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후 첫 금메달, 기억 저편의 국민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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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업인력공단
2010-07-16 09:14
서울--(뉴스와이어)--광복이후 국제대회 첫 금메달의 주인공은 누굴까?

바로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양복종목 홍근삼 선수(70), 제화종목 배진효 선수(62)였다. 당시 이들의 금메달 소식은 나라 전체를 들뜨게 하는데 충분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중심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지는 동안 시민들의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았고, 팬레터도 이어졌다. 당시 홍 씨와 배 씨는 월드컵 원정 16강을 이룬 태극전사들 부럽지 않은 국민영웅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196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능경기대회가 열렸고, 이들은 제1회 서울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입상했지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출전이 예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는 목형, 판금을 비롯한 7개 직종의 예산만 확보한 상태였고, 양복과 제화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출전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재직하고 있던 이성우 양복점과 칠성제화에서 비용지원을 약속했다. 홍 씨는 40년 생으로 당시 27세였지만, 호적이 47년생으로 되어 있어, 만 22세 이하만 출전할 수 있었던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피땀을 흘리며 연습했고, 67년 7월 드디어 대회가 열렸다. 대회 첫날 한국선수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대회에서 사용해야 할 장비들 중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연습하던 장비들이 세계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제화의 경우 장비사용법을 다시 익혀야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들의 열정과 실력은 빛을 발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처녀출전한 나라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따냈다. 그것도 자비로 출전한 양복과 제화 종목이었다. “당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 회장이었던 김종필 씨가 체면을 살려줬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배 씨는 회고했다. 청와대에서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선수 대표였던 홍 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국제대회 수준에 맞는 장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다음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독일에서 들여온 새로운 장비로 연습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났다. 머리는 희끗하고 눈은 침침해졌지만, 홍 씨는 종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고, 배 씨는 동대문 근처 제화회사에서 근무하며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홍 씨는 “일 년에 20벌 정도 양복을 제작하고 있다”며, “용돈을 버는 수준이지만, 현장을 떠나기 아쉽다”고 말했다. 배 씨도 “지금도 신발의 라스트(목형)을 손으로 제작하고 있다”며, “맘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의 기쁨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금메달 덕분에 한국은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꾸준히 참가해왔다. 후배들은 25번 출전 중 16번의 종합우승으로 ‘기술강국 코리아’의 명성을 쌓았고 더 많은 금메달을 캐왔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입상자들은 기능인양성과 기술개발로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홍 씨와 배 씨는 “우리의 금메달은 한국제품이 싸고 좋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그래서인지 이듬해부터 섬유와 제화 쪽 수출이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1978년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부산에서 개최됐다. 밀링 종목 금메달리스트인 양한석 씨는 현재 강서공고 교감으로 재직 중이다. 양 교감은 32년간 공업고등학교에만 재직하며 우수한 기능 인력들을 배출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국내기능경기대회는 물론 국제기능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는 우수한 실력자가 됐다.지금은 강서공업고등학교에서 현장형 기능인력 양성을 통해 취업을 장려하고 있다. 양 교감은 “진학에 올인하는 것은 한국 전체 인력구조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며, “전문기술인이 되어 현장에서 인정받는 우수 기능인력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광 P.M.S의 정호순 대표는 30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1989년, 영국 버밍햄) 정밀기기제작 종목 금메달의 주인공이다. 영광 P.M.S는 자동차 차체 제작 판매회사로 국내 유일의 수제 스포츠카인 ‘스피라’ 차체와 ‘그랜드카니발 리무진’의 하이루프를 독점공급하고 있다. 정 대표는 ‘자동차의 필러튜브 조립체’, ‘주차브레이크 장치’를 개발해 특허를 등록하는 등 꾸준히 기술을 개발했다. 정 대표는 “기술개발로 후발업체면서도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으며, 수출로만 연간 50억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제33회 국제기능올림픽 대회(1995년, 프랑스 리옹)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 정보처리 직종을 처음 채택했다. 대표선수로 참가한 김성민 씨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쉬웠지만, 당시 국내 정보화 수준이 매우 낮았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성적이었다. 김 씨는 현재 ‘이노룰스’라는 프로그램 개발업체에서 제품개발팀장을 맡고 있으며, 전산개발 경력 15년으로 과기부 기준 특급 경력의 개발자다. 이노룰스는 국내 유일의 ‘룰 엔진’ 개발업체로, 김 씨는 룰 엔진 개발에 많은 참여를 했으며, 향후 ‘수출형 룰 엔진’ 개발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또한 전국기능경기대회와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기능경기대회 발전에 힘쓰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모바일 로보틱스 종목이었다. 처음 정식직종으로 채택된다가, 일본 등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는 바로 서울로봇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최문석, 김원영 군이었다. 이들은 현재 고졸의 학력으로 삼성전자에 취업했고, 미래 로봇산업분야의 전문가를 꿈꾸고 있다.

16번의 종합우승 등 후배들은 금메달을 더 많이 가져왔지만, 홍 씨와 배 씨처럼 더 이상 국민영웅은 될 수 없었다. 산업사회가 지나고,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기능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존재조차 모르고 있고, 산업사회 발전을 일군 기능인들의 공헌도 잊고 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입상자들은 기능을 소홀히 하는 사회현상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배 씨는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있지만, 사람 손이 가지 않고 제품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며, “젊고 우수한 기능인들이 양성되지 않으면, 모든 제품을 수입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정 대표도 “실업률이 높은데도 요즘 젊은이들은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려 하지 않는다”며, “젊은이들이 제조현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다가, 교육기관도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제60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는 우수기능인 처우 개선방안이 마련됐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입상자들의 일시보상금과 기능장려금을 크게 인상했으며, 산업기능요원제도 폐지와 관계없이 병역특례도 유지하기로 했다. 마이스터고 설립근거도 법제화하기로 했고, 기능인력의 선취업· 후학업 기반 조성 방안도 마련됐다.

배 씨와 홍 씨는 정부의 파격적인 개선방안을 반기면서도 기능장려금이 연금형태로 전환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기능장려금은 입상직종에서 계속 종사하도록 하는 유인책으로, 다른 일은 하거나 은퇴를 하면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배 씨는 “나이가 들거나 장애가 생겨 은퇴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며, “일정기준이 충족되면 연금형태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개요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근로자 평생학습 지원과 직업능력개발훈련, 자격검정, 기능장려 사업 및 고용촉진 등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다. 1982년 한국직업훈련관리공단이 설립되었고, 1987년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으로, 1998년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소속 기관은 6개 지역본부, 18개 지사가 있다. 현재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 본부가 있고, 울산광역시 혁신도시로 이전할 예정이다. 노동부 고용정책실장을 역임한 송영중 이사장이 2011년부터 공단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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