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윤산군이탁백자음각묘지(輪山君李濯白磁陰刻墓誌)’ 유형문화재 제313호로 지정
※ 묘지(墓誌) : 죽은 사람의 이름과 경력, 생몰연월일, 성품, 가족사항 등을 새겨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자기
화정박물관(종로구 평창동 소재)이 소장하고 있는 이 묘지는 서울시가 2010년에 실시한 ‘명문이 있는 백자’ 일괄공모를 통해 발굴된 것으로 문화재위원 조사와 3차에 거친 문화재위원회(2010.7.16, 9.17, 12.16)의 도자사 및 사료적 가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선정되었다.
묘지는 세로 23cm, 가로 18cm, 두께 2cm의 직사각형 순백자로 총 3매이다. 음각으로 해서체(楷書體)의 묘지명(墓誌銘)을 새겨 넣었다. 내용은 묘주(墓主)인 윤산군 이탁(1462~1547)의 이력과 품행, 몰년(沒年)과 장례 등에 관한 것이고, 글은 입암(立巖) 민제인(閔齊仁,1439~1549)이 윤산군 이탁이 세상을 떠난 가정(嘉靖)26년, 즉1547년 4월에 지었다. 뒷면에는 ‘一’, ‘二’, ‘三’의 숫자를 음각으로 새겨 묘지의 순서를 표시하였다.
윤산군 이탁은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 1419~1469)의 9명의 아들 중 8번째 아들로 자(字)는 자광(子光)이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등에 전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문화재 지정조사와 심의, 묘지명의 원문 번역을 통해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그의 이력과 성품, 품행, 가족사항, 장례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윤산군 이탁은 7살이 되던 1468년에 보신대부(保信大夫)의 품계를 받아 윤산부정(輪山副正)이 되었고, 1476년(성종 7년)에 창선대부(彰善大夫), 1499년(연산군 5년)에 명선대부(明善大夫), 1541년(중종 36년)에 정의대부(正義大夫)와 윤산군에 봉해졌으며, 1543년(중중 38년)에는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중반정 후에는 신수근(愼守勤, 1450~1506)과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8월 풀려나기도 하였다.
윤산군은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술을 즐기지 않았고, 꽃을 좋아하는 반면 활쏘기에 능하였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부사정(副司正) 신석녕(申錫寧)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고, 측실에서 다섯 아들을 두어 모두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86세까지 천수(天壽)를 누렸다.
이와 같이 윤산군이탁백자음각묘지는 지금까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전하던 윤산군 이탁에 대한 1차 사료(史料)일 뿐만 아니라 세종의 손자이자 조선 전기 왕실인사에 대한 기록으로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1차 사료라는 데 의의가 크다.
또한 비록 묘지의 제작수준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현전하는 예가 매우 드문 조선 전기 왕실인사의 묘지라는 점에서 도자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묘지는 향후 조선시대사 및 조선 전기 묘지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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