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동북아시대비서관
동북아는 오랜 세월, 제국주의와 냉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대립과 불신, 갈등의 지역질서 속에서 고통받아 왔으며, 지금도 북핵문제, 영토분쟁, 배타적 민족주의, 역내국가 간 산업 및 교역구조의 경합구도 심화 등 많은 도전 요인들에 당면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동북아의 공통현안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협력의 틀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통합은, 평화와 공동번영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동북아에서 협력적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참여정부의 정책구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은 2차대전 이전의 불신과 대결의 질서를 극복하고, 지금 화해와 통합 및 공동번영의 질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유럽통합 과정을 살펴본다.
전쟁의 기억에서 공동번영의 토대 구축한 유럽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평화의 갈망과 전쟁 이후의 경제재건, 공동번영을 위한 지역협력의 필요성은 유럽통합 추진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이후 유럽은 개별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에서 점진적으로 통합논의를 발전시켜 1993년 유럽연합을 출범시키고, 2002년 단일통화(EURO) 체제를 완성하였으며, 2004년 10월 유럽헌법조약을 채택해 현재 회원국별 비준 절차를 진행 중이다.
유럽통합 과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온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먼저, 유럽각국은 유럽통합 과정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선명한 통합이념과 비전 및 철학을 공유하였다. 평화를 추구하고, 민주주의, 인권, 법치 존중의 이념가치를 공유하였다.
둘째, 유럽통합은 부문통합에서 출발, 점차 심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경제의 특정부분 ECSC(유럽석탄철강공동체, 1952)에서 시작, 경제 전 분야의 EEC(유럽경제공동체 1957), 비정치적 전 분야의 EC(유럽공동체, 1967), 정치안보, 사회문화 분야가 포함된 모든 분야의 통합인 EU(유럽연합, 1993) 등으로 통합이 점진적으로 확산·발전하여 왔다.
셋째, 개별국가의 이익과 합치되는 협력과 통합과정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독일의 전쟁능력 봉쇄 및 자국 기간산업의 안정적 발전의 기회로, 독일은 전범국가로서의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 독일통일의 역내외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기회로, 유럽소국은 유럽통합을 시장확대와 무역 증진의 호기로 인식하였다.
넷째, 유럽통합과정에서 특정국가, 프랑스와 독일의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는 빈번한 유럽 전쟁의 가장 큰 피해국가로 1920년대부터 유럽통합을 항구적 평화정착의 유일한 방안으로 인식해 왔으며, 2차대전 이후 적극적으로 통합방안을 마련, 제시하였다. 독일은 2차대전 직후 프랑스 주도의 유럽통합 움직임을 국제사회 복귀 기회로 인식, 적극 참여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역사교과서협의회 운영(1950-1967년), 1970년 빌리 브란트의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에서의 사죄 등 유럽통합의 걸림돌이 될 과거사 청산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통합과정에서 양국은 쌍두마차 역할을 하였으며, 1982년부터 1992년 사이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콜 서독 수상이 만난 횟수는 무려 115회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정치지도자들이 사회지도층과 일반국민들을 대상으로 통합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유럽통합 구상을 담은 1950년 ‘슈망(프랑스 외무장관) 플랜’, 독일통일 가능성을 유럽통합에서 도출한 ‘아데나워(독일초대 수상) 구상’, 유럽통합 추진전략을 제시한 ‘들로르(EC집행위원장) 보고서’ 등이 그 예라고 하겠다.
유럽에서 구축한 새로운 질서는 동북아에서도 가능
이와 같은 유럽통합 과정은 ‘신뢰, 호혜, 상생의 동북아공동체’ 형성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가시적 성과를 보일 수 있는 실현가능 분야부터 순차적으로 접근하되, 역내 국가들의 이익에 부합되면서 평화조성에 기여할 협력사업을 우선적으로 발굴,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동북아 에너지협력, 동북아 개발금융, 남북·대륙철도 연결 등이 구체적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동북아공동체 형성의 비전과 철학에 대한 역내 국가 간 이념가치의 공유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공동체 협의기구의 출범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유럽통합과정에서 독일이 보여준 헌신적 노력은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북아 경제협력 거점개발, 에너지, 철도, 농업, 환경 등 협력사업에 북한의 참여를 유도해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하고, 동북아공동체 형성을 위한 노력을 통해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남북통일의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근 6자회담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동북아 경제 및 다자 안보협력 체제의 틀을 구축하는 데 있어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는 국정목표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동북아의 불안정한 질서를 극복하고 평화와 공동번영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 안보불안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우리의 미래 생존전략이다.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는 중장기적으로 동북아구상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동북아공동체 형성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교역할, 비전 제시자의 역할이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공동체 건설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장애요소도 적지 않지만, 이는 민주주의, 평화, 공동번영 등에 기초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본다. 중장기적 시각에서 동북아공동체 실현을 위한 분야별 구체적 전략을 마련하는 한편, 동북아공동체 형성에 대한 대내외적 공감대를 확산하는 노력은 어느 나라보다 대한민국이 앞장서 주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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