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평론부문 수상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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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08-08-11 10:00
서울--(뉴스와이어)--창조문학신문사(대표 박인과, http://www.ohmywell.com)는 평론부문 신인문학상 당선작을 발표했다.

창조문학신문은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에 부산에 거주하는 박동규의 <'강물'에 흐르는 처연한 삶>, <'보헤미안' 기질이 넘치는 감상주의>, <그 화려한 단풍의 계절> 등의 평론을 선정했다. 박인과 문학평론가는 "박동규의 평론은 작품 내면의 깊이에 잘 스며들어 사계절의 특성이 오롯이 들어앉은 향내 깊은 된장의 맛을 분석해 내듯 심도 깊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시대적 평론의 틀에서 자유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인내와 고통과 투쟁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바라보며 한국문단에 이 낯선, 그리고 풋풋한 평론가의 출연을 맞이한다"며 "좀 더 끈질기게 쓰고, 좀 더 치열하게 쓰고, 좀 더 새로운 틀을 창조하여 꽃을 피우게 되면 이 시대의 슬픔과 환희의 문학의 증인이 되기에 충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박동규의 문학평론가 등단을 축하했다.

그의 작품 중 <'강물'에 흐르는 처연한 삶>은 다음과 같다.

▣ <강물>에 흐르는 처연한 삶 / 박동규
- 노천명의 시 <강물>을 중심으로

내적인 평화가 없을 때 행복할 수 있을까? 웃고 흥겹게 논다고 해서 깊이 뿌리박힌 고통이 누그러질 수 있으며, 술로 우울한 감정을 달래거나 부도덕한 생활 방식이 슬기로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웃음으로 고통을 감출 수는 있어도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우울한 감정이 계속될 때 우리는 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노련한 지도”의 도움이 필요하기까지 하다. 웃음과 오락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 가치는 상대적이며 크지 않다. 강물 배후에 있는 까닭! 그리움 뒤에 피는 까닭! 그리고, 서러움 배후에 있는 까닭! 화자가 정녕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유추해 본다. 두 어깨에는 멍에를 멘 듯 무겁고, 마음도 그러하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노천명의 <강물> 전문

우리가 알고 있는, 알려지지 않는 오랜 시간 이미 새벽의 태로부터 발원하여 계곡과 호수와 강과 바다, 결국엔 한 곳에 모두 모아지는 자연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화자의 마음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이라함은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자연법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이란 결코 없다. 그 법에 익숙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지만 푸른 드넓은 바다라는 사물의 제도라는 틀이 부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는 여전히 고통 받는 [그 까닭]이 흐르기에 그것을 이겨야 산다는, 어쩌면 동물적 본질을 떠올린다.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 도시에 운집한 인파처럼 복잡하고 살기 위해 아우성치는 삶의 현장을 요동하는 인류의 [강물]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조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현 제도의 톱니바퀴 같은 흐름에 젊음을 내맡긴 채, 대중과 함께 갇혀있음을 [그 까닭만은 아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우주는 광활한데 비해 작은 [언덕에 서서]라는 표현은 흔히 말이나 각오 혹은 행동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각조각 나뉜 조그만 땅덩어리엔 이기적인 욕망과 자아제일주의, 편파적 혹은 분파와 갈등 등 범죄와 얼룩으로 범철 된 고뇌를 떠올리면서 화자와 함께 강물 되어 [바다로 흐르는] 굴레에서 [온종일 울었다]로 답답함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 과거를 살아온 아픈 그림자가 아직도 화자의 마음에 가득 서려있음을 표현한 [온종일 울었다]로 웅변한 듯 보인다. [그 까닭만은 아니다]에서 때때로 언덕과 산은 종종 인생이 살아온 세월이나 인생을 뒤돌아볼 때 쓰이는 비유적인 용법이다. [언덕]은 은신하여 묵상할 수 있는 공간에서 [까닭]에 쟁점화 된 상황으로 끌려 같다고 본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지난 암울했던 과거를 문득 돌아보면서 삶에서 경험한 모든 생각들을 떠올려 본다.
[밤새]라는 시간적 간격은 2경(8시간)쯤 되는 작은 부분이지만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생각하고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한 량이다. 화자는 흔히 지난 세월 끝없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삶을 돌아보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허상과 한줄기 해바라기로 올라와 자아의 목적과 뜻을 빼앗긴 현 사물에 제도의 굴레에 자신을 맞기며 타성에 젖어있는 듯 보인다.

[해바라기처럼] 해바라기 잎과 꽃은 모두 향일성(向日性) 즉 햇볕이 강한 쪽을 향하여 자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해바라기에는 생장을 조절하는 식물 호르몬인 옥신이 있다. 옥신은 햇빛이 비치지 않는 쪽에 더 많기 때문에 줄기가 햇빛이 비치는 쪽을 향해 자라게 된다.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는 오랜 세월 주워진 환경에서만 안주하였던 정체된 힘의 동력으로 [피던]힘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화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그리움 ] 그 넘어 에 있는 [까닭]은 떠나온 고향을 노래하는 그리움일는지 모르며 반어적 표현으로 고통스러운 고된 노동을 의미할 수 있다. 물과 산과 땅은 그대로인데 [온종일 울었다]에서 끊임없이 극도의 감성을 자극하는 삶의 본질을 다룬 사별의 아픔을 경험한 [그리움]으로 승화하는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 화자는 아직도 그 까닭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짐승처럼]에서 보통은 어미 사자가 먹이를 잡기 위해 우는 경우가 있지만 화자는 우는 동물처럼 [내가 짐승처럼][울고 있는 까닭]이라고 함으로 독립된, 소속감에서 떨어진, 어미에게 떨어졌을 때 본능적으로 그리움 때문에 운다. [서러움에 울고]는 심한 상처로부터 치유 받고 싶은 보호본능의 울음일 것이다.

또 다른, 강가 [언덕]에 올라 흐르는 물줄기 따라 내려가 보면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주어진 순리를 순응하며 처연하게 받아들인다.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 창일한데 어찌 시원하지 않으랴 그러나 그 넘어 에 있는 [까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죽음만큼이나 강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물줄기 따라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묵묵히 내려가는 인간사의 복잡하게 얼 킨 이념의 벽을 초월한 거스를 수도 없는, 소리 없는 외침으로 심중을 드러내는 절규가 흐르고 있다.

자신의 빗물 한 알갱이는 모두 함께 모여 [강물]되고 [바다로만 흐르는]수십억 인류의 바다에 묻혀, 의미도, 존재도 없는 허무한 삶에 대한 허망함이 [서러워] 울었다. 화자는 절규하듯 보여 지는 모든 인류가 가는 아픈 삶을 그린 주검을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때때로 언덕은 산마루, 차별화된, 혹은 은신처로 쓰인다. 혼자만의 아픔을 토로하기에 충분한 그런 공간으로서 보고, 듣고, 울고, 그리워한 것은 사라지고 결국 인류의 무덤인 바다에 모이는 [까닭]이요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을 [서러움에 우는][까닭]으로도 집약된다.

예시적 비유에서 언덕이나 강물, 바다 그리고 본능에 의한 움직이는 짐승의 언급을 통해서 그의 머리서만 활발하게 움직이는 알려지지 않은 고뇌가 그를 압도한 작품이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티 없이 맑은, 동료애적인 슬픈 인생길이 허망함을 상징화 한 삶의 본질을 이야기 한 작품으로 화자의 맑고 깨끗함과 감성이 풍부함을 함축성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 하겠다. 베일로 가린 듯 [까닭]이 의미하는 존재의 의의는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 <당선소감> / 박동규 문학평론가

바람이고 싶다.
문학가의 표현 양식은 끊임없이 바뀌지만, 고뇌의 태로부터 탄생하는 작품은 기쁨을 준다. 글을 쓰는 재료는 삶, 그 자체이다. 개인의 삶이 그러하듯이 문학을 통해 표현되는 방식도, 쉴 새 없이 변하고 만들어지는 독특한 문화적 모양들이며, 인류바다 위에서 차일처럼 펼쳐져, 삶을 의미 있고, 만족과 희망으로 윤택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문학이라 하겠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마치, 사막의 바람이 아름답게 쌓아올려진 모래 조각품을 보면서 굽이굽이 바람결 따라 변해가는 능선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예술적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곳에서 사는 식물들, 예를 들어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발견된 ‘포아폴’과의 호밀의 키는, 5cm의 불과하지만, 사막이나 황무지 혹은, 한 겨울 박토 속에서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면에서는 최강의 식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한 폭의 식물을 보면서 인내와 끈기를 배운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내리는 뿌리는, 무려 622,8km에 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작가의 의도된 사상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쟁점화 한 글의 진위를 진솔하게 그 뿌리 채 드러내는 재주야 말로, 문학 평론가이든, 비평가이든, 평론가들의 몫이며, 그 힘은 능히 정부라도 옮길만한 부여된 기술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만은 않다.

문학은 보고 느끼는데서 그 가치가 증폭된다.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작은 풀잎에 앉은 이슬방울들, 한줌 흙이나, 물, 하늘, 별, 구름 따라 흐르는 반달 방랑자, 여기저기 번뜩이는 밤 고양이들, 마치, 의미도 없이 홀로 핀 신장로 곁의 코스모스 한 폭에 이르기까지 예사롭지 않게 본다. 그 가치와 의미를 느끼는 수단이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문학적인 감성일 것이다. 대상이야 무엇이든, 문학이란, 삶을 통해 느끼는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창자의 고통을 느끼듯 출생한 글을, 진솔한 평론가의 마음의 눈으로 덧칠해 내는 것이야 말로 완성된 한 폭의 평론화가 아닌가 싶다.

그냥 흘려보냈던 평범한 감상에서, 이제, 평론가의 길은, 그 의미를 달리한다고 본다. 작가의 지나온 삶, 그 배경과 성향, 덕 몫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때론, 단조롭지만 함축된 글들에서 예리한 통찰력과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문학의 격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수련으로의 과정일 것이다. 나는, 이제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고도의 문학적 다양한 언어를 통해 끝도 없이 쏟아내는 이해와 지식, 견문과 문학적 해학들이 어우러진 /어느 화형일/을 더 큰 빛으로 각인시켜 준 이름처럼, 나도 언젠가는 그런 평론가의 정신과 에너지의 폭발력을 지필 수 있을까? 나는, 검은 바람이 몰고 온 나목처럼, 정오의 그림자 만 큼이나 속히 사라지는 시간의 한계를 느끼지만, 무대 중앙에서 예리한 감독으로 필적할 만한 작품 하나 남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직은, 허망한 짧은 인생행로에 의미 있는 삶을 불어넣고 싶은 욕망이 불의 혀처럼 일렁이지만, 삭풍은 내 가슴을 여지없이 파고든다. 그래도 어쩌면, 나는, 바람이란 생각이 든다. 바람은 전반적인 모습을 결정하며, 원하는 대로 그 모양을 새롭게 바꾸어 낳아갈 수 있다. 바람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 이제, 내일의 바람은 어디로 불까? 창조문학신문사 사장 (문학평론가 박인과)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당선 소감을 대신한다. / kirim.

▣ 박동규 문학평론가 프로필
* 필명: 寄林kirim / 박동규(본명)
* 거주지: 1950 년 충북청원 출생 / 현재 부산진구에 거주
* 2008년 2월 월간["광장"](시와 창작)서울 라 11766 시부문 신인상 수상
* 2008년 3월 계간(봄호)[문학21]서울 라 6940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시: 추천인: 혜전대 교수- 최문길 (문학 평론가)
수필: 추천인: 송호대 (문희수)교수- 우당, 안도섭 (문학 평론가)
* 저서: [사상을 위한 여가] 및 [작가문인지] 다수 수록

창조문학신문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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