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최고 특수효과 전문가, 미라클스페셜이펙트 소달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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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넷
2014-01-07 16:53
서울--(뉴스와이어)--이벤트넷은 국내 이벤트업계의 관련 전문가를 소개하는 코너를 개설하여 관련 전문가를 소개하고 있다. 최근 창조경제와 부합되는 이벤트산업의 활성화와 전문가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여 관련산업의 소개를 통해 청년층의 취업과도 연계할 수 있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마치 무대와 같은 모양, 접히지도 않는 입체명함 위에 ‘미라클’이라는 사명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이 명함을 웃으며 내민 분은 특수효과 및 기계장치 분야의 전문가 ‘소달영’ 대표를 소개한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에 참여한 이후 이벤트 산업의 구성원이 되었고 이후 많은 우여곡절 속에 특유의 임기응변을 바탕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에 진출하여 중국 중앙방송국, 상해 방송국의 협력업체로 일하기도 했으며, 2008년 북경올림픽 개폐막식에 외국 업체로 참여하여 조직위원회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또 그는 사단법인 ‘한국방송문화산업기술인협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길을 다니면서도 사소한 무엇을 보아도 특수효과 방향의 시선으로 접근하면 새로운 아이템이 보이게 되며, 예기치 못한 전문기술들의 ‘합쳐짐’이 바로 특수효과의 매력이라고 한 그는 ‘장인(Artisan)’의 방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임기응변의 달인”

Q. 어떻게 특수효과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

시작은 ‘인형극’이었다. ‘세계 인형극대회’가 시발이었고, KBS1TV의 ‘TV유치원 하나둘셋’을 처음 만든 인형극의 대부인 조영수 씨가 MBC인형극의 김선익 대표를 소개시켜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뽀뽀뽀’ 계약직으로 AD(Assistant Director)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애니메이션’은 기술력이 약했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인형극’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형극은 ‘표현력’이 약했기에 이런 ‘리얼함’의 문제를 좀 해결해보고자 일본 ‘NHK TV’의 ‘도꼬’라는 특수효과 회사에 가서 기술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 ‘거미줄’이었다.

그 당시 특수효과는 영화에만 있었는데, 문제는 ‘페이크’가 없다는 것이었다. 폭파장면과 총격장면에는 각각 실제 다이너마이트와 실제 총을 사용하였기에 배우들이 많이들 다쳤다고 한다. 효과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좀 덜 위험한 소품이 필요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 역할을 내가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 방송, 예능 등에서도 특수효과가 사용되게 되었다.

또 당시 TV, 특히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는 ‘도사’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그들이 등장할 때는 연기와 함께 ‘뿅’하고 등장하는 것이 정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사용되는 일명 ‘뽕 화약’은 마그네슘이 주성분이라 열이 많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 암모니아를 배합하는 기술로 열을 낮출 수 있었고 ‘도사님’은 리얼하면서도 보다 안전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이후 1986년 일본 인형극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들에게 내가 미국의 유명특수효과 회사에서 벤치마킹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퇴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8년 올림픽 때 호돌이 마스코트 400개를 직접 운영한 것이 내가 특수효과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1개당 50만원 쯤 받았으니 합이 2억쯤 되었을 것이다. 이 때 기술이 마땅찮아 월트디즈니의 협조를 구했는데 이것 때문에 롯데월드 캐릭터 팀이 생겨나기도 했다.

Q. 기억에 남는 행사나 활약이 있는가?

1990년에 ‘삼성 한마음 체전’이 기억에 남는다. 이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대내외에 그 정신을 밝히는 행사였는데 당시 비공식적으로 몇 백억 규모의 행사였다. 당시 ‘특수효과’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그 전에는 ‘특기’, 즉 ‘특별한 기술’이라고 불렀다. 이 행사가 특수효과의 시초인 셈이다. 이 때 이미 산업규모가 컸던 영화에는 특수효과가 존재했다. 이는 해방 이전에 상해 등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영화를 배웠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먼저고 나중에 일본에서 별도로 영화 기술이 도입된 것이다.

초기 특수효과는 ‘소품’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송에서 시청자들의 호응을 자아내는 박수부대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를 대체하기 위해 ‘짝짝이’ 라는 일종의 박수로봇을 고안해 이벤트 도구로써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치연화’라는 디스플레이 화약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한국화약’에 제공하여, 기존의 ‘타상연화’처럼 ‘뻥뻥’ 터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불꽃과 같이 ‘예쁘게 터지는’ 연출도 가능케 하였다.

Q. ‘정점’을 꼽는다면?

이벤트업 자체의 시작과도 관련이 깊은 1993년 ‘대전 엑스포’가 그것이다. 이때는 비교 대상이 없었기에 기준 단가가 없었고, 선진기술이 많이 도입된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에서는 90년대 초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과 ‘쇼특급’이라는 프로그램이 서로 경쟁적으로 특수효과를 도입하던 것이 인상 깊다. 한 쪽에서 20발을 쏘면, 한 쪽에선 40발을 쏘고 또 한 쪽에선 60발을 쏘는 식. 망하든 말든 막 사용했다. 또 예능 프로 출연자들의 구성이 다양해지고 무대의 볼륨도 커져갔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멀티플렉스 무대. 한쪽에서 2층짜리 무대를 세우면 다른 쪽에선 3층짜리를 세우는 식으로 서로 경쟁이 붙었다.

“중국으로 진출한 진주 ‘소’ 씨”

Q. 중국과는 어떻게 연을 맺고 그곳으로 진출하게 되었나?

앞서 얘기한 ‘토토즐’이 프로그램 볼륨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700년의 약속’이라는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외국진출을 꾀했다. 700년 전 신안 앞바다에서 배와 함께 가라앉은 보물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중국 복건성에서 출항식을 하고 신안 앞바다에서 재를 지낸 후 일본 후쿠호카에서 환영대회를 하는 식. 복건성에서 발전차가 없어서 경운기로 대신하고 선을 연결하는 커넥터가 없어 그냥 천으로 감아놓는 등 고생이 많았다.

내가 ‘소’씨라서 소정방의 후예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실제론 진주 소씨인데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이 있어왔다. 당시 중국은 선동선도를 목적으로 한 방송은 잘하지만 기술력이 약했기에,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배우려고 갔는데 일은 가르칠 생각 없이 청소만 시켰던 일본에서의 ‘수모’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이 후 1997년, ‘상해TV’의 부사장과 함께 ‘상해 아트비젼’을 만들었다. 투자한 것만 몇 억쯤 됐는데 당시 중국 돈으론 몇 백억쯤. 진행되는 모든 방송의 무대, 음향, 조명 등을 도맡는 조건이었다. 음향시스템 등 방송을 위한 시설과 특수한 장치들을 제공하였지만 좋은 뜻과는 달리 당시 그들은 장비와 기술 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임대료를 내기는 커녕 중국 전역의 방송국 3000여개에 신기술들을 카피해서 몰래 팔아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소송을 걸었다. 6년 만에 승소했지만 돈은 10여년 후에 받으라는 판결이 나왔다.

Q. 중국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행사?

고민할 필요도 없이 1997년 ‘홍콩반환’ 행사다. 찰스 황태자, 장저민 대표도 참석했었던 역사적 행사였다. 이 때 행사의 기술상 주안점이 ‘영국꺼 쓰지 말고, 우리끼리 해내자’였다. 그래서 처음에 미국에 의뢰했으나 비싼 가격 때문에 KBS에 의뢰가 들어왔고, 거기서 우리 ‘미라클’을 소개시켜준 것이다. 그리하여 행사기획팀에 들어가고 보니, 여러 개의 빌딩에서 불꽃들이 동시에 터지도록 무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외국 사람들도 못한다고 포기했던 것을, 유선전화기 12대로 일일이 각각의 빌딩에 전화를 걸어서 ‘큐’ 사인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또 하나의 미션은 ‘실내인데 오성기를 펄럭거려라’였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생각해낸 게 땅을 파고, 50cm짜리 관들을 환기구를 통해 연결시키는 것이었고 결국 그걸로 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이런 성공적 경험을 거치자 중국은 ‘될 나라다. 투자해도 되겠다’ 싶어서 중국 ‘CCTV’로 갔다. 당시 특수효과나 장치들에 대한 담당부서가 없어 제작부서가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이후 ‘중국의 열린 음악회’ 같은 프로그램 등 굵직한 것들을 거의 다 맡게 되었다. 무대 무빙, 대나무 등 연약한 재질이 아닌 ‘쇠’로 무대 만들기 등 특별한 기술들의 멘토 역할을 하여 ‘확장성’과 ‘변형성’을 가진 무대 만들기에 주력했다.

이때의 중국은 예술을 정부 혹은 국가에서 도맡는 ‘선전예술’의 특색을 띄었다. 이들 무대의 특징으로 ‘객석이 환해야한다’는 조건이 있다. 관객들은 단지 설정된 내용에 대한 ‘리액션’의 역할을 할 뿐이었고, 무엇보다 환하니까 재미가 없고 감시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예능에서의 ‘객석 조명’을 없애는 역할을 내가 했고, 이후 무대조명의 역할도 커지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 중국 방송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확장성’과 ‘변형성’을 가진 무대, 관객 참여가 핵심”

Q. 다양한 곳에 두각을 나타내는데, 주로 매진했던 분야는?

특수효과 중 ‘장치’ 분야에 주로 매진했다. 하나의 간단한 장치를 통해 무대나 객석 전체의 흐름을 바꾸며 변화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해 ‘제이슨 므라즈’ 콘서트에서 우리가 사용했고, 최근 ‘2013 SBS 가요대상’에 사용하기도 했던 ‘LED팔찌’란 것이 있다. 연출자가 관람객의 팔찌에 들어오는 불빛을 무선으로 통제하여, 흰색, 노란색, 빨간색, 산란효과 등이 팔찌에서 나타날 때 마다 객석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바람잡이’가 없이도 관객들의 호응을 자연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연출자는 실감나는 연출을 할 수 있고, 객석을 참여시켜 무대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Q. 어떤 이벤트 사와 거래?

“특수효과 회사 치고 많은 32명의 직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특히 1997년 IMF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고정거래처가 더욱 필요했다. 하루에 KBS1, 2TV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8~9개 정도로 거의 다 한다. ‘기계장치’는 동남아시아 등 테마파크 위주로 거래하며 ‘4D극장’에 응용되기도 한다. 그러다 ‘특수영상’ 회사도 세우게 되었는데, 얼마 전 ‘AV마스터’의 이승철 대표가 유명을 달리하고 그 회사의 상황이 어려워졌었다. 그 소식을 듣고는 당시 ‘AV마스터’에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던 ‘캔 조명’의 김일수 대표에게 자본을 대고 함께 운영을 돕게 된 것이다. 회사명은 콸콸콸(QWLE X 3)로 변경할 예정. 이는 고 ‘백남준’ 작가가 포항제철을 상징할 수 있는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하게 된 작품명에서 따온 것으로 ‘Quality of Working Life’, 즉 ‘노동의 질을 인갑답게’ 라는 의미도 담았다. ‘일하는 게 꼭 노동이냐, 행복일 수도 있다’해서 그렇게 만들어가자, 연구를 해보자 한 것이다.

이벤트人의 자기규정 중요…‘아티잔(Artisan_장인)’, ‘해피메이커’

‘뇌이벤트’ 등 기술이 예술문화를 선도하는 그 날까지…

Q.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의미에서의 ‘무한 경쟁’을 했으면 한다. 원래 이벤트는 A부터 Z까지 모든 걸 다 하는 것이었다. ‘철밥통’보다 내 밥그릇이 내 밥그릇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더 넓은 시장을 만들기 위해 특수효과에 더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었으면 한다. 아울러 업계 사람끼리는 서로 신경써주자는 말을 하고 싶다.

아이디어는 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놓지 않고 싶다.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취업 공부를 했지만 지상파 방송사에서 안 받아주는 방송고 학생들이 있었는데, 우리 협회 회원사들에게 부탁을 해서 20명 정도 취업을 시킨 적도 있다. 이렇게 하드웨어 쪽은 연 20명 정도 채용이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일’ 자체를 좋아하며 미래를 보고 노력하는 편이다. 앞으로 ‘NEURO’, 즉 뇌기능을 이벤트에 접목시켜 ‘뇌이벤트’를 탄생시키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파워풀한 뇌신경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다이내믹한 뇌기능을 이용해 이벤트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벤쿠버 올림픽’ 때 이런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장애인들이 빨간공, 노란공, 파란공 등을 눈으로 보면 그들의 ‘뇌파’를 100만 배 증폭시킨 전기적 신호로 변환하여 나이아가라 폭포 경관조명 색깔이 바뀌는 식이었다. 내 친구 중에도 사지 못 움직이고 입만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있다.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여 장애인들이 직접 성화를 점화하는 등 그들도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고 싶다.

또 비슷한 것으로 ‘슬럿카(slot car)’라는 것이 개발되었다. 사람은 집중과 이완을 반복할 때 뇌가 활성화되는데 이것을 잘 할 수 있게끔 놀이처럼 훈련을 시켜주는 기계이다. 이 차는 ‘이완’을 해야 빨리 가고, ‘집중’을 해야 내릴 수 있다. 10분, 20분, 5분짜리 코스가 있는데 10분짜리는 1시간 수면 효과와 맞먹는다고 한다. 이러한 툴을 ‘뉴로 스카이(Neuro Sky)’에서 판매하는데 이 곳의 한국 판매 대리점인 ‘S&T 글로벌’에 내가 공동투자하여 대주주로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업의 조직원으로서 ‘이벤트’를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예술을 ‘보는 사람’이 만드는 시대이다. 많이 배워야 보이고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다. 이벤트 인들도 지켜봐주는 사람들에게 ‘문화유산’을 남겼으면 한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벤트 인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명칭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안성댁’, ‘망나니’ 등 누군가가 지은 정체모를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에서 ‘이미지 매니저’라는 독창적 호칭으로 자사의 직원들을 재창조한 것은 좋은 사례이다. 이벤트PD(Project Director)에서의 ‘디렉터’는 원래 영화용어인데, 개인적으로 이벤트 장인이라는 뜻의 ‘이벤트 아티잔(Artisan)’이란 말이 참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명확한 자기규정을 바탕으로 모든 이벤트 인들이 ‘해피메이커’로써 세상을 이끌었으면 한다.

[이 자료는 이벤트넷이 국내 이벤트업계의 관련 전문가를 소개하는 코너를 개설하여 전문가를 소개한 자료이다. 모든 매체는 출처를 밝히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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