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최초의 장편소설, 김남천의 ‘1945년 8.15’ 전편 발굴,복원 출판
소설가, 문예이론가. 1911년 평남 성천 출생. 1929년 일본 호세이대학에 입학, 카프(KAPF) 동경지부에 임화, 안막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평양고무공장 파업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장신문」 「공우회」 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제1차 카프 검거사건으로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받았다. 1935년 5월 임화, 김기진과 함께 카프 해산계를 경기도 경찰국에 제출하였다. 이후 고발문학론, 모랄론 등을 제출하는 한편 이를 소설화한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 임화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설립을 주도하고, 10월 15일부터 장편 「1945년 8·15」를 연재하였다. 진보적 리얼리즘의 구현을 위해 활발한 문예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1947년 말 월북하였다. 1951년,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일가족과 함께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삽화 : 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
서양화가. 1912년 대구 출생. 조선미술전람회(鮮展)과 일본 제국미술전람회(帝展)에 출품하여 수차에 걸쳐 입선과 특선을 하였으며 1935년 제14회 선전에서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으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작품 경향은 서구의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폭사하였다.
김남천의 생질 박숙란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직후 소설가 김남천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한 인연을 계기로 해방기 최초의 장편인 김남천의 「1945년 8·15」의 삽화를 맡게 되었던 것 같다. 총 165회에 달하는 연재분마다 이인성의 날렵한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작가의 말
남쪽·북쪽이 갈리고 정당이 45개나 생기고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떠들어 대고 도무지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뒤숭숭하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더구나 젊은 학생이나 청년들에게서 이런 말은 더 자조 듣게 된다.
혼란! 그러나 이 복잡하고 뒤숭숭한 현상의 포말 밑에 굳세게 흘러내리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진행에 대해서 우리는 고요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젊은이들이여! 어디로 가려는가? 청년의 불타는 정열과 냉철한 진리를 안고 그대들은 어디로 향하려는가? 이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말하자만 하나의 대답이다. 혼란 가운데서 가장 진실한 그러나 가장 곤란한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 연재예고 기사에 실린 김남천의 「작가의 말」 중에서(「자유신문」 1945. 10. 5.)
* 출판사 서평
해방 직후, 당대를 배경으로 한 최초 장편소설
김남천의 「1945년 8·15」 61년 만에 전편 발굴·출판
해방 62주년을 맞는 2007년 8·15에 맞춰 해방 직후인 1945~6년 「자유신문」에 연재되었던 해방기 최초의 장편소설 김남천의 「1945년 8·15」가 전작이 발굴·출판된다. 때마침 역사적인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는 이때에 이 책의 출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1945년의 역사적인 해방을 맞이하고 어언 62년의 성상을 흘려보내고도 아직도 온전한 민족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한 이때, 1945년 8·15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8월 28일부터 30일 사이에 열리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비로소 한국현대사의 비원이 서린 해방직후의 역사적 염원을 김남천의 장편소설 「1945년 8·15」의 전작 발굴 출판을 통해서 재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자유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1946년 6월 28일까지 연재되다가 중단된 미완의 장편소설 「1945년 8·15」는 200자 원고지로 1,100여 매에 달하는 작품으로 새나라 건설의 진보적 신념을 담지한 연인인 김지원과 박문경이 해방기의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으로 (박문경의 일기인 「일성록」의 그날그날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 서사적 완결을 예비하며 중단되었다. 따라서 미완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문학적 성과를 논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서사적 형상화를 갖추고 있다.
이 장편소설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소설가이자 문예이론가로서 양면에 걸쳐 두루 두드러진 문학적 성과를 남긴 바 있는 김남천의 문학적 완결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그가 남긴 우리 역사에 대한 전망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작품의 연재가 1946년 6월 말 중단되더니,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작가의 월북과 의문의 죽음, 그리고 작품이 연재된 신문마저 온전히 보존되지 못한 채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1988년 정부의 월북문인에 대한 공식 해금 이후로, 1990년대 들어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어렵사리 작품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져왔을 뿐 아직도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러던 차에 국문학 연구자인 이희환 인하대 BK21 박사후연구원이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생들과의 협동작업을 거치면서 「자유신문」 연재본을 대상으로 최대한 원문을 되살리는 과정을 거쳐서 1차로 작품을 복원하여 지난 1년 동안 계간 「작가들」에 4회에 걸쳐 분재하였고, 연재를 마치고 원본 신문과의 치밀한 재교열을 거쳐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되게 되었다.
새로 밝혀진 김남천의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
- 김남천 친족들의 증언
단행본 출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방기 김남천의 창작 활동이 문학운동만큼이나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실된 작품이 비단 「1945년 8·15」 한 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편의 작품이 더 묻혀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남천의 생애사에 있어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2002년 10월, 김남천의 생질인 박숙란 여사와 조카인 김희섭 선생이 문학지 「작가들」이 마련한 대담을 통해서 김남천의 생애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증언을 들려주었다.(「김남천 친족인터뷰 ; 기억 속의 김남천」, 「작가들」 2002년 하반기호. 이러한 증언과 새로 찾아낸 김남천의 해방기 작품 등을 반영하여 책 권말에 <김남천 연보>를 새롭게 작성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김남천의 출신과 가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김남천은 1911년 3월 16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성천면 하부리 271번지에서 부친 김해김씨 영전과 모 김옥경 사이의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김남천이 김해김씨라는 것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거니와, 친족 박숙란 여사와 김희섭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남천의 부친 김영전(김희섭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집안에서는 “김영돈”으로 불렀다고 한다)은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한 매우 정갈한 인품의 소유자로 당시 성천군 내에서 존경받는 유지였으며, 이 때문에 마을의 면장직을 맡기도 하고 군청의 고위직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성천군지」(1989)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해방 직후 성천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중농의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한 김남천의 문학 활동에 대해서는 김남천이 많은 자전적 기록을 남겨놓았기에 비교적 소상이 알 수 있었으나, 그의 가정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차에 2002년의 대담을 통해 ‘조선의 발렌티노’라 불리면서 미남으로 널리 알려졌던 김남천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소상한 기억과 증언이 제출되었고, 그의 가족사진도 새롭게 공개되었다.
김남천이 결혼한 것은 1931년으로 이해부터 ‘남천(南天)’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공장신문」 「공우회」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학하고 있던 호세이대학 당국에서 김남천이 독서회 등 여러 좌익계열의 서클에 가입한 것을 이유로 김남천을 제적처분하면서 귀국한 김남천은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적극 제기하고 좌익극단인 청복극장에서 연극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무렵 김남천은 결혼을 한 것인데, 결혼 상대자가 의뢰로 당시 성천군수 김화준의 딸이자 경성의전을 나온 김진해(金珍海)라는 신여성이었다. 김진해는 김남천과 같은 김해김씨 동성동본이었기 집안의 반대가 매우 심했지만 결국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1년 남짓 만인 1931년 10월 카프 제1차 검거 과정 중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연루 검거되어, 김남천은 카프 맹원 중에서는 유일하게 본심에 회부되어 2년의 실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2년 만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한 후 김남천은 낙향하여 활발한 창작과 비평 활동을 도모하였다. 6월에 옥중체험을 생생하게 기록한 단편 「물」의 발표를 계기로 임화와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 해 12월에 아내 김진해가 둘째딸을 해산한 후 후더침으로 사망하면서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이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프로문예운동을 전개하던 김남천은 결국 1935년 5월 임화, 김기진과 협의하여 카프 해산계를 경기도 경찰국에 제출하고 프로문예운동의 일선에서 벗어나서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취재 과정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의 딸이며 유한양행의 약사인 박복실(朴福實)과 여운형의 중매와 주례로 재혼하였다고 한다. 박복실과의 사이에 희창, 희선 등 모두 1남2녀를 두게 된다.
김남천의 생애에 관한 새로운 증언으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문학운동과 창작에 걸쳐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김남천은 1947년에 「3·1운동」 「대하」 「맥」 등의 소설집을 간행하였고, 그의 대표작인 장편 「대하」는 체코 프라하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다.(「문화일보」, 1947. 6. 7) 6월에는 각 부문 문예단체의 연합체인 조선문화단체총연맹(朝鮮文化團體總聯盟, 문련)의 서기장이 되기도 하였다.(「문화일보」, 1947. 6. 22) 그러한 와중에도 김남천은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그의 작품연보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장편소설 「十月」을 1947년 7월 1일부터 「광명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일어난 ‘10월 인민항쟁’을 소설화한 장편 「十月」은 그러나 신문의 휴간으로 연재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김남천은 임화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뒤를 따라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는 ‘북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1기 최고인민대표위원으로 피선되고, 북문예총 서기장을 잠시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남천은 임화, 이원조 등과 함께 7월 1일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내려와 문화예술총동맹 서울지도부 간판을 내걸고 선무활동을 전개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기자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1951년 숙청의 빌미가 된 작품 「꿀」을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의 기관지 「인민평론」에 발표하면서 그의 운명은 남로당의 그것과 함께 하게 되었다. 전쟁소설 「꿀」에 대한 엄호석의 비판을 시작으로 그를 숙청대상인 남로당으로 지목한 북한 정권은 급기야 그를 철창에 가두었던 모양이다.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북한 정권의 복종과 회유 요구를 끝내 거부했던 김남천은 1951년 일시적으로 풀려나 고향 성천으로 귀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집까지 찾아온 김일성 정권에 의해 양 부모, 동생 내외와 함께 현장에서 즉결 총살당하였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그의 친족들에 의해 「작가들」 지면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 좌파의 낙관적 전망과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
- 김남천의 「1945년 8·15」의 세계
「1945년 8·15」은 해방이 되고 나서 2개월째로 접어드는 1945년 10월 15일부터 「자유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1946년 6월 28일 연재가 중단된 미완의 장편소설이다. 해방 직후 김남천은 임화 등과 함께 정력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진보적 리얼리즘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진보적 문학이념을 정초하는 평론을 정력적으로 제출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 있듯이 해방기의 김남천은 정력적인 문학운동과 더불어 이와 병행하여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김남천은 해방을 맞아 억눌렸던 자신의 문학의 의지를 실천 활동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작품 창작을 통해서도 정력적으로 전개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그의 모색이 장편소설 「1945년 8·15」의 야심찬 연재를 통해 집중되었다는 점은 어렵게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남로당의 문예노선을 선도했던 김남천의 의욕이 그대로 담긴 「1945년 8·15」는 어떤 면에서 르포르타주 혹은 기록문학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작품의 시간적 배경과 창작의 시간대가 거의 차이가 없는 장편소설이다. 이는 우리 소설사에 있어서도 매두 드문 사례에 속할 것이다. 조선문학가동맹이 1946년 2월 8, 9일 양일간 개최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그 자신이 「새로운 창작방법에 관하여」이라는 글을 통해 정초한 바 있는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자체내의 커다란 계기로하는 진보적 리얼리즘”을 제출하기도 하였거니와, 이 작품은 진보적 리얼리즘론의 제출 이전부터 실제 창작을 통해 진보적 리얼리즘을 선보였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해방기를 맞는 김남천의 날것 그대로의 현실인식과 문학적 지향이 담겨 있다고 봐도 좋다.
남쪽·북쪽이 갈리고 정당이 45개나 생기고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떠들어 대고 도무지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뒤숭숭하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더구나 젊은 학생이나 청년들에게서 이런 말은 더 자조 듣게 된다. 혼란! 그러나 이 복잡하고 뒤숭숭한 현상의 포말 밑에 굳세게 흘러내리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진행에 대해서 우리는 고요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젊은이들이여! 어디로 가려는가? 청년의 불타는 정열과 냉철한 진리를 안고 그대들은 어디로 향하려는가? 이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말하자만 하나의 대답이다. 혼란 가운데서 가장 진실한 그러나 가장 곤란한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 김남천, 「작가의 말」, 「자유신문」, 1945. 10. 5.
소설의 연재 예고기사와 함께 실린 위의 「작가의 말」에는 「1945년 8·15」 연재를 앞둔 김남천의 각오와 더불어 역사의 방향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담겨 있다. 해방 직후의 포말과도 같은 혼란한 현실 밑에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커다란 진행”에 대한 낙관적 신념과 역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나마 진보하는 역사의 대의를 젊은 세대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주어야 하겠다는 김남천의 사명감이 위의 「작가의 말」에는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와다 도모미라는 연구자는 김남천 소설의 취재원에 대한 고찰과 인물의 상호 관련성을 검토하여 「사랑의 수족관」과 「1945년 8·15」, 「동방의 애인」을 일련의 연작소설로 검토한 바 있다. 소설의 창작방법에 대한 이론적 탐색을 깊이 시도한 바 있는 김남천은 신문연재소설의 특성을 살려 당대의 실제적 사건을 소설에 흡수하는 방법을 통해서 소설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들여 「사랑의 수족관」을 창작하였다는 것인데, 실제로 대흥콘체른 사장 이신국의 딸인 이경희와 새로운 공학적 지식인 이광호 사이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다룬 「사랑의 수족관」의 인물형상은 그대로 「1945년 8·15」으로 연결되고 있다.
두 소설에 모두 등장하는 이신국이라는 인물은 화신백화점의 창립자이자 대흥상사의 사장이었던 박흥식(朴興植)을 실제모델로 한 인물로, 친일파였던 그는 해방 이후 대한공화당을 지원하면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정적 인물로 그려진다. 「사랑의 수족관」의 주인공이었던 이경희와 김광호는 「1945년 8·15」에서는 이미 결혼한 지 여러 해 된 부부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랑의 수족관」의 합리주의자 김광호는 이신국이 경영하는 대흥콘체른의 중역이 되어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부정적 인물로 변모하고, 이경희도 의욕 없이 생활의 권태에 빠져 연하의 남자를 유혹하다가 미군과의 사교에 나서는 역시 시대에 뒤쳐지는 부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였던 이신국과 최진성이 살아남기 위해서 대한공화당의 결성에 앞장서는 장면이나 미군정에 접근하는 과정 또한 주요한 서사적 배경으로 형상화되고 있어, 리얼리즘 소설로서의 문학적 성취를 구현하고 있다.
이들 부정적 인물군과 달리, 20여 년 전 망명한 독립운동가 박일산의 딸인 박문경과, 의과대생으로 일제 말 학병반대 격문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은 김지원은 「1945년 8·15」에서 김남천이 새시대의 진보적인 젊은이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물이다. 마음속 깊이 서로 사랑하는 이 두 인물이 8·15 직후 일어난 실제적 사건들을 겪어가면서 일신의 안일과 사랑, 행복을 마다하고 새나라의 건설을 위해 현장으로 매진하는 과정을 주변 인물들과의 엇갈리는 행보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김남천은 8·15 이후의 올바른 역사의 방향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젊은이들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를 펼쳐 보이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던 김남천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김지원과 박문경의 놀랄 정도로 순박한 소명의식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다.
역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헌신하려는 이 두 인물의 소명의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를 일러 김남천은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자체내의 커다란 계기로하는 진보적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했던가. 그러나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당대의 현실로부터 역사적 거리가 부재함으로써 김남천이 진보적 리얼리즘을 통해서 보여주려 했던 역사적 전망이란 현실적 기반에 놓여있지 않은 채 선취된 소명의식과 이념에 의해 추상화되고 만다. 결정적으로는 김남천이 이 소설을 통해 그려 보여주려고 했던 진보적 전망이란, 1946년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실재의 현실과는 크게 유리되어 관념적 전망으로 추상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지식인으로서 자기반성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획득하고자 노동운동에 뛰어든 김지원과 박문경의 고뇌와 실천을 다룬 부분은 어딘지 모르게 윤리적이고 어색하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형상화에 있어서도 그 폭과 수준이 추상적이고 제한된 영역에 머무르고 만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김지원과 박문경을 지도하는 황성묵이 조직적 결의 속에서 제시한 미군정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미군정을 “우리를 해방하여 준 또 해방하러온 군대의 행정기관”이자 “외국서 온 손님”이라고 설파한다. 이러한 낙관적 현실인식 때문에 소설은 다음과 같은 고민과 질문을 박문경의 일기장에 남겨둔 채 결정적인 대단원의 제시 없이 연재가 중단되고 만다.
염상섭의 장편 「효풍」(1948)과 김동리의 「해방」(1949~50)과의 대비
- 중간파의 염상섭의 균형감각과 우파 김동리의 소설로 쓴 대한민국건국사
「1945년 8·15」의 책임편집을 맡은 이희환 박사는 권말에 붙인 해설에서 김남천의 「1945년 8·15」에 이어 발표된 해방기의 대표적 장편소설인 염상섭의 「효풍」과 김동리의 「해방」과 비교, 검토하고 있다.
남과 북에 가장 극단적인 우파와 좌파의 승리로 가시화되던 시점이었던 1948년 벽두에, 해방기 내내 좌·우파의 대립으로부터 초월적 위치에 존재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던 염상섭이 ‘새벽바람’이란 의미의 「효풍(曉風)」이라는 장편을 1948년 1월 1일자로 「자유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1월 3일 200회로 완결을 지었다. 현실의 이데올로기인 좌·우파와는 무관한 제3세력권을 통칭하여 중간파라 불렀거니와 염상섭은 당시 “중간파의 두목격”으로 해방기 내내 민족분단에 반대하는 독자적 목소리를 견지해왔다. 그런 그가 ‘새벽바람’이란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해방기 당대의 총체적 현실을 형상화한 장편소설 「효풍」을 중단 없이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해방기의 여러 쟁점들에 대한 염상섭의 시각을 박병직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미군정의 민족운동 탄압에 대한 우회적 비판과 함께 미군정이 지원한 우파의 분열에 따르는 혼란, 그리고 조선의 현안문제는 조선인의 입장에서 조선인이 감당해나가야 한다는 관점 등이 박병직의 격정적인 말 속에 담겨있다. 좌파의 무산독재도 부인하지만 여론의 호도 속에서 부실한 부르주아들의 일당독재로 흘러가는 38선 이남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를 수수방관 내지는 조장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에는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차례로 지켜보면서도 민족의 분열을 넘어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열망했던 중도적 민족통일주의자 염상섭의 꼿꼿한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냉철한 현식인식에 기반 하여 미국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점 또한 당대의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탁월한 날카로운 현실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새로운 국가 만들기를 둘러싼 치열한 전면전에서 승리를 쟁취한 우파를 대표하여 김동리가 장편소설을 들고 나섰다. 그 시점도 이미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9년 9월에 들어서인데, 김동리는 「해방」이라는 제목을 당당히 내걸고 당대 역사에 대한 총체적 결산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이 소설은 김동리 개인에게도 기념비적 소설이 아닐 수 없지만, 남한 단독정부의 출범에 대한 문학적 헌사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1949년 9월 1일부터 1950년 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총156회 연재된 이 소설은 김동리 최초의 장편소설이자 해방기 당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야심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신념은 이미 사년간의 실적을 쌓아 왔다. 우리의 독립은 완수될 것이며 우리의 자유는 승리할 것이다”는 확신에 찬 어조야말로 승리에 찬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비록 좌파에 대한 승리가 38선 이남 아래 반쪽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얼마 있지 않아 “아직도 완수되어 있지 않”은 한반도 전체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그간의 고투어린 투쟁과정을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고 재미날 수 있게” 형상화해보려 했다고 당당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김동리는 그 방법으로 “우리의 해방을 상징할만한 인간형”을 등장시켜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고 재미날 수 있게” 써보려 했다. 김동리의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곧 소설로 쓴 대한민국건국사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1949년 시점의 김동리, 이장우의 말마따나 “다른 ‘한 개의 세계’를 극복”하는 보람찬 승리를 구가하기에 바빴던 현실주의자 김동리의 저열한 정치성만이 있는 그대로 표백되고 있다. 그 어떤 이상이나 논리를 떠나 38선을 둘러싼 생존을 위한 적나라한 “현실”에서 김동리에게 절실했던 명제는 바로 이것이다. “가장 현실적이요 구체적인 방법은 그 어느 ‘한 개의 세계’가 다른 ‘한 개의 세계’를 극복하는 길 밖에 없어.” 작가 김동리의 분신이라 할 이장우의 마지막 말을 통해 우리는 현실추수를 넘어, 그 자신 득의의 ‘구경적 생의 형식론’조차 부정하는, 냉전논리에 깊이 침윤된 김동리의 면모를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해방기 김동리 소설이 가닿은 마지막 구경으로서 장편 「해방」을 최대의 실패작으로 남겨놓았고 그렇기 때문에 김동리는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이후에 이 작품을 「김동리대표작선집」(삼성출판사, 1967)에 수록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재발간이나 심지어 작품에 대한 언급조차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편 「1945년 8·15」의 출간의 의미
세 작가의 삶은 그 시대에 갇혀 그처럼 각기 다른 운명을 겪으며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염상섭의 장편 「효풍」의 복원과 더불어 이제 막 김남천의 장편소설 「1945년 8·15」이 발굴, 복원된 것을 계기로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면서, 오늘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다시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다준다. 문학과 정치의 이항대립, 승리와 패배를 강요하는 저열한 현실의 논리로 좌절했던 해방기의 역사적 상처를 뒤로 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여 진정 화해와 평화가 깃든 아름다운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김남천의 「1945년 8·15」는 새삼 되묻고 있는 것이다.
* 도서명 : 장편소설 「1945년 8·15」
* 저자 : 김남천(金南天) * 삽화 : 화가 이인성(李仁星)
* 책임편집 : 이희환(인하대 BK21 박사후연구원)
* 출판사 : 도서출판 작가들
* 판 형 : 신국판(A5신) 225*153mm
* ISBN : 978-89-957530-6-4
* 쪽수 : 356쪽
* 책 값 : 13,000원
웹사이트: http://www.writers.or.kr
연락처
도시출판 작가들 이희환 032-425-8352
-
2007년 3월 20일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