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와축기단 건물지와 기록목간을 확인하다
이번 자문회의에서는 6세기 중·후반 경의 건물지부터 사찰이 건립되는 8세기 후반까지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유구와 유물이 소개된다. 특히 신라지역에서 7세기 초엽 경 조영(造營)된 것으로 추정되는 와축기단 건물지와 우물에서 출토된 목간은 통일신라의 사초로 추정되는 기록 자료로 평가되어 앞으로 고대사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와축기단 건물지는 사비시기(538~660년)의 백제지역에서 조사 보고된 백제의 전형적인 기단 축조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전)인용사지에서 확인된 와축기단 건물지(도리 3칸, 보 1칸 : 12.6 × 6.7m)는 기와를 이용하여 기단을 구축한다는 형식은 백제의 그것과 같지만 기와를 경사지게 엇갈려 쌓는 방법에 있어서는 백제지역에서 보고된 사례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영 시기는 기단토 내부에서 수습된 고식의 단판연화문수막새, 단각고배 등의 출토유물과 건물지의 중복관계(사찰 건물의 아래층)로 볼 때 7세기 초엽 경으로 추정된다. (전)인용사지에서 확인된 와축기단 건물지처럼 차후 신라지역에서의 발견사례가 증가될 경우 백제지역 건축술과의 좋은 비교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물에서 출토된 목간은 세장방형(細長方形)으로 길이 15.8㎝, 너비 1.38㎝, 두께 0.77㎝이며, 수종은 소나무이다. 목간의 앞뒤 양면에서 묵서(墨書)가 약 40여 자 확인되는데, 앞면은 길이방향으로 1행만 기재되어 있지만, 뒷면은 2행의 묵서가 서로 엇갈리게 기재되어 있다. 서체는 전형적인 왕희지체로 매우 능숙하게 쓰인 글씨체다. 목간의 내용은 왕에게 대룡(大龍)이 소귀공(所貴公) 등 2인에 대한 평(評)과 천거(薦擧)를 아뢰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으로 볼 때 이 목간은 어떤 사실을 기록한 자료로서 정식문서로 정리하기 전 단계의 기록, 즉 사초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대룡”이라는 인물은‘삼국유사’에 나타난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딸 (大龍夫人, 小龍夫人 중의 대룡부인)로 비정(比定)되어 목간의 연대를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엽 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9세기 대의 이두 연구와 신라 하대 정치상황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연못과 우물, 건물지 등에서 출토된 원반형 토제품, 동경(銅鏡 : 청동거울), 토기, 복숭아씨 등 통일신라 제의(祭儀)행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도 공개된다.
경주 (전)인용사지는 신라의 궁성인 월성 남쪽에 폐사지(廢寺址)로 존재하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인용사지로 소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인문(628~694,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이 당나라의 옥중에 있을 때 신라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라 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2002년부터 유적정비를 목적으로 시작된 (전)인용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지를 비롯하여 절터 건물지 일곽(一廓)과 금동불상, 광명대, 치미 등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소개된 바 있다.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전)인용사지에 대한 그간의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유적과 출토유물에 대한 종합연구보고서를 발간하여 유적 정비의 기초 자료를 제공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개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온 문화재 체계,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제정된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60년간 지속된 문화재 체계가 국가유산 체계로 변화한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고정된 가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국민의 참여로 새로운 미래가치를 만드는 ‘국가유산’.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은 국민과 함께 누리는 미래가치를 위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국민과 공감하고 공존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를 지키며 과거와 현재, 국내와 해외의 경계를 넘어 다양성의 가치를 나눌 것이다.
웹사이트: http://www.cha.go.kr/
연락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054-777-8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