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뉴스와이어)--문화재청(청장 유홍준·兪弘濬)이 허가하여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인천 계양산성 동문지 유적」의 출토유물 보고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한다.

일 시 : 2005. 6. 27(월) 14 : 00

장 소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성백제학술조사단(서울 풍납토성내)

조사기관 : 선문대학교 고고학연구소

인천 계양산성 동문지내 집수정 발굴조사

1. 조사경위

본 발굴조사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산성(桂陽山城) 내 동문지(舊 주민체육시설)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원에 있는 계양산성(桂陽山城)의 발굴조사는 계양구청(구청장: 朴喜龍)의 사적공원 조성의 일환으로 선문대학교(총장: 李京埈)에 학술조사를 의뢰하여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가 학술 발굴을 실시하게된 것이다.

계양산성이 위치해 있는 계양구는 지리적으로 인천광역시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고 북쪽은 김포시 고촌면과 서구의 검단지역, 동쪽은 부천시 오정구, 서쪽은 서구, 남쪽은 부평구와 접하고 있다. 또 위도상으로 계양구는 부평구와 함께 우리나라 중심에 위치하고, 동북으로 한강(漢江)유역의 김포평야와 서남으로 서해의 관문인 인천항과 연결되는 요충지이자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하다. 말하자면 한강의 인후지지(咽喉之地)이다.

역사적으로도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 군사적으로는 물론 대외무역의 주요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또한 왜구의 극심한 침입으로부터 계양산성과 문학산성이 적극적인 저항선이 되기도 했다. 계양산성은 이 지역의 외적방어에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특히 계양산성은 한성백제시기의 한강의 관문으로서 역사적ㆍ문화적ㆍ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다.

이번 발굴조사에 앞서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에서는 이와같은 계양산성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1999년부터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이어서 2003년에는 제 1차 계양산성내 서벽을 발굴 조사하여 실시하여 계양산성의 성벽구조를 파악한 바 있다. 이어서 2005년에는 제 2차로 동문지를 발굴 조사하게 되었다.

특히 계양산성 내 동문지의 지형은 산 능선이 완만하게 내려가는 모습으로 계곡을 막아 성벽으로 형성되었는데 폐성 이후 오랜 시일동안 퇴적된 상태였다. 최근 그 위에 체육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이 체육활동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번 조사 시에 지표아래에서 근대 시멘트 우물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동문 지 내 집수시설이 존재할 것으로 보고 이에 초점을 맞추어 발굴을 실시하였다.

동문지 내의 집수정의 성격파악과 동벽 확인을 위한 발굴이 계속되었다. 이번 발굴은 동문지의 집수정과 동벽을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조사기관은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이며, 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조사단장 겸 책임연구원 이형구(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겸 고고연구소장)

지 도 위 원 조유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 재(문화재위원)

심정보(문화재위원)

조 사 위 원 윤근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박경식(단국대학교 교수)

지현병(강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조 사 연 구 원 김영수(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강사)

황용순(동양고고학연구소 연구원)

조 사 원 이상오(선문대학교 대학원생)

라경화(선문대학교 대학원생)

정경일(선문대학교 대학원생)

이왕호(중앙대학교 대학원생)

이은숙(선문대학교 역사학과 졸업생)

박용상(선문대학교 역사학과 졸업생)

조 사 보 조 원 오운형(선문대학교 역사학과 4년)

이인경(선문대학교 역사학과 4년)

김은혜(선문대학교 역사학과 3년)

이우용(선문대학교 역사학과 2년)

재학생 다수

2. 조사내용

1) 동문지

(1) 집수정(集水井)

우선 집수정의 외벽과 내벽을 조사하기 위해서 집수정의 외벽은 두 개의 트렌치를 설치하여 조사하였는데, 1번 트렌치는 동남쪽에 설치했던 트렌치를 1m 확장하여 총 2m를 암반층까지 조사하였고, 2번 트렌치는 남서쪽에 설치하였던 트렌치를 1m 확장하여 총 2m를 암반층까지 조사하였다. 내벽은 호안석축의 남쪽에서부터 트렌치를 3m 폭으로 설치하여 구지표까지 조사하였다.

그 결과 외벽의 1번 트렌치의 암반층에서 호안석축까지의 깊이는 250㎝이고, 토층은 아래서부터 암반층위에 흑색 점토와 회청색 사질점토로 쌓은 뒤 갈색 사질점토 위에 잡석과 암회색 사질점토를 올린 후 적갈색 사질점토층(와편+잡석)의 보강토를 쌓고 그 위에 석축을 쌓았다.

2번 트렌치의 암반층에서 호안석축 아래까지의 깊이는 180㎝이다. 북쪽 토층의 단면은 생토에서부터 적갈색 사질점토로 단단히 다진 후 그 외의 부분은 모두 보강토로 할석과 기와편, 토기편, 목탄등과 사질점토로 보강한 후 석축을 쌓았다.

집수정 내부의 전체적인 토층은 총 10개로 나뉘는데,

제 1층은 표토층으로 우각형 파수와 토기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 2층은 적갈색 사질점토층으로 사질의 성격이 강하고, 토기편과 기와편, 잡석 등이 섞였다.

제 3층은 황갈색 사질점토층으로 약 40cm 형성하고 있고, 점질의 성격이 강하며 기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유수작용에 의해 얇은 적갈색의 망간층이 제 4층까지 미치고 있다.

제 4층은 암회색 사질점토층으로 사질의 성격이 더 강하고, 출토유물은 기와편과 토기편 등이다.

제 5층은 암청색 점토층으로 완전한 점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약 1m 넘게 형성되었으나 중간에 사질층이 크게 밴드를 형성하고 있어 한번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고 있다. 출토유물은 기와편들과 여러종의 토기편들인데, 그 중 흑회색 단경호와 광구호 등이 출토되었다.

제 6층은 유기물층으로 그 당시 집수정의 최후의 바닥면으로 확인되었다. 유기물층은 약 5cm 가 되지 않게 얇게 형성되었으며 기와편과 잡석들이 부정형하게 깔려있으며 유기물 층을 걷자 그 아래 제 7, 8층인 암황색 사질점토층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제 7층에서는 고대 묵서명(墨書銘)인 목간(木簡)을 비롯하여 토기편과 기와편 그리고 가공된 목재 등과 수골(獸骨), 패각류(貝殼類), 거북이 등껍질(龜甲), 과일 씨앗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목간(木簡)은 형태가 5각형으로 지금 남아있는 길이 14㎝이고, 각 면의 크기는 약 1.5㎝이다. 목간의 바로 옆에서 출토된 원저단경호(구경 18, 복경 30, 크기 30cm)는 비교적 잘 남아있다. 구연부는 외반되었으며, 기복부에는 집선타날문이 전체적으로 시문되었다.한성백제(漢城百濟) 시기의 토기의 유형으로 보인다. 한편, 집수정의 동쪽에는 거북이 껍질(龜甲) 1구가 비교적 형태를 온전하게 알아 볼 수 있도록 남아있는데, 등껍질의 크기는 너비 16㎝, 길이 24㎝이다.

제 8층은 암회색 점토층으로 검은색 밴드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다.

제 9층은 암적갈색 점토층으로 검은색의 단단한 점토질의 토층이 얇게 밴드를 형성하고 있다. 이 제 8층과 9층부터는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고, 집수정의 석축은 이들 층 위에서부터 쌓은 것으로 보인다.

10층은 암반층이다.

집수정 내부의 석축의 형태는 내어쌓기 식으로 아래로 좁혀가면서 계단을 만들어가는 다각형식이다.<사진 1> 석축을 쌓은 후 그 위에 적갈색 점사질토로 단단하게 다진 후 다짐토를 올리고 그 외벽선을 따라 곁면에 돌로 덮는 방법으로 마감하였다.

집수정의 원형 외연의 직경은 13m이고, 저부의 다각형석축의 직경은 약 6m로 드러났다. 집수정 상부에서부터 집수정 저부 암반층의 기단까지의 깊이는 약 5m이다.

(2) 동벽

동쪽의 성벽은 이미 많은 석재들이 무너져 내려 계곡을 덮고 있는 상태이다. 성벽의 기저부를 찾기 위해서 무너져 내린 돌을 걷어 내면서 동벽의 남아있는 성벽을 찾는 작업을 하였다. 그와 동시에 호안석축과 동벽간의 거리와 내벽(내탁)을 쌓았는가에 대한 부분과 호안석축과 동벽간의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호안석축의 가장 동쪽에서 동벽까지 폭 2m의 트렌치를 넣어 토층을 확인하였다.

트렌치의 조사로 호안석축과 내탁과의 거리는 2.8m이며 호안석축과 내탁사이에는 와적층(瓦積層)이 형성되어 있다.

동벽의 면석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부분은 약 3.4m이며, 면석이 무너져 내린 길이가 약 3.5m이다. 면석은 현재 기단에서부터 15단이 남아있다. 기단부에서 7단과 8단의 2단이 동벽 중간부분에서 하나의 큰면석(25×25㎝)으로 바꾸어 계곡부의 상벽을 견고하게 하였다. 면석의 크기는 모두 각각 다르며, 기단석의 크기는 다른 면석과 차이가 없다. 면석의 크기는 25×25, 16×30, 12×20, 20×27, 18×36, 13×10, 14×22(㎝)등 다양하고, 면석사이에는 잡석으로 틈을 메우기도 하였다.

기단아래에는 다짐토로 암반층까지 다졌다. 다짐토의 깊이는 최저 70㎝이고, 최고 180㎝이다. 이 다짐토는 기단석에서 앞으로 약 2m까지 다졌으며, 암반층의 깊이에 따라 다짐층의 깊이가 변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암반층이 내려가게 되어서 남쪽에서 7m지점에 이르러서 암반층의 깊이가 180㎝가 된다.

성벽의 외벽은 현재 성벽 상부에서 기단석까지의 높이는 6.21m이며, 암반층까지의 높이는 8.19m이다. 성벽 상부와 내탁 상부와의 거리는 5.8m이다. 무너져 내린 석축사이로 기와편, 토기편이 혼재되어 나오고 있으나, 기단석아래 다짐토에서는 잡석이외 토기는 나오고 있지 않다. 동벽 내부(내탁)와 집수정 외벽 사이에 배수(排水)시설 같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트렌치를 넣어 확인한 결과 동벽 내탁의 깊이는 5.4m이다.

동벽발굴조사는 성벽 외부에 쌓인 적석층을 걷어내고 성벽의 기저부까지 발굴한 결과 동벽은 암반위에 기반토를 다진 후 석축을 쌓았다. 기반석을 구축하지 않고 바로 20×30cm정도의 석제로 성벽을 쌓아 올라갔다. 이는 백제의 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축조 방법이다. 성벽 하부에 역(逆)아치형으로 보이는 것은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이며, 성벽 상부에서 발견된 2개의 문확석(門確石)으로 미루어보아 동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조사결과

조사구역내 동문지 상부에서 물이 계속 솟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물과 많은 관련이 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지금도 성벽아래 계곡에서 「林鶴藥水」라고 새긴 약수터가 여러 곳이 남아 있다.

동문지 안쪽으로 평탄지가 형성되었는데, 1994년에 철봉, 평행대 등 주민 체육시설을 설치하였다. 동문지에서 서쪽 능선 위에 약 15m 너비로 편평하고 석축을 가로질러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아직도 바닥은 물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차 저수 시설로 추정된다. 이 저수 시설에서 동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있는 우물에서 폭 3m 정도의 웅덩이(2차 저수시설)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성벽 안의 집수시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1 · 2차 저수시설에서 물을 흘려 바로 성벽안에 물을 모이게 만든 집수지(集水池)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지역주민들의 체육시설이 있었다. 조사결과 표토 바로 아래에서 가로×세로, 높이가 각 1m인 근대 시멘트 우물지가 발견되어 주민 체육시설이 설치되기 전(1994년)까지는 이 우물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수정의 내면에 석축을 쌓아 물을 모으고, 석축위에는 다짐토로 다졌고, 그 위에 다시 석축을 돌렸다. 집수정 내부의 저부에는 다각의 석축렬을 계단 모양으로 쌓아 올라가고 있으며, 그 위에 다짐토로 다시 다지고 또 석축을 쌓았다. 집수정 바닥 면의 암반층으로부터 약 1m가 넘게 점토층이 깔린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동안 물을 모아두었던 집수시설로써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수정이 집수시설의 보호벽으로써 우물(집수정) 벽의 보호시설일 뿐 아니라 정수(靜水) 장치의 역할을 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 주민들이 공동사용하던 급수저장시설로 보인다.

북측 호안 석축 상부에서 출토 된 기와 가운데 「主夫吐」명의 기와는 『삼국사기』잡지에 이 일대를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고 지칭(475~757)한 사례와 관계가 있는 명문으로 밝혀졌다.

집수정 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를 비롯하여 기와류, 목재류, 패각류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토기의 종류는 광구호, 단경호, 대형호 등이며, 이 밖에 투각기대와 개배도 보이고 있으며, 무늬는 선문ㆍ인화문 등이 있다. 기와류는 선문으로부터 집선문, 심선문, 기하문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토기들은 삼국 시기로부터 신라시기의 토기로 추정되고 있다. 상부에서는 고려시기의 자기편과 약간 기와가 보인다.

크기가 24㎝나 되는 대형 거북이가 출토되는 것을 비롯하여 대합 등 패각류가 출토되고, 수 점의 박(朴)류가 출토되고 있어 이에 대한 성격이 궁금하다. 거북이의 수장이 혹, 어떤 형태의 제사(祭祀)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집수정 바닥에서 목간과 함께 대형의 원저단경호가 출토되었는데, 연질의 표면에 집선문이 전체적으로 시문되었고, 내면에도 타박(打拍)무늬가 시문되었다. 이 원저단경호는 한성백제(漢城百濟)시기의 토기로 추정된다. 따라서 원저단경호와 함께 출토된 5각형의 목간(木簡)은 한성백제시기의 유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목간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개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온 문화재 체계,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제정된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60년간 지속된 문화재 체계가 국가유산 체계로 변화한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고정된 가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국민의 참여로 새로운 미래가치를 만드는 ‘국가유산’.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은 국민과 함께 누리는 미래가치를 위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국민과 공감하고 공존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를 지키며 과거와 현재, 국내와 해외의 경계를 넘어 다양성의 가치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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