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잃어버린 10년’동안‘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채 한국 기업의 약진을 지켜봐야 했던 일본 기업들이 실적 회복을 바탕으로 글로벌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의 반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전자, 자동차, 조선 등 한국 기업들의 거의 모든 주력 시장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엔저를 기반으로 한 대대적인 가격 공세는 한국 기업들에게 강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가격 공세의 백미는 북미 디스플레이시장이다. 마쓰시타는 2006년 미국의 추수감사절연휴 기간에 PDP TV 가격을 50% 가까이 할인하는 깜짝 행사를 벌였다. 심지어 미국 최대 가전 유통점인 베스트바이에서는 42인치 PDP TV를 999불에 판매하기도 했다. 2006년 3분기까지 미국 시장에서 마쓰시타의 42인치 PDP TV 가격은 2,499달러였다. 품질과 브랜드로 승부하던 과거 일본 기업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형국이다.
아울러 일본 기업들은 BRICs를 비롯, 베트남, 태국 등 신흥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투자 타깃은 신흥시장에 맞추어져 있다. 도요타는 2009년까지 연간 45만대 규모의 추가 생산을 위해 중국, 인도 등에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며, 혼다 역시 2007년 까지 인도 내 생산 능력을 현재의 2배인 10만대로 확장할 계획이다. 마쓰시타, 소니 등 전자 기업 역시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에서 공격적인 사업 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게다가 2006년에 워크맨폰과 사이버샷폰으로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소니에릭슨은 최근 인도 시장을 겨냥해저가폰을 출시한다고 선언했다. 선진시장에서 일본 기업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국 기업들로서는 그동안 어렵게 쌓아놓은 신흥시장의 아성마저 무너진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기업의 신흥시장 공략 강화 배경
그렇다면 일본 기업들이 신흥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신흥 시장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증대되면서 소비 시장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주요 신흥시장 소비자들은 상위 20%가 전체가계 소득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노무라 종합연구소에 따르면, 2004년 기준으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흥 시장에서 중산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소비자는 1억 5천만 명 정도로 전 세계 인구의 약 5% 수준이며, 2009년이면 4억 명에 달해 전 세계 인구의약 14%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소비 시장으로서 신흥시장의 약진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BRICs 지역의 휴대폰 가입자 수는5억 명을 넘어섰으며 TV 연간 수요도 5,000만대에 육박하고 있다. 전자 제품의 경우신흥시장의 세계 시장 성장 기여율이 30%에 달한다. 가입자 수를 기준으로 한 휴대폰 시장의 경우는 신흥시장의 성장 기여율이 80%에 육박하고 있다. 이미 중국 PDP TV 시장은 2005년 4분기에 출하 대수 기준으로 일본을 제친 바 있다. 또한LCD TV 시장의 경우 2001년 일본이 60%를 차지하는 등 선진국이 90% 이상을 점유했으나, 2010년에는 BRICs 등 신흥 시장 비중이 40% 수준으로 확대 될 전망이다.
둘째, 글로벌 전략 차원에서 해외 시장 확대의 일환이다. 일본의 경기가 회복되었다고는 하나이는 근본적으로 전 세계 수요 확대에 따른 수출호조에 기인한다. 내수 시장의 성장은 둔화되고 있으며 소비 역시 정체가 예상되고 있다. 또한 산업 내 구조조정이 진전되어 과거에 비해 업체별로 사업 구조 측면에서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내수 시장에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 기업들의 글로벌화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이미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선진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 왔지만 한국기업들을 비롯한 경쟁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지속적인 성장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본 기업들이 해외 시장을 확대하기위해서는 또 다른 성장 축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신흥시장이다. 신흥시장은 시장 규모에 비해 아직도 주요 제품 보급률이 높지 않아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큰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경쟁 전략 차원에서 한국 기업과 로컬 기업에 대한 대응 측면이다. 향후 높은 성장이 예상되는 신흥시장을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으로 공략하여 한국 기업들의 시장 지위를 약화시키고 동시에 신흥 로컬 기업의 성장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은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신흥시장에서의 주도권을 한국 기업들에게 내주었지만, 브랜드 파워에 있어서는 여전히 밀리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기업들의 신흥시장 공략 강화는 브랜드 파워를 바탕으로 더 늦기 전에 신흥시장에서 한국 기업 및 신흥 로컬 기업의 독주를 막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본 기업의 신흥시장 전략
일본 기업들의 신흥시장 공략은 생산에서 마케팅,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례를 통해 일본 기업들의 신흥 시장 공략 전략을 살펴본다.
●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현지 생산 거점 구축
일본 기업들이 신흥시장 공략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현지 생산 거점 구축 및 생산능력 확대이다. 지역별 생산 거점 구축을 통해 신흥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는 선봉장은 마쓰시타이다. 마쓰시타는 중국에 이어 2006년, 러시아와 브라질에서도 평판TV의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2006년 9월부터 LCD TV 생산을 시작해 온 러시아 시장의 경우 수요 확대에 발맞춰 생산 규모를 5만대에서 25만대로 늘려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2006년부터 PDP TV 양산에 들어간 브라질 시장에서는 현지 정부가 일본 규격과 같은 HD TV 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생산 라인을 확충하여 TV를 비롯한 디지털 가전 시장 공략을 강화할 예정이다. 인도의 경우 첸나이에 판매 및 서비스 거점을 설립한 데 이어2007년에 가동 예정인 싱가포르 거점을 활용하여 시장 진입을 가속화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브라질 현지에서이미 2005년부터 LCD TV를 생산하고 있고, 인도시장을 겨냥해 인도와 FTA를 체결한 태국 거점을 활용하여 본격적으로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소니 이외에도 히타치 등 일본 전자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기반을 구축해온 태국을 거점으로 삼아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신흥시장 진출을 강화하고 있다. 도시바 역시 중국 LCD TV 시장의 성장세에 주목하고, 대련에 있는 브라운관TV 공장을 2007년 중에 LCD TV 공장으로 전환하여 현지 매출을 늘려 나갈 계획이다.
● 세계 동시 판매 지역에 신흥시장을 포함
아울러 일본 기업들은‘자국 내 우선 출시’의 관행에서 벗어나 세계 동시 판매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세계 동시 판매 계획은 향후 성장의 축을 내수 시장에서 해외 시장으로 전환하고 시장선점을 통해 빠르게 점유율을 늘려가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현저하게 짧아진 제품 수명 주기와 공격적인 설비 투자를 고려하면 빠른 제품출시와 함께 해외 시장 공동 출시는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기업들은 자국에 신제품을 먼저 소개하고 2~3개월 후에 북미와 유럽 등 주요 해외 시장에 수출해 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세계 동시 판매 계획이 미국, 유럽 등 선진시장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샤프는 미국과 유럽 외에 중국에서도 42, 46, 52인치 LCD TV 6개모델을 동시에 판매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해외 매출 비중을 60%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2005년부터 일본 및 북미, 유럽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 중 가장 먼저 세계 동시 판매를 추진한 바 있는 마쓰시타는 글로벌 PDP TV 시장 1등 달성에 세계 동시 판매 전략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2006년부터는 중국과 아시아, 중동으로 세계동시 판매 지역을 확대, 글로벌 PDP 시장에서40% 이상의 점유율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샤프와 마쓰시타 이외에도 도시바와 히타치 등 다른 일본 평판TV 업체 역시 전세계 동시 판매를 통한시장 점유율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 현지 밀착형 마케팅 강화
일본 기업들의 현지 밀착형 마케팅 노력도 눈에 띈다. 마쓰시타의 경우 전통적으로 대형 양판점보다는 현지 중소 전문점과의 관계를 중시해 왔다. 이는 대형 양판점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마케팅에 주력했던 국내 기업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대형 유통업체들과의 관계 강화를 통한 판매망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구조조정의 성과로 확보된 비용 절감분을 마케팅에 투입하여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 시장 사례를 살펴보면, 모스크바의대표적인 전자 상가인‘가르부쉬카’등 5개 지역에 판매 홍보 센터를 설치하는 한편, 대형 트레일러에 자사 제품을 운반하면서 지방 도시를 순회하는 등 지역 밀착형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소니의 경우에도 가전 양판점에 소니 전담 코너를 설치하여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소니는 양판점과의 협력을 통해 과거 브랜드 별로 상품을 전시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평판TV를 비롯해 디지털카메라, PC, 오디오 등 고가 제품을 종합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시키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신흥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약진 뚜렷
과거 신흥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성공 방정식은 철저한 현지화였다. 또한 일본 기업등 선진 기업과 비교했을 때‘품질 대비 적당한 가격(Value for Money)’을 제공함으로써 현지 소비자들을 효과적으로 유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 기업의 과거 성공 방정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기업들이 현지생산 거점 및 밀착 마케팅을 통해 현지화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엔저 효과를 통해 한/일 기업 간 코스트 경쟁력 격차가 축소된 데다 핵심 부품 및 소재의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 기업들이 열세에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본 기업들의 신흥시장 공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기업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국 시장의 경우, 일본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이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다. LCD TV의 경우 금액 기준으로 2005년 4% 수준에 머물던 소니의 시장 점유율은 2006년 8%로 2배가 늘었다. 같은 기간 도시바 역시 5.8%에서 7.4%로 시장 점유율이 상승하였다. PDP 시장의 마쓰시타도 2005년 19.6%에서 2006년 26.2%로 신장되었다. 가전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세탁기 및 에어컨 시장에서도 마쓰시타를 비롯한 일본기업들은 견조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러시아 가전 시장에서도 한국 브랜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일본 기업들과 로컬 브랜드 등 신흥시장 브랜드 사이에 끼어 성장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 이후 철수했던 일본 기업들이 재진입하여 엔저를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면서 중고가 시장에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LG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의 철옹성으로 불리던 인도 시장마저도 소니에릭슨의 저가폰 출시 및 태국 거점을 활용한 가전 시장 공략 본격화 등 일본 기업들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글로벌 전략 차원에서 대응해야
향후에도 일본 기업들의 신흥시장 공략은 계속될 전망이다. 특히,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목표를 세우고 신흥시장 공략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소니와 도시바는 2007년, 중국 LCD TV 시장에서 2006년 실적의 2배 수준인 50만대를 목표로 정했다. 마쓰시타 역시 상해 PDP 합작 공장에서 중국 HD TV 규격에 맞는 패널을 양산, 2007년에 총 30만대의 PDP TV를 판매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2005년 10월, 항저우에 설립한 세계 최대 가전 공장을 통해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공략을 본격화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기업의 신흥시장 공략 강화에 대해 한국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우선, 개별 시장 차원에서의 접근보다는 글로벌전략 차원에서의 대응이 바람직하다. 개별 시장차원에서 일본 기업들에 대응하다 보면 비용 측면에서도, 또한 효과 측면에서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관된 포지셔닝으로 경쟁에 임하되 사업별, 지역별로 공격과 방어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사업을 조정할 수 있는 수준까지 글로벌화를 진전시켜야 한다.
글로벌 차원에서 사업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경영 체제의 시스템화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마쓰시타와 샤프 등 일본 기업들이 세계 동시 판매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은 셀생산 방식과 글로벌 플랫폼 등으로 대표되는 경영의 모듈화 및 과학화가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도 글로벌 공급망 관리(SCM) 체계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생산지 효율화 노력을 가속화하는 한편, 제품 및 시장 전략을 명확히 함으로써 경영 체제를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
아울러 창의성과 유연성의 제고가 필요하다. 이제 한국 기업들은 일본 기업들을 모방하고 추격하는 도전자의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 기업들의 공세를 막아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벤치마킹에 의존하던 과거 방식에서 탈피해, 시장을 읽는 눈과 창의력을 기반으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업 방식과 시장 창출을 추구해야 한다. 개방형혁신 체제를 도입하여 외부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박천규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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