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문학신문, 2007년 첫 신인문학상 당선작 발표

서울--(뉴스와이어)--2007 신춘문예의 계절이 마감되고 있다. 2007년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와 함께 창조문학신문의 신춘문예는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신춘문예’ 이슈의 1위 자리를 고수하며 창조문학신문의 신춘문예 거꾸로 보기는 연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창조문학신문사(대표 박인과 http://www.sisarang.co.kr)에서 2007년 첫 신인문학상 당선자들을 발표했다.

2007년 창조문학신문 첫 신인문학상 당선자들은 사진의 왼편에서 오른 쪽으로 온 동호 씨, 한 현수 씨, 김 종헌 씨, 방 승복 씨, 이 재기 씨이다.

창조문인협회 이 경덕 시인(서울지역)은 온 동호 씨의 작품에 대해 “양식이 없어 점심을 고구마와 옥수수로 때우던 그 시절의,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보리밥에 참기름 넣어 비벼먹던 풍경이 우리의 영원한 향수가 되어 작가의 마음속에서 펄펄 끓어오르듯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하고, 한 현수 씨의 작품에 대해서는 “봉황이 날개를 펴듯 아침 햇살을 병풍을 펼치는 모습으로 표현한 시”라고 하며 “이 시에서 작가는 한 해의 난관을 극복하고 쌓아올린 마지막 달 12월에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고 있다. 노아가 가족들을 이끌고 방주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를 이끄는 작가가 되어주기 바란다”고 주문한다.

창조문인협회 최 성훈 시인(경기지역)은 “전체 응모작 중에서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가식적이고 부담스런 느낌이 들며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작품이 있다”, 그리고 “이해는 가는데 감동이 없다면, 설명문 같은 느낌이 든다면, 어떻게 좋은 시라고 말해야 하는지 응모자들은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평했다.

창조문인협회 오 우식 시인(제주지역)은 당선된 작품들에 대하여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배어있고 시적 진술들이 진지하고 단단하다”고 평가한다.

박인과 문학평론가는 “이제 신인문학상에 당선된 시어들을, 그 힘찬 시어(詩魚)들을, 인터넷의 넓고 영원한 바다에 풀어놓는다. 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당선자들은 이제 한국문단에서 새로운 한국문학의 횃불잡이, 혹은 새로운 신춘문예의 횃불잡이, 세계 문화와 역사의 길라잡이 역할들을 다할 것으로 사려된다. 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출신들의 문력의 틀은 싱싱한 언어의 이빨에서 돋아나는 산소통과 같다. 이제 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당선자 여러분의 문장들을 영원한 생명의 자궁으로 통하는 인터넷의 혈자리마다 아픔으로 꽂아 놓는다. 푸르고 푸른 희망과 생명의 시침으로 그리움의 경락을 짚어 정확한 혈자리에 꽂아놓고 값없이 주시는 신의 선물인 우주의 기운을 감아 돌릴 것이다. 이제 시의 자궁에 시침함으로, 문장의 경락에 드러난 혈자리들을 두드려댐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생태계의 마지막 최첨단 에너지를 받아 잘 자생해 주기를 바란다. 맑은 대나무 숲의 향기처럼 깊고 푸른 하늘을 받아 압축하고 농축하고 울궈내어 파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생명의 열매들을 탐스럽게 달아 모두 문학의 금자탑, 그 시어들 혹은 문장들의 뿌리에서 돋아나는 순수한 생명의 환희로 날개 돋친 말씀의 창조력으로 진정한 구원의 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한다.

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영광의 당선작들과 심사평, 당선자들의 약력과 당선소감 등은 다음과 같다. 참조 : http://cafe.daum.net/msi


▣ 12월의 그 날에 / 한 현수 作 (48세, 전북 전주産)

네팔의 어느 산기슭
뼛속까지 꽁꽁 굳을 것 같던
구부려 앉은 허름한 대나무집에서
온 몸을 떨며 껴안고 지새던 밤
그 날을 기억하니.
파란 하늘에 튕겨 나온 별을
하나, 둘 짚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울던
12월의 그 날에
떨리는 턱이 부서질 듯 고함을 질렀던 기억,
경악이었어, 그것은
히말라야 천지의 일출(日出)!
만년설 어깨를 짚고 뛰어 오르는 황금불이
고봉(高峯)의 가슴마다
급하게 미끄러지며 노란 광선을 뿌리고,
수십 개 칠천고봉(七千高峯)의 뚝심마저
찰나에 제압하는 경이(驚異).
터널을 막 뚫고 나온 폭주기관차처럼
밤사이 접었던 병풍을 펼치는 거대한 아침에
무엇도 숨길 수 없는 빛의 향연,
빛의 충만 속으로
생명을 깨우는 하늘의 음성이 가득한
그 날을 기억하니.
창조의 서막, 그 찬미에 잠기며
어둠과 고통이 해방의 자유를 껴안고
극치의 아침을 맞는
12월의 그 날에


♣ 한 현수 약력

* 경기도 광주시 거주
* 전북 전주産
* 가정의학과 전문의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 분당 ‘야베스가정의학과’ 원장
* 칼럼니스트, 숲생태전문가


♣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의 표상으로 열려오는 계시록의 축소판
―신인문학상 심사평 / 박 인과 문학평론가

한 현수의 시는 신춘문예의 틀을 벗어났다. 그러면서 신춘문예의 문법의 맥을 감지하고 있다. 잘 선택된 언어의 기능들을 잘 활용하여 시적 극대화를 꾀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가 빼다 박은 문장의 이빨에 튼튼히 뿌리 내린 시어들은 그 자체로서 각자 고유한 틀과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당선작 “12월의 그 날에”는 한 현수의 신앙적 여정과 감성이 빼곡하게, 농도 짙은 질감으로 우리의 그리움 충만한 가슴 깨진 옥합의 극한 향기처럼, 잘 나가는 신춘문예의 문법을 깨트리며 싱싱한 심호흡으로 다가온다.

참신한 신앙시이다. 고루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편벽된 신앙세계가 아니고 열린 신앙세계이다. 그럼으로 해서 그의 시에서는 종교적인 색체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깊게 은유된 그의 신앙세계는 특유의 에너지를 발출하며 천지의 맥을 추스린다.

튼튼한 생태시이다. 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놀라움의 연속에 대한 경이를 그리고자 하는 작가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우물처럼 깊고 푸른 그리움으로 농익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신앙의 거울이다. 그 거울이 바로 그의 시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신앙시 혹은 생태시는 그의 신에 대한 관념의 진실한 존재의 가치 표출에 대한 변으로서의 생태계의 거울 역할을 하고 있는 꿈의 작품으로서, 그는 자연의 생태계를 끌어들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건져내며, 그것을 또한 인류의 희망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주도하고 있음으로 해서 신앙적인 삶의 여정의 인식으로서의 인류의 구원에 대한 광명한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다.

그의 시어들 속에서 이제 그 근거를 사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네팔의 어느 산기슭 / 뼛속까지 꽁꽁 굳을 것 같던 / 구부려 앉은 허름한 대나무집에서 / 온 몸을 떨며 껴안고 지새던 밤”에서 ‘네팔의 어느 산기슭’이라는 신의 땅에서 부재중인 인류의 존재의 후미진 곳, 그 망각의 땅을 의미할 수 있는 시어를 심어놓고 출발하여 ‘뼛속까지 꽁꽁 굳을 것 같은’ 사망의 땅, ‘온몸을 떨며 껴안고 지새는 밤’이라며 아직은 우울한 어둠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인류의 현세적인 삶의 방식을 그 ‘밤’이라는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 언어는 생태적인 자연의 감각으로부터 꺼내어 깊게 돌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더 돋보이는 “허름한 대나무집”이라는 시어를 보자. ‘대나무’는 절개와 희망의 푸른 잎의 상징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곧게 자라는 나무이다. 옛부터 이 대나무는 침의 재료로 쓰였다. 대나무로 만든 죽침(竹鍼)은 많은 죽음의 혈에 꽂혀 생명의 기를 돌게 하는, 천지의 에너지를 운용(運用)하는 기능을 가지고 인류에게 많은 희망을 주어왔다. 그 죽침(竹鍼)은 신의 선물이다. 생태학적으로 살펴보면 대나무는 외떡잎식물로서 잎맥이 나란히맥으로 이루어진 생물체에 속한다.

성경의 이사야서 11장 1절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외떡잎식물의 속성을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외떡잎식물이다. 이사야서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는 ‘이새’의 계보에서 싹 튼, ‘한 가지’ 혹은 ‘한 싹’의 함의가 있다. 그렇듯이 그는 오직 죄악의 세상과 맞서서 외로이 투쟁한 단 한사람의 의인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대나무의 속성, 즉 외떡잎식물의 속성을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며 환영하였다. 종려나무는 외떡잎식물이며 나란히맥을 형성하고 있다. 외떡잎식물의 속성을 닮은 그가 이제는 쌍떡잎식물의 가시면류관을 쓰고 쌍떡잎식물로 만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영적인 쌍떡잎식물의 그물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어쩌면 인류와는 전혀 다른 신의 속성으로 인류의 사망의 혈에 사랑의 침으로 꽂혀온 단 하나의 외떡잎식물이었다. 외떡잎식물의 속성으로 그는 신의 본질을 지니고서 인류와는 생태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으나 인간의 속성을 갖추고 많은 사람의 고통을 짊어지며 쉼과 안식을 주기 위해 인류와 어울린 성화의 쌍떡잎식물의 영적 세계를 표출하였다. 인류의 죽음의 들판에 홀로 외로이 꽂혀온 외떡잎식물의 고고한 자태를 지니고서 사흘만에 무덤의 권세를 물리치고 생명으로 돌출된 생명의 죽침(竹鍼) 역할을 이 사망의 땅에 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삶의 무덤에 꽂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침은 생명을 낳게 하였다. 한 현수는 그의 시어에서 “생명을 깨우는 하늘의 음성”을 담아내고 있다. 그것이 예수의 부활의 의미라면 또한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사랑의 침은 인류의 새로운 생태계에로의 부활의 희망인 것이다. 이 시의 골짜기, 그 은유의 항아리에 담긴 깊은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는 “자신의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것은 바로 이웃과 더불어 사랑의 그물맥, 즉 영적인 쌍떡잎식물의 그물맥을 형성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오직 홀로 오신 그분은 신성을 소유한 단 한 분의 신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상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길로서 생명의 진리의 빛깔로 흔들리는 외떡잎식물로 존재하면서 성화된 쌍떡잎식물의 사랑의 그물맥을 희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포도나무이며 모든 자들은 그의 지체가 된다는 성경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다. 포도나무는 쌍떡잎식물로서 그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서로 어울려 사랑의 그물맥을 형성하여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그물맥은 알알이 열린 포도알처럼 생명의 알들을 가지마다 맺는 것이다.

그래서 온 인류는, 예수가 자신의 피보다 더 사랑하는 온 인류는 ‘허름한 대나무집’의 상징 속에서 살아간다. “구부려 앉은 허름한 대나무집”에서 “떨며 지새던 밤”은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어두운 사망의 땅에 거하는 현재의 공간을 대변한다. 즉, 예수가 남겨놓고 간 오직 하나의 사랑, 대쪽처럼 곧고 밝아서 다른 사망의 그늘과는 어울릴 수 없는 빛의 진리의 아들들이 사는 ‘아직’ 어두운 땅은 ‘허름한 대나무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온 인류는 성화된 영적인 쌍떡잎식물의 사랑의 그물맥의 상징을 바라보며, 신과 인간이 어울리는 초자연적인 쌍떡잎 숲의 그물맥의 사랑을 표상하며 ‘이미’ 도래한 사랑의 나라, 그 성화의 영역으로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현수의 시어 “천지의 일출”에서 드러난다. 해가 하나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천’과 ‘지’가 따로따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천’과 ‘지’가 같이 해를 밀고 올라온다. 해가 하나 올라오는 것 같은, 한 싹이 돌출되는 외떡잎식물의 표상에서 벗어나 함께 올라오며 어울리는 사랑의 지평선, 그 생명의 층은 투명하게 떠오르는 쌍떡잎식물의 표상으로 진보한 것이다.

이것은 꿈의 세계, 꿈의 진보된 생태계의 환희에 대한 영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빛의 향연”인 것이다. 빛들은 땅에 충만하여 서로 그물맥을 촘촘히 형성하여 어둠을 밀어낸다. 빛은 신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들은 모두 참나무숲의 싱싱한 바람처럼 일어나 ‘참빛’의 자녀들로서 참떡갈나무의 쌍떡잎식물 잎맥처럼 참신함으로 흔들리며 ‘빛의 향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을 깨우는 하늘의 음성”이 가득한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태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이 준비해 놓은 새로운 생태 환경으로 진보하는 날은, 바로 그날은, “12월의 그 날”로서 한 현수는 1년 중 마지막 달을 선정하여 인류의 마지막 때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어둠과 고통이 해방”된 ‘극치’의 아침, “어둠과 고통이 해방의 자유를 껴안고 / 극치의 아침을 맞는” 그 풍경은 “병풍을 펼치는 거대한 아침”의 표현에서 보여지는 포용력을 간직한 영적인 쌍떡잎식물의 아침의 표상이다. 그것은 “천지의 일출”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열림을 보는 것으로서 일종의 묵시록에 해당하는 아름답고 힘찬 생명력을 발산하는 꿈의 계시록의 축소판이다.

이제 그가 뛰어난 은혜와 진리의 감성으로 계시의 바코드를 풀어내기 시작하면, 제일 으뜸인 삶의 원리가 우주에 충만된 신의 사랑인 것임을 우리의 이웃이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 신인문학상 당선소감 / 한 현수

“/ 내 나이 어디로 갈 줄 모른다. 이미 돌아오지 못할 하늘을 날고, 낙엽을 따라 휘돌다가, 숲에 굵은 점 하나 찍어 버렸으니……/”

창조문학신문을 알게 된 것이 제게는 큰 축복입니다. “12월의 그 날에”는 15년 전 네팔에서 각인된 경험을 최근에 노래한 것입니다. 제 나이 어디로 갈 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가장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방황할 때가 있었지요. 그러다가 숲을 알게 되었고, 생태를 알게 되었고,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숲에는 나무와 풀, 흙, 바람과 햇살, 곤충, 새들이 있습니다. 숲에 가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노래를 부르고 묵상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숲을 찾아갑니다. 우레가 있어도 친구 만나듯 숲에 갑니다. 비록 어수룩해 보여도 묵묵히 나의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숲이 있는 산과 바다에는 창조주의 지혜와 지식의 코드가 있습니다.

지금은 숲과 영성, 숲과 건강, 숲과 문학이라는 가치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생태적인 글을 많이 쓰고 싶습니다. 아직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여 창조문학신문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의 지도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글을 선하여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어떤 풍경 / 김 종헌 作 (42세, 부산産)

나무가 서 있고
천년쯤 살았을 것 같은 나무가 서 있고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이 없어 보이는데
스스로 무너질 수 없는 남자처럼
담담히 하늘을 짚고 나무가 서 있고

눈이 내리고
잊혀진 사랑처럼 빛바랜 낙엽 위로
깃털 같은 눈이 내리고
궁상한 가지마다 하얀 꽃이 피고
깊은 수렁 같은 하늘
수없이 절망하고
수없이 꿈을 꾸고

바람이 불고
밤새 앓는 신음소리로 바람이 불고
하얀 꽃잎이 날리고
그렇게 서성이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더 쓸쓸한 바람
외롭다고
외롭다고 고백해 버리고


♣ 김 종헌 약력

* 부산시 사하구 거주
* 부산産
* 경남대학교 전산통계학과, 창신대학 음악과(성악전공).
* 교회 지휘 20년.
* 음악(성악, 지휘)래슨, 찬양 아카데미 강사.
* ‘들향문학회’ 사무국장, ‘석파랑문학회’ 동인
* ‘시마을’ 회원, ‘뿌리문학회’ 회원
* 공저시집-‘꽃보다 아름다운 그대’


♣ 그리움의 순환소수의 음표들로 존재하는 ‘하얀 꽃잎’의 시어들
―신인문학상 심사평 / 박 인과 문학평론가

김 종헌의 시는 요즘 신춘문예의 식상한 산문적 표현법을 지향하지 않고 시의 리듬을 잘 살려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시는 신의 그리움에 대한 극한 외로움의 순환소수의 수렁에서 ‘하얀 꽃잎’으로 흩날리며 자유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가 부리는 시어들은 시의 경락에서 그리움의 순환소수의 음표들로, 구원의 서정으로 존재하는 ‘하얀 꽃잎’의 레이어들을 펼쳐낸다.

그의 시적 진술로서 그는 ‘수없이 절망’하면서도 계속하여 ‘꿈을 꾸면’서 ‘외롭다고’ ‘외롭다고’ 수없이 고백한다. 수없이 ‘외롭다고’ 시의 강으로 시침(施鍼)하는 그의 시어가 그의 신을 향한 그리움의 순환소수의 마디이다. ‘천 년 쯤 살았을 것 같은 나무’로 서있으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그리움의 관절이다. 생명의 유기체 속 본질에 근거하는 신에 대한 영원한 생명의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신이 인간의 존재 안에 회귀(回歸)의 칩으로 내장하여 둔 생명의 코드이다. 애정의 대상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그 ‘하얀 꽃잎’은 그러한 그의 신앙적인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깨끗한 구원의 서정으로 난타되며, 혹은 “깊은 수렁 같은 하늘”로 빠져들며 그 ‘하얀 꽃잎’은 안단테-칸타빌레(andante cantabile)로 날개를 치며 극대화 되는 듯하다. 김 종헌의 닉네임이 ‘안단테’이다.

그러나 아직은 ‘하얀 꽃잎’이 날리면서도 외로운 ‘뒷모습’을 표현함으로써 극한 기쁨의 서정과 극한 고독의 서정을 함께 갈무리하고 있다. 그것은 깊은 신학적인 영상으로서 신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지만 온전히 완성될 날을 채우고 있는 ‘아직’은 남은 날들을 채워야 하는 상태, 즉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끼어있는 인간존재의 중간지점을 ‘하얀 꽃잎’의 건반으로 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계시에 의해서 완성될 날을 더욱 그리워하며 “외롭다고 / 외롭다고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이 ‘외로움’은 끈임 없이 고백되는 인간의 진실이다. 무한 기쁨, 무한 영광, 무한 행복의 꿈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았던 한 스타 가수, ‘유니’의 자살에서도 우리는 이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 지를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 지를 그녀, ‘유니’의 마지막 음반의 그리움의 코드에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하늘나라에 거할 ‘유니’의 온전한 기쁨, 영원한 행복을 기원한다.)

그래서 ‘외롭다’고, ‘외롭다’고 자꾸 고백하는 김 종헌의 시가 자칫 일반적인 사랑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천 년 쯤 살았을 것 같은 나무”와 “깊은 수렁 같은 하늘”이란 시어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사랑시로 승화되게 하는 것이다. 그 ‘천 년 쯤 살았을 것 같은 나무’가 “담담히 하늘을 짚고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천 년 쯤 살았을’ 인류의 나무, 인류의 역사는 ‘하늘을 짚고’, 즉 하늘의 뜻, 즉 신의 뜻을 감지하며 살아가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인이 바라보는 영상이 흐르는 시에는 몇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지도 모를 자신의 부재중의 존재의 시각까지 감지하는 구원의 틀에 의한 영원한 생명의 칩을 내장하고 있다.

“눈이 내리고 / 잊혀진 사랑처럼 빛바랜 낙엽 위로 / 깃털 같은 눈이 내리”면 ‘하얀 꽃잎’이 피어나게 된다. 신의 사랑을 잊은 것 같은 인류의 의식의 ‘빛바랜 낙엽 위로’ ‘깃털 같은’ 즉 포근한 사랑의 ‘눈’이 내리면 그 사랑에 의해 ‘궁상한 가지마다’ ‘하얀 꽃’이 피어 ‘하얀 꽃잎’이 날리는 것이다. 아직은 죽음 같은 생명이 ‘이미’와 ‘미래’에 ‘하얀 꽃잎’의 사랑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사랑의 레이어가 “깊은 수렁 같은 하늘”의 층으로 깊게깊게 기록되는 시인의 시는 시인 자신도 모를 존재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수없이 절망하고’, ‘수없이 꿈을 꾸며’ 올라가는 것이다. 그 ‘깊은 수렁 같은 하늘’이 깊고 깊어도 신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외롭다’고 다시 또 ‘외롭다’고 끝없는 순환소수의 음표들을 두드리며, 생의 고독과 고통의 낮은음자리에서 ‘천 년 쯤 살았을 나무’ 그 ‘궁상한 가지’에서 피어나는 ‘하얀 꽃잎’의 순수한 신앙의 혼불로 존재하며 날마다 날마다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깊은 수렁 같은 하늘’ 그 높은음자리의 사랑으로, 생명과 영원한 구원의 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제 그가 더욱 깊어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음률의 세계로 시어들을 풀어낼 때마다 낮은음자리표의 낚싯줄에 걸려오는 높은음자리표의 메시지를 경험할 것이며, 또한 낮은음자리표와 높은음자리표의 성숙된 그물맥의 화음으로 진동하는 오선지 위에 안단테 영상으로 날아다니는 ‘하얀 꽃잎’의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신인문학상 당선소감 / 김 종헌

시가 좋아서 시처럼 산다.
시처럼 사랑하고 시처럼 이별하며
그리움도 외로움도 내 삶의 편린(片鱗)이라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진주처럼 품고 산다.
푹 찌르면 주루룩 시가 흘러 나올만치
시에 젖어 시처럼 산다.

시가 좋아서 시에 취해 산다.
음악에 취해 노래를 하고
바다에 취해 마음을 넓히며
삶에 취해 사람을 사랑하듯
그렇게 시에 취해 산다.
아직은 삶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
세상의 바람에 홀로 나부끼는
시의 주정(酒酊)이 눈물겹고
진솔한 무게로 부끄럽지 않은 시를 꿈꾸는
숙취(宿醉)가 속이 쓰리다.


▣ 지순한 행복 / 이재기 作 (43세, 경기도 수원 거주)

지스러기 같은 慾望
불같이 내면에서 타오르고
억대스레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인생은 欲望을 지나
慾望으로 집착되어질 때부터
慾望의 언걸로
고뇌의 밤을 지새우게 되나 봅니다.

욕망으로 웅천된 삶은
벽 허물어지듯 중심을 무너뜨리고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고양이가 호랑이처럼
살고자 할 때
欲望은 慾望으로 삐거덕거리고
생의 균열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지순한 행복으로의 첫 디딤은
컵에 물 채우듯 적은 것이라도
족한 줄 아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내 안의 속사람과 거푸집의 사람은
欲望과 慾望사이에서
무휴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 이 재기 약력

* 경기도 수원시 거주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독태권도선교회’ 대표 간사
* ‘화랑태권도체육관’ 관장
*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 싱싱한 믿음의 바늘로 생명 신학의 형상을 표현하는 구원의 서정
―신인문학상 심사평 / 박 인과 문학평론가

요즘 신춘문예 이야기로 문단이 떠들썩하다. 그런데 이 재기의 시는 이른바 신춘문예의 그러한 고정된 틀을 감지하지 않는 시이다. 그 고정된 틀 즉, 삶의 거푸집, 혹은 존재의 거푸집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술적 영상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의 그림에서 깊은 신학을 촉촉하고 강렬하게 생명의 자궁으로 꿰어 올리고 있다. 또한 겨레말의 맛을 살리고자 하는 진솔한 노력이 이 시의 가치를 한층 더 빛내주고 있으며, 신학적 사유의 메시지가 죄악의 땅 심층 깊이 한반도를 뒤흔들던 강원도 평창 지진처럼(2007. 01. 20) 꿈틀거리며 그가 선포하는 ‘말씀’은 생명의 시가 되어 “생의 균열” 같은 사망의 무덤을 갈라놓게 되는 것이다.

이 재기의 시는 성경의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을 싱싱한 언어의 귀를 열고 있는 그의 믿음의 바늘로, 생명의 낚싯바늘로 꿰어 올리고 있는 신앙시이다.

이 재기의 시의 뼈대는 ‘욕심’ → ‘죄’ → ‘사망’이라는 신앙적 인식으로 인해 성경의 바탕에서 뽑혀 올려진 것들이며 그것들이 신학적 메시지의 밑둥으로 그의 문학의 얼개에 씽씽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욕심’에 해당하는 시어가 ‘지스러기 같은 慾望’으로 나타나 있고, ‘죄’에 해당하는 시어가 ‘이성을 마비시킵니다.’에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사망’에 해당하는 시어는 바로 ‘생의 균열’로서 “欲望이 慾望으로 삐거덕거릴 때” “시작되는 것”이다. 즉,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을 줄낚시처럼 줄줄이 꿰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고린도 후서 4장 16절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는 말씀을 튼튼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현(絃)으로 건져 올리고 있다. 그것은 “오늘도 / 내 안의 속사람과 거푸집의 사람은 / 欲望과 慾望사이에서 / 무휴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는 그의 마지막 시어들에서 알 수 있다. ‘내 안의 속사람’과 ‘거푸집의 사람’에서 이 시의 주제가 깊어짐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거푸집’은 ‘겉사람’을 표현하기 위한 시어로 선택한 것인데 이 ‘거푸집’은 “쇠붙이를 녹여 부어서 만드는 물건의 바탕으로 쓰이는 모형”이란 뜻으로서 몸의 겉모양을 얕잡아 일컫는 말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는 이 ‘거푸집’의 시어가 인류의 헛된 욕망의 껍데기를 대유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는 ‘欲望과 慾望사이에서’ 혹은 죄와 욕망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는 존재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 날마다 겉사람을 벗어버리고 속사람으로 성화되고자 하는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서정의 튼튼한 틀로 존재하는, 이 재기가 죄의 형상으로 가득한 인류의 사망의 바다에 생명의 그물로 던지고 있는, 신의 뜻이다.

이제 그가 길과 진리와 생명의 글을 쓰고 또 써서 귀한 신학으로 돋아나는 문학적 영성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인류는 그가 물리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메신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신인문학상 당선소감 / 이 재기

애면글면 용빼가며 쓴 보람이 있나 봅니다.
솔직히 졸작인데도 심사평을 너그러이 해줘서 그런 것이지
어찌 실력이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당선이 됐다는 소식은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신인응모작품으로 올린 다섯 편의 시들 가운데
세 편은 삼십대 초반에 쓴 것이고,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시와 결별하다가
올 초에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철이 들었는지
다시 시와 재결합해서 애오라지 몇 편을 앙버팀으로 써 보았는데
그중의 시 “지순한 행복”이 당선됐다 하니
어줍기만 할 따름입니다.
아직 본인의 시가 세상에 내놓기에는
어리보기한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좋게 봐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제 누가 봐도 어엿한 시인(?)으로 등단했으니,
세상에 내놔도 창피하지 않을 만큼의
어연번듯한 작품이 나오도록 영혼에 닦달질을 좀 해야겠습니다.


▣ 내 안의 가을 / 온 동호 作 (68세, 전북 전주産)

내 가을은 호젓한 먼 나라,
그 아득한 꿈의 젖줄

흰 치마 적삼에 무명수건을 쓴
어머님 젖가슴 영그는 나라

하늘과 땅에 살벌한 신경줄 드리우고
무서리 맵차게 내리깔리는 날
닳고 닳은 깜장 고무신 끌고
우리 어머님, 홀태를 이고 홀로
논으로 밭으로 들타작을 가시던 어머니

운동회 날에는 울기쌀로 밥하고
토실토실한 알밤 같은 사랑으로
고구마를 눈물처럼 삶아 내오시던 어머님

지금도 내 안의 하늘, 살아있다.
어린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와
책보를 내동댕이치고 그리움처럼
밭으로 내달리던 슬픔의 지평선 저 끝

탁탁 토닥토닥…
밭 둔덕 버럭더미 위에서 어머니는
매로 들꽤를 열씨미 두드리시고
콩깍지도 열씨미 투드리시고
내 남은 삶의 부스러기들 고통처럼 열씨미
뚜드리시고

기억의 끝자락에서 열씨미
못난 아들의 기쁨도 뚜드리시고
못난 아들의 슬픔도 한가슴
뚜드리시고

꽤 재미난 얘기 들려주시던
꽤 쏟아지는 소리
스륵스륵…

이불포 끝자락에 놓인 소쿠리에서도
들려오는 얘기 소리,
가지콩과 고구마가 희번덕거리며
도란도란…

가지콩과 고구마가 꿈꾸는 행복들이
한겨울 눈송이처럼
소복소복…


♣ 온 동호 약력

* 전주시 완산구 거주
* 전주産
* 전주 ‘기린문학’ 초창기 98년부터 문학회 활동.


♣ 사랑의 본체와 감성의 모니터를 연결하여 눈물을 출력하는 그리움의 코드
―신인문학상 심사평 : 박인과 문학평론가

온 동호의 시는 몇 번 읽어도 감동을 준다. 그의 시의 경락에는 우리의 혼미한 삶 속에서 2007 신춘문예 작품들에서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의 그리움을 솎아내고 있는 고통과 슬픔으로 얹혀진 성스러운 한(恨)의 신경계로 어우러진 값비싼 눈물의 칩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소재들은 우리의 가슴에 항상 머물러 있는 고향과 그 어머님의 품에 대한 애틋한 절망 같은 그리움에 관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로서 꿈을 출력하기 위한 소프트웨어(software)이다.

그의 시어 ‘어머니’와 ‘내 안의 하늘’은 존재의 근거지가 되는 꿈의 하드웨어(hardware)이다. ‘어머니’는 사랑의 본체이다. ‘어머니’는 ‘내 안의 하늘’로서 인류의 꿈에 대한 사랑의 본체이다. 그리하여 남은 자들이 삶의 한을 엮은 그리움의 코드를 그 사랑의 본체에 꽂기만 하면 사랑의 전기는 그리움의 코드와 2비트(bit) 섹스를 하며 클라이맥스(climax)에 오르게 된다. 클라이맥스(climax)에 오르게 됨과 동시에 추억의 십팔인치 감성의 모니터로 눈물을 출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그 ‘어머니’란 소리만 들어도 그리움의 코드가 전율하고 동시에 눈물의 강을 흘려내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최첨단 사랑의 프린터가 된 우리의 동공의 우물에서 총천연색 그리움의 꽃이 피는 눈물의 강을 출력하게 되는 것이다. 정 기환 옹의 시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뻐꾹새’처럼 마냥 울음보를 터트리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류 모두의 꿈의 대상이며 꿈의 언어이고 생의 비밀을 간직하여 원초적인 출생의 본질에 근접할 수 있는 최초와 최후의 강물 같은 키워드이며 감성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눈물샘의 시어인 것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라는 시어는 2비트(bit)로 얼룩진 눈물을 프린트한다. 그 ‘눈물’은 구멍(0)과 존재(1)의 합성 언어이다. 존재는 항상 자신이 지나온 구멍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구멍과 존재의 언어는 무(無)와 유(有)의 언어로서 천지와 우주를 운행하는 신의 언어이다.

지나온 구멍 즉, 떠나온 집을 그리워하는 그의 향수(鄕愁) 같은 시의 꿈 꾸러미는 ‘꿈의 젖줄’, ‘흰 치마 적삼’, ‘울기쌀’, ‘고구마’, ‘들꽤’, ‘콩깍지’, ‘가지콩’, ‘들타작’ 등으로 갖추어져 우리의 유년의 시간을 아픔의 환희로 기워 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원초적 꿈의 존재를 어머님의 품으로 각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언어 감각은 상상의 지평선(0)과 형이상학(1)의 비무장지대를 질주하며 행복한 순간들을 현실적 눈물의 레이어로 캡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온 동호의 시를 보면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고 그의 시의 바닥에 인류의 우울의 숲이 시간의 강처럼 흐른다. 그의 시를 보며 우리는 머나먼 고향, 떠나온 꿈의 원천을 연어의 꿈길처럼 더듬어 올라가 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어에 의해서 ‘어머니’는 영원히, 싱싱한 망각의 슬픔으로 구조된 시간의 영역에서 싱싱하게 존재하며, 황금들녘에서 싯누런 태양을 굴리며 타작하고 계시는 현재형으로 (우리의 추억에 의해) 실존한다. 들꽤도 타작하고 콩깍지도 타작하고 “내 남은 삶의 부스러기들도 고통처럼” 타작하는 모습으로 현존한다.

이것은 한의 서정이다. 그리움(0)과 한(1, 외로움)의 서정이 엉기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한, 자식에 대한 사랑의 한으로 들꽤도 두드리고 자식의 고통까지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가의 감성이며, 희망이며, 이 시의 생명이다. 이 시의 혈자리이다. 시의 경락이다. 이 시의 경락을 두드릴 때마다 이 시어의 혈자리(0)에서 들꽤(1) 쏟아지는 소리가 ‘스륵스륵’ 들리게 되고, 이 시의 혈자리(0)를 시어의 작대기로 그 한(1)의 도리깨질로 타작할 때마다 ‘꿈꾸는 행복들이 한겨울 눈송이처럼’ ‘소복소복’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한의 서정이다.

온 동호는 ‘꿈의 젖줄’을 대고 있는 그의 시의 혈자리에서 시어의 출력기로 스륵스륵… 고소하게 들꽤를 출력하고, 소복소복… 기쁘게 행복도 출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어머님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의 노래가 더욱 깊게 우리의 가슴에 밀착되어 오게 되면, 우리는 잊어버린 고향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 안에 탄생 전부터 보관되어 있는 영원한 사랑의 원류를 찾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눈물의 강을 건너 생명의 모니터로 원초적인 사랑을 출력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랑의 출력기로 영원한 생명의 강을 출력해 낼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눈물의 모니터로 영원한 시간의 강도 출력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시어의 무(無)와 유(有)의 출력기로 신의 언어도 출력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당선소감 / 온 동호

어찌 세상을 살다 보니 시라는 것을 써 보고 울고 싶다.


▣ 몽환(夢幻) / 방 승복 作 (수필, 37세, 강원도 정선産)

“저 복권(福券)한 장만 주세요.”

저녁 퇴근길 집 근처를 지나는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복권 판매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복권 한 장을 산다. 복권을 사기 시작한 지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기억의 시점을 넘어선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 그러는지 나도 모르지만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판매점 주인이 건네준 복권을 빠르게 지갑 속에 넣고서 이내 자리를 떠난다.

일주일에 한 번 추첨을 하는 추첨식 복권, 추첨식 복권은 주말과 휴일에 추첨을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복권을 구매한다. 나는 이들과 다르게 주초에 복권을 구매한다. 오랜 기간 동안 복권을 구매하였던 나는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추첨이 완료되는 일주일 동안 나만의 몽환(夢幻)을 즐기기 위하여 터득한 방법이다.

복권(福券)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경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의 시저 왕이 로마재건을 위한 기금마련의 방편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기원은 근대 이전의 한국사회에서 크게 발달한 일종의 민간협동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계”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복권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며 추첨의 형식 또한 다양한 방법이 있다. 처음 복권(福券)은 어떤 것이었느냐는 인식에 앞서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첫 번째 복권은 주택복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일요일 정오 때 무언가 작은 종이를 펼쳐놓고 방송을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복권이었으며, 텔레비전 안에서 진행자가 “준비하시고 쏘세요.”라는 외침과 동시에 활을 쏘아 돌아가는 번호판을 맞추는 추첨 방식이라는 것도 또한 알게 되었다.

이후 나의 성장기에는 다양한 이름의 복권이 나왔다. 각기 다른 1등의 금액이 명시된 복권들이지만 크게 나누어보면 주택복권과 같은 종류의 복권과 즉석식 복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석식 복권이 처음 나왔을 때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추첨일까지 기다려야하는 기존의 방식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당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즉석복권의 판매를 부추겼을 것이다.

1등 당첨자가 꾸었다는 돼지꿈은 복권당첨의 교과서적인 꿈이 되었고 조상님이 꿈에 나와 당첨의 예시를 주었다는 꿈 또한 당첨을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선 한 번 쯤 꿔보고 싶은 꿈이 되었다.

나는 오늘 인생역전의 기회를 준다는 복권 한 장을 샀다.

몇 년 전부터 발매한 복권인데 발매 이후에, 매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이 복권을 산다. 처음엔 당첨의 확률이 8만분의 1인 복권의 1등 당첨을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지만 그 생각을 접은 지는 이미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도 이 복권을 사는 것은 꿈을 꾸기 위해서다. 복권을 사든 안 사든 누구나 한번쯤은 복권당첨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은 커다란 집을 갖는 꿈을 꾸었을 것이고 여행이 꿈인 사람은 세계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저마다 각기 다른 꿈을 꾸었겠지만 나는 이런 꿈을 꾼다. 먼저 병환으로 몸이 불편하신 장모님을 위하여 여행을 가고 싶다. 벌써 13년째 병환으로 외출이 어려워 여행을 가지 못하시는 장모님께 이동이 편한 전동의자를 사드리고 오랫동안 멀리까지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꿈을 꾼다.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가끔 장모님이 “자네 요즘도 바쁜가?” 하시면 자식 된 도리를 못함이 늘 죄송하다. 그 다음으로 집세를 내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은 것과 큰 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학원 수강료를 제 때에 보내주는 것. 나는 오늘 이 꿈을 꾸기 위해 복권을 샀다.

요행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며 살아간다.
나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들과 다르진 않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오늘처럼 꿈을 꾸기 위해 복권을 살 것이다.

복권을 사고 당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일주일 동안 이렇게 난 5천원에 그 꿈을 산다. 일주일 유효기간의 몽환(夢幻) 가격이 5천원이다. 가끔은 아내가 “복권 맞았어?” 하며 내 꿈에 무임승차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꿈의 가격은 5천원이다.

예전에, 어렸을 때 어머님이 꿈꾸시던 몽환(夢幻)은 5백 원에 살 수 있었는데 꿈의 가격도 세월이 갈수록 오르는가 보다.


♣ 방 승복 약력

* 경기도 고양시 거주
* 강원도 정선産
* ‘문예춘추’ 신인문학상
* 여행가이드
* ‘시인과 육필시’ 회원


♣ 소박한 서민들의 꿈과 애환이 서린 복권에 대한 애틋한 단상
―신인문학상 심사평 : 박인과 문학평론가

방 승복의 수필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도 그만의 독특한 사유의 깊이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올해가 황금돼지해라는 상술적인 수법이 난무하지 않을지라도 인류가 꿈꾸고 있는 풍요로움의 상징인 돼지꿈은 날마다 우리의 꿈으로 현재진행형이 된다. 복권과 돼지의 꿈, 어머님에 대한 기억을 교차시키며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사유의 폭과 서술의 자연스러움으로 수필의 구조를 잘 엮어내고 있다.

“수필은 자유롭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장르”라고 하면서 수필을 가볍게 보는 문학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수필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수필이 어떤 고정화된 틀이 없다는 것은(물론 현대의 모든 장르에 다 적용되는 억지스러움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의 표현법이 따로 있다는 것으로서 더욱 더 개인의 개성이 질감 있게 펼쳐질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면 수필을 잘 쓰는 사람은 그만큼 인생과 역사와 미래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방 승복의 수필은 우리에게 평범하지 않은 사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삶과 문학정신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의 수필이 소박하고 담담하게 기록되면서도 싱싱한 아픔의 깊이를 독자들에게 선사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체험된 삶이 문학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사랑의 꿈을 꾼다. 복권에 당첨이 되면 “먼저 병환으로 몸이 불편하신 장모님을 위하여 여행을 가고 싶다. 벌써 13년째 병환으로 외출이 어려워 여행을 가지 못하시는 장모님께 이동이 편한 전동의자를 사드리고 오랫동안 멀리까지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꿈을 꾼다.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가끔 장모님이 “자네 요즘도 바쁜가?” 하시면 자식 된 도리를 못함이 늘 죄송하다. 그 다음으로 집세를 내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은 것과 큰 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학원 수강료를 제 때에 보내주는 것. 나는 오늘 이 꿈을 꾸기 위해 복권을 샀다.”며 싱싱한 꿈의 이야기를 행복처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또, 그의 문장에서 “복권을 사고 당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일주일 동안 이렇게 난 5천원에 그 꿈을 산다. 일주일 유효기간의 몽환(夢幻) 가격이 5천원이다. 가끔은 아내가 “복권 맞았어?” 하며 내 꿈에 무임승차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꿈의 가격은 5천원이다.”라며 재치 있는 꿈과 복권의 이야기를 마무리해가는 솜씨는 그만큼 그의 필력이 능숙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의 소시민적 그리움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나라, 한층 더 복지국가의 아름다운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더욱 더 쓰고 또 써서 서민과 인류의 아픔을 위로하며, 자신의 자아 혹은 우리의 가슴에 숨겨 둔 눈물 한 방울씩 꺼내어 상념에 잠길 수 있는 고운 언어로 이루어지는 힘찬 수필의 비단길, 그 꿈의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우리에게 꿈의 복권들이 쏟아지는 꿈을 자주 꾸게 해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 당선소감 / 방 승복

언제부턴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런 용기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글을 시작할 때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문득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다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게 될 때 나는 하고픈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글쓰기를 고민하는 저에게 신인문학상이란 커다란 선물을 전해주신 창조문학신문의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게 주신 용기는 제게 큰 힘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신인문학상 그 자체보다도 더 커다란 용기를 이렇게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젠 그 용기로 앞으로 글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스스로 떳떳한 글을 쓰도록 힘차게 노력하겠습니다.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창조문학신문사는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역량 있는 문인들을 배출하며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sisar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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