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과의 신춘평론…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 2

- 서울신문 편,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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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신문사
2012-01-16 10:03
서울--(뉴스와이어)--본고에서는 심사위원 등이 금전적인 부분과 인맥 등에 얽혀있다는 ‘뜬소문’과 함께 신춘문예의 심사에 대한 병폐를 짚어보고자 한다.

‘뜬소문’처럼,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신문사와 응모자의 사이에서 신춘문예 당선 조건으로 1,0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거나 지방신문사에서는 5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하는 중개인들이 있다면 정말 한심한 일일 것이고, 이러한 일이 정말 있어서 이러한 일에 관련된 심사위원들이 있다면 심사위원의 자격이 박탈되어야 한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은 한국문학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예지에서 좋은 작품을 뽑아놓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게 해주겠다. 그렇게 되려면 돈을 가져오거나 책을 사야한다”와 같은 강제적인 조건을 붙여 응모자에게 요구하는 일이 있다면 이 또한 한국문학의 우울증을 도지게 하는 것이다. 신춘문예의 당선작으로 뽑거나 문예지의 당선작으로 뽑을 때 혹은 각종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할 때도 단 돈 1만원이라도 강제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상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신춘문예에서 당선작을 뽑기 위해 돈이 오간다면 순수하게 작품을 열심히 쓰고 있는 가난한 응모자들은 모두 들러리들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심사위원이 고정되어 있는 신문사 등의 신춘문예 심사에서 그 심사위원이 아는 자들이나 그 인맥들 중에 있는 자가 당선자로 결정된다면 이 또한 부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당선작보다 더 잘 창작된 작품이 사장될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선한 자들은 또 얼마나 가슴을 태우며 기나 긴 날들을 고통으로 지내야 할 것인가.

문인 등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의 시행에 있어서 신인문학상을 주는 대신 응모자에 대해 어떤 댓가를 지불할 것을 강제적인 조건으로 건다면, 그리고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좋은 작품으로 선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신인문학상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의 퇴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문예지는 사실상 그 운영이 힘들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고 해서 운영이 어렵다고 해서 책을 몇 권을 사줘야 한다거나 기부를 얼마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강제의 조건이 되어서 응모자가 가난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신인문학상에 당선이 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신춘문예 심사위원 등이 금전적인 부분과 인맥 등에 얽혀있다거나 혹은 문예지 등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돈을 뜯는다는 것은 ‘뜬소문’에 불과하다.

한국의 문단에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많은 부작용의 상황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 필자는 어김없이 여러 곳에서 당선된 신춘문예 작품들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올해는 얼마나 심사를 잘 해서 얼마나 한국문학의 발전에 이 신춘문예가 기여할 것인지를 보는 것에 필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당선작들을 살펴보다가 답답한 상황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서울신문의 신춘문예 결과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시조부문 심사평에 기재된 “세련된 감각적 재단 돋보여”라는 글을 보면서 필자가 정말 답답해 환장하겠다. 도대체 한국문학이 왜 이렇게 흘러갔는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조를 보며 한국의 시조는 신춘문예에 의해 거의 죽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시조의 그 우람한 체격과 유쾌・상쾌한 흐름과 앞뒤 문맥의 긴밀한 통로가 막혀 있어 동맥경화증 내지는 심근경색증과 같은 원인으로써 시조가 중증 고혈압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을 보면서 시조를 창작한 당선자에게 불만을 토로할 필요는 없다. 창작의 길은 그만큼 어렵고 험난한 것이며, 이렇게 창작한 작자의 노력도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자들에게는 쓴 소리를 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더 마름질 되었어야 했다. 시대적 상황도 고려하여 사대주의적 표현에도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글은 오랜 숙련 끝에 농익어 나와야 하는 발효식품과 같은 것이다. 발효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조를 삼키는 백성은 그대로 동맥경화증을 앓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선자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조는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인데, 그 전문은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은어 떼 고운 등빛에 야윈 땅을 맡긴다.//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이다.

이번 서울신문 시조부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한분순과 이근배이다. 지난 해 심사위원도 한분순과 이근배였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에 대한 심사평은 ‘세련된 감각적 재단 돋보여’라는 것인데,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 주제로 정한 시점이 과거이나 박제된 이야기로 흐르지 않고 동시대와 교감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은 형상화가 뛰어났다.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라고 극찬하여 적고 있다. 참으로 답답해 환장하겠다.

우선 이 시조는 문법적인 오류가 발견된다. 그리고 시조의 틀을 훼손하고 있다. 또한 기승전결의 과정에서 앞뒤의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엉뚱한 문맥들로 짜깁기되어 서술되고 있다. 시조의 틀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과 엉뚱한 문맥들로 짜깁기되어 있다는 것은 이 시조의 선자가 말한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는 극찬 일변도의 심사평에 감동할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도대체 우리의 자긍심인 시조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이렇게 시조를 중병에 들게 했는가. 누가 이렇게 시조를 희롱하고 있단 말인가. 한국시조단은 말하라, 분명히 국민과 역사 앞에 말해야 한다. 누가 우리의 시조를 병들게 했는지 분명히 책임져야 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시조를 쓰는 시조인이다. 그런데 한국시조협회 등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다. 한국시조협회 등은 이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말해 달라.

시조는 각 장과 각 구의 힘의 격이 서로 독립되어서 이루어지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우주와 같은 유기체로서 존재해야 시조다운 향과 맛과 빛깔과 그 힘을 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시조가 각 구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자유시처럼 배열된다면 시조의 해석도 달라지고 시조의 고유의 힘의 집중도 파괴되는 것이다. 자유시처럼 배열된다면 초장에서 혹은 중장에서 혹은 종장에서 끝나야 될 해석이 초・중・종장으로 계속 매듭 되지 않은 의미들이 혼란스럽게 연결되어서 원래의 창작 의도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창작하는 자는 구의 구분도 시조의 틀에 맞추어 정확히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조의 각 구의 구분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창작의 행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어야 하고 시조의 틀과 율격이 살아있어야 하고 기승전결이 잘 되려면 기승전결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문맥들이 서로 잘 소통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조는 문맥들의 소통의 맥이 막혀있다.

첫째, 문법적인 오류들을 살펴보자. 자유시에서는 문법적인 오류가 있어도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창작해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조는 극히 엄밀한 문법 체계 속에서 구현되는 철저하고 과학적인 언어의 기능으로 우리의 얼이 정제되어 나타나는 탐스러운 문학 형태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조 창작에 있어서 가능한 한 기본 문법을 틀림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선 이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필자가 누차 지적하듯이 문학적 표현이 문법을 탈피하려면 “그 문장을 독자가 창작자의 의도처럼 해독할 수 있어야 하며 문법을 탈피한 것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더 큰 문학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조는 그렇지 못하고 함부로 문장을 부리고 있다. 문장도 생명체이다. 문장이 잘못 사용되어지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오히려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을 보자. 이 시어에서 전체적인 수식을 받는 것은 ‘무르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르팍’은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의 수식을 받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낯선 세상 왼 무르팍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작자는 상상하고 있겠지만 작자의 표현력 부족으로 독자는 잘 알 수 없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다면 독자를 위해 각주라도 달아주면 좋지 않을까.

“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는 문장을 살펴보자. ‘벌레처럼’의 시어와 ‘눈발’의 시어는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눈발이라는 것은 “눈이 줄기차게 내려 줄이 죽죽 져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벌레처럼 달라붙는다’는 시어와 눈발은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꿈을 물린다’고 했는데 그 ‘꿈’을 무엇에게 물린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즉 예를 들어 “싣고 온 꿈을 건륭에게 물린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이 문장은 더욱 선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조의 문장은 ‘꿈’을 무엇에게 물리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아니,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그 앞에 ‘눈발 앞에’라는 시어는 있는데 이 ‘에’라는 것은 ‘눈발의 앞’이라는 위치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꿈’을 그 ‘눈발 앞’에 물린다는 것인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놓친 길’도 ‘눈발 앞에’ 묻는다는 것인가.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만약 ‘~눈발 앞에서 건륭에게 묻는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확실해져서 명확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문법적인 부분에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만하자.

둘째, 시조의 틀과 율격을 희롱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은 3・4조 형식을 맞추지 않고 있다. 지독히도 자유시스럽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려면 자유시를 써야지 이렇게 시조를 쓰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러한 문장이 과연 심사평에서처럼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라고 극찬 받을 수 있는 문장인가. 어찌해서 이런 문장들이 세련되게 재단되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심사평이 한국문학을 혼절시키고 있는 답답한 현실이 아닌가.

시조는 자유시를 쓰다가 지친 사람들이 시조를 희롱하며 놀러오는 장소가 아니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를 비교해 보자. 힘의 분배의 격이 다르지 않는가.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는 자유시이어야 하고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정형시이어야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얼마나 시조의 틀과 율격을 우리 민족의 호흡과 맥의 격에 맞게 힘차게 살려내고 있는지 감탄스럽다. 얼마나 생기발랄한가. 노랫가락이 저절로 형성되는 것 같지 않는가. 시조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노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조가 노래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조가 아닌 것이다. 시조는 時調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조는 詩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시조는 詩가 되어있는 것은 기본이어야 하고 時調가 되어야 하는 것은 원칙인 것이다. 그 둘 중에서 하나를 빼려고 한다면 시조는 詩를 뺀 時調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렇게 시조의 정형의 틀이 훼손되고 있는데 어떻게 시조 심사평에서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고 극찬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시인들이여 시조의 진정한 틀을 버리면서까지 시조에서 자유시를 닮은 시어를 왜 창작해야만 한단 말인가. 시조의 격을 낮추지 말고 차라리 자유시를 쓰는 것이 맞지 않은가.

셋째, 엉뚱한 문맥들로 짜깁기 된 기승전결의 맥의 불협화음을 보자. 이 시조의 선자는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고 극찬하고 있다. 이 시조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 일변도인 심사평을 본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를 살펴보자. ‘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문장은 ‘산과 들’이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산과 들’ 뒤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산과 들, 열하’를 향해 (무엇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의미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무엇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시조에서 밝혀져 있지 않고 불분명하다. 앞・뒤 문맥이 소통되지 않고 있다. 문장들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의 문장은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인데, ‘속으로 끓는 불길’을 어떻게 ‘바람 불러’ 잠재운다는 것인가. 보통 불의 속성은 바람이 불면 더 잘 살아나는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 시이겠지만 그것은 독자와의 소통이 가능할 것을 전제로 한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혼자만 알고 글로써 발표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무엇이) 왜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것인가. 그리고 낮게낮게 엎드리는 이유가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썩 잘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다. 끓는 불길을 잠재운다 해서 (무엇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표현은 좀 어색하다는 것이다. 이 시조의 시어는 분명히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이라는 조건을 걸고 있다. 이러한 조건이 성립되면 누가 보아도 (무엇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오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맞다고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이 썩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장이 소통이 안 되고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 심사평에서처럼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라느니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이라느니 한다면, 만약 필자가 “타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이명박 대통령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라고 하는 문장을 만들었을 때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며 “기승전결의 매끈한 흐름”이라고 극찬해 줄 것인가. 또 필자가 “타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연암 박지원이 중국 황제에게 무릎 꿇고 절을 한다”라고 하는 문장을 만들었을 때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며 “기승전결의 매끈한 흐름”이라고 극찬해 줄 것인가.

이 시조는 이렇게 썩 잘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시조를 어찌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고 극찬하고 있단 말인가. 시조는 그 뒤의 장이 앞의 장의 인도 하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이유에 의해 뒤의 장이 이루어지는 것이 시조라는 것이다. 어려운가. 그렇다면 시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긍심 강한 우리만의 정서와 역사가 담긴 시조의 생명의 맥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시조를 사경에 이르게 만든 것이 잘못된 현대시조작법이란 것들이다. 잘 못 가르치고 있는 현대시조작법이 대한민국의 국격을 낮추고 우리의 자존심을 망가뜨리고 있다. 이 당선된 시조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낮추고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문장을 볼 수 있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어는 현대에 사대주의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시조가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이다. 이 시어는 중국 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박지원의 굴욕적인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열하熱河가 바로 그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조를 보고 기껏 한다는 심사평이 “주제로 정한 시점이 과거이나 박제된 이야기로 흐르지 않고 동시대와 교감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은 형상화가 뛰어났다”며 극찬하고 있다. ‘동시대’의 필자는 결코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대’에 그들에게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향해 현재의 우리가 무릎을 꿇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기가 찰 일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2012년 서울신문 당선 시조를 보고 우월감을 키우며 우리들을 향해 “너희 작은 나라가 뭐 별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너희 나라가 잘 사는 것 아니겠느냐. 잘 생각했다. 서해 앞바다도 우리에게 내놓고 우리 앞에 무릎을 더 낮게 꿇어라”라며 비웃지 않겠는가. 필자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 그래서 이런 꼴을 보는 것일까. 그러지 않아도 중국의 해상에서의 무력도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개탄하고 있는데, 이런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심사평이 나오는 것이 어찌 망국의 전령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서울신문 시조부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한분순과 이근배였는데 지난해 심사위원도 한분순과 이근배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난 번 작품도 이번 작품과 같이 문장 기호 ‘,’의 사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난해의 작품과 이번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심사평도 또한 지난해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필자가 지켜보겠다. 이제 한국의 시조단이 정신을 차려야 할 때이다. 시조는 국격과 관계된 아주 중요한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의 표현의 도구이기도 하다. 시조의 원류를 찾아 지켜라. 이제부터라도 잘 정리해서 새롭고 희망찬 힘의 강국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단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서 우리의 시조의 혼을 되살려 내야 한다. 시조를 원형으로 회복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다.

글/ 박인과(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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