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문학신문, 특이한 생태평론 ‘버들치들의 6월 생태기록’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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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07-07-01 09:53
서울--(뉴스와이어)--창조문학신문사(대표 박인과)에서 '버들치들의 6월 생태기록'이라는 특이한 생태평론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부산북구문인협회의 동인지 <북구문학>제3호의 詩 작품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평론을 쓴 박인과 문학평론가는 "평론이란 게 굳이 어떤 틀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꾸만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비전을 평론에서 보여줘야 한다. 시대적으로 죽어있는 평론이 사는 길은 평론도 창작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평론에서 자신만의 특유한 창작품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피력하며 그 작은 출발로서 새로운 형태의 평론문학을 위해 기존의 관념 안에 새로운 詩의 세포의 물줄기를 그려넣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생태평론가 박인과 씨의 평론이 대중에게 맞아들어갈지 의문이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새로운 시도라는 면에서는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문단의 화제가 되고 실험적인 시도가 된 문학평론가 박인과의 생태평론은 아래와 같다.

○버들치들의 6월 생태기록 : 박인과 문학평론가
― 생태윤리에 귀의하는 詩의 버들치들의 산란 일기

Ⅰ. 들어가는 말

부산북구문학 동인지 <북구문학>제3호의 시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삶의 기록들을 훑어본다.

삼락(三樂)의 의식과 만락(萬樂)의 무의식 사이에서 유영하는 시어(詩魚)의 물안경을 끼고 잠재의식의 물속호흡기를 장착한 채 시간의 강물 속에서 가난과 죽음의 은유로 채색된 시간의 지느러미들, 그 6월의 버들치들의 생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버들치의 산란기 : 버들치는 깨끗한 1급수에서만 살아가는 1급수의 지표종인데, 넓은 하천과 호수 및 좁은 산간 계류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 몸의 길이는 약 8∼15cm이다. 15cm를 넘어 20cm가 되는 놈도 있다. 옆구리에는 짙은 갈색의 비늘 모양이 흩어져 있어서 버들치의 특유한 색채를 띠고 있다. 행동 양상은 매우 활발하며 맑고 찬 물을 좋아하고 물살이 부드러운 여울 같은 곳에 알을 낳는데 산란시기는 5~6월이다. <사전적인 버들치의 생태>

탐색하고 있는 삼락천(三樂川, 부산 북구)은, 맑게 흐르고 있는 삼락천의 물은 아직도 산소량과 유기질이 풍부한 채 싱싱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앗, 자유롭게 유영(游泳)하고 있는 많은 물고기들 중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버들치들이 눈에 띄었다. 버들치들은 5~6월이 산란기이기 때문인지 모두 산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선 시야에 들어오는대로 무작위로 8마리의 버들치들을 평론의 카메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북구 삼락천에 버들치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북구가 1급수의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급수의 수질을 유지하고 있는 북구 삼락동은 三樂洞이고 남구 민락동은 民樂洞이다. 삼락동은 산마을이고 민락동은 갯마을이다. 三樂은 세가지 즐거움이고 民樂은 민중의 즐거움이다. 三樂의 강물이 흘러흘러 民樂의 바다가 된다.

북구 시인의 빛깔로 三樂의 뜻은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하늘과 사람을 사랑하고’, ‘미래를 사랑하는’ 즐거움이다. 시적인 생태학으로 논한다면 그들의 창작의 기쁨은 그리움 흐르는 상상력의 계곡 깊이 빠져들어 홀로 되어 꽃피우는 청아한 현시적 존재의 실존적 부존재에 대한 탐색의 내밀화된 화석에 대한 단단한 슬픔의 튼튼한 환희이다. 결론은 존재의 부존재를 논하든, 부존재의 존재를 논하든 잃어버린 자아의 정체성에 관한 이미지의 그물에 걸려드는 버들치들에 대한 순수한 게놈(Genom)의 생태적 관계성에 의한 긴밀한 향수의 서정이다.
그래서 시인들이 역사의 강물 깊이 던지고 있는 시간의 그물로 건져올리고자 하는 것은 자연과 하늘을 닮은 버들치들의 생태이다. 그것이 그들에겐 꿈이 되고 또한 시를 가동케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북구문인들의 그 꿈은 알이다. 그것도 시간의 알이다. 그들의 시작 행위의 목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달콤하고 비릿한 시간의 알 속에서 튼튼한 생태의 정체성을 부화시켜 줄 생명의 젖줄로 각기 다른 존재의 빛깔로 일어서며, 영원한 시간의 핵으로 엉겨드는 그리움의 나이테를 표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창조 행위이다.

이제 창조의 물길을 타고 환호하는 물결의 콧잔등을 훌치며 생태윤리로 회귀하는 8마리 버들치들의 생태 속에 나타나는 강렬한 생명에의 꿈, 그 꿈의 알을 풍요롭고 맑은 시어의 둥지 위에서 평론의 틀로 부화시켜 보기로 한다.

Ⅱ. 북구 버들치들의 생활 양태
― 비슷한 생태환경의 행동 양식이 불러오는 관계성의 법칙 탐구

▣ 판자촌 사람들(첫 번째 버들치) / 김가원

졸음을 쫓는 수선 집 재봉틀 소리가
이른 아침을 깁는다
수척한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일터로 가는 사람들 발걸음이
짹각거리며 시계 바늘을 쫓는다
폐타이어가 기대고 있는 전신주
“철거지역”의 붉은 글귀가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의
시한부 삶을 예고한다
사글세방을 비우라는 독촉에
어디론가 떠나버린 더벅머리 사내
그의 뒷모습이 보이던 길목
발가벗은 겨울 햇살이 앉아있다
담뱃불에 몸을 녹이는 늙은 사내들
티눈처럼 골목 어귀에 박혀 있고
자전거 수리 점 앞에
펑크 난 길을 끌고 온 아이들
개구리 울음 같은 얘기들을 풀어 놓는다
검은 테 안경의 절뚝거리는 사내가
후줄근한 바퀴의 내장을 꺼내든다
보글거리며 뿜어내는
낡은 주전자의 입김 속에서
하얀 꿈들이 기지개를 켠다
구멍 난 삶을 땜질하는 달동네의
야윈 어깨 위로
가난한 아침이 눈을 뜬다.

약 반 세기 전 부산에는 판자집이 즐비했다. 산과 들판에 온통 판자집이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피난민들은 대부분 판자집으로 자리잡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런데 오늘도 판자집은 존재한다. 먼 기억의 과거와 현재의 아픔의 그림자가 그 판자집에서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김가원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고통받는 이웃의 현실을 농도 짙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의 언어는 ‘구멍 난 삶을 땜질하는 달동네의’ 영상을 희망으로 만들어준다. 그의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시어들 속에는 “철거지역”에 대한 애틋한 눈물과 사랑이 있다. 그 속에서 “일터로 가는 사람들 발걸음이 / 짹각거리며 시계 바늘을 쫓는다”며 시간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용기 있고 근면한 우리의 일상을 엄호한다.

그의 시는 비유가 튼튼하고 신선하다. 단언컨데, 각기 다른 비유를 사용하는 시인의 깊은 개성들이 우리를 낡은 나태의 잠에서 깨워주고 우리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시인들의 비유가 튼튼하고 깊을 때 각자의 시인들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며 일상에서의 남다른 존재의 의미를 희망과 기쁨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문학적 소재로 많이 사용되어온 달동네의 영상을 떠올리면서도 그의 시가 고루한 느낌을 주지 않고 읽혀지는 것은 그만의 비유와 언어의 조립 방법에 의해서인 것이다.

단지, 비유에 있어서 조금의 함정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담뱃불에 몸을 녹이는 늙은 사내들 / 티눈처럼 골목 어귀에 박혀 있고”에서 ‘티눈처럼’이라는 시어가 어르신들을 당혹케 하고 분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티눈이란 것은 무사마귀 비슷한 굳은 살로서 빼어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인이 이런 발언을 했다면 당장 데모와 항의가 일어났을 것이다. ‘늙은 사내들’이란 시어를 ‘장애인들’이라고 교체해 놓아도 사회적으로 큰 반항세력이 형성될 수 있다. 비유를 잘 사용하되 긍정적인 비유가 우리의 시대를 싱싱하고 건강하고 바람직한 연대로 만들어줄 것이다.

▣ 낙타들의 잠(두 번째 버들치) / 송유미

추적추적 비가 지나간다.
0시는 알을 품은 사내와
지하도 바닥에 잠들어 있다.
마지막 기차가 지나간다.
셔터를 굳게 내린 도시의 불빛들
알을 품은 낙타의 잠 속을 지나간다.
추적추적 비를 맞은 0시가 지나간다.
내게도 비에 젖은 솜보다
무거운 잠이 있었을까.
신문지 한 장 덮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꿈꾸는
가난한 낙타들의 잠이
알을 품은 0시의 잠속을 지나간다.
세상의 평화로운 잠은
무덤 속의 잠이라지만,
무덤보다 무서운
칼잠에 든 낙타들,
0시의 사막을 지나간다.


두 번째 버들치는 <낙타들의 잠>이다. 이 송유미의 시는 첫 번째 버들치 <판자촌 사람들>(김가원의 시)와 마찬가지로 텅 빈 이웃의 아픔을 색칠하기 위해 영혼의 붓을 든다. 김가원이 달동네의 판자촌을 그렸다면 송유미는 지하철 노숙자들의 삶을 터치하고 있다. 송유미는 김가원의 시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가난한’의 시어를 사용하며 김정호의 시 <노숙자>의 아픔과 겹쳐 거대한 휴머니즘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가난’이 서로 모여 단체를 만들만큼 이 시대는 가난이란 필명으로 대용되고 있다.

그녀가 제공하고 있는 꿈의 알은 낙타의 알이다. 낙타가 어떤 방법으로 출산을 하든 그 방식과는 관계 없이 노숙자들의 등은 배고픔과 질병으로 휘어져 있음을 떠올릴 수 있다. “0시는 알을 품은 사내와 / 지하도 바닥에 잠들어 있다.”에서 ‘0시’는 ‘알’과 동거하면서 <0=알>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시각적인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0=알>의 구조 속에서 강렬한 시어의 에너지가 발출되고 있는 것이다.

‘알을 품은 낙타의 잠’ 속에서 우린 그 알이 희망임을 알 수 있다. 그 낙타가 칼잠에 들면서도 끌어안고 부화시키는 것은 희망의 알인 것이다. 그 알은 ‘0’이며, ‘0’이 존재한다는 것은 ‘1’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0’이 나타남과 지나감은 우리에게 ‘1’ 이상의 희망을 예견하게 한다. 그래서 ‘지나감’의 행위는 이 시의 핵심 뼈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지나감’을 이야기 하고 있는 시어들을 살펴보면 구조적으로 ‘비’가 지나가고→‘기차’가 지나가고→‘0’시가 지나가고→‘낙타들의 잠’이 지나가는 필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현상된다. 이 구조들은 우리의 슬픈 현실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 구조 속에서 맨앞에 ‘비’가 나옴으로써 더욱 진한 그리움의 애착을 갖게 한다. 또한 이 구조 속의 내밀한 곳에서는 후두둑 내리는 빗소리가 들리고 빠~앙, 빠~앙, 칙칙폭폭 울려오는 기차소리와 짹각거리는 시곗바늘의 소리가 연속된 레이어의 음향으로 들려온다. 이 소리들이 미래로부터 오는 희망의 소리로 들리는 것은 이제 낙타들(=노숙자들)이 ‘0시의 사막’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0시’는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부존재의 공간으로서 그 낙타의 잠 속을 빠져나감으로써 시간의 세계가 존재하는 현존의 에너지로 승화되는 것이다.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래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시작하기 애초부터 그녀가 시적 가난의 대상을 ‘지나가는’ 것으로 시작하였던 것은 이 현실이 지나간 가까운 미래의 진보를 노래하고 싶은 의지가 강렬했기 때문인 것이다. 송유미의 필력을 비싼 값으로 사고 싶다.

▣ 얼굴(세 번째 버들치) / 최진만

할머니 살고 있던 지붕에
박꽃은 할머니같이 하얗게 웃드니
한가위 동산에 솟는 달처럼
녹색 문 열고 살짝 내민 얼굴
아슴하게 잊혀진 그 사람을 닮았다

지난 여름 내내
어버이 같은 손길로
얼마나 어루만져 주었길레
저토록 세상을 향해 환희 웃으실까

떠난 고향 돌아와도
외롭다 말 아니하고
제 자리 지켜내는 얼굴 하나
햇볕보다 더 눈이 부시다.

세 번째 버들치 <얼굴>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진만은 진부한 시의 소재를 가지고도 진부하지 않고 눈부시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의 시어의 출발은 ‘할머니 살고 있던 지붕’에서 시작된다. 어느 할머니가 지붕 위에서 잘도 주무셨는지 모르지만 “박꽃은 할머니같이 하얗게 웃드니 / 한가위 동산에 솟는 달처럼”의 이미지를 꿰어놓는 것을 보면 그의 기억의 카테고리( Kategorie) 속에서 할머니가 살고 있는 둥지, 초가지붕이 어렵지 않게 떠올려진다. 그의 그리움의 지붕에 할머니가 계신 것이다. 그렇듯이 그의 기억의 창고에는 항상 ‘히노끼싱’의 알레고리(allegorie)가 깊게 싸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난’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도 그에겐 소박한 가난과 비움의 철학을 구사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는 가난의 현주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창작 속에서 시의 부요를 가져온다. 그것의 그의 창작의 비밀이다.
이 시 <얼굴>에서도 그는 그의 가난한 꿈의 알을 부화시켜 놓았다. 이 알은 바로 송유미의 ‘낙타(=노숙자)’가 부화시키고 있는 ‘희망의 알’과 같은 것인데, 그 부화의 과정은 바로 “지난 여름 내내 / 어버이 같은 손길로 / 얼마나 어루만져 주었길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암탉이 알을 품을 때 정성들여 보살펴 주는 것처럼 ‘어버이’로 호칭되는 시어가 이 시에서 암탉의 역할을 한다. 신체 생리학적 구조로 시의 구조를 얘기한다면 이곳이 바로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혈자리인 것이다. 이 생명의 혈자리인 ‘어버이’의 시어의 혈자리를 통하여 생명이 흐르게 된다. ‘할머니처럼 하얗게 웃는 박꽃’의 영상으로 넉넉하게 흐르는 것이다. 만물을 소생케 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속성을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 혈자리를 ‘어루만져 줌’으로써 햇빛의 알보다 더 눈부신 시의 알이 “햇볕보다 더 눈이 부시다.”라며 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가난이 부요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마음은 우리의 삶에 풍요를 더해주는 강물처럼 낮게낮게 자신을 침잠시킨다. 그 침잠의 이면으로는 “녹색 문 열고 살짝 내민 얼굴”로 완성되어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구도가 최진만의 글쓰기이다. 마치 낮은 곳으로 낮게낮게 흐르던 三樂川이 民樂의 바다에서 “할머니같이 하얗게 웃으며” 하얀 파도의 포말되어, 수증기 되어, 오르듯이 승화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것이 최진만이 그려내는 자연이다.

▣ 백치·2(네 번째 버들치) / 신정자

맑은 물에 산다는
산천어를 새식구로 데려와
정수기 물을 받고
그럴듯한 물풀에
키우는 거 문제 없다
옹골찬 생각
맥없이 끝나는 저녁
쉬운 거 하나 없는 세상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천 번을 아뢰면 알려나
만 번을 아뢰면 그대 알려나
억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이승에서
속수무책 타는 갈증
손 놓고 바라봄이 죄가 됩니까

피는꽃 지는꽃이 매양 다르듯
가슴에 품은 사랑 각기 다른 거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깨달아
화들짝 후회한들

어쩌겠습니까
쉬운 거 하나 없고
억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이승에 사는 우리.

네 번째 버들치는 <백치·2>로서 죽음의 문턱을 헤엄치고 있다. 이 버들치의 알은 ‘가슴에 품은 사랑’이다.

신정자는 ‘산천어’의 죽음을 통해 자연의 질서를 알려주고자 한다. 산천어에겐 자신이 떠나온 그 산천(=자연)이 그리운 것이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산천어가 죽은 이유는 자신의 뿌리인 자연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연과 연 사이의 연관성이 모호해진 것 또한 산천어의 귀가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산천어의 죽음과 모호한 연과의 연결을 통해 우리 시대의 불확실한 미래의 현실을 고발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이 시에서 “가슴에 품은 사랑”의 알은 역시 ‘희망’으로 해석되는데 각 연마다 곁가지를 친 메타포에 의해 부정적인 상황을 표출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글쓰기에서 그녀는 독자에게 강한 소망에 대한 필연적인 희구를 갈급하게 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 금색 브로바 시계(다섯 번째 버들치) / 이용철

아버지가 물려주신 금색 브로바 시계를 풀었다
고바우 생맥주집 여주인은 ‘또 야’라는 표정이다
허전한 팔목에서 거리의 함성이 흐른다
무수히 밟힌 얼룩진 운동화의 얇은 고무창이 뜨거워진다

달리다 쓰러진 눈이 먼 봄이여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름을 적어본다
마른 멸치가 된 어두운 아스팔트를 씹으며
소나기 같은 고바우 생맥주를 우겨넣다

우리들은 떠났다
강원도 화천으로
경기도 전곡으로
전라도 광주로

사뭇 뒤웅스러워
매캐한 골목길에서 말똥구리처럼 살았다

인도의 거리 따개비처럼 늘어선 노점상에서
누런 브로바 중고 시계를 보았다
칠이 벗겨진 스무 여덟 해
잊혀졌지만 잃지는 않았던 시월에

지금은 없어진 고바우 생맥주집 언저리에서
형제 잃은 새끼 거위 마냥 기우뚱대다
바람은 다시 나뭇잎을 불러들이지만
이제 나는 흰 머리카락에 까마귀손이 되었다
고장난 브로바 시계를 차고

다섯 번째 버들치의 ‘시계’가 우리의 일상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현세에 존재하기 때문에 시계가 필요하고 시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김가원은 그의 시에서 ‘시한부의 삶’이라는 시어로 시간의 유한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송유미는 ‘0시의 잠’ 속에서 +(플러스) 시간을 부화시킨다. 또한 최진만은 ‘여름 내내’ 익은 시간 속에서 하이얀 ‘박꽃’을 발출시키는가 하면 신정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라는 시알(詩卵)을 허벌라게 까벌린다. 이용철은 시간이란 존재에 대해 많은 가치를 매기고 있듯이 우린 모두 이 시간의 선상 위에 있는 삶과 죽음의 두 선로 위에서 근면함의 이름으로 이용철의 시어 “무수히 밟힌 얼룩진 운동화의 얇은 고무창”을, 그 삶의 밑바닥을 뜨겁게 달구게 된다.

이용철의 정지된 시간의 층은 “칠이 벗겨진 스무 여덟 해”에 잠시 멈추어 있고 ‘바람이 다시 나뭇잎을 불러들’일 때 그의 머리는 희어졌고 그가 꿈꾸던 삶의 시계는 고장나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렇듯이 그의 시는 약간의 무질서를 허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때 그는 “마른 멸치가 된 어두운 아스팔트를 씹으며”, ‘소나기 같은 고바우’ 그 인고의 생맥주를 우겨넣게 된다. 닳고 닳은 삶의 핫바지나 혹은 팬티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찢어진 치마폭으로 나신이 되어있는 벌거벗은 삶의 회한에 빠져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를 통해 이미 그는 삶의 시간 너머 영원히 존재하는 깊고 깊은 하늘, 그 꿈의 알을 부화시키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첫 구절 “아버지가 물려주신 금색 브로바 시계를 풀었다”에서 시간을 버리고 무시간대의 하늘로 나아감이 예견되었듯이 ‘고장난 시계’는 독자에게 현세의 시간의 무덤에서 튀어나와 영원성과 무한성을 인식케 한다.

▣ 초죽음이라는 것(여섯 번째 버들치) / 김중일

세탁기 주위에는 언제나
헹굼제 향기로 은폐된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신호음이 끝난 뒤 세탁기 뚜껑을 열어보면
똬리를 튼채 질식해 있는 초죽음을 볼 수 있다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는 빠져나가지 못할
탈수의 기억들이 표백되어 있다
전자동에 인공지능은 공포다
일초에 열 바퀴, 뼈도 못 추릴
원심력의 광란 속에서는
겉과 속이 따로 없다
염치불구 서로를 보듬는 것은
외설이 아니다
차라리 운명이다
툴툴 털려 햇살 품은 모습이
좀 야위어 보이는 이유는
아마, 죽었다 깨어난 경험 때문일 게다

왠지 여섯 번째의 버들치는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김중일은 자신의 시 <초죽음이라는 것>에서 서로 부대끼고 있는 인류 공동체인 지구를 이야기 하고 더 나아가 우주의 꿈과 미래를 서술하고자 한다. 돌아가는 것이 세탁기만이 아니고 자전과 공전의 축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시간의 원심력 속에서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 시간의 굴레와 에너지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시간의 에너지는 3차원의 존재이며 우리가 필히 접해야 할 삶의 본 바탕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세탁기 속에서 ‘초죽음’이 된 빨래들이 “툴툴 털려 햇살 품은 모습”이 되는 것은 세탁기라는 공간 속의 원심력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일생의 경험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은 누구나가 현세의 원심력에서 닳고 닳은 다음에 미래의 햇볓 속에 나동그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블랙홀이 있다. 이 고통의 버짐들을 말끔히 씻어내줄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빠져나갈 시의 블랙홀이 필요하고, 반면에 자신의 뼈다귀를 지탱해줄 “탈수의 기억들이 표백”될 생명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김중일은 시를 쓴다. 그의 존재 속에서 탈수시켜버리거나 표백해야할 세탁물이 그의 불면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영혼의 세탁기를 가동시킬 때마다 그의 아픈 존재는 “똬리를 튼채 질식해 있는 초죽음”이 되어가는 경험을 계속하고, 필요할 때마다 햇살 푸른 삶의 시간을 따오게 되는 것이다. 창작을 통한 “죽었다 깨어난 경험 때문”에 사망의 늪에서 생명의 시를 건져내는 것이다.

▣ 가을에 대한 명상(일곱 번째 버들치) / 윤혜진

비 그치자 햇살이 더 싸늘하다
구절초 꽃 잎 사이
얼 빠진 벌 한 마리
쓰러져 있다
바람은
가을숲을 저리도 흔들고
헐벗은 상념은
메마른 나의 숲을 흔든다
미루나무 아래
채곡이 쌓이는 소리가
툭툭 털어내는 몸짓을 휘감고
처방전 없는
낡은 시간을
가지마다 매단다

가을은
야윈 영혼의 알을
부화 시키는 것
어떤 언어 속에서
비망록을 쓰고 있는,

일곱 번째 버들치는 ‘알’을 부화시키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알을 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비망록’을 쓰는 것이다. 생명체의 게놈 구조에는 모두 자신의 존재를 이 땅에 기억시키기 위한 생명 메모리칩이 내장되어 있다.

윤혜진은 ‘야윈 영혼의 알을’을 부화시키기 위해 가을이란 상념의 메마른 숲을 동원한다. 그러면서 그 숲을 자신의 숲으로 동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아마도 생명체가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것은 생명의 마지막 시간대가 임박했음이 감지된 다음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서 생태계의 생명 고리에 함유된 생명유지 현상에 깊이 관여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자연현상을 윤혜진은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씨앗들이 싹트게 하기 위해서 냉동실에 얼마 간 놓아 두었다가 꺼내어 적당한 수분과 온도를 제공하면 봄이 아니어도 씨앗은 이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봄이 되지 않았는데도 싹을 틔우는 이유는 씨앗이 생명의 위협을 냉동고 속에서 느꼈기 때문이며 또한 냉동고 속에서 견딘 추위 때문에 자연의 겨울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냉동고에서 꺼내졌을 때는 봄이 왔다고 인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윤혜진은 이 자연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숲을 가을 숲으로 대치함으로써 자신의 숲에서 가지마다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처방전 없는 / 낡은 시간을 / 가지마다” 매다는 행위를 함으로써 이 시간의 사슬을 풀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알을 깨고 부화하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것은 3차원적 존재의 창에서 다른 차원으로의 업그레이드 된 진보된 생태계로의 진입을 위한 것이다. 지금 평론의 앵글에 비치고 있는 8마리의 버들치들은 모두 이렇게 진보된 삶의 완전한 생태계를 절망보다도 더 절망처럼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 노숙자(여덟 번째 버들치) / 김정호

지하철 역
돌의자에 구부리고 누운
중년의 사나이가
한 장의 신문지로 몸을 데우고 있다

추위가 물어뜯는지
호흡이 멎을 듯 멎을 듯
간신히 이어진다

사나이를 덮고 있는
신문 기사는
코스피 또는 코스닥 지수가
스크럼을 짜듯 등을 맞대고
성난 고양이 꼬리마냥
치솟고

헬리곱터를 동원하여 구출한
흰머리독수리를
오랜 치료 끝에 날려보내는
조류학자들의
환호하는 사진이 있다

한 장의 종이 사이가
천 길 벼랑끝이다

차가운 동굴 같은
세상의 자궁 속에
지참금 없이 수정된
태아가 누워 있다

여덟 번째 버들치는 두 번째 버들치인 송유미와 마찬가지로 노숙자의 삶을 통해 인류의 꿈을 해석하고자 한다. 송유미의 “신문지 한 장”의 시어와 김정호의 “한 장의 신문지”의 시어는 각각 다른 빛깔로 나타나는 같은 시대의 핵심 키워드이다. 그 한 장의 신문지는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역할을 넘어 “조류학자들의 환호하는 사진”이 인쇄된 시어(詩語)로서, “한 장의 종이 사이가 / 천 길 벼랑끝이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사회적 고발의 현장에 서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시 이 마지막 버들치도 “차가운 동굴 같은 / 세상의 자궁 속에 / 지참금 없이 수정된 / 태아가 누워 있다”며 희망의 보자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 희망의 보자기는 우리가 부정하고 있는 ‘세상의 자궁’‘이며 그 안에 ‘지참금 없이 수정된 태아가 누워’ 있다고 고백하며 새로운 부활을 꿈꾸게 한다. 노숙자들은 이미 차가운 동굴 같은 세상을 구원해줄 ‘태아’로서 대치되어 있는 것이다. 노숙자들, 이제 이 버들치들이 생명의 알들을 산란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Ⅲ. 물안경을 벗으며

위의 시인들은 모두 현존하는 의식과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시적 메타포를 생성하며 생명과학과 시간의 생태윤리에 귀의하고자 한다. 그들의 작업은 죽음 같은 이미지들을 끈질긴 탐구와 평화의 바탕색으로 스케치하며 절망처럼 푸른 희망의 언저리를 돋보이게 한다. 독자들의 상상력에 침투하여, 연속되는 삶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의 심층 깊이 연관되어 있는 존재에 대한 의식을 부각시키기도 하며 미래의 진보를 꿈꾸게 하기도 한다.

그들이 꿈꾸는 생명의 알은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강에 산란되어 맘껏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생태적 부활을 꿈꾼다. 어쩌면 누가 얘기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마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지참금 없이 수정된 / 태아”를 꿈꾸면서까지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태도를 포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람의 심리적 현상의 이면에는 더욱더 신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는 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에 대한 그리움, 그것이 문학의 형태로서 표출된다.

문학의 효용과 가치는 자신과 자연의 존재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여 만물의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 태초의 그림자를 가슴 떨리게 채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지만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무런 지참금도 없이 신의 섭리에 의해 수정되어 태어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문학적 틀을 활용하여 엄마의 자궁, 우주의 자궁, 더 나아가 창조의 자궁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이면에는 현재의 인류의 고통을 풀어줄 희망과 생명의 원류가 그곳으로부터 흐르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북구의 시인들이 잠재의식의 들판에서 이루어지는 불확실한 현실의 깊은 잠(=죽음) 속에서 꿈의 알들을 부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면 ① 김가원의 “하얀 꿈들이 기지개를 켠다”, ② 송유미의 “알을 품은 낙타의 잠 속을 지나간다.”, ③ 최진만의 “녹색 문 열고 살짝 내민 얼굴”, ④ 신정자의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깨달아 ”, ⑤ 이용철의 “칠이 벗겨진 스무 여덟 해”, ⑥ 김중일의 “죽었다 깨어난 경험”, ⑦ 윤혜진의 “야윈 영혼의 알을 부화 시키는 것”, ⑧ 김정호의 “지참금 없이 수정된 태아가 누워 있다” 등으로서 시의 알들을 맘껏 산란하고 있다.

버들치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환경오염을 증언한다. 버들치들은 오염된 강물 속에서 죽어가면서까지 희망의 알들을 산란한다. 반딧불이는 죽어서도 그의 빛을 어둠 속에 산란한다. 그런 것들은 마치 예수가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자신을 죽여 새로운 부활의 튼튼한 생태계의 소망을 인류에게 안겨주는 것과 같다. 비록 이 땅의 6월이 죽음의 은유로 완곡하게 비뚤어져 있는 듯하지만 이 버들치들의 산란을 보며 우리는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아름다운 투쟁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박인과, 2007년 6월 마지막날>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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