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주,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 출간

서울--(뉴스와이어)--열 가지 풍경에 담긴 윤형주의 인생, 노래, 가족, 신앙, 친구들

“여기 50대 소녀들 많이 오셨네요?” 이 말 한마디에 수천 명이 모인 관중석은 까르르 웃음으로 가득 찬다. 이것이 바로 1960년대를 대표하는 통기타 문화의 주자이자 원조 청춘스타, ‘트윈 폴리오’의 힘이다.

가수가 자본으로 만들어 낸 ‘기획 상품’이 아니라 가수 스스로 주체가 되어 대중과 감수성으로 소통하고 교감하며 이야기하듯 노래를 만들고, 함께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60~70년대 통기타와 포크송으로 발현한 청년 문화를 말할 때 그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트윈 폴리오’다. 트윈 폴리오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1년 10개월 활동하고 해체했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지금은 그리움이라는 감성으로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는 트윈 폴리오의 한 축이자 한평생 기타를 놓아본 적 없이 살아온 윤형주의 이야기다.

독립투사의 집안에서 평생 학자로 살아온 아버지 밑에서 자라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 윤형주는 시인 윤동주의 육촌 동생이자 당시 최고 엘리트였다. 기타를 잡고 노래를 시작한 그에게 “우리 집안에 그런 풍각쟁이는 없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야기는 이미 연예인으로 얼굴이 알려진 채 대학 생활을 하던 그가 휴강 시간을 때우다가 ‘0시의 다이얼’ 피디에게 이끌려가 그날로 라디오 디제이로 첫 방송을 한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 뒤로 방송인으로, 가수로 밟아온 길과, 그 목소리처럼 맑아 보이기만 하던 그의 인생에 드리워졌던 힘겨운 고비, 그리고 속앓이를 겪고서 다시금 환한 삶을 펼쳐 나간 과정이 ‘열 가지 풍경’으로 그려진다.

그 풍경 안에는 학창 시절 처음 만난 소녀와 천천히 사랑을 싹틔우고 결혼한 풋풋한 청년 윤형주도 있고,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아버지로서 딸들과 아들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는 윤형주도 있다.

대마초 파동 당시 구속되어 자살을 생각한 젊은 윤형주도, 예기치 않은 난관을 만나 빚더미에 앉은 채 좌절한 사업가 윤형주도 있는 한편,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좇으며 낮게 몸을 굽혀 비로소 다시 일어서는 윤형주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 시절의 노래와 풍경은 이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낭만으로, 시대를 같이한 사람들에게는 손에 잡힐 듯한 기억으로 와 닿는다.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나의 노래’는 계속될 것이며,이 세상 모든 이들과 함께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아들이자 아버지인 윤형주,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사업체를 이끌어가는 경영인 윤형주, 일생 동안 디제이로, MC로 활약해 온 방송인 윤형주, 장로 직분을 받은 신앙인 윤형주 등 갖가지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한 문장으로 “윤형주는 가수다”를 꼽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KBS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출연한 첫 무대에서 망신을 당한 뒤로는 남 앞에 노래하기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노래가 좋아서 중학교 때 이미 미국 빌보드차트에 오른 노래들을 다 외우고 다녔다. 중학교 때는 학교 합창을 통해, 고등학교 때는 성가대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게 되고 또 화음, 화성을 익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작곡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휘닉스’라는 보컬그룹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그 뒤로 송창식, 이익균을 만나 가수로서의 삶이 시작된 이후로 노래를 멈춘 적이 없다. 함께하든 혼자 하든 늘 노래를 불렀고, 노래하며 만난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동생이 되고 형이 되었다. 가족들하고도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하며 화합을 다졌다. 하나님에게 달란트로 목소리를 받았으니, 그 목소리로 찬양하는 찬양 앨범을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노래를 불렀다.

이 책 2부 ‘세시봉에서 만난 사람들’,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조영남, 서유석, 전유성 등과의 에피소드는 여전히 노래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을 사랑하는 한 가수의 재밌는 추억담이기도 하다. 주제별로 선별해 70여 장으로 추린 부록 화보 사진 속의 윤형주는 언제 어디서든 기타를 들고 있다.

윤형주는 여전히 노래를 사랑하고, 노래하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팬들을 사랑한다. 이 책에는 또한 특별한 선물이 담겨 있다. 윤형주가 독자를 위해 직접 선곡한 자신의 노래 열 곡이 담긴 CD는 그의 이야기와 더불어 독자를 젊음의 감수성과 낭만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인도할 것이다.

본문 발췌

그 시절에는 내가 돈 만 원을 갖고 있으면 그 돈은 나의 돈이 아니라 우리의 돈이었다. 빈부와 문화 차이를 떠나 ‘우리는 똑같은 젊은이’라고 하는 본능적 연대감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노래도 기꺼이 나누었다. 나는 ‘길가에 앉아서’ ‘화가 났을까’를, 송창식은 ‘사랑하는 마음’을, 이장희는 ‘비’와 ‘좋은 걸 어떡해’를 김세환에게 아무런 사심 없이 선물했다. 누가 녹음하는 날이면 모두가 나타나 밤새 함께 화음을 넣어주고 악기를 연주해 주었다. -프롤로그 ‘하나의 결이 되어’에서

나는 나의 인생을 사랑한다. 나의 노래를 사랑하고, 나의 노래를 사랑해 준 이들을 사랑한다. 내가 걸어 온 길을 사랑하고, 나의 가족들이 숨 쉬며 걷는 이 땅을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내 자신을 사랑한다. 여기에 내 인생의 열 가지 풍경이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시간을 건너온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다. 모두 나의 결이다. 한때의 실수나 교만을 포함하여 이 안의 모든 슬픔과 기쁨과 영광과 상처들이 나의 것이다. 내 몫의 인생이었다. -프롤로그 ‘하나의 결이 되어’에서

“여긴 웬일이세요?”
“웬일이고 뭐고 우리하고 같이 가자.”
“가다니, 어딜요?”
“가서 방송해야 돼.”
“방송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두 사람은 나를 당구장 한쪽의 소파로 데리고 갔다.
“우리 방송에서 하는 ‘0시의 다이얼’ 알지?”
“알지요.”
“오늘부터 형주 네가 그 프로 맡아야 돼.”
-‘0시의 다이얼’에서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죽을까? 항시 사람들과 붙어 있기 때문에 목을 매달거나 감방 벽에 머리를 찧는다거나 하는 자해는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에 동맥을 긋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칼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꼽슬이에게 면도를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유리를 구해 달라고 했다. 곧 법정에 나가야 하는데 사람들 앞에 깨끗한 모습으로 나서고 싶다고 하자 꼽슬이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구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마침내 작은 유리조각이 손에 들어왔다. -‘너는 내 것이라’에서

나는 많게는 하루에 열두 곡까지 시엠송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시엠송이 현재까지 1400여 곡이 된다.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나에게 시엠송 제작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20초 안팎의 짧은 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담아야 하는 것이 시엠송이다. 광고 자체로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제품이 시장에서 잘 팔리도록 견인해야만 했다. 나는 제품 하나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내 안의 열정과 애착을 모두 쏟아부었다. -‘겨울에서 봄으로’에서

이제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호텔에서 혼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데 마침 창밖에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기숙사에서 낯선 형들 사이에 잠들어 있을 희원이가 생각났다. 또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아버지에게 반발하여 집을 뛰쳐나왔을 때, 내가 살던 집에 찾아와 혼자 30분이나 묵묵히 앉아 계시다 가셨다는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앉아 계셨을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었다. 짐작이 안 되었다. 나는 그만큼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요즘 재능기부라고 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 재능을 희사하는 행사들이 있다. 그런데 보면 가수들은 재능기부에 가장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목소리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꼭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재능은 자기 것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에게 없는 재능을 타고나면 그것을 감사하면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의 목소리는 주님의 쟁기’에서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고, 사회를 보던 강영숙 아나운서가 얼른 마이크를 잡더니 “우리 윤형주 어린이가 가사는 조금 바꿔 불렀지만 노래는 잘 불렀으니까 맞는 걸로 할까요?” 하고 말했다. “네!” 하는 대답을 유도하는 발언이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실수한 것도 창피하지만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초조했다. 아이들의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1초도 안 되는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내심 아나운서의 말도 있고 하니 잘 넘어가겠지 기대하며 객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잔인했다. “안돼요, 안돼요” 하면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반대했다. 결국 심사위원은 딩동댕 대신 땡을 쳤다. -‘윤형주는 가수다’에서

송창식이 음악적으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화음을 쓰자고 권유하면,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범주를 떠나지 말자고 반대하는 편이었다. 듀엣 자체도 의외의 조합이었다. 1969년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유명한 음악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트윈 폴리오는 참 불가사의한 팀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두 목소리가 어떻게 이런 화음을 만들어 내는가? 윤형주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때로 소년 같거나 여성적이다. 가정적인 느낌이 있다. 반면 송창식의 목소리에선 물과 바람, 파도 소리가 들린다. 때로 흙냄새가 나고, 때론 바위를 때리는 것 같다.” -‘윤형주는 가수다’에서

지은이 윤형주

작사, 작곡, 편곡 및 제작을 겸하는 가수이자 방송인이다.

1947년 11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1974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년까지 재학했다. 1967년 가을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송창식을 만났으며 1968년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이크’, ‘슬픈 운명’ 등을 발표했다. 1969년 12월 트윈 폴리오를 해체하고 1971년부터는 솔로로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 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미운 사람’ 등 80여 곡을 발표했다. 1971년에는 동아방송 심야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탑튠쇼’에서 디제이를 맡았다. 그 후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BC-FM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 CBS ‘찬양의 꽃다발’, 극동방송 ‘윤형주와 함께’ 등에서 라디오 진행, KBS ‘연예가중계‘, ‘열린 음악회’, SBS ’음악세상’, MBC '청소년 음악회’ 등 TV 프로그램 MC를 맡아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1976년 광고회사 서울오디오를 설립해 ‘오란씨’, ‘새우깡’, ‘롯데껌’ 등 1400여 곡의 시엠송과 로고송을 제작했고 지금은 (주)한빛기획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1989년 케니 로저스 내한 공연 제작을 시작으로 셀린 디옹, 마라나타 싱어즈, 가스펠 가수 샌디 패티, 스티브 그린 등 해외 유명 가수의 내한 공연을 기획, 제작했다. 2003년 7월에는 카네기홀 역사상 첫 가족 공연을 했고, 그다음 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앙코르 공연을 가진 바 있다. 2010년 세시봉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으로 미주, 호주, 유럽, 일본 공연에 이어 지금도 계속 세시봉 친구들과 공연을 한다.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Habitat) 후원회장 겸 홍보위원장, 한국 십대선교회(Y.F.C) 본부 이사,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홍보이사, 법무부 홍보대사, 몰디브 명예영사, 독도 의용수비대 홍보대사 등으로 봉사해 오고 있으며 온누리교회 장로로 교도소, 장애우, 해외선교 사역을 꾸준히 펼쳐 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움’(나침판사, 1991), ‘QT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두란노서원, 1998)이 있다.

- 2013년 01월12일 교보문고 광화문점. 오후 2시부터 사인회
- 2013년 01월17일 예술의 전당. 오후 7시부터 저자와 만남
- 문의 : 도서출판 삼인(02.322.1845), 업무협력 악사소프트(031.609.5353)

악사소프트 개요
저희 기업은 고객에 대한 신뢰성, 품질성, 경제성을 회사 경영방침으로 두고 있습니다. 이런한 경영방침 아래 다양한 앱 개발 및 세계일류의 테블릿 프레임인 아이프레임등을 개발하고 공급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퍼블리싱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침체되어 가는 관련 업계 종사자들(출판사, 서점, 디자인업체등)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디지털 생태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 앱 개발외 출판인쇄분야쪽은 아이폰, 아이폰, 안드로이드, 각종 테블릿등과 같은 Mobile Device 활성화로 인하여 점차 축소 되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종이 인쇄물 출판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기에서 보여질 멀티 플랫폼 솔루션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저희의 자체 개발한 멀티미디어 프레임인 iFrame을 활용한 컨텐츠 생산과 공급을 가능하게 하여, 컨텐츠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켜 최고의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웹사이트: http://www.axasoft.co.kr

연락처

악사소프트
총괄업무부
문충규 본부장
032-751-9228, 031-609-5353, 010-5399-9228
이메일 보내기

국내 최대 배포망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