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흠의 묘역,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

서울--(뉴스와이어)--조선 인조 때 한성부 좌·우윤(漢城府 左·右尹)·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양양부사·개성부유수 등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가난한 백성을 위한 시정을 펼쳤으며, 청렴 강직했던 목서흠【睦叙欽:1572년(선조5)~1652년(효종3)】. 그의 묘역이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될 전망이다.

목서흠은 선조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오늘날 행정자치부 차관에 해당)을 지낸 목첨(睦詹)의 맏아들로 주로 인조 때 활약하였는데 양양부사를 지낼 때는 그 지방의 수재들을 별도로 수학시키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으며 관혼(冠婚)을 치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용을 대주었다.

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낼 때에는 학교를 새로이 정비하고, 학름(學廩:장학금의 일종)을 증가시켰으며 선죽교(善竹橋)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화담서원(花潭書院 : 서경덕을 모신 서원)을 수리하는 한편 충신·효자·열부의 정려(旌閭)로서 무너진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잘 고쳐놓았고, 붕당(朋黨)의 해로움을 인조에게 상소하기도 했다.

중앙에서는 좌·우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관에 해당)·한성부 좌우윤·예조참판 등을 지내다 1652년(효종3)】세상을 떠났다. 1675년(숙종 1)에는 그의 공을 기려 나라에서 충정(忠貞)이라는 시호(諡號:왕이나 재상, 저명한 학자 등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나라에서 내려주는 이름)가 내려졌고, 1689년(숙종 15)에는 다섯째 아들인 목내선(睦來善)이 좌의정에 오르게 되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죽은 후 벼슬이 더해지는 것을 말함)되었다.

목서흠의 묘역은 사적 362호 <연산군묘>와 서울시 유형문화재 50호 <정의공주(세종대왕의 차녀) 묘역> 인근 방학동 시루봉 자락에 위치한 사천 목씨 묘역 내에 있는데 목서흠의 부인인 정경부인 안동 권씨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634년(인조 12) 최초 조성된 후 목서흠이 세상을 떠난 1652년(현종 3) 본격 정비되기 시작, 목서흠의 묘표(墓表)가 건립되는 1689년(숙종 15)까지 완성되었다.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神道碑)·혼유석(魂遊石)·향로석(香爐石)·동자석(童子石)·망주석(望柱石) 등 석물들이 원래의 모습대로 잘 남아 있어서 조선 후기 묘제와 석물 제작방식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묘역 입구에 자리한 3m 높이의 신도비는 1671년(현종 12) 세워진 것으로 목서흠의 가계(家系)와 후손·역임한 주요 관직들과 활동·성품·그의 덕망을 기리는 시문 등이 새겨져 있는데 전서(篆書:한자 글씨체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서체로 획이 가장 복잡하고 곡선이 많음)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났던 이정영(李正英)과 역시 명문장가이자 명필로 알려진 조위명(趙威明)의 글씨, 그리고 조경(趙絅)의 문장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서울시는 오늘날 공복(公僕)으로서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하는 조선 후기 관료 목서흠의 묘역과 신도비에 대한 문화재 지정계획을 2009년 4월 23일부터 30일 동안 예고하여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금년 6월쯤 서울시 기념물로 최종 지정 고시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의견이 있는 경우 서울시 문화재과(02-2171-2594)로 제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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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서울특별시 문화국 문화재과장 이충세 02-2171-2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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