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과거와 달라진 일본 전자기업의 구조조정’
일본 기업들의 고전이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되었던 2008년 실적을 살펴보면, 주요 9대 전자 기업들이 내놓은 손실 규모만도 2조엔에 이른다. 그러나 손실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 영업 적자는 총 손실의 약10% 수준으로 오히려 IT 버블 붕괴 때의 3,000억엔보다 규모가 작은 1,852억엔 정도이다. 영업적자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손실이 발생한 것은 상당부분 구조조정 비용이 미리 계상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구조조정은 비용인 동시에 미래를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비록 엔고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영업 실적이 추락하였지만, 일본 기업들은 여기서 좌절을 느낄 새도 없이 발 빠르게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의 재도약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잡은 듯 하다.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 현황
일본 기업들은 이번 구조조정에서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을까? 일본 기업들의 구조조정유형부터 정리해 보자.
● 수익 구조 개선
일본 기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왔던 요소는 고비용 구조이다. 방만한 생산 설비, 높은 인건비는 일본 기업의 고정비 부담을 높이는 대표적인 문제점들로 지적되어 왔다. 우선 생산 설비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이한창이다. 소니의 경우 자국 내의 대표적인 생산 거점인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공장을 비롯하여 해외 LCD 모듈 생산기지인 미국의 피츠버그 테크놀로지 센터 등 5~6개의 공장 폐쇄를 앞두고 있다. 파나소닉은 일본 내 공장 13곳, 해외공장 14곳을 정리할 방침인데 이것은 파나소닉 전체 제조 거점의 20%에 달하는 규모이다. NEC도 자국 내 3곳의 공장을 폐쇄하였다. 샤프도 그 동안 중소형 패널 공정을 담당했던 미에와 텐리공장의 일부 노후화된 생산라인을 폐쇄하고 카메야마 공장으로 집약해 생산을 효율화할 방침이다. 또한 LCD TV용패널 공장의 일부를 중국으로 이전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엔고로 일본 내 생산 단가가 악화되면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도시바는 백색가전 부문의 생산 설비를 정리하고 있다. 올해안에 일본 내 백색가전 제조공장 2곳을 하나로 정리하고, 개발 거점도 3곳에서 2곳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특히, 냉장고와 세탁기 등을 생산하는 도시바 홈 어플라이언스의 아이치공장은 가동이 중단되고 이 공장의 세탁건조기 라인이 중국 광둥성의 생산 자회사로 옮겨지는 등 에어컨을 제외한 대형 백색가전 모두가 해외 공장으로 이전된다.
생산설비 구조조정에 이어 가장 눈에 띄는 움직임은 감원이다. 소니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각각 8,000명씩 총 16,000명, 파나소닉이 정규직 포함 15,000명 등 적자 사업부문중심으로 인력감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NEC는 정규직 9,450명을 포함, 국내외 인력20,000명을 감축하는 유례없는 감원을 추진하고 있다.
부품 조달 구조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소니는 현재의 LCD TV 시장의 부진을 극복하고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패널 소싱을 다변화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삼성과의 합작사인 S-LCD에서의 패널 소싱의 비중이 높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격 경쟁력이 있는 대만업체로부터의 패널 구매를 확대할 전망이다.
● 비수익 사업 효율화 및 철수
일본 기업이 가진 또 하나의 문제점은 문어발식 사업구조이다. 부품에서 세트에 이르기까지 일본 기업의 사업 영역은 매우 다양한데 수익을 내는 사업이 있는 반면, 경쟁력을 회복하기 어려운 사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일본 기업들은 좀처럼 비수익 사업을 철수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비수익 사업이라 해도 계열 내 관련 부품 사업을 가짐으로써 수직 통합의 이점이 발생하는 효과와 더불어, 사업 철수에 따르는 인력 해고의 높은 부담과, 계열 회사와의 신의를 중시하는 ‘일본적’인 사업 철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위기를 맞으면서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파이오니어는 지난 1분기를 끝으로 PDP사업에서 공식 철수했다. TV사업 역시 점차적으로 축소하기 시작하여 오는 2010년 3월 최종적으로 TV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할 방침이다. 파나소닉은 도시바와 합작회사(TMD:Toshiba Matsushita Display Technology)를 이루어 중소형 LCD사업을 운영해 왔지만LCD 가격하락으로 인해 채산성이 악화되자 결국 지분 40%를 도시바에 매각하고 사업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히타치는 엘피다 메모리 지분 매각으로 DRAM 사업에서 물러났으며 올 7월부터 TV사업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분사시킬 예정이다. 후지쯔는 하드 디스크드라이브(HDD)에 들어가는 헤드 사업 부문을2009년 3월 31일자로 중단하였다. 세계적 경기 침체로 인해 앞으로도 HDD 사업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자 도시바로의 매각을 확정지은 것이다.
● 핵심사업 재정의 및 차세대 성장 동력 모색
구조조정이라 해서 다운사이징만 있는 것은아니다. 이것만으로는 기업의 중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의신성장 동력이 될 핵심 사업을 재정의하거나,차세대 사업을 준비하는 모습 역시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놓칠 수 없는 움직임이다.
핵심 사업 부문을 재정의한 회사로는 도시바와 히타치를 들 수가 있다. 도시바는 반도체 및 디지털 가전 부문의 구조개혁과 고정비삭감을 강행하는 한편, 원자력 발전과 같은 중전 분야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히타치는 제조 중심이던 사업 구조를 솔루션 중심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TV와 자동차 기기 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분사하는 대신 텔레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장비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등을 핵심 사업으로 육성하면서 금융회사 전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힘을 쏟을 방침이다.
반면, 소니와 샤프, 파나소닉은 에너지라는 차세대 사업에 시동을 걸고 있다. 샤프는 소니와 공동 출자하여 건설중인 LCD 대형 콤비나트에서 LCD 모듈과 동시에 박막형 태양전지 개발에도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LCD와 태양전지는 생산기술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고 기술자를 서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개발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파나소닉의 경우, 전기 자동차용 전지, 태양전지 등의 차세대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산요전기를 인수했고 지난 1월 1,000억엔을 투입하여 리튬-이온전지의 신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2010년에 가동할 예정인 히메지 LCD 생산 공장에 차세대 패널인 OLED 생산라인을 함께 설치할 계획에 있다. LCD와 OLED는 제조 기술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같은 공장에서 생산하게 되면 원가절감 및 차세대 기술의 실현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제조 사업 모델의 변화
제품개발에서 생산, 부품조립 및 완성까지 수직계열화 체제를 고집해 온 일본식 사업 모델도 이번 기회에 변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소니가 가장 대표적이다. 디지털 TV 사업에 뒤늦게 진출하여 뼈아픈 시행 착오를 경험한 바 있는 소니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은TV 제품의 범용화 추세이다. 이미 디지털 TV시장은 성숙기에 접어들어서 제품의 범용화가가속화 되어가고 있고 그에 걸맞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본 것이다. 결국 소니는 이번 구조조정을 통해 저가 생산이 가능한OEM과 ODM 방식의 비율을 높이고 패널 및 부품 조달에 있어 글로벌 아웃소싱을 확대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소니는 퍼스널컴퓨터(PC)의 수평분업 모델을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TV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도입할 전망이다.
도시바 역시 2010년까지 외부생산위탁을600만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미 미국 시장에서는 LCD TV 판매대수 가운데 ODM비율이 50% 증가하면서 2008년도(회계연도 기준)에 TV 사업이 흑자로 전환하는데 큰 몫을했다.
금번 구조조정의 의미 : 무엇이 달라졌나?
일본 기업의 위기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도 IT버블이 붕괴되면서 일본 기업들의 실적은 크게 악화되었고, 주요 사업의 빅딜과 같이 업계 전반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뒤따르기도 했다. 따라서 금번의 구조조정 역시 의례적인 수준이 아닌가 하는 회의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최근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에서는 일본 기업 기저에 깔린 근본적인 가치마저도 개혁하려는 결연함이 느껴진다.
우선, 일본 기업 운영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종신 고용 원칙을 포기했다. 연이은 위기 속에서도 일본 기업들은 종신 고용의 원칙만은 고수하려 노력해왔다. 일개 중소기업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만큼 소명의식으로 가득 찬 종업원,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는 굳건한 사업 의지 등 오늘날 일본 기업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요소들이종신 고용제로부터 나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기업은 물론, 일본사회 전체가 받을 충격도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이 이처럼 대규모 감원에 나선 것은 이번 위기를 대응하는 일본 기업의 각오가 얼마나 결연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경영진의 인적 쇄신이다. 경영에 관한 한 보수적인 일본 기업들이 신사업에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을 중심으로 경영진을 꾸려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원자력 발전 등 중전기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사키 노리오 부사장은 도시바의 차기 사장으로 내정되어 급격히 나빠진 반도체와 디지털 분야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중전기 부문을 회사의 주력사업으로 키울 방침이다. 히타치에서 새로이 내정된 가와무라 다카시 사장 역시 히타치 플랜트 테크놀로지와 히타치 멕셀 회장을 겸하면서 워터트리트먼트 시스템과 산업용 기계 등 IT인프라분야에서 활약한 바 있다.
새로운 기업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리더쉽강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소니 역사상 첫 외국인 CEO로 발탁되어 주목을 받아 온 하워드스트링거 회장의 경우 오랜 기간 소니를 지탱해 온 컴퍼니 체제를 본부제로 바꾸면서 의사결정권한을 CEO인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스트링거 회장은 14년 만에 최대 적자를 낸 TV사업에 대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벌이는 한편, 게임과 영화 엔터테인먼트 등 소프트웨어 사업을 강화할 방침이다.
셋째, 제조 역량과 수직 통합을 강조하는일본식 사업 모델에서 외주 생산, 제품과 서비스의 연계와 같은 미국식 사업 모델이 이식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 비해 비용 우위에 있는 대만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기업은 늘 경쟁하는 위치였으나, 사업 모델이나 기업 운영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이 한국 기업에 장점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같은 전략을 쓰고 있지만 일본보다 한국이 좀 더 빠르고, 좀 더 가격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일본이 사업 모델을 바꾸어 등장한다면 향후 경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역습, 미리 대비하라
그렇다면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일까? TV로 대표되는 기존 사업에서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는 단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우선, 파이오니어와 히타치 등 상대적으로 세컨드 티어에 위치해 있는 기업들이 점차적으로 TV사업에서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소니와 파나소닉처럼 탑 티어에 있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구조조정이 마무리되고, 변화된 시스템이 자리잡기까지 일정 부분의 혼선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공백을 잘 이용한다면, 한국기업 입장에서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대비가 필요하다. 우선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제조 사업 모델의 변화와 슬림화된 비용구조, 강력한 브랜드를 바탕으로 아시아 등 신흥 시장의 공략을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구조조정에서 일본 기업들이 펼치고 있는 활동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비용 구조효율화다. 더구나 일본 기업들을 짓눌러 온 엔고 부담이 완화되면 일본 기업들이 앞으로 공격태세를 갖추게 될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 전자 기업들의 차세대 사업진출 계획 또한 주목해 봐야 할 위협 요인이다. 현재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OL ED와OLED TV는 한국 기업의 주력 사업인 LCD패널, LCD TV와 경쟁 관계에 있다. 소니가 브라운관 TV의 성공에 사로잡혀 TV 시장의 맹주 자리를 내놓게 되었던 사례가 한국 기업이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 사업의 승패는 한 순간에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뿐 아니라 전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쏟고 있는 태양전지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간 경쟁양상이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인 만큼 정부 차원에서 차세대 신사업에 대한 R&D 투자 확대를 지원해야 하고 일본 기업들에 비해 다소 뒤쳐진 기술력에 대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을 강화하여 경쟁력을 제고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인 불황의 그늘에서, 한국은 비교적 안도하는 분위기가 크다. 매달 경상수지흑자가 최고 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수출도 호조세이고, 일본을 제쳤다는 안도감마저 엿보인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일본 기업이 기록한 최악의 실적을 보고 안도할 것이 아니라, 구조조정 비용 속에 숨어있는 의도를 주목해야 한다...유미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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