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포천 화현리 분청사기 요지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및 현장설명회 개최
포천 화현리 분청사기 요지 발굴조사
Ⅰ. 조사개요
유 적 위 치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190번지 일원
조 사 기 간 : 2005년 7월 6일~8월 15일(예정)
유 적 성 격 : 15세기 분청사기 가마터 1기와 퇴적층
조 사 면 적 : 1,695㎡
조 사 기 관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조사의뢰기관 : 산림청
Ⅱ. 조사경위
화현리 도요지는 운악산 일대에 자연휴양림 조성을 계획하고 있는 산림청의 의뢰로 화랑대연구소에서 2004년 11~12월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확인되었다. 지표조사 결과 이 지역에서 분청사기 도요지 4곳이 확인되었는데 2곳이 휴양림 내 도로개설 구간 내에 포함되어 발굴조사를 건의하는 조사단 의견서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발굴 조사는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퇴적층을 중심으로 산림청의 의뢰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발굴조사는 지표조사에서 퇴적층이 확인된 지역을 중심으로 탐색 피트를 구획하여 유구를 확인하였다. 탐색 피트 조사결과 분청사기 1호 요지는 도로개설 예정지에서 유구가 확인되지 않아 2호 요지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2호 요지에서는 가마 1기와 가마 좌우에 형성된 퇴적층(폐기장)이 확인되어 탐색 피트와 트렌치를 구획하여 가마와 퇴적층의 규모를 확인한 후 전면제토를 실시하여 조사하였다. 출토 유물은 발과 접시가 대부분으로 이외에 다양한 기종과 도지미, 불창마개 등이 출토되었다.
Ⅲ. 자연 환경
조사지역은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운악산(雲岳山, 936m) 서쪽 산록에 소재한다. 운악산은 한북정맥에 위치하여 과거 경기 5악(五岳)의 하나로 널리 아려진 명산이며, 예로부터 ‘경기의 금강’이라 불릴 만큼 산세와 기암절벽, 계곡 등이 잘 어우러진 절경을 이룬 곳이다. 한북정맥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연결되어 광덕산(1.046m)과 백운산(937m), 국망봉(1.176m), 강씨봉(830m), 청계산(849m) 등을 거쳐 운악산으로 연결되어 다시 남쪽으로 점점 낮아지면서 주금산과 천마산 등으로 이어져 있다.
이처럼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로 연결된 운악산의 지질은 쥬라기의 화강암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심한 습곡작용과 기복이 일정한 방향을 두고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추가령열곡의 연장선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지질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 지역의 산림은 한국전쟁 이후의 무분별한 도벌과 이후 자라난 인공 식재림과 자연림으로 이루어진 2차림으로, 현재 녹지 7등급으로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어울려 활엽수림이 자연림 지역 전체에 고루 나타나고 있다. 지형적 요인으로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이 지역 년 평균 기온은 11.8℃ 정도이며, 강수량은 1300㎜이다.
운악산의 서쪽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47번 국도가 4차선으로 개통되어 최근 운악산에 대한 탐방객과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매년 가을 ‘운악산 단풍축제’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기도 하다.
Ⅳ. 역사적 배경
조사지역이 위치한 곳은 포천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역사시대 이후 현재까지 포천시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포천시의 선사유적은 최근 다양하게 학계에 보고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유적은 이곳과 인접한 화대리 구석기유적과 금현리·수입리 고인돌과 영송리 선사유적 등이 있다.
역사시대에 접어들면 백제 영역에서 광개토대왕 때에 고구려로 편입되면서 처음 마홀(馬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어 신라 경덕왕 대에는 견성군(堅城郡)으로 변화하며, 신라통일기 말 철원을 중심으로 강력한 패권 국가를 세운 궁예의 강토에 들면서 태봉에 속하게 되었다. 특히 조사지역에 위치한 운악산성은 궁예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918년 왕건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면서 견성은 명지성(命旨城)으로 개칭되며, 조선 건국 후에는 태종대에 이르러 지금의 포천군 전신인 포천현(抱川縣)으로 명칭이 바뀐다.
조선시대 화현지역은 포천현 동촌면(東村面) 영역으로 화현(花峴)·지현(芝峴)·명덕(明德)·신팔(薪八) 등 4개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내촌면과 병합하여 내촌면이 되었다. 1943년 주민들의 요구로 화현리에 화현출장소를 설치하고 화현·지현·명덕 등 3개리를 관할하였다. 1983년 대통령령에 의해 화현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휴양림 조성구역 주변에 다양한 유적과 휴양시설, 온천 등이 위치하고 있어 수도권의 휴양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분청사기 도요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인 「世宗實錄地理志」 抱川縣條에 자기소에 대한 기록이 있어 검토가 요구된다. 또한 최근 인근 일동면 길명리에서 조선 후기의 흑갈유 도요지가 조사되어 포천지역 도자문화 규명에 도움을 주고 있다.
Ⅴ. 조사 내용
1. 조사유구
발굴 조사는 유구가 확인된 2호 요지를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먼저 지표조사에서 퇴적층이 확인된 곳을 중심으로 15m×2m의 피트를 구획하여 조사하였으나 소규모의 퇴적층(폐기장)만 확인되어 1m의 둑을 남기고 10m×3.5m와 10m×1.5m 탐색 피트를 추가로 구획하여 조사하였다. 그러나 가마와 추가적인 퇴적층이 확인되지 않아 林道를 개설하면서 퇴적층이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퇴적층 아래 부분을 임도를 이용하여 20m×2.5m의 탐색 트렌치를 구획하였다. 탐색 트렌치 조사에서 퇴적층 중심부가 확인되어 퇴적층 좌측를 전면 제토하여 가마의 윤곽을 확인하였다.
조사 결과 2호에서는 가마 1기와 도자 실폐품·폐기물 등을 버린 폐기장(퇴적층)이 조사되었다. 가마는 조사 지역의 산사면에 남-북에 가까운 남동-북서 방향의 半地下式 單室 登窯이다. 구조는 봉통부 앞 작업공간(窯前部)과 봉통부(燃燒室), 燔造室(燒成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부분(排煙部)은 유실되었다. 크기는 잔존 길이 28m로 작업공간은 길이 120㎝ ×너비 75㎝ × 깊이 10~20㎝, 봉통부는 길이 160㎝ × 너비 105㎝ × 깊이 72㎝, 번조실은 길이 18㎝ × 너비 140㎝ 내외 × 깊이 10~15㎝이다. 경사도는 약 30°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火口部는 너비 75㎝ × 높이 30㎝이다.
가마는 생토층인 황갈색 풍화암반층을 파고 바닥과 벽을 축조하였으며 천정부는 점토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벽은 부분적으로 도지미와 도편 등을 이용하여 일부 수리하였다. 벽은 남아 있는 부분 가운데 극히 일부만 유리질화되었으며, 번조실 바닥은 도지미의 수평을 위한 모래층이 두텁게 깔려 있다. 퇴적층은 가마의 좌우에 형성되어 있는데 조사는 가마 우측(동측) 퇴적층을 중심으로 실시하였는데 퇴적층은 표토층을 포함하여 크게 3개층으로 구분된다.
2. 출토유물
출토품은 분청사기와 문양이 없는 회청사기, 백자, 흑유자, 연질 도기, 요도구 등이 있다. 출토품의 대부분은 분청사기와 회청사기이며 백자와 흑유자, 연질 도기는 매우 적은 양이다. 분청사기와 회청사기는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까지 파악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회청사기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백자는 소량 출토되었으나 분청사기(회청사기)와 함께 포개어 번조한 것으로 화현리 가마터에서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태토는 정선된 정도와 색깔을 기준으로 입자가 고르고 색깔이 밝은 양질과 입자가 거칠고 색깔이 어두운 조질로 구분할 수 있다.
기종은 발과 접시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종지, 잔, 병, 호, 마상배, 장군, 대발(大鉢), 삼족기(제기) 등이 있다. 발은 대부분 완만한 곡면형의 넓은 내저면에 측면선에 양감이 있으며 구연은 외반한다. 접시는 지름 10㎝ 내외의 내저면이 평평하고 측면이 직립한 것이 가장 많은데, 구연부 형태가 화형(花形)과 거치형인 접시도 출토되었다. 병과 호는 크기가 다양하다. 굽 형태는 대부분 높이가 낮은 죽절형이다.
문양 장식은 상감기법과 인화(印花)기법이 혼용되었는데 인화기법은 단독인화기법이 대부분이고, 적은 양이지만 집단연권인화기법(集團連圈印花技法)이 나타난다. 덤벙기법과 귀얄기법은 확인되지 않는다. 상감기법의 문양은 여러 겹의 선을 한꺼번에 새긴 파상문과 와선문(渦線文)이 있으며, 단독인화기법의 문양은 국화문과 육각문, 연판문, 연주문, 삼원문, 육원문 등이 있고, 집단연권인화기법의 문양은 작은 국화 2-4개를 한 구획 안에 나타냈다.
시유는 기종에 따라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대접은 기면 전체를 시유하였으나, 접시는 굽 부분을 시유하지 않았다. 번조 기법은 2~3개의 그릇을 포개어 번조하였으며, 갑발이 출토되지 않아 모두 포개 번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큰 그릇 위에 작은 그릇을 포개었으며, 맨 아래 쪽에는 모래를 깔고, 기물과 기물 사이에는 태토빚음을 받쳤다. 백자와 마상배 등 특수 기형은 1점만 놓고 번조하거나 포개 구이의 최상에서 번조하여 내저면에 받침 흔이 없다.
요도구는 대부분 도지미로 높이 15~17㎝ 내외의 원통형이 가장 많으며, 소형 도지미는 소량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불창마개가 1점 출토되었다.
Ⅵ. 조사 성과와 의의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공납용(貢納用) 자기였던 분청사기는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지역적 특징이 뚜렷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포천 화현리 분청사기 가마터 발굴은 경기도 지역에서 실시된 최초의 분청사기 가마터 발굴로 경기도 지역 분청사기의 특징뿐만 아니라 조선전기의 陶磁文化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조사에서 연대추정이 가능한 銘文資料는 출토되지 않았으나 도편의 양식적인 특징을 고찰하여 가마의 운영시기를 상대편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화현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에서는 흑백상감 기법의 연당초문을 비롯한 고려 말 상감청자의 양식적인 특징이 확인되지 않으며, 기형에서도 내저원각형의 내만형 구연 대접이 나타나지 않았다. 문양은 인화문 분청사기 초기단계에 해당하는 국화문과 육각문, 삼원문 등의 단독 인화기법이 주류를 이루며 적은 양의 집단연권국화문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분청사기와 함께 백자를 포개어 번조한 점 등은 가까운 경기도 廣州地域의 분청사기 가마와 같은 양상을 보인다. 특히 화현리 출토 분청사기의 양식적 특징과 백자를 함께 제작한 점은 廣州 도수리 6호와 번천리 17호 제작양상과 부분적으로 공통되는 점이 있어 1420~1440년대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화현리 분청사기에서 양식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점과 집단연권인화문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점을 감안 할 때 그 운영시기를 1420~1430년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磁器所 139개소와 陶器所 185개소가 조사된 기간에 해당되는 시기로, 「世宗實錄地理志」 京畿道 楊州都護府 抱川縣 東 蜂巢里 磁器所 下品 1곳, 縣 東 其岾 陶器所 下品 1곳의 기록과의 관련성은 화현리 가마터에서 갑발과 명문자기가 출토되지 않아 좀 더 검토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화현리 분청사기 가마터 발굴은 경기도 지역의 분청사기 특징과 백자로의 전환 시기를 비롯하여 경기도 이외 지역의 분청사기 가마들의 백자로의 전환 시기 등을 비교하여 조선 전기의 도자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일부 굴뚝부가 유실되었으나 매우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가마도 도요지 변천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재청 개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온 문화재 체계,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제정된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60년간 지속된 문화재 체계가 국가유산 체계로 변화한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고정된 가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국민의 참여로 새로운 미래가치를 만드는 ‘국가유산’.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은 국민과 함께 누리는 미래가치를 위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국민과 공감하고 공존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를 지키며 과거와 현재, 국내와 해외의 경계를 넘어 다양성의 가치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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