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이 의장에 취임한 지 70일째 되는 10월 19일 월요일( ‘Black Monday’) 다우지수가 22.6% 폭락했다. 대공황으로 이어진 1929년 10월 29일‘검은 화요일(Black Tuesday)’당시 주가 하락 폭 11.7%의2배 가량 되는 낙폭이다. 그린스펀은 다음날 증시 개장직전 단 한 줄짜리 성명서를 발표했다. ‘FRB는 유동성을 공급해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을 지원할 만반의 태세를갖추고 있습니다.’주가는 사상 최대의 폭등세(102포인트)로 화답했다. 그린스펀 효과는 이처럼 잇따른 시련속에서 더욱 강력해졌다.
18년간 크고 작은 위기 상황을 절묘하게 타개해 온‘통화정책의 마에스트로(거장)’, 그린스펀이 내년 1월 은퇴한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요즘 그린스펀의 공과(功過)논란이 뜨겁다. 후임자에 대한 하마평도 분분하다. 하지만 그린스펀의 공백이 커다란 불확실성 요인이라는 점에서 진단이 일치한다. 미국 경제에 부동산 거품, 쌍둥이 적자 등 불안 요인이 중첩돼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은퇴타이밍도 좋지 못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전설의 10년’, 1990년대 미국 경제
그린스펀이 FRB 의장으로 일한 1990년대의 미국 경제는 1960년대(실제로는 1960~1973년)의‘팍스 아메리카나’에 버금가는 안정 속의 풍요를 누렸다. 연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9%로 1970년대(5.1%)나 1980년대(7.4%)보다 크게 낮았다. 실업률은 연평균 5.8%로‘자연실업률은6%’라는 당대의 상식을 깨뜨렸다. 경제성장률도 3.2%로 당시‘인플레이션 없이 성장할 수 있는성장률 한계’추정치인 2.5%를 훨씬 상회했다.
물가와 고용 간 관계는 1960년대보다도 좋았다. 1960년대에는 케인즈 경제학의 도그마처럼 물가가 상승하면 실업률이 떨어지고, 물가를 잡으면 실업이 증가하는 역상관(trade off)관계가 뚜렷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겪고 소비자들의 기대심리가 강력한 경제 변수로 등장한 1970, 1980년대에는 물가와 실업률이 동반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물가와 실업률은동시에 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행운아인가, 거장인가?
1990년대 미국 경제가 놀라운 성과를 낸 요인은 무엇인가? 호의적인 경제여건의 도움이 컸다. 1984년 이후 미국 경제의 변동성은 이전 20년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첫째, 1980년대 이후 불황 때마다 대대적으로 이뤄진 인원 감축에 충격을 받은 미국 근로자들이 호황기에일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임금 인상 요구 수준을 낮췄다. 둘째, 1995~1998년 세계 경제의 둔화와 달러화의급격한 평가절상 덕택에 수입 물가가 급락했다. 원유 가격도 미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기준으로 1996년배럴당 25~30달러에서 1999년 초 15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셋째, 1990년대 후반 컴퓨터 및 정보통신 기술의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생산성이 크게 상승했다. 근로자들이 생산성 증가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바람에 생산성 증가분은 이윤과 자본수익으로 고스란히 흡수됐다. 그린스펀은 시운을 타고난 행운아였다.
하지만 행운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겐 찾아오지않는다. 그린스펀은 백악관과 FRB는 물론 당대 경제학계 인사 가운데 공식 거시통계에서 확인되지 않는 미국경제의 체질 변화, 즉 미국 경제가 생산성이 상승하는동시에 실질임금과 물가가 동시에 하락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을 가장 먼저 포착했다. 이런 확신은1996~1999년 비개입(Forbearance) 정책으로 나타났다. 실업률이 5.5%에서 4.1%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추정치를 훌쩍 뛰어넘어 평균4.5%에 이르렀는데도 FRB 안팎의 금리인상 요구를 무시하고 참고 기다린 것. 20여 년의 실물경제 경험에 바탕한 예리한 분석력과 강력한 추진력은 갖가지 위기에대응하는 과정에서 여지 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취임 2개월 만에 블랙 먼데이를 겪은 그린스펀은 2년 여 뒤 대공황 이래 가장 심각한 금융공황(저축대부조합 대량파산)에 직면했다. 미국 경제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에는1994년 멕시코, 1997년 동아시아, 1998년 러시아, 2002년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어진 이머징마켓의 연쇄적인 통화위기와 씨름해야 했다. 행운 만으로는‘전설의 10년’을설명하기 힘들다.
그린스펀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 그린스펀은 재량과 임기응변의 달인이었다. ‘자연실업률은 6%’라는 당대의 완고한 경제상식을 간단히 무시했을 뿐더러 경제학적 모델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순진한 믿음도 버렸다. 대신 수많은 데이터를 파고들어 현장경제 흐름의 미묘한 변화를 시시각각 점검했다.
둘째,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최적의 정책 해법’에 연연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위기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1998년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 파산 위기 때 14개금융회사들에 압력을 행사해 36억달러의구제금융을 이끌어낸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확률이 낮더라도 거대 헤지펀드의파산이 대규모 금융위기로 번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노골적 시장개입’이라는비싼 대가를 감수한 것이다.
셋째, 연방 기금금리를 지렛대로 해서 물가를 안정시키는 통화정책의 전형을 완성했다. 특히 인플레이션기대 심리가 물가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점을 깨닫고 이를 다스리기 위해 부심했다.
넷째, 다른 중앙은행장들과는 달리 물가안정 이외에완전고용에도 높은 비중을 뒀다. 그린스펀 취임 이전 18년 동안 미국에는 4번의 공황이 발생했다. 그 중 2번은대공황기 이후 가장 심각한 공황이었다. 그린스펀 임기18년 동안에는 2번의 온건한 불황이 있었다 .
다섯째, 유럽중앙은행(ECB)와는 달리 일반물가보다 식료품이나 에너지 가격을 제외하고 산출한 근원물가를 금리정책의 타깃으로 삼았다. 특히 유가 급등은 대부분 일시적인 충격에 그친다고 보고 직접적 정책 대응을 삼갔다.
그린스펀의 유산
그린스펀의 은퇴는 단기적으로 볼커→그린스펀 교체 때와 비슷한 금융불안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중장기적으로 그린스펀의 공백이 얼마나 빨리 메워질것인지’이다. 이는 후임자의 능력과 운에 달려 있다.
먼저, 운. 가장 힘겨운 유산은 버블이다. 그린스펀은 1998년 LTCM 위기, 2001년 불황 및 9.11 테러 사건,2003년 디플레이션 위기 등 굵직한 위기 때마다 엄청난돈을 풀었다. 그 결과 지금 미국에서는‘그린스펀 풋 옵션(Greenspan Put)’현상이 만연해 있다. 투자자들이‘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그린스펀이 다 해결해 줄것’이라고 믿고 무모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것.
일례로 1995년 말 2000억달러였던 헤지펀드 위탁금은 2005년 초 1조달러로 늘었다. 부실기업 채권에도‘묻지마 투자’가 횡행해 부실채권과 미국 재무부 증권의 금리 스프레드는 1997년 동아시아 위기 직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동산시장이 특히 큰 문제다. 미국 주택 가격은 그린스펀 취임 이후 올 2월까지 132% 올랐다. 지난해 주택 매입자의 주택 매입 동기는 23%가‘투자’, 13%는‘두 번째 주택 마련’이었다.
그린스펀은 줄곧 자산시장 버블은 FRB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최근‘부동산 버블이 머지않아 꺼질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했다. 실제로 붕괴 조짐이 보인다는 진단도 나오기 시작했다. 8월 주택 가격 상승률은 15.8%로 1979년 7월 이후 가장 높았으며 기존주택 판매량은 729만 가구로 7월(735만 가구)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많았다. 일부경제학자들은“주택 매물량이 정점을 찍고 대략 1년 뒤불황이 찾아오곤 했다”고 주장한다. 이르면 내년 봄, 늦어도 내년 중 부동산 거품이 터질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스펀 후임자는 누구?
벤 버난케, 마틴 펠트스타인, 글렌 허바드 등 3명의 전현직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있다. 현 FRB 이사인 도날드 콘(Donald Kohn), 로저 퍼거슨(Roger Ferguson) 등도 거론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인터넷 모의투표에서는 9월 25일 현재 버난케가 30%의 득표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어 펠드스타인 27%, 퍼거슨 21%, 허바드 12%, 콘 10% 순이다.
이들은‘가급적 시장 간섭을 삼가야 한다’는 보수주의적 경제철학을 갖고 있다. 하지만 보험회사 AIG의이사로 등록돼 있는 펠드스타인을 제외하고는 실물 경제 경험이 거의 없다. 그린스펀이 시장에서 경제를 익혔다면 이들은 대학에서 경제를 배웠다고 하겠다.
그린스펀 이후의 미국 금리정책
후임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그린스펀이 떠난 FRB가시장의 신뢰를 얻기 전까지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 같다. 금리정책의 성격과 FRB 의사결정 시스템도 달라질 전망이다.
첫째, 재량적인 미세조정 기능이 상당히 약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력한 후보인 버난케는 금리정책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 제고를 명분으로 인플레이션 목표수준을 공표하는‘인플레이션 타게팅’을 적극 지지한다.
둘째, 의사결정에서 의장의 판단보다 위원들의 합의가 중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린스펀 시기 FRB는‘그린스펀의 원맨쇼 무대’였다. 1998~2004년 멤버가 17명인 FOMC회의가 60번 열렸다. 그린스펀은 투표에서 단한번도 지지 않았으며 반대표는 전부 합쳐 14표에 불과했다. 합의와 준칙에 따른 의사결정은 극단적인 결정을피할 수 있지만 순발력 있는 대응에는 약하다. 그린스펀이후 FRB의 정책 성과는 그린스펀 시기보다 더 많이 운(거시경제 여건)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그린스펀 이후 미 금리정책과 한국 경제
차기 FRB의장에 대한 미국 금융시장의 반응은 그대로한국 주식시장에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자칫 상당기간미국 증시를 좇아 급등락할 가능성도 있다.
차기 FRB 의장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일단락된 뒤에는 금리격차를 촉매로 한 영향이 우세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리격차(한국 금리-미국 금리)가 커지면 미국인들의 투자자금 회수와 내국인들의 해외 자산 투자 증가로 인해 자본수지가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미간 기준금리가 이미 역전돼 자본유출 문제는‘발등의 불’이다. 양국 기준금리는 8월 처음 역전됐으며9월 미국의 0.25% 금리 인상에 따라 격차가 0.5% 포인트로 더 벌어졌다. FRB는‘미국 경제가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되고 있다’는 판단 하에 선제적 금리 인상을 당분간 계속할 전망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금리 인상에 대한 찬반론이 팽팽히 맞서 있다. 적어도 올해 중 금리 격차가 줄어들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그린스펀 이후에도 FRB는 사실상‘세계의 중앙은행’역할을 해야 한다. 사상 최대 수준의 쌍둥이 적자로 드러나는 세계경제 불균형의 진원지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FRB의 정책은 앞으로도 한국 경제의 명운에두고두고 큰 영향을 주는 변수라고 하겠다.
<그린스펀이 중앙은행장들에게 주는 10가지 교훈>
1.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경제 모델에 의존하지 말라.
2. 유연하게 생각하라. 통화주의니 케인지주의 하는 독트린에 갇히지 말라. ‘자연실업률은 6%’하는 식의 철칙까지 버려라.
3. 금리를 0.5%p 올린 뒤 다시 0.25%p 내리는 식의 우를 범하지말라. 점진적으로 움직여라.
4. 경제예측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 지금 경제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중 어느 것이 일시적이고 어떤 것이 지속되는 것인지 파악하라.
5. 현실에서 최적화(optimization)는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리스크 관리다.
6. 물가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황을 막아야 한다. 불황은 사회 전체에 엄청난 고통을초래하기 때문이다.
7. 대부분의 오일 쇼크는 불황을 야기하지 않는다. 유가 급등에 긴축으로 대응하는 경우 불황을 피하기 어렵다.
8. 거품을 터뜨리려고 하지 마라. 시장의 자기조절 메카니즘에 따라 거품이 터질 때 뒷정리(mopping-up)나 잘 하라.
9. 단기 실질이자율을 화폐정책의 기본 지표로 삼아라.
10. 통화정책으로 모든 것을 달성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목표는 높게 가져라.
Alan S. Blinder and Ricardo Reis, “Understanding the Greenspan Standard”pp.82-86 재정리
LG경제연구원 이철용 정책분석그룹 부연구위원
웹사이트: http://www.lge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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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용 부연구위원 3777-0422 이철용 정책분석그룹 부연구위원 이메일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