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작품 <계산>으로 등단한 이래, 50년간 치열하게 창작에만 몰두한 작가 박경리. 다큐멘터리 <박경리>는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기는 육성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살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화관.
일흔 아홉, 고령의 작가는 손수 키워 낸 고추를 앞마당에 늘어 말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20년 넘게 한결같이 지어온 고추농사다. 그는 취미가 아니라 농부로 농사를 한다. 그 일의 갈피갈피에서 글의 실마리를 풀어내왔다.
박경리 선생의 그늘아래 작가들의 일터로 사용되는 이 곳 토지문화관의 아침은 작가 박경리의 노동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매일아침 밭일, 고추기르는 이 노동 역시 집필의 연장이라 했다. 그밖에 작가의 얼굴을 내세우는 모든 일을 세속적이라 했다.
지금은 토지문학공원이 된 원주의 옛집에서부터 현재 토지문화관까지 원주생활 25년 동안 시내 한번 나간 적 없는 그였다. 세속적인 것과 고리를 끊고 지독한 고독 속에서 창작에만 몰두했다. 때론 원망도 샀고 시기도 받았지만 이런 치열한 작가정신이 아니었다면 600명이 넘는 생생한 등장인물이 지금처럼 올올이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 장편소설. 동학혁명에서 해방까지 험난했던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며 한반도와 중국, 일본,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 역사의 방대한 기록으로 남았다.
작가는 1945년 결혼으로 고향을 등졌다. 사위 김지하를 옥바라지하는 딸을 위해 서울에서 다시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하면서도 좀처럼 발길을 하지 못했던 고향 통영. 소설 속 간창골과 서문고개는 여전하지만 박경리의 흔적이라곤 그가 학교로 알고 다녔던 세병관 명정동 좁은 골목 나지막한 모퉁이집 뿐이었다. 잠시 머물렀던 이곳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세상과 고리를 끊으면서 고향조차 뒤돌아보지 않았던 선생. 그러나 역시 그는 통영의 딸이었다. 작가 박경리는 고향 통영을 위해 쉽지 않은 이 자리를 허락했다.
박경리선생은 우리 역사속의 ‘동학’에 대해 긴 얘기를 펼친다.
“토지를 어느 한 양반가의 몰락의 초점을 맞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동학세력의 흐름, 구한말에서부터 일제시대를 거치는 그 줄기를 더 강하게 맞추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죠. 동학은 하나의 이념으로서 완성도가 굉장히 높거든요. 이 이념 하에 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인데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기록할만한 일이에요. 세계사라는 게, 소위 쿠데타는 많지만 이념에 의한 혁명이라는 것은 파리의 아니 불란서혁명, 그 다음에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이 있지만 그건 좀 황당한 데가 있어요. 왜냐면 완성이 못된 느낌이 있고 그렇게 보면 동학혁명이에요. 그 다음에는 러시아혁명이거든요. 그거를 볼 때 우리가 동학을 새로운 눈으로 봐야하고, 또 동학이 천상을 지상으로 삼는 게 아니고 지상의 이익이거든요. 이게 무슨 종교적인 색채보다는 오히려, 지상의 얘기고 하니깐 이것을 볼 때 우리 나라 민족이 상당히 사색적이면서 진실에 대한 현실주의적 추구, 이런 것이 치열한 민족이라는 겁니다.“
어린시절, 책이라는 것에 대한 흡입력이 누구보다 남달라서 배고파서 밥을 먹는 이상의 힘을 독서에서 느꼈다는 작가는 서점에서 쫓겨날 때까지 붙어서서 책을 읽던 시절을 회고했다. 여학교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어 엄살을 피우고 그 책을 결석해가면서 봤던 일, 단 하루만 빌린 책들을 다 보려고, 밤을 꼬박세워 읽어내려가던 시절을 얘기하면서 독서량이 지금의 내 모든 기초라고 말한다.
한국을 대표해 세계에 알리고 싶은 문인 1순위로 꼽히는 작가 박경리. 한국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키우며 살던 선생은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작품 <계산>을 발표, 등단했다, 62년 <김약국의 딸들> 64년엔 <시장과 전장> 등 발표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69년엔 드디어 토지 1부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인생은 자신의 표현대로 빙벽에 걸린 자일, 주술에 걸린 죄인이 되어 버렸다. 25년의 자기차단 속에서 1994년 8월 15일 삼만 장이 넘는 원고지로 토지 전 5부가 끝났다, 그리고 폭풍이 몰고 간 그 세월을 작가는 끔찍스러워 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하나의 작가가 염두해 두었던 하나의 주제를 4반세기에 걸쳐서 작가적인 생애의 반을 하나의 작품에 매달려서 끈질기게 그 작품의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것은 우리 문단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세계 문단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한다.
‘토지’로 한창 그 인기의 절정에 있을 때, 세상하고 문을 닫았던 박경리는 영광과 절정에 오를수록 완전히 세상과 스스로 고리를 끊었다. 수많은 언론이나 행사 등 그를 부르는 끊임없는 요청에도 불구,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한번은 방송사의 집요한 섭외요청에 질려서 “내가 시민으로서 세금을 안냈는냐, 대한민국은 안 할 자유도 있다. 당신네들 오라는데 다 가고 모이는데 다 가고 그래했다면 어떻게 내가 <토지>를 썼겠느냐”며 고함을 쳤다. 작가는 ‘그래야 내가 작품에 몰두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말로 그때를 설명했다.
“그러니깐 그분들이 처음으로 깨달은 것 같아요. 그 말 한마디에 딱 그냥 지워버렸어요. 그처럼 지가 25년이란 세월은 완전히 스스로 끊고 살은거지요.”
문학의 비중이 점차 사라져 가는 이 시대에 문학에 대해 한마디를 요구하자 이렇게 말한다.
“시작서부터 돈을 벌고 명예도 얻고 이런다면 문학이 안 되지요. 뭔가 내부에서 절실하게 소망하는 것, 거기서 출발하고 왜 사는가? 삶 자체를 규명하고, 말하자면 탐구하는 그런 정신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고 생산되는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결국 오락기구지요.”
토지는 1897년 경남 하동의 한가위에서 시작해, 간도, 일본을 거쳐 8.15 해방까지 이어졌다.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로 마침표를 찍은 소설. 작가 박경리는 한국문학사, 아니 세계문학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아리랑국제방송 다큐멘터리 <박경리> 3부작
10월 5,12,19일(수) 오후 10:30(재방송 - 목요일 오후 3:00)
웹사이트: http://www.arirang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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