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와이어)--전세계적으로 도시의 위기라고 일컫는 요즈음, 청계천 복원은 도심 한복판에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시작했다는 점과 유서깊은 문화재의 발굴과 복원이라는 점에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리랑TV에서는 청계천 복원 준공식에 즈음하여 2년 3개월에 이르는 청계천 복원 전 과정을 밀착 취재함으로써 청계천의 역사와 미래, 그리고 인간과 자연, 도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청계천 복원의 첫 삽을 떴을 때 전세계 언론에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하천의 복원은 다른 여러나라들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속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유서깊은 문화재가 발굴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적관계에 있던 계비 신원왕후의 무덤에 세워져 있던 신장석을 광통교의 부재로 사용했던 태종과 청계천 준천을 결심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많은 백성들의 그 의향을 물었던 영조의 위민사상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고문헌과 고지도 등을 통해 소개한다.

청계천 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던 박경리 선생을 비롯한 교통, 환경, 물, 전통도시관, 생태학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청계천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아울러 해외 사례와 비교해서 우리나라 전통 도시관과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짚어봄으로써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와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조선사람을 열등한 민족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일부러 청계천변을 방치하던 일제는, 청계천을 만주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7년,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청계천을 덮고 그 위에 도로를 깔았다.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운송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청계천을 전면적으로 다 복개한다는 계획은 실현할 기회가 없어졌다. 해방 후에 그대로 답습하여 조금씩 복개가 되다가 경제개발시대인 박정희시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청계천 전부가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놓였다. 그 시대는 경제를 중요시하던 시대여서 그 시대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다.

개발이 최우선 과제로 여겨지던 시대에 이뤄진 청계천의 복개는 물만 덮은 것이 아니었다.

600여년 동안 조선을 통치하면서 ‘덕치’로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고자 했던 조선 왕조의 꿈과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살아왔던 사람들의 다양한 풍습과 훈훈한 정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지게 한 것이었다.

2003년 7월 1일. 고도성장의 상징물이었던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면서 수십년 지하 깊숙히 묻혀있던 청계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엔 생명이 살고 있었다. 수십년간 빛이 통하지 않고 인간이 내버린 오물과 폐수더미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단체에 의해 발의된 청계천 복원운동은 2002년 서울시가 본격적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루 11만대에 달하는 교통부하지역인 청계천의 교통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공사가 진행될 경우 청계천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상인들의 생계를 어떻게 책임지느냐였다.

수십년간 딱딱한 콘크리트로 덮여있던 청계천을 생태하천으로 되돌리기 위해 첫 삽을 떴을 때 그 속에서 다량의 문화재들이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수십년간 오물과 폐수 그리고 무거운 콘크리트 하중을 견디고 오롯이 살아남은 문화재의 위대한 생명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 귀중한 문화재들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고 복원하느냐를 놓고 서울시 당국과 문화재 관련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청계천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신발에서부터 도자기, 엽전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그 연대도 다양했다.

아리랑TV 청계천복원 특집 다큐멘터리

부제 : A Close-up of Cheonggyecheon
10월 9일(일) 오후 8:00(재방송 - 10일 새벽 2:00, 오전 11:00

웹사이트: http://www.arirang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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