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화학산업에 대한 5가지 고정관념'
최근에는 최종 제품의 품질과 성능을 좌우하는 소재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화학을 비롯한 소재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될 정도이다. 이러한 중요성과 달리 화학산업(석유화학산업과 정밀화학산업을 포함하는 협의의 분류에 따름)의 실상은 그리 밝지 못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화학산업에서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성장세가 둔화되고, 수익성이 저하되는 성숙기 현상이 완연하게나타나고 있다. 수익성의 저하는 연구개발 투자 부진으로 이어져 신제품 개발도 저조한 실정이다. 대중의 인식도 대체적으로 이와 일치하는 듯하다. 특히 급성장하는 IT산업과 대비되면서 화학산업의 이미지는 변화에 둔감한 전통산업으로 굳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결국 화학산업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성장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하에서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환경 변화를 통해 화학산업의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이에 따른 기업의 대응 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환경 변화는 곧 기회를 의미한다
19세기 중반 근대 화학산업의 출발 이후 화학산업은 기술 발전과 함께 오랜 기간 견실하고도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해 왔다.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길고, 특정 산업에 의존하지 않는 기초 소재산업의 특성에 따라 화학산업은 일시적인 경기의 부침은 있어도 환경 변화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1990년대를 전후하여 화학산업에서는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 즉 화학산업의 구조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초대형 환경 변화 요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혁신기술의 발전을 들 수 있다. IT, BT, NT 등 혁신기술은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으로 대변되던 화학산업의기술 기반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합화학(IT와의 접목), 바이오화학(BT와의 접목), 나노화학(NT와의 접목) 등 듣기만 해도 생소한 개념의 기술들이 등장했고, 이는 화학산업의 기술적 한계를극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혁신기술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반 기술 성격이 강한 혁신기술은 기술, 산업 간 경계를 넘나들며 융합화(Convergence)현상을 진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융합화의 진전은 복잡성의 증가를 의미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지만,한편으로 다양한 기회가 창출되는 효과를 누릴 수있다. 결과적으로 화학기업들이 의도하는 바와는 관계없이 기술 기반이나 사업 영역의 변화가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두 번째 환경 변화 요인으로는 에너지와 환경문제를 들 수 있다. 현재의 유가는 1990년대 중반대비 세 배 이상 높은 수준에서 형성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이번의 유가 급등 현상은 단기간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석유를 원료또는 연료로 사용하고 있는 화학산업에 있어서 고유가의 장기화 또는 고착화는 일단 위협 요인이 아닐 수 없다.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온실가스감축을 위한 기후변화협약 등 최근의 환경 규제는갈수록 글로벌, 강제적 차원의 문제로 변모하고 있다. 에너지 소모나 유해화학물질의 취급이 많은 화학산업에서 환경 규제의 강화는 시급한 대응이 필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글로벌화의 진전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화학산업은 일부 선진기업을 제외하고는 글로벌화가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이었다. 화학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관세 등 정부의 보호를 상대적으로 많이 받아왔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전자, 자동차 등 수요산업의 글로벌화및 거대기업 위주로의 시장 재편, 신흥 시장의 급성장, FTA(자유무역협정)의 진전 등에 따라 화학산업내에서도 글로벌화의 필요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화의 진전은 기업 간 경쟁을 가열시킬 것이며, 결과적으로 화학산업 내의 집중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학산업 내에서는 기업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급격한 환경 변화가 진행 중이다. 기업에게는 분명히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화학산업의 새로운 세대로의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화학산업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화학산업을 지배하던 고정관념을 뒤집어 봄으로써 변화의 실체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변화의 실체를 인정하고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최근의 환경 변화는 화학산업이 직면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하에서는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있는 선진기업의 사례를 통해 화학산업의 대표적인고정관념 다섯 가지를 하나하나 짚어보고, 그것이기업에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 화학기업은 화학기술만 연구한다?
최근 선진 화학기업들의 연구개발 전략에 있어서가장 큰 흐름 중의 하나는 기술 융합의 추구이다. 적어도 선진 화학기업들에 있어서 화학기술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옛말이 된지 오래이다. 심지어 DuPont이나 Bayer는 섬유, 석유화학 등 전통적인화학사업의 분리와 함께 자사의 기술 기반을 화학이라는 말 대신 과학(Science)이라는 광범위한 표현으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다양한 기술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활발하다.
일본의 종합화학기업인 도레이는2003년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첨단융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바이오(BT)와 나노(NT), 양자 간의 융합 영역(BNT)을 주 연구분야로,일차적으로는 차세대 약물전달시스템, DNA 칩 등의 실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도레이는 소장 및연구원들을 대거 외부에서 영입하는 한편 대학의관련 실험실을 연구소 내에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차세대 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 기업들은 내부의 기술 확보와 함께 시장을 통해 보다 다양한 외부 기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Dow,DuPont, BASF, DSM 등 많은 기업들이 벤처 캐피탈을 활용해 IT, BT, NT, 재료 등 다양한 기술 기반벤처에 투자하고 있다. 화학산업의 기술 기반 다양화는 이미 대세로받아들여지고 있다. 화학이라는 분류 자체가 미래에는 별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다양한 기술을 확보할 것인지, 확보한 이종 기술을 어떻게 기존기술과 융합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 화학기업은 화학제품만 생산한다?
지금까지는 화학기업이 주로 소재의 생산에 주력하고 이를 가공기업에 공급하면, 가공기업이 소재를가공하여 부품 등의 형태로 수요기업에 공급하는방식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소재 부문의 범용화가 진전됨에 따라 이러한 방식은 수익 창출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수요기업의 변화무쌍한 니즈에도 대응이 어렵다는 문제를 노출시켰다. 따라서 최근에는 화학기업들의 가공부문 진출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전자재료 이다. 엄밀하게 보면 필름 등 상당 부분이가공 영역에 해당하는데도 화학기업들의 진출이 쇄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화학기업들거의 대부분이 다양한 분야의 전자재료 사업에 진출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나 다른 외국 화학산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다각화가 아닌 일종의융합화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IT, NT 등의 활용으로 소재의 설계 및 제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원하는 기능의 부여가 보다 용이해진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가공 단계로의 확장에서 나아가 부품, 장기적으로는 완제품 단계로까지 이러한 모델이 확장될수도 있을 것이다. 화학기업들이 자동차기업에 플라스틱 도어 등을 모듈 형태로 공급하고 있는 것이좋은 예이다. 과거와 같이 소재 부문에서의 고수익 창출이 어려워짐에 따라 화학기업의 가치사슬 확장을 통한수익모델 발굴은 점차 일상적인 경영활동으로 자리잡게 될 전망이다. 분야에 있어서도 전자재료는 물론 환경, 에너지, 보건·의료, 우주·항공 등 향후성장산업으로 확장이 예상된다.
3M이 주로 화학기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다양한제품 때문에 3M을 화학기업으로 선뜻 분류하기는어렵다. 화학기업이 역량과 무관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문제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굳이 화학제품만을 생산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화학기업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그것에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 화학산업은 자본집약형 장치산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학산업 하면 대규모 설비투자가 요구되는 전형적인 제조업을 연상한다. 그러나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생산 이외의 부문에서 부가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갈수록 확산되는추세이다. 가장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예가 컴파운딩 등의솔루션 비즈니스이다. 단순히 제품만을 공급하는것에 비해 고객의 요구 사항을 듣고 고객의 성과를극대화하기 위한 솔루션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미쓰비시화학은 중국의 자동차용 PP(폴리프로필렌) 컴파운딩 사업을2010년까지 두 배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동사는 SINOPEC(중국석유화공총공사)과의 합작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한편 기술 개발력과제품 평가 체계 강화, 판매체계 정비에 나서고 있다. 기존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를 도모하는 데서 더나아가, 아예 라이센스나 컨설팅 등 지식자산을 사업화하는 탈 제조업 비즈니스 모델도 등장하고 있다.
Symyx는 조합화학, 초고속 스크리닝 기술 등을 활용해 신물질을 개발하는 연구개발 전문기업으로, 라이센싱, 공동 연구개발, 연구개발 컨설팅 등을 사업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선진기업들의 경우는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지식집약형 사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DuPont은 향후 아시아 투자에 있어서 과거와 같은대형 설비투자를 지양하고 기술, 지식자산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동사는 싱가포르에 BT, NT 등첨단 분야를 대상으로 한 연구개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산업 내의 경쟁이 가열되고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화학산업에서도 단순한 제조업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로는 점점 생존이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사업 분야와 관계없이 지식자산의 활용은 앞으로 기업들의 가장 큰 과제가 될 전망이다.
● 화학산업은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다?
일반적으로 화학산업은 연속공정형 장치산업으로에너지 소모가 비교적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고유가 및 환경규제 강화 추세와 맞물려 에너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기술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에너지 절감 노력은 화학산업 전 분야에 걸쳐이루어지고 있지만 공정의 특성 상 혁신적인 에너지 절감 성과는 주로 정밀화학 분야에서 나타나고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이오 공정의 도입이다. DSM은 10단계에 이르던 기존의 항생제 원료 제조공정을 효소를 활용한 바이오 공정으로 대체함으로써 에너지 소비를 무려 65% 감소시킬 수 있었다. 최근에는 마이크로반응 기술(MicroreactorTechnology)을 활용해 에너지를 절감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마이크로반응기는 그램 또는 킬로그램 단위의 실험용 생산설비로 제품 개발용으로활용되어 왔다. 이러한 마이크로반응기를 병렬로연결하여, 상업 생산설비로 활용하면 유연한 생산이 가능해져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 있게된다. 에너지 소비 증가는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화학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있다. 따라서 향후 공정 혁신을 통한 에너지 절감노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BT와 NT 등 혁신기술의 기여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질것으로 예상된다.
● 화학산업은 환경오염 산업이다?
다양한 화학물질을 취급하고 생산하는 화학기업이환경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간헐적으로터지는 대형 환경 사고는 화학산업을 환경오염 유발형 산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학기업이 방어적 대응에만 치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화학기업은 환경오염의 원인 제공자이지만 동시에 환경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지구온난화해결에 있어서도 화학기업들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아사히화성은 일산화이질소(N2O)라는 화학물질을 분해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자체적으로 이산화탄소 환산 연간 600만톤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달성하였다. 이는 일본의 온실가스 삭감 의무량의0.5%, 네덜란드 전체의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에해당하는 규모이다. 이밖에 미쓰비시머티리얼은 최근 혼합가스에 포함된 이산화탄소를 과거에 비해훨씬 적은 에너지로 분리, 회수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학기업은 향후 환경규제의피해자가 아니라 최대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플라스틱, 잉크, 접착제, 코팅재, 섬유 원단 등으로갈수록 분야가 확대되고 있는 BT 기반 화학제품이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밖에 각종 환경오염 방지용소재 및 약품, 대체 프로세스 개발 등 환경과 관련된 사업기회는 무궁무진하다. 환경 분야가 새로운활로를 모색하는 화학기업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고있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홍정기 산업기술그룹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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