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TV, 한국전쟁 60주년기념 ‘한국전쟁과 언론’ 5부작 방송

서울--(뉴스와이어)--아리랑TV <Arirang Today> 한국전쟁 60주년기념 ‘한국전쟁과 언론’ 5부작

<1편> 한국전쟁 발발에서 서울 함락까지 - 21일 방송

<아리랑 투데이>에서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연속기획 ‘한국전쟁과 언론’을 준비했다.

그 첫 번째 시간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다시 보는 한국전쟁’으로 전쟁발발에서 서울 함락까지의 시간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 발발 이후 세계의 시선이 한반도로 집중됨과 동시에 종군기자들의 취재가 시작됐다.

온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전쟁의 현장을 일반인들이 안방에서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무릎쓰고 현장에 뛰어든 종군기자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의 첫 언론보도는 UP통신의 잭 제임스의 기사였다. 이것은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타전한 보고보다 앞섰다.

한국 언론의 첫 보도는 ‘한국전쟁 유일한 방송기자’ 한영섭(KBS) 기자의 아침 7시의 뉴스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조선일보에서는 ‘이북괴뢰 불법남침 25일 삼팔전역에 걸쳐’란 제목으로, 동아일보는 ‘괴뢰군 돌연 남침을 기도’란 제목으로 호외 신문이 뿌려졌다. 주된 내용은 정예국군이 있으니 안심하고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신문들도 25일 오전 남침을 주장하는 보도를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하루 전날인 24일 기사를 내기도 했다. 25일 투사신문은 ‘평화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이처럼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북한의 행동이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된다. 북한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27일, 경향신문은 ‘아군 용전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중’, 동아일보는 ‘국군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우리 국군이 반격에 나서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기사가 보도됐지만, 당시 국군은 서울 바로 코앞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도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28일 새벽인 ‘전쟁 3일째’에 결국 서울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에 점령당한 서울은 탈환하는 9월 28일까지 약 90일 간 공산당의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만 발행됐다. 한국외대 언론학부 정진석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북한은 서울을 함락하자마자 바로 잡지까지 낼 정도로 모든 준비가 완비”라고 분석했다. 한국정부의 이동은 곧 전선의 이동을 의미했고, 종군기자들도 함께 따라 나섰다. 해외기자들도 속속 한국에 도착하고, 8월이 되자 세계 17개국 기자들이 한국에 모였다. 한편 드레스보다 군복이 어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히긴스’ 기자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안겨준 것도 바로 한국전쟁의 취재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퓰리처상은 이례적으로 6명에게 주어졌는데 모두 한국전을 취재한 종군기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리랑 투데이>팀이 한국전쟁 순직 종군 기자의 추념비가 있는 ‘문산 통일공원’을 찾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동원되었던 기자들의 반 이상인 600여명에 달했던 기자들 중 18명이 전장에서 산화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한국전쟁의 역사가 기록된 것이다. 전선을 함께 이동했던 수많은 종군기자들. 군 검열하에 진실을 발표할 수 없던 언론인들의 고충과 남침을 이야기하는 북한 언론까지 한국전쟁 중 순직한 종군 기자들이 남긴 흔적들을 <아리랑 투데이>에서 따라가본다.

<2편>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의 후퇴까지 - 22일 방송

지난 4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 육사 생도 2기생 전원이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육사 입교 25일 만에 한국전쟁에 생도신분으로 참전해 동기들의 반을 잃고 졸업도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기수이다. 지난 96년도에 명예졸업장을 받고 올해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받으며 입교 반세기만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한편 북한군의 공세에 밀리기만 하던 한국군과 UN군은 드디어 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사건의 제 1보는 AP통신의 신화봉(빌신)기자의 기사로 미국사령부의 발표보다 9시간 빨랐다. 타전 이후 맥아더 사령부가 항의를 할 정도로 앞선 보도였다. 다행히 인천상륙작전은 큰 성공을 거뒀다.

프랑스 AFP통신의 ‘피에르 드르베’ 기자도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연합군을 환영했다고 기억한다. 50년 9월 29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UN군과 한국군은 마침내 서울을 탈환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폐허가 돼버린 서울의 모습. 그 후 10월 1일 서울신문의 속간을 시작으로 신문들의 발행이 재개됐다. 학살된 시체들과 행방불명 광고들이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했다.

당시 UN군은 기세를 몰아 평양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다. 50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김진섭 기자의 보도에서는 ‘모란봉에 휘날리는 태극기’, ‘왜 이제야 왔소’등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당시 기사를 작성한 동아일보 김진섭기자는 “언론인 중 대동강 철교에 맨 처음 도착하는 영예를 얻었고, 많은 이들이 행복해했다”고 전한다.

50년 11월, 정기간행물 발간 제한이 폐지되고 학교들은 개학을 준비할 정도로 한국군은 승리를 자부했다. 얼마 후인 11월 6일, 중공군의 참전이 밝혀졌으나 언론을 통해 중공군의 위력은 확인되지 않았다. 50년 11월 16일에는 서울 평양의 철도까지 운행도 재개됐다. 그러나 얼마못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50년 12월 31일.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기관차는 중공군의 폭격으로 멈춰서고 말았다. 서울 탈환 3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후퇴에 맞춰 언론인들은 다시 짐을 싸야했다. 51년 1월 4일 후퇴 후, 1월 10일 동아일보는 부산에서 첫 속간을 발행했다. 1월 11일자 신문에는 ‘민족의 운명은 우리 손에’, 1월 20일자 신문에는 ‘여성의 궐기 시급’ 등이 전해졌다. 시민들의 전쟁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51년 3월 UN군은 다시 서울을 수복했지만 4월에 맥아더가 경질되고 다시 피난이 시작됐다. 51년 6월 25일에 발행된 경향신문에는 전쟁 1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전황을 지도로 설명하기도 했다.

<3편> 한국전쟁 휴전 협정 - 23일 방송

한국전쟁 발발 1년이 조금 넘은 시점, ‘정전회담’이 합의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반대의사를 전달했지만 한국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긴 정전회담의 막이 올랐다. 휴전 협정 중에도 한국 신문들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헬싱키 올림픽’ 등의 세계소식을 계속 전했다.

53년 3월 6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협정은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53년 6월 10일 경향신문의 ‘휴전 반대 데모’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시민들은 휴전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통일을 염원했던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세계열강들에 의해 휴전협정이 이뤄지고 당시 여론은 동아일보의 53년 7월 28일자 ‘통일 못 이룬 적막감뿐’, 조선일보의 7월 29일자 ‘11분간의 조인식’등을 통해 드러났다.

반대로 외신의 반응은 달랐다. 휴전은 UN군의 승리로 환영받은 것이다.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됐지만, 오랜 전쟁 끝에 남은 한국의 모습을 처참했다. 전쟁 도중의 상황이 반영된, 51년 10월 1일 런던타임즈에는 ‘한국의 폐허 가운데서 건전한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를 기대하느니보다 오히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라고 전했으며, 51년 9월 1일 선데이 마이니치는 ‘한국은 어디를 가나 구린내가 코를 찔러’라고 보도했다.

한국은 미래가 없는 곳으로 치부됐지만, 한국인의 휴전협정반대를 이해하는 기사는 ‘더타임스’ 밖에 없었다. 7월 27일자 더타임스(영국)에는‘전쟁에 찢긴 한국의 장래 지속적인 해결의 위협’이라고 보도했다. 외신기자들이 이후 한국전쟁 보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했다. AFP통신 피레르 길러리 기자는 ‘한국전쟁은 전쟁 그 자체는 과잉 보도된 반면, 한 나라로서의 한국에 대한 보도는 빈약했다’고 말했으며, UP통신의 어네스트 호브레트 기자는 ‘한국이라면 그저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 거지가 들끊는 나라로 오랫동안 잘못 인식된 데는 다분히 당시 기자들의 보도 태도에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문화권 시각에서 본 ‘사건 중심’의 보도로 전쟁 저널리즘의 한계를 드러낸 외신보도와 외부의 압력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국내 보도들, 안타까웠던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

<4편> 한국전쟁 종군기자 ‘맥스 데스포’ 대담 - 24일 방송

한국전쟁의 참상을 한 컷으로 사진으로 응축한 ‘대동강 다리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UP통신의 맥스 데스포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방한했다. <아리랑 투데이>가 한국전쟁 종군기자 ‘맥스 데스포’를 만나본다. 그가 겪은 한국전쟁의 참상, 대동강 다리 사진을 찍었을 때 느꼈던 충격과 카메라를 방패삼아 전쟁터를 뛰어다녔던 종군기자 시절의 이야기, 휴전협정 현장과 이산가족의 아픔 등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5편> 참전국 방한기자가 바라본 한국전쟁과 한국의 현재와 미래 - 25일 방송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한 참전국 언론인 중 호주 ‘채널9’의 기자 피터를 대표로 만나본다. 피터가 취재한 호주 참전용사들의 주요 전장(참전비) 화면을 보며, 한국전 파병의 의미와 한국전쟁의 의미, 60년이 흐른 한국 발전상과 다가올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전쟁 발발로부터 반세기를 훌쩍 넘긴 2010년, 그러나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지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는 전쟁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종전이 아닌 여전히 정전 중이며, ‘천안함’, ‘서해교전’ 등으로 대치돼 있는 상황이다. 이 외에도 외부에 밝혀지지 않은 전쟁의 기록이 많이 있다.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전쟁 당시 종군 기자들의 보도(국내,외신) 기록을 통한 시선으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웹사이트: http://www.arirang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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