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와이어)--2005년 상반기 글로벌 IT업계 빅 뉴스 중하나는 미국계 IT 기업의 실적 호전이었다. 모토로라는 지난 2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41% 급증한3,390만대의 휴대폰을 판매하였다. 시장 점유율도 전년 동기 대비 3.3%, 1분기 대비 1.7% 증가한18.1%을 기록하며 한때 삼성에게 위협받던 2위자리를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델 컴퓨터 역시 지난 2분기 23.7%의 출하량성장률을 보이며 전세계 PC 출하량 증가율16.6%를 크게 상회하였다.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15%, 순익은 28% 증가하며 PC업계의 1인자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이들 두 기업의 공통점은 저가 시장에서의성과를 바탕으로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모토로라의 성장은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등 신흥시장에서의 저가폰 판매 호조가 결정적인 역할을하였고, 델 컴퓨터도 아시아 지역에서 자사 성장률을 크게 웃도는 50%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하며 고성장을 이어갔다.

노동력이나 토지 등 생산요소 측면에서는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선진 기업이 저가 시장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세계 IT 생산의 중심, 대만 기업

실제로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미국및 유럽의 IT 기업들은 원가 경쟁력의 한계로 자국의 공장을 매각하고 R&D와 판매에 집중하는형태로 사업 모델을 변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값싼 노동력을 무기삼아 생산 전문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바로 대만 기업들이다. 지금도 많은 대만 기업들이 서구 기업의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방식)업체로 글로벌 IT 제품 생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 결과, 대만은 전세계 IT 제품의 최대 생산지로 자리 잡았다. 비즈니스위크 誌에 의하면 전세계 노트PC의 72%, PDA의 79%, LCD모니터의68%가 대만 기업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디지털 카메라, 서버, 케이블 모뎀 등도 30% 이상이 대만 및 대만 기업의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미국의 한 IT 대기업의 CEO가“대만 기업 이외의 IT 생산업체를찾는 것은 중동 오일을 대체할 오일 생산지를 찾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것은 전세계 IT 산업의대만 의존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단순 조립 아웃소싱은 오히려 성과 악화

그러나 대만 IT 기업과 서구 기업과의 만남이 처음부터 성과를 낸 것은 아니었다. 단순 제조만을아웃소싱하던 시절, 서구 기업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휴대폰 생산의 70% 이상을 아웃소싱하고 있는 모토로라와 소니-에릭슨도 아웃소싱 초기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시장점유율과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였다. 오히려 개발부터 생산까지 일관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는한국 휴대폰 기업들이 첨단 제품을앞서 출시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넓혀 나갔다.

휴대폰 산업은 제품 수명주기가 짧고 당시에는 프리미엄 시장이산업 성장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신제품 조기 출시는 기업의 성과와직결되었다. 신기술과 디자인이 적용된 휴대폰을 먼저 출시한 업체는 높은 판매 가격으로 수익을 올리면서 고급 이미지를 구축할수 있었던 반면, 경쟁사보다 늦게 신제품을 출시한 업체는 가격 하락과 재고 증가의 부담을 떠안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조와 개발을 분리하는아웃소싱은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아웃소싱을 통해 제품 원가는 떨어뜨렸지만, 이과정에서 개발 부문과 아웃소싱 생산 업체간에불협화음이 생기면서 제품 출시 시기가 늦어져판매가격이 급속히 떨어지고 오히려 이익률과시장 지배력이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선진 기업 브랜드 + 대만 기업 제조

그런데 최근 들어 대만 IT 기업과 서구 브랜드가연합한 비즈니스 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이후 모토로라와 소니-에릭슨은ODM(제조업자개발 생산방식) 비중이 늘어나면서 성과도 개선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 제조 아웃소싱의 약점을 경험한 서구 기업은 대만 기업에게제품 컨셉 개발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을 일임하면서 개발비 부문에서 상당한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선진 기업 내부 개발진의 긴장도도 높아져 신제품의 적기 출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대만 업체에게 전 과정을 일임하다보니 개발과 생산간의 불협화음도 줄어들게되었다. 중동, 아프리카, 인도 등 신흥 저가 시장이 성장하면서 대만 ODM업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모토로라는 이들 시장의 주력 상품인 저가 휴대폰은 개발단계부터 아웃소싱을 적극활용하였는데, 그 대부분을 콤팔(Compal) 등 대만 업체가 주도하고 있다. 반면 프리미엄폰인 레이저(RAZR)는 개발부터생산까지 철저히 내부화하였다. 그결과, 개발 비용과 생산 복잡성은 줄이면서도 고객에게 제공하는 제품라인업은 강화해 양극화된 시장에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구조를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듯 대만 기업이 과거의 단순 제조 아웃소싱에서 벗어나 서구 기업 개발 혁신의 소스로 빠르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2~3년전까지만 해도 제품 개발과 디자인은 서구 기업들이 주도하고 대만 기업은 제품 조립만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대만기업의 제품을 가져다 브랜드만 붙여서 판매하는형태로 사업 모델이 진화하고 있다. 이는 마치 서구 기업이 대만 기업에게‘생산’아웃소싱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대만 기업이 서구 기업의‘브랜드’를 아웃소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혁신의 배경은 우수 R&D 인력의 공급

대만 기업이 개발 역량까지 확보하여서구 IT 기업의 최적의 파트너로 성장한 배경으로는 저렴한 우수 R&D인력의 공급을 들 수 있다. 대만 기업의 엔지니어 연봉은 미국 엔지니어에비해 3분의 1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미국이나 한국, 일본의 엔지니어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타이페이에서 남쪽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는 아시아의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신주과학공업원구(新竹科學工業園區, 이하 신주)가 위치하고 있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모방하여 80년대부터 조성된 신주는 대만 반도체 매출의 80%를 올리고 있고, 정부 주도로 성공한 대표적인 첨단산업단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이 신주에는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ndustrial TechnologyResearch Institute, 이하 ITRI)이자리잡고 있다. ITRI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탠포드 대학에 비유되면서 대만 산학연계의 핵심으로 평가받는 국책 연구기관이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로 성장한 TSMC(Taiwan SemiconductorManufacturing Co.)와 UMC(UnitedMicroelectronics Co.)도 ITRI의 사내 벤처에서시작하였다. ITRI의 강점은 기초 과학보다는 응용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기업이 바로활용할 수 있는 인력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MIT, Berkley,Carnegie Melon 대학의 과학자들과 제휴를 맺는 등 대만 R&D 인력의 핵심 공급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대만 기업, 브랜드 사업까지 강화 중

최근 대만 기업들은 브랜드 사업으로도 그 영역을 점차 확대하며 사업 모델의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조립기지에서 출발하여 R&D 역량 확보, 자체브랜드 사업 확대로 이어지는 대만 기업의 발전 과정은 마치 한국 IT 대기업 성장사의복제본을 보는 듯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가장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벤큐를 들 수 있다. 대만 최대 휴대폰 기업인 벤큐는 지난 6월 세계적인 휴대폰 업체인 지멘스의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인수하였고, 내년 1분기 벤큐-지멘스의 공동 브랜드 휴대폰 출시를 앞두고 있다. 벤큐의CEO인 리건야오 회장은 OEM 사업만으로는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판단하고 자체 브랜드사업 강화를 천명하고 있다.

대만의 대표적인 PC 제조업체인 에이서 역시 꾸준히 브랜드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지난해 처음 도시바(Toshiba)를 밀어내고세계 5대 PC 메이커로 부상한 에이서는 지난 2분기에는 시장 점유율 4.4%로 세계 4위 업체로 부상하며 자본 시장으로부터“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PC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기도하였다. 최근에는 미국 LCD TV시장에 진출을 선언하는 등 에이서 역시 브랜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자인 역량과 스피드도 수준급

현재의 성과만으로는 대만 기업의 글로벌 메이저 브랜드 도약 가능성을 단언하기는 어렵다. 대만기업의 브랜드 사업에 대해선 아직까지 부정적인 견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응용 기술 및 디자인 능력은 뛰어나지만, 원천 기술이 부족하고 현재 브랜드 사업의 성과도 대부분 중국 및 대만시장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벤큐의 지멘스휴대폰 사업부문 인수에 대해서도 조속한 시일내에 수익성 확보에 실패할 경우,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러나 한국 IT 기업의 성장 과정을 돌이켜보면 대만 기업이 글로벌 업체로 도약할 가능성을 무시하기만은 어렵다. 한국 기업들도 처음에는 글로벌 업체의 생산 기지로 출발하여 자체적으로 R&D 역량을 쌓으며 도약을 준비하다 휴대폰을 비롯한 IT 산업의 부흥기에 과감한 마케팅 투자로 급격히 성장하였다. 대만 기업들도 생산과 디자인경험은 이미 충분히 쌓았고 마케팅및 고객 대응과 같은 소프트 역량들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실제로 벤큐는 지난 1월 세계최대의 가전 박람회인 CES 2005에서 4개의 혁신 제품상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세계적인 가전 디자인 어워드인 2004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10개, Red Dot 디자인 어워드에서 6개의 디자인 상을 수상하는 등 디자인 능력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기업이라고 할수 있다.

대만 기업의 기업 고객 대응 속도도 상당한수준이다. 장기간 ODM 및 OEM 업체로 성장한대만 기업들은 고객의 요구에 가장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질을 갖추고 있다. 2004년 인텔(Intel)은 무선 인터넷용 센트리노(Centrino) 칩을 개발한 후, 자사의 칩을 탑재한 노트북을 가장먼저 만들 수 있는 업체로 대만 업체인 에이서를선정하였다. 3개월이 지난 뒤 에이서는 고가 노트북뿐 아니라 중저가 라인업 노트북까지 생산해냈다. 신기술을 제품화하는데 걸린 시간이 단3개월인 것이다.

이런 신속한 기업 고객 대응 능력은 휴대폰시장에서 그 활용 가능성이 높다. 한국 휴대폰 기업들이 대형 통신 사업자들과 밀착하여 사업자요구에 맞춘 제품을 적기에 출시하며 성장해 왔듯이 대만의 휴대폰 기업들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디자인 및 생산 경험이 풍부한 중저가 휴대폰 시장은 대만 기업의 주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근본적인 경쟁우위 확보로 추격을 뿌리쳐야

최근 대만 IT 기업의 행보는 한국 기업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이다. 먼저 대만 기업들이 서구 기업의 R&D 소스 역할을 하면서 글로벌 IT 기업의 경쟁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들도 대만 기업들을 활용해 적극적인 아웃소싱을추진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섣부른 아웃소싱은 경계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아웃소싱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늘리면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한 원천 기술우위와 브랜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부족한 한국 기업이 개발과 생산을분리할 경우, 기존의 강점이라 여겨지고 있는 프리미엄 제품의 선출시 능력이 현저히 저하될 위험이 높다. 양극화된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아웃소싱을 고려하더라도, 아웃소싱을 통해실제로 어디에서 돈이 아껴지는지, 기존 강점을훼손시키지는 않는지, 고객은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 들일지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대만 기업의 브랜드 사업 강화에 대해선 철저한 차별화로 추격을 뿌리쳐야 한다. 대만 기업들이 메이저 브랜드 업체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만큼은 한국이 또 다른 강한 경쟁자를 만난 것이 분명하다. 우리 기업들도 기존의 강점만을 고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비록 어렵고힘이 들더라도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 주도적기업이 될 수 있는 지속적 혁신이 필요하다.

LG경제연구원 형민우 전자통신전략그룹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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