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숙 홍보수석-‘비판과잉’에서 ‘비판+대안’으로
유명한 사회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실험 참가자의 눈을 가리고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느낌이 어떤지 말하라고 주문합니다. 실제로 물은 얼음물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물이 너무 차가워 손을 담글 수가 없다며 고통을 호소합니다. 실험자의 설명과 다르게 정말로 뜨거운 물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비슷한 실험이 또 있습니다. 같은 크기의 줄을 여러 개 놓고 실험참가자에게 모두 같은 크기이니 하나를 뽑으라고 말합니다. 이때 한 사람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장으로 실험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줄의 크기를 자로 재서 말하라고 하지요. 위장으로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10센티라고 소리칩니다. 실제 줄의 길이는 10센티가 아닙니다. 대부분 실험참가자는 위장참가자들의 기에 눌려 10센티라고 답합니다. 비록 자신의 줄이 10센티가 아니더라도 혼자서 다르게 답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인지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때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듣느냐에 따라 직접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크건 작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요즘 대부분 국가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뚜렷한 추세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하락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미디어라고 많은 연구자들은 진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디어의 영향을 측정한 유명한 실험연구가 있습니다. 먼저 실험 참가자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를 측정합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담은 방송을 보여줍니다. 다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측정합니다. 이 실험은 방법론적으로 매우 정교한 솔로몬 디자인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결론은 언론의 보도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상승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위의 실험은 언론이 정부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이런 결과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에서는 요즘 미디어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화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언론의 이런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하락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탐구과제입니다. 언론이 비판의 역할에 너무 충실하다보니 더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언론은 사회의 목탁 또는 소금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젓갈에 소금을 적당히 넣으면 맛있는 젓갈을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 소금이 순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언론의 비판은 정부가 옳은 길을 가도록 이끌기도 하지만, 자칫 비판의 과잉은 정부에 대한 과도한 불신을 불러와 국정의 효율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8월 26일 한 신문 1면 탑으로 ‘국정원, 여섯 차례 직접보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와대, 2월 이후 도청보고 받은 적 없다더니’라는 부제이지요. 이미 청와대와 저는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의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박한 바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취임 이후 한나라당에게 그렇게 인신공격을 당해도 박근혜 대표와 전여옥 대변인에게 좋은 덕담만 건네던 제가 나서서 강하게 반박을 했겠습니까?
몇몇 언론은 권 의원에 대한 비판은 없고 저에 대해서만 거친 말을 했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솔직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가 막히다, 어처구니 없다, 힘들다”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거친 용어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유 없이 때리는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한참 얻어맞다 왜 때리느냐고 소리치면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최소한의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불필요한 진실공방을 벌이면서 버리는 시간이 정말로 아깝습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자정이 될 때까지 일하고, 글 쓰고, 사람 만나고, 한 순간도 낭비하기 아까운 시간입니다.
잘못된 논란으로 정부의 의욕 꺾지는 말아야
청와대 참모나 공무원들이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보이면 많은 사람들은 원래 언론의 임무가 비판에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며 너그럽게 넘기라고 조언합니다. 8월 24일자 모 일간지 사설만 해도 “언론의 본질, 언론의 사명, 언론의 존재 이유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01년 미국의 언론인들이 오랜 토론과 인터뷰, 연구의 결과 펴낸 책이 있습니다. 코바치와 로젠셜(Bill Kovach and Tom Rosential)이 저술한 ‘최고 저널리즘을 위한 과제: 저널리즘의 요소’라는 책인데 여기에 저널리즘의 9원칙이 제시돼 있습니다.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소개해드립니다. 첫 원칙은 진실입니다. 이는 인터뷰 대상이었던 100%의 언론인이 공감한 원칙으로서 정보의 사실성이 언론의 생명이라는 겁니다. 둘째 언론인은 시민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다른 어떤 영향력 있는 기업인, 지도자, 광고주에 앞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확인의 원칙입니다. 언론은 소문이나 가십, 불명확한 기억, 정략적인 아젠다를 걸러주고 가능한 한 정확한 정보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권력을 감시하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라는 것입니다. 언론인은 독립적인 권력의 감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권력은 꼭 정치권력만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광고주나 언론의 소유주로부터 독립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섯째, 언론인은 양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도덕성을 세계적인 규준에 맞춰야 함을 의미하는데 즉, 정확하고, 공정하고, 균형된, 국민을 위한, 독립적 사고를 갖고 용기 있는 저널리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9원칙을 다 살펴보았지만 비판이 언론의 본질적 사명이라는 원칙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아마도 네 번째 ‘권력을 감시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도 무조건 권력을 비판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추구와 확인이 먼저입니다. 권력 감시에 있어서 방점은 언론사주로부터의 독립에 찍혀 있습니다.
언론의 본질이 비판이라는 주장은 독재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특수한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재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 용기를 필요로 했기에…. 이제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도 오래됐고 정부의 역할과 일하는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정부는 투명해졌고 과거 국가가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언론의 역할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니 저널리즘의 원칙에 있어서 최소한 우선순위라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언론은 사실보도에 앞서 여론선도를 주도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찬물인지 더운 물인지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미리 얼음물이라고 주입시켜서는 곤란합니다. 기사인지 주장인지 구분이 안가는 의견기사가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물론 사실보도의 경우에도 기자의 주관이 전혀 배제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도와 요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심도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부족’이 아니라 ‘비판과잉’이 문제
참여정부가 25일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각 언론이 발표한 참여정부 전반기에 대한 성적표는 가혹합니다. 학교에서 성적을 매길 때에도 객관적인 기준과 원칙이 있습니다. 하물며 정부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 객관적인 분석기준이나 지표가 아니라 여론조사결과만으로 보도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런 것을 개체적 오류(individualistic fallacy)라고 부릅니다. 주관적인 개개인의 평가를 모아 정부기관에 대한 객관적 평가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평가를 아무리 많이 모아 놓아도 그것은 어차피 주관적 평가에 불과할 뿐 객관적 평가를 대신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99명이 학을 검다고 하고 1명만이 학을 희다고 해서 검은학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국민의 여론이 참여정부 성과의 객관적 성적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의사소통 실패의 성적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물론 국민의 여론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여론만으로 정부를 평가해 보도한다면 언론의 존재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역량이 뛰어난 여론조사기관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겠지요.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언론이라면 발로 뛰어 취재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지표를 모으고 역대정부와 비교하는 체계적인 평가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고려해도 방법론적 문제를 고려해도 여론조사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은 책임 있는 언론으로서는 아무래도 직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부가 효과적으로 정책집행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부터의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투입이 국민의 신뢰라면, 산출은 정부의 성공적인 정책집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비판 부족이 아니라 비판과잉이 문제입니다. 정부는 열심히 일만 해도 부족합니다. 선진국에 비하면 인원이며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과잉은 정부의 효율성과 신뢰를 심각하게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구조에서는 밝은 대한민국의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정확한 기사, 생산적 비판 기대
언론의 정부비판을 용기 있다고 말할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비판언론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금전으로 회유할 권력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바야흐로 협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비판 자체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비판의 정확성과 수준, 그리고 생산성을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언론도 하나의 권력기관으로서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부적절한 공직자의 사퇴만을 촉구할 것이 아니라 오보를 사과하면서 과감히 은퇴를 선언한 댄 래더(Dan Rather)의 자세를 본받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저도 청와대 오기 전에는 비판을 업으로 삼았기에 남의 비판에 관대한 편입니다. 남도 저에 대해 애정 어린 비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많은 언론인들이 남을 비판하는 데에만 익숙해서 그런지 비판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매우 인색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제 우리 언론도 달라져야 합니다. 언론도 비판의 성역에 남을 수 없습니다. 남을 주로 비판하는 직업이기에 누구보다도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언론인은 자연히 남에 대해서도 애정을 갖고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역지사지를 해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 언론도 대안을 제시하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비판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지금도 잘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이 이런 자세로 나올 때 정부와 언론은 협력적 경쟁관계를 이루고 우리사회가 선진한국에 한 걸음 다가설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춘추관의 기자들을 존경하고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해외 순방을 함께 다니면서 그들의 직업의식과 전문가 정신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춘추관 언론인들이 아무리 새로운 언론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언론환경 전체가 변하지 않으면 언론인으로서 함께 불신을 당하게 됩니다. 먼저, 춘추관 언론인부터 나서서 한국 언론문화 개혁의 기수가 되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언론문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생각입니다. 청와대 기자들과 이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우리사회 전반적인 언론문화의 선진화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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