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와이어)--작성 청와대 윤태영 제1부속실장

‘바빠서’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것이 지시인지 설명인지, 아니면 어떤 불만의 표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대통령은 텅 빈 지시메모 창에 그렇게 달랑 세 글자만을 써놓았다. 5월 8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방 길에 오르기 위해 관저를 나서는 아침, 대통령은 지난 며칠동안 미처리로 남아있던 많은 이지원 보고서들을 한꺼번에 내려 보냈다. 지시메모가 달린 문서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 아니 두 개의 문건에서 이렇게 ‘바빠서’라는 지시메모가 발견된 것이다.

사실 대통령은 그때까지 며칠동안 이지원 보고서를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통령의 열람을 기다리고 있는 문서의 목록도 그 키가 꽤나 높아졌다. 그만큼 부속실 직원들의 우려 또는 의구심도 깊어지고 있었다.

“요즘 보고서를 왜 안보고 계십니까?”

부속실의 질문에 대통령은 짧게 대답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

안 그래도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앞으로 일보다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언급도 있었던 터라 부속실은 대통령의 업무방식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닐까 예의주시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예단이 무색하게도 대통령은 순방을 앞두고 밀린 숙제를 모두 처리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이제는 더 이상 읽을 의미가 없을 정도로 기한을 넘겨버린 보고서에 ‘바빠서’라는 짧은 한마디를 남김으로써 미안함을 표현했던 것.

처음 같은 긴장과 열정으로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2년하고도 100일. 대통령은 이렇듯 때로는 숨 가쁘게, 또 때로는 숨 돌리며, 그렇게 완급을 조절하면서 참여정부의 오늘을 이끌어가고 있다. 가끔은 잘못과 실수도 있어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하지만, 그래서 침울한 청와대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3년차 대통령이 내딛는 발걸음에는 첫해의 이맘때처럼 건강한 긴장감과 열정이 어우러져 있다.

대통령의 하루는 기상과 함께 특유의 체조로 시작된다. 오래 전부터의 습관이다. 외국 순방기간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대통령 스스로가 개발한 스트레칭 요가, 아니면 요가 스트레칭이다. 약 40-50분간 매일매일 꾸준히 반복한다. 어쩌면 이 운동이야말로 고된 격무와 스트레스로부터 대통령을 지켜주고 있는 방패일지 모른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조찬을 할 때까지는 연설문 등 급한 보고서를 처리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경내 산책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05년 5월, 청와대 관저의 조찬에는 외부손님이 거의 없었다. 장관이나 수석 급 인선이 있을 때에는 주로 조찬을 활용해 후보자에 대한 일종의 면접을 한다. 지난 5월에는 조찬을 부러 잡아야 할 만한 인사도 없었고, 장관의 급한 보고도 없었다. 외부손님이 있는 날은 공식일정까지의 여유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 그 와중에도 대통령은 틈틈이 그날의 일정, 또는 지시점검 사항과 관련된 메모를 한다.

대통령이 수행 비서를 대동하고 차에 오르면 본관의 의전과 1부속실 등은 등청을 맞을 준비를 한다. 현관에 대통령이 도착하면 가벼운 인사와 함께 하루의 일정이 본격화된다. 홀을 지나 2층 집무실로 오르는 동안에도 사실상의 보고 또는 지시가 시작된다.

작고 가벼운 화제로부터 무겁고 급박한 보고에 이르기까지, 그날그날의 상황이 이 시간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때로는 대통령이 간밤에 또는 아침까지 깊이 생각해온 지시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첫 행사가 공개행사인 경우에는 영상 촬영을 위한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 시간 역시 지시와 보고의 장으로 활용된다. 의전비서관은 대체로 그날의 일정 가운데 핵심 포인트를 설명하고, 부속실은 비서실의 상황, 또는 대응이 필요한 주요 언론보도를 보고한다.

결정 전, 반드시 두어 가지 질문

대통령은 아무리 급해도 한마디만 듣고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거의 예외 없이 보고자에게 두 세 개의 질문을 던진다. 상황 파악을 위한 것이다. 판단 과정에 빠트리는 핵심 포인트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런 면에서는 사안에 대한 찬반양론이 간략하게 소개되면 더 좋다. 작은 일정 하나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누구의 제안인지, 어떤 정책적 효과가 있는지,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한다.

첫 행사가 시작되기 전, 5분에서 10분간은 주로 비서실장의 보고가 이루어진다. 짧은 시간에도 대통령은 여러 가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비서실장의 보고사항은 전방위적이다. 주요 정책이 결정되는 회의 또는 행사를 앞두고는 주무 수석 또는 보좌관의 사전보고가 준비된다. 그러나 말이 사전보고이지, 대통령은 행사와 관련된 자료를 이미 이지원 보고를 통해 학습한 상태이므로, 대부분은 간략하게 보고를 들은 다음 해당 분야의 현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오전 회의는 11시 30분을 전후해서 끝난다. 회의에서 대통령이 언급을 하는 시간은 대체로 30분에서 40분 정도.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는 지시가 대부분이지만, 정책결정 회의에서는 참석자들의 문제 제기에 하나하나 메모를 한 끝에 설명 또는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에 발언시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오전 회의를 예정된 11시 30분 전후에 마치려고 한다. 오찬까지의 30분 정도를 국내언론보도 분석을 읽는 데 활용하기 위한 것.

국내언론비서관실의 보도분석은 대통령이 거의 유일하게 오프라인 형식으로도 처리하는 보고서. 외국 순방 중에도 빼놓지 않고 필독하는 이 보고서를 통해 대통령은 국정을 점검하는 한편, 창조적 대안이 있으면 이를 수용한다. 대통령의 지시나 의견은 보고서의 해당 항목에 자필로 쓴다. ‘무슨 뜻이지요?’ ‘이 사안의 경위, 자세히 확인해서 보고 바람’ ‘이 주장, 이 논리가 맞는 것인가요?’ 등등.

학습과 토론, 그리고 판단과 결정의 연속

행사성이 아닌 오찬은 대부분 본관 집무실 근처에서 이루어진다. 월요일은 국무총리, 화요일은 분야별 팀장 장관 오찬으로 고정되어 있다. 월요일 오찬에서 주요현안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다면, 화요일은 정보공유의 성격이 짙다. 나머지 비어있는 오찬을 채우는 것은 부속실의 몫. 주로 비서실 내부의 수석 또는 비서관들의 필요한 보고가 이 시간에 활용된다. 부속실은 가급적 오찬이나 만찬을 가벼운 환담 형식으로 하여 대통령의 부담을 덜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접견자들, 특히 장관들의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두툼한 보고서를 가지고 온다.

오찬이 끝나면 휴식. 휴식 후에는 다시 오후 행사의 사전보고가 시작. 때로는 이 시간도 온라인보고서를 읽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오후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에도 대통령은 계속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보고를 들은 다음, 그때그때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판단을 하고 그에 따른 지시를 내린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깨어있는 시간들은 수많은 판단과 결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

대통령은 가급적 대통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결정만을 하려 하지만, 여의치만은 않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 또 있다. 국무회의 심의안건 등 수많은 결재서류에 서명하는 일. 대통령은 지겹다는 말 한마디 없이 대통령 이름 석자를 수도 없이 써내려간다.

하루의 일정 중에 막간의 시간을 활용해서 틈틈이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들의 인사 결재 등 현안 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부속실이 신경 써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 하루에도 예정에 없던 보고가 두 세 번씩 생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만찬은 외부손님이 있는 경우에는 2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그래도 9시는 거의 만찬의 마지노선. 대통령은 빼놓지 않고 9시 뉴스를 시청하는 편이다. 피로가 덜한 날에는 뉴스 시청 이후에도 이지원 보고서를 열람하다가 12시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든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대통령 권력

2005년 6월. 거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청와대의 하루이지만, 그 하루하루의 작은 결단들이 모이는 곳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거기에는 열띤 토론이 있고, 피를 말리는 긴장이 있고, 무겁고 깊은 고뇌가 있고, 때로는 침울하지만 심각한 자기반성이 있다. 대통령은 때로는 매서운 질타로, 때로는 넉넉한 포용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선택을 한다. 그것은 개인 노무현의 선택이 아니라, 국민의 표로 선출된, 수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깊고 무거운 책임에서 비롯된 대통령의 선택이다.

참여정부의 대통령은 특별히 가진 것 없이 출발했다. 독재시절 대통령이 지닌 무소불위의 힘을 구성하던 많은 요소들이 해체되었기 때문. 대통령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공작을 벌이는 권력기관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갔다. ‘손보기’ 위한 세무조사도 없고, 검찰은 정권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고 강변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중립지대에 있다. 그런가 하면 언론은 두려움 없이 정부를 비판해왔다. 참여정부가 첫해 겪었던 어려움은 역설적으로 이들 권력기관이 제 자리로 돌아갔음을 웅변해주었다.

지난날 일상적으로 신문 칼럼을 장식하던 정경유착이란 말은 어느 덧 잊혀진 단어가 되고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기업은 기업의 일을 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는 관행으로 이해되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군 인사 파동과 수사, 최근 몇 차례 있었던 장관 인사검증 문제가 그 단적인 예다. 이 모두는 의도했든 안 했든 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인해 만들어진 변화다.

대통령은 당도 지배하지 않는다. 당직임명권도 공천권도 없다. 계보를 꾸릴만한 돈도 없지만, 계보로 불릴 만한 의원들의 집합도 없다. 이렇듯 대통령은 권력 유지에 사용되던 권력, 그러나 변화된 대통령직에서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권력들을 모두 손에서 놓았다. 어쩌면 공직 인사권만이 대통령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권한일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도덕성만이 대통령 권력의 기반이 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은 어떤 힘으로도 되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정치란 굽이쳐 흐르는 강과 같은 것”

5월 초의 어느 날, 대통령은 언론보도를 보면서 한숨을 지었다. 사개추위, 검경수사권, 교원평가제, 대입제도와 고1의 시위 등등. 갈등과 관련된 보도를 접하면서 대통령은 무척 난감해하며 힘겨움을 토로했다. 대통령은 요즘 부쩍 ‘통합의 위기’를 말한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 우리 사회의 과제는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라는 의미.

대통령은 말한다.

“청문회 스타가 되었을 때 정치를 왜 시작했냐는 물음에 ‘분노 때문에 시작했고 지금도 식지 않아서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과제는 한국사회에 있는 ‘증오와 분노’를 해소하는 것이다.”

“88년 이래 우리 국민은 대통령에게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주지 않았다. 여당은 정계개편이나 의원 빼오기, 지역연합으로 이를 극복했지만 결국 다음 총선에서는 다시 여소야대가 되었다. 이런 구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다. 연정을 이야기하면 모든 국민이 ‘야합’이라며 기분 나빠 하고, 우리와 같은 당론투표 구조 하에서는 대통령이 야당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정책 설명을 하기도 어렵다.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이제는 어려움이 있지만 각기 책임을 분담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나가야 한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에 유리한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일과 국민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자는 것이다.”

“정치는 물과 같다. 일직선으로 가는 강을 아직 못 보았다. 갈지자로 바다를 향해 간다. 정치는 강의 흐름과 같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5월은 그 굽이치는 강줄기의 어디쯤 와 있을까? 5월 8일 러시아 순방에 나선 대통령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승무원들이 건네준 카네이션을 받아들고는 그날이 어버이날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 듯했다. 부속실 직원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대통령이 빙그레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가진 것 없는 대통령, 그러나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변화하고 있는 대통령이 카메라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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