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과의 신춘평론…‘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 1’

-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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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12-01-02 11:20
서울--(뉴스와이어)--박인과 문학평론가는 창조문학신문에 신춘문학평론을 게재하였다.

박 평론가는 앞으로 2012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면서 ‘신춘문예가 한국문학을 죽인다’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계획이라며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그의 신춘 문학평론이다.

제목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 1 / 박인과 문학평론가

오래 전부터 신춘문예에 대한 비평이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춘문예가 많은 문인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국문학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고 한국문학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본고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어느 작품을 향해서 혹평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되어 있는 문학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권력자라 함은 특별히 어떤 단체나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그 문학적 권위를 행사하는 도중에 한국문학의 정도를 흐려놓는 자를 지칭한다.

신춘문예의 문학권력자는 신문사 등이며 또한 그 신문사에서 심사하는 심사위원이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한다. 그런데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되는 것을 보면 그 심사위원의 자격이 제대로 되어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어쩌면 한국문학은 신춘문예 때문에 크게 병들어 있고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반면에 한국의 문단에서 문법을 잘 지키고 문맥이 잘 통하게 하는 문장다운 문장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에는 이 신춘문예가 한몫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도들이나 독자들은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은 무조건 최고의 작품이고 잘 창작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창작물이라고 믿고 그 작품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춘문예의 선자들이 문법에 대한 지식도 좀 익혀서 당선작에 대하여 정확한 평가를 내려주어야 우리의 문학도시가 병들지 않게 된다. 응모한 작품들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발표하되 잘못된 표현과 문법적인 오류, 그 작품의 기능과 작품력과 문장력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필자는 한국문학의 현주소에 쓴 소리를 좀 하게 될 것이다. 필자도 이제 한국문학의 중추에서 뭔가 후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시조 한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2012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 시조라고 하여 내심 반가운 마음에 그 시조를 읽어보게 되었다. 시조는 우리의 호흡과 얼이 담긴 아주 고귀한 문학의 형태이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문학적 자산이다. 그 시조를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당선작과 심사평을 보면서 필자는 한 마디로 가슴이 아프다. 한국문학의 위기를 실감한다.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은 ‘암자에 홀로 앉아’인데 그 전문은 “날 좀 때려주오 / 천년고찰 범종 치듯 / 안으로 / 다져놓은 /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 / 빈 골짝 / 다 쏟아 붓고 / 나비 되어 가련다”이다.

불교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인 고은 시인은 심사평에서 “당선작 시조는 종소리와 ‘청태눈물’이라는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을 이루었다. 다만 ‘때려라’라는 거센 표현이 산사 환경을 작위적이게 했다. 하지만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이 어디에 있는가. 시각적인 부분은 있어도 청각적인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가는 정확히 해야 한다. ‘범종 치듯’은 청각적 감각이 아니라 범종을 치는 행위 즉, 시각적 감각이다. ‘범종을 치듯’이 아니라 범종을 치고 종소리가 나면 그때서야 바로 청각적 감각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범종을 치지도 않았는데 무슨 청각적 감각을 운운하고 있는가. 이 글은 다만 범종을 치듯이 ‘안으로 다져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문맥이 맞지가 않다. 범종을 치듯이 어떻게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을 다진다는 것인가. 작자의 의도는 그가 당선소감에서 밝혔듯이 종소리의 파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종소리의 파동처럼 ‘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볼 때 이 문맥은 전혀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문맥의 흐름은 범종을 치듯이 때리면서 ‘다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시어도 ‘날 좀 때려주오’이다.

그런데 이 ‘날 좀 때려주오’의 주어 또한 모호하다. 범종이 때려달라고 하는 3인칭 시점인 것인지 작자의 시어처럼 1인칭시점인지가 불분명하다. 시어는 1인칭 시점이지만 그 뒤에 범종을 치는 시각적 이미지가 3인칭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당선자의 시조 당선소감은 “둥! 종이 울리고 한 동안 그 파동은 지속되다가 웅! 웅! 맥놀이를 거듭하다 서서히 종소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종소리가 울려온다. 마치 중생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억겁 생(億劫 生)을 거듭하며 쌓아온 모든 번뇌덩이를 모아 빈 골짝으로 쏟아버리듯.”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심사위원 고은의 심사평에 심한 우울증을 느낀다. 한국문학의 미래가 모래성처럼 허망한 것임을 보았다. 푸석푸석 썩어 침몰하는 문학의 위기감을 느낀다.

고은은 당선된 시조가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기승전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어가 혼돈되어 있고 앞뒤 문맥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를 어찌 기승전결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도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고 평할 수 있는가.

이 시조는 잣수의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시조는 정형시이다. 정형의 틀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날 좀 때려주오’는 그 잣수를 맞추지 않고 있다. 충분히 3・4의 형식으로 시조의 잣수와 율격을 맞출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아니한 것은 시조의 맥을 짚어내지 못함이다. 그리고 이 시조는 너무 가볍다. 단수의 시조가 일반 자유시 한 편과 맞먹을 만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야 시조다운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의 시조라면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당선작은 그 의미 구조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혼동스럽다. 이 시조에서 말하는 ‘나비 되어 가련다’의 주어는 무엇인가. ‘빈 골짝’이 “다 쏟아 붓고 / 나비 되어 가련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련다’가 되지 않고 ‘가려고 한다’라고 되어야 한다. 이 시어의 시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어가 따로 있고 ‘빈 골짝’을 “다 쏟아 붓고 / 나비 되어 가련다”라고 표현했다면 그 위에서 또 다른 주어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청태(靑苔)눈물’이 주어가 되어야 하는데 청태눈물이 ‘빈 골짝’을 쏟아놓고 간다고 하는 것은 이 시의 의도와 맞지 않는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날 좀 때려주오’는 1인칭 시점이다. 그래서 1인칭 시점으로 말한다면 ‘가련다’가 맞게 되고 주어는 1인칭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당선자가 당선소감에서 밝혔듯이 “마치 중생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억겁 생(億劫 生)을 거듭하며 쌓아온 모든 번뇌덩이를 모아 빈 골짝으로 쏟아버리듯”이 버리고 가려는 행위의 시어를 표출하는 것이 작자의 창작 의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앞에 명사구가 있다는 것인데,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련다’의 주어는 바로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의 ‘언어’나 ‘눈물’이 되어야 하는데 문맥상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3인칭이며 가련다는 1인칭의 주어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일 앞부분의 ‘날 좀 때려주오’의 1인칭 시점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가련다’로 자연스럽게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당선자의 의도는 바로 이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나’라는 1인칭이 주어가 되고 “다 쏟아 붓고 / 나비 되어 가련다”가 술어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중간에서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이 막고 있어서 ‘나’라는 1인칭의 주어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말도 저 말도 아닌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어찌 기승전결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도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라고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기승전결의 과정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기승전결이 이루어지려면 앞뒤 문맥이 잘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시조는 초・중・종장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의 구성이 짜임새 있게 잘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문학적인 양태에서 시조가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더욱 시조는 맛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자유시의 흐름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시조는 정형의 틀 안에서 짧은 문장들로 승부를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시조가 단수일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시조의 초장은 중장이 오기 위해 있고 중장은 종장이 오기 위해 있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언어의 폭포를 향해 일목요연하게 언어의 돌을 놓는 것이다. 그리고 초장에서 중장으로 중장에서 종장으로 갈수록 그 긴장의 강도는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힘 있는 시조이다. 삼각형 형태의 피라미드가 인류의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라고 하듯이 시조의 에너지는 그렇게 초장에서 종장으로 내려오기까지 삼각형 형태로 더욱 내밀하고 과학적이고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언어의 건축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전개에 있어서 기승전결 과정이 과학적이면서도 치밀하기가 그지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시조의 힘이다.

그런데 이 시조는 초・중・종장이 서로 떨어져 놀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한 마디로 혼란스러운 것이다. 의미 구조들을 그나마 맞게 연결해 보면 초장의 ‘날 좀 때려주오’와 종장의 “빈 골짜 / 다 쏟아 붓고 / 나비 되어 가련다”가 서로 어울릴 수 있고 그 중간의 “천년고찰 / 범종 치듯 / 안으로 / 다져 놓은 /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은 그대로 따로 존재한다. 즉 문맥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작자의 당선소감을 보면 작자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시어는 전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승전결의 틀과 흐름이 엉망이다. 이런 글을 어찌 고은 시인의 심사평에서처럼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고 평할 수 있단 말인가. 시조를 작하는 자나 평하는 자나 똑 같이 기승전결의 흐름을 모르고 시조를 모르는 채 시조를 대하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쓰고 또 선자는 이렇게 쓴 시를 잘 썼다고 평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해서 이렇게 짧은 시조 하나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단 말인가. 슬프다. 한국문학의 주검을 본다. 특히 선자는 대한민국에서 노벨문학상을 바라보는 극히 추앙받는 시인이다.

한국문학이 이런 상태에서 노벨문학상을 바라보고 있다니 한국문학의 주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학도들과 독자들은 또 이 당선작을 보면서 배울 것이다. “아, 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기승전결의 연결은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배워갈 것이다. 이러니 어찌 신춘문예가,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우리 문학의 정기를 끊고 한국문학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글/ 박인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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