳의 점이 드러내고 있는 세계에 있다. 삶은 언젠가는 그 점처럼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침표 다음에는 신에게 귀의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자유스러운 날갯짓이 있음을 표현하는 자아의 본질적 내면의 성찰을 그려낸 수작이다.

이 마침표를 활용해 백두산사슴 같은 깨끗하고 고고(孤高)한 심성으로 퉁겨내는 그의 이별의 변주곡은 ‘산새의 구슬픈 축가’로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생명의 음의 혈자리는 바로 그 점에 위치하는 떨켜의 자리이다. 그 자리에 점을 콕 박아놓은 것이다. 그 점의 시침으로 인해 이 시는 이별의 변주곡을 사랑하며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리듬은 ‘가벼웁게 날아’ “꽃물 들어 양금(兩琴)같았던 / 나뭇잎의 / 수고로운 삶”도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마침표의 점을 찍어야 “낙엽의 비행”처럼 날아오르는 자유를 소유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뒤집기가 아닐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역설의 문법이 아닐까.

― ♣ 시부문 당선소감 : 최 성훈

2004년을 마지막 보내는 저녁, 거리는 들뜬 아우성들로 가득 찼는데, ‘열쭝이’였던 나는 혼자서 무슨 하찮은 넋두리인지 한숨만 짓다가 자정이 넘도록 울고 있었다. 삶을 돌이켜보니 허무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뿐, 가진 것이나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회오(會悟)라고나 할까, 생의 반환점을 멀리 돌고나서야 접한 삶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졌기에 갓밝이에 이르도록 글을 쓰고 또 썼고, 그것이 시를 처음 알게 되고 시와 사랑에 빠져 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 후 2년 간 밤낮 없이 습작에 몰두하면서 남은 날 동안 모든 수고와 노력을 다 기울여 볼만한 가치가 있는 새로운 세계가 시창작의 세계인 것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내 삶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경험하면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지냈는데, 또 오늘 기쁜 소식을 받게 되었다. 행여 게을러지지나 않을까, 반복되던 후회의 잔을 또다시 들게 되지는 않을까, 스스로 노심초사하던 나였는데 새 길을 제시받은 느낌이다.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신 창조문학신문사 관계자 모든 분들에게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6. 시조부문 정 기환 : 당선작 「뻐꾹새」

― ♣ 프로필 : 80세, 남원 수지産, 전주시 완산구, 완산도서관 사랑모임 회장,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전북외국어 통·번역회 영어팀장, '영어 동시통역사’ 자격 취득과 자신의 ‘영어시조집’ 출간 준비 중. 전주시 완산구 거주.

― ♣ 「뻐꾹새」 / 정 기환의 시조

여쭤봐도, 봐도 될까요
아버지 어머니

저승살이 그 마저도
맨발의 가난이시라면

이 자식
무언들 아까우리
임 앞에 길길이 바치련만


불현듯 산소 앞에
울며 바친 만 원 권 몇 장

그 마저 속절없이
바람에 흩날리니

나 이젠,
무엇을 하오리까
뻐꾹새 되어 마냥 울겠네

― ♣ 시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극심한 가난으로 억눌려있는 자유에의 자유를 자유함”

본심에서 정 기환, 최 기정, 한 정숙 씨 등 3분이 경합했다. 그리고 정 기환 씨의 시조 한 작품만 남았다. 정 기환 씨의 시조 「뻐꾹새」는 일상적인 생활언어들을 시조의 틀로 만들어 내고 그 정형 속에 폭포 같은 그리움의 눈물을 담아내고 있는 뼈아픈 시조이다.

눈물을 담아내며 정 기환은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뻐꾹새 되어 마냥” 울어 옐 수 있는 자유를 부모님 산소 앞에서 눈물로써 캐낸다. 그가 정형의 틀에 안주하는 것은 그의 자유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함을 원한다. 구속된 자유에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다.

뻐꾹새(=뻐꾸기)는 동물이다. 사람도 동물이다. 사람은 동물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뻐꾸기도 동물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은 뻐꾸기와 사람은 서로 비유될 수 있다. 뻐꾸기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도 서로 비유될 수 있다. 뻐꾸기의 노래와 인간의 노래도 비유될 수 있는데 더욱 중요한 이 시의 핵심은 뻐꾸기의 눈물과 사람의 눈물도 서로 비유될 수 있다는 데에서 심각한 이 시의 주제의 노출이 감지된다. “뻐꾹새 되어 마냥 울겠네”에서 보이는 것처럼 ‘마냥’ 눈물의 강이 감지되는 것이다.

이 시조의 경락은 “아버지 어머니” → “맨발의 가난” → “산소” → “만 원 권 몇 장” → “바람에 흩날리니” → “마냥 울겠네”와 같은 흐름의 길을 만들고 있다. 이 시조의 강은 마지막에 터져난다. 그것은 시조의 종장의 특색이기도 한 것인데 그 묘미를 정 기환은 잘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 눈물의 강은 한없이 흐르고 있는 한민족의 한의 강이다. 한반도의 수맥으로 흐르고 있는 백의민족의 푸른 역사의 축축한 정신이다.

그런데 이 시의 강은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시의 한 줄기의 경락인 “그 마저 속절없이 / 바람에 흩날리니”에 있는 ‘바람’이 위치한 곳에서 발원한다. 부모님 산소에 바람이 불어 만 원짜리 지폐들을 흩날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의 강이 거기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바람’이라는 시조어의 위치가 바로 이 시조의 구멍이 깊이 패인 무덤의 혈자리로 나타나고 있다. 그 혈자리에 ‘바람’이라는 시조어를 깊게깊게 박아놓음으로써, 그 구멍에 바람을 태풍처럼 불어넣음으로 해서 잠겨있는 참생명의 뚜껑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흐르는 눈물의 강의 파도는 높게높게 한없이 솟구쳐 ‘마냥’ 울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슬픔이 북받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바람’이라는 시조어가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바람’이라는 시조어로 인해 이 시조는 강렬한 눈물을 쏟아 올리며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강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 눈물의 강에서 이 시조어(時調魚)들은 파들파들 살아서 자유에의 자유를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뻐꾸기는 야후의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뻐꾸기는 스스로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종류의 새 둥지에 알을 낳는다. / 한국의 민간에서는 배은망덕한 새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이 원한을 품고 죽어 그 넋이 새가 되어 날아다니면서 슬피 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뻐꾸기의 행동의 일련에는 뻐꾸기가 가난하다는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요즘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가지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6·25 전후를 하여 많은 우리의 아이들을 외국에 입양시켰다. 그 아이들은 외국의 집에서 주는 양식을 먹고 자랐다. 그런 후에 부모들을 찾는 뻐꾸기가 되어 한국에 오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이 주는 형벌이다.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은 집이 없다. 노숙자가 그렇고 행려병자의 최후에도 그렇다. 따스한 방이 있는 곳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차라리 뻐꾹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자유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 기환이 조어하고 있는 이 시세계는 이런 민족적 자긍심의 뿌리에 있는 아픔의 우물을 건드리는 것이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마냥 울음보가 터져버리는 한겨레의 한의 수맥을 한없이 한바탕 퍼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승에서의 가난도 서러운데 저승에서마저 “맨발의 가난”으로 고통 받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견딜 수 없다는 심경으로 이 작품을 그리고 있다. 물론 정 기환이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의 삶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시의 행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 그 구조 속에 자신이 그려 넣고자 하는 눈물의 열매들을 가득 달아놓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눈물들은 한민족의 한의 열매들인 것이다.

한국의 민간에서 뻐꾸기를 배은망덕한 새로 여기는 것이기에 자신의 배은망덕한 심사를 뻐꾸기의 울음에 용해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뻐꾸기에 동화되어 가면서 이 시를 물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원한을 품고 죽어 그 넋이 새가 되어 날아다니면서 슬피 운다는” 한국의 민속적인 정서에 자신의 그리움을 격정적으로 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현 듯 산소 앞에 / 울며 바친 만 원 권 몇 장”이 바람에 흩날린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경제에, 지금 화폐의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무덤 앞에서 화폐는 유통되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가듯 그 가치는 자꾸만 소멸해가고 것이다. 시중에 돈이 잘 안 돈다는 것은 화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잃게 되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우리의 경제는 구걸하다시피 되어 있고, 또 한 때의 바람에 힘없이 무너질 수 있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돈을 잃어버려 국가를 휘청거리게 하는 자괴심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돈’이라는 시조어는 액면 그대로 만 원 권 지폐이지만 이 만 원 권 지폐의 가치는 이 시조에서 무한한 부가가치를 생산해 낸다. 돈으로 가치 평가를 할 수 없을 우리의 정서에 관한,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자존에 관한 농도 짙은 시조어인 것이다. 그러한 총체적인 한민족의 가치가 바람에 날리는 화폐처럼 소실되어 가고 있음을 향하여 울게 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 기환은 세월이 깊은 만큼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정도로 우리의 경제릂 책임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라의 경제가 형편이 없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괴심에 의해서 정 기환은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버지 어머니”의 시조어는 우리의 원초적 역사적 조상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현재도 존속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잃어가는 우리의 국토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조의 종장은 다른 어떤 시보다도 시조의 다른 장보다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 종장 부분에서 정 기환은 시조의 충만한 힘의 분량을 맘껏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뻐꾹새 되어 마냥” 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뻐꾹새’는 눈물의 근원이 되는 한의 울음의 소재 역할을 하고 있다.

한민족의 위기상황, 그 무덤 앞에서 정 기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추측하건데 우리의 가난, 우리 민족정신의 부재에 대한 단상(斷想)이다. 그 단상이 깊게 우리의 우물에 박혀있는 눈물의 자유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 ♣ 시부문 당선소감 : 정 기환
“저도 부모님 묘 앞에서 울고 있는 한 사람”

이번 창조문학신문사에서 저의 작품을 예쁘게 보아주시고 뽑아주심에 감사합니다.
가슴이 미어지며 조상과 부모님의 묘 앞에서 우는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닌 울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저 소박하게 쓴 제 작품이 품고 있는 뜻을 값지게 여기신 주최측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7. 소설부문 조 용균 : 당선작 「친구」

― ♣ 프로필 : 서울産, 고려대 졸업, 현 강사. 서울시 서초구 거주.

― ♣ 「친구」 / 조 용균의 단편소설
(창조문학신문 홈 참조 www.sisarang.co.kr)

― ♣ 소설부문 심사평 : 문학평론가 박인과
“김신조 청와대 침투사건, 유족의 이야기를 유골(遺骨)의 아픔으로 그려”

조 용균은 우선 문법적인 부분을 통과해야 하는 심사에서 문장들이 튼튼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확한 문장의 형태에 의해, 그의 문학성이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작품 속에서 느껴져 기쁨을 주었다. 문법적으로 깔끔한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긍정적인 기대치를 상승시켜 주게 되고 그가 가진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는 문법적 도구는 단어들의 새로운 어울림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독창성을 띠고 명료하고 정확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화적인 감동과 호기심을 일으켜 끝까지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가게 하는 독특한 마력 같은 것에 끌리게 하는 힘이 있으면서도 객관성을 충분히 획득하고 있었다. 플롯 자체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잔잔하게 펼쳐 보이는 작가의 소박한 필력이 선자의 마음에 끌리기 시작했다.

점점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주제에 대한 감동의 농도가 짙어져 갔고 그에 따라 나타나기 시작하는 반전의 힘도 독자들에게 생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완성도 면에서도 탄탄하다. 마무리의 부분도 안정감이 있고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중간 중간에 삽입한 두 번의 백석의 시도 무리 없이 작품과 조화를 이루며 한 층 더 심도 있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데에 일조를 한 것으로 일단은 시의 도입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 용균은 사각의 자유를 꿈꾼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뼛가루를 뿌리며” 형석이가 고통의 산만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형석이가 “저 세상에서나마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하기를” 바라는 참된 자유에의 꿈을, 나뒹구는 유골함의 하얀 뼛가루의 구름이 파란 하늘에 흩날리는 아픔으로 엮어가고 있는 웅숭깊은 고통의 작품이다.

1968년도에 일어난 김신조 청와대 침투사건과 그 유족, 고시공부하는 사람들, 마음이 아픈 이들(정신병자로 호칭되는)을 소재로 하여 한반도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현실을 짚어내고 있는, 단편으로서의 무난한 분량과 무게의 한 편이다.

죽음에 대한 모티브로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형석에 대한 회상과 화장터, 뼛가루와 유골함, 단호하게 출입을 거절하며 만류하는 청와대 부근의 경호원 등에 관한 상황 묘사가 적절하게 연결되어 작품의 무게를 유기적으로 충전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추측과 판단이 독자들을 믿게 해버렸기 때문에 그 주인공도 모르는 사실이 반전되어 드러날 때는 극적 효과가 배가되었다. 그 이야기들에 대한 복선도 무리 없이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아버님이 자기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용산 시장에서 행상을 하면서 자기와 남동생 두 형제를 길러주셨다고 한다.”는 문장과 멀리 떨어진 문장에서 형석이가 용산역 지하상가에서 한 여자가 추행당하는 것을 구해주었다는 설정이 나중에 사실로 드러나는 효과는 어머님의 “용산시장에서의 행상”과 형석의 “용산역 지하상가”와 같이 같은 지역대에 속하도록 철저하게 묘사함으로서 사실감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도록 조 용균의 소설은 앞뒤의 사건과 묘사가 일치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욕심 내지 않고 담담하게 펼쳐내는 구성에 내밀한 힘이 느껴지는 조 용균의 소설처럼 담담하게 민족의 끓는 아픔을 정화시키는 문학적 도구로써의 승리의 방패와 창을 소유하길 빈다. 쓰고 또 써서 길이 남는 작품을 탄생시키리라 믿는다.


― ♣ 소설부문 당선소감 : 조 용균
“마음 달래주는 부드러운 죽과 같은 소설 꼭 쓰고 싶어”

군에 있을 때 후배가 제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데 소설 같은 것이 무슨 힘이 있을까요?”
힘도 힘 나름인 것.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움이 가진 힘의 존재를 저는 믿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미(美)라는 것은, 힘들고 지친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그런 면이 있다고 봅니다. 매일 마시는 커피를 담는 잔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심지어 방송광고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삶의 약자인 사람의 마음을 위무(慰撫)하는 그런 아름다움이, 보다 더 윗길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거기에 더해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장점은, 이야기 속으로 한 독자를 초대하여 이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이야기 속의 인물과 사건의 교직을 통해서 새로운 관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을 사랑합니다.

하나의 이야기 형태를 통해서 끓여내는, 마음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죽과 같은 소설, 흔하지만 귀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런 소설을 언젠가는 꼭 써내고 싶습니다. 아직 부족한 저의 글을 좋게 읽어주신 창조문학신문의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창조문학신문사는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역량 있는 문인들을 배출하며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sisar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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