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와이어)--황인성 시민사회비서관

“제발 중간만 해라, 뭐 할라꼬 남 눈에 띄게 앞에 나서노. 그저 남 기시지(속이지) 않고 밥 묵고 살면 그기 최고다. 더 잘 할라고 애달 복달 할 것도 없다.”

내가 시국사건으로 처음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나왔을 때, 몇 해 전 세상을 뜨신 내 고모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후 고모님은 나를 볼 때마다 근심어린 표정으로 간곡하게 타이르셨다.

“제발 나서지 말고 중간에만 있어라, 그 영리하던 외갓집 오빠도 만세 부르니까 고마 안 되더라, 감옥살고 나와서도 고향서 못살고, 결국에는 만주에서 아편 장사하다 죽었다 카더라”

왜정 때 동경유학까지 한 외사촌 오빠의 제대로 피지 못한 인생에, 이제 대학생이 된 조카의 걱정스런 미래가 오버랩 되어 고모님의 눈앞에 어른거렸는지 모를 일이다.

주변에서 가족의 일이 아니고 공동체 전체의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 있으면, 왠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 내 성장기에 본 어른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끼리 심심찮게 하던 말이 ‘뭐든지 중간만 해라’였다. 망국민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모진 역사의 굴곡을 감내해야 했던 힘없는 민초들의 굴절된 모습이라고 이해해야 옳을까. 언제나 소극적 체념과 대세추종이 세상을 사는 바른 지혜인 듯이 말하는 그분들에게서 나는 잘 모르면서도 막연한 거부감을 가졌다.

시련은 고난일지언정 좌절과 실패의 강제 아니다

돌이켜 보면,지난 반세기 이상 우리 민족이 겪은 시련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해방의 기쁨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강토는 허리가 잘리고, 곧 국제냉전의 대리전쟁터로 변했다. 수많은 나라의 군대가 이 땅에 발을 들여 놓고, 20세기의 가장 처참한 열전을 벌였다. 동족상잔의 깊은 상처 위에 다시 선 남북의 분단국가는 적대감과 전쟁공포를 주춧돌로 하여 군사권위주의의 기둥을 세웠다. 국민의 권리 주장은 늘 안보라는 구호 하에 탄압받고, 민주적 참여요구는 효율이란 명분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시련이란 사람들에게 고난을 요구하는 것일지언정 좌절과 실패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은 그 전쟁의 잿더미 위에 세계 10위권에 근접하는 규모의 국민경제를 일으켜 세웠고, 끈질긴 대중의 투쟁과 희생을 바탕으로 모범적인 민주국가의 터전을 가꾸어 오지 않았는가. 한국기업이 반도체,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한류열풍이 아시아지역을 휩쓰는 등 정보통신기술과 대중문화에서도 한민족의 역량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가 놀라는 이 큰 변화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우리민족의 고통과 갈망이 빚어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열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때론 짓눌리고 꺾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응축되었다가, 활화산처럼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집단적 의지와 신명,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이다.

3.1운동, 4.19혁명, 부마항쟁과 5.18 광주항쟁, 그리고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불의와 압제에 결코 체념하지 않고 일어서게 하는 힘, 바로 우리 국민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이상과 넉넉한 자신감인 것이다. 지난 2002년 세계를 놀라게 한 붉은 악마의 거리물결, 이후에도 중요한 계기마다 광장을 물들이는 촛불의 바다 역시 열정적이면서도 절제된 국민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국민이 보여준 미래에 대한 낙관적 태도와 자신감이 우리의 역사를 여기까지 밀고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올해는 화해·통합의 큰 걸음 내딛는 출발점

올해는 우리민족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60년은 하나의 긴 순환을 매듭짓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지난 60년 동안 우리민족의 고난과 성취를 되돌아보면서, 민족공동체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남과 북,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국민 모두가 오늘 직면한 내외적 과제를 함께 인식하고, 국가적, 민족적 비전을 공유하는 좋은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세계는 2차대전 종전 직후에 버금가는 대전환기적 환경에 처해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 냉전질서는 마지막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고, 지구화와 지식정보화라는 문명사적인 대변화의 물결 역시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 와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냉전시대의 편협한 시각과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오늘의 위기를 통찰하고, 상생과 통합의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모든 부문에서 지난 시기의 소모적인 대결과 불신, 맹목과 편견을 뛰어넘어, 신뢰와 타협, 합리와 이성을 존중하는 풍토와 관행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때이다.

그럴 때만 우리는 분단의 질곡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분열과 군사적 갈등을 해결해 나갈 상생과 평화, 번영을 위한 통합력과 개방적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는 분단구조 하에서 점철된 독재와 타도, 불신과 대결의 소모적 정쟁을 극복하고 생산적인 정치문화와 제도를 뿌리내리고, 경쟁과 연대가 조화를 이루는 협력적 사회기풍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광복 60주년, 지난 세기의 모든 외세의 침탈과 간섭, 분단과 적대, 이기적 갈등으로 인한 분열의 역사를 뒤로 하고, 화해와 통합의 큰 걸음을 내딛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도록 온 민족의 꿈을 나누는 장이 되게 우리 모두 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한사람이 꾸는 꿈은 단지 꿈으로 그치지만 만인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7000만 겨레가 함께 꾸는 꿈이라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 믿음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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