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동아시아 최초 성홍열 관찰 연구
그러나 조선시대 주요 인물 가운데 허준 만큼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 없을 것이다. 허준은 많은 의서를 저술했으나 정작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문집은 남기지 않았다. 허준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못고치는 병이 없는 명의이며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슈퍼맨 같은 이미지 때문에 정작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생애가 가리워져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신동원박사(인문사회과학부 연구교수)는 지난 18일 한국과학사학회(회장 황상익) 주최로 서울의대 함춘회관에서 열린 `이달의 과학기술인물세미나'에서 “허준은 동아시아의학사와 세계질병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신박사는 `허준의 삶과 의학'이라는 발표논문을 통해 “허준의 성격은 과감하고 솔직하며 당당했지만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다정하고 인자한 인물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박사는 허준의 전염병 전문의서인 `벽역신방'과 `신찬벽온방'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허준은 1613년 북쪽지방에서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해 매우 면밀한 관찰결과를 보고했는데 이는 동아시아 지역의 최초 연구이다. 허준은 두창, 온역(티푸스질환), 성홍렬 등 조선시대의 전염병을 거의 다루었으며 오늘날의 홍역에 해당하는 새로운 질병을 발견해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신박사는 “세계적으로는 성홍열 환자에 대한 그룹 연구를 실시한 초기 기록으로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중국에서 30여차례, 일본에서 두차례 출간되며 동아시아 의학의 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 동의보감은 기존 의서와는 달리 대분류 방법을 통해 전체의학체계를 새롭게 분류했다. 또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뿐 아니라 정 기 신을 중심으로 한 신체관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높은 수준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신박사는 “오늘날 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동의보감은 17세기 조선의 생명관, 신체관을 잘 확립한 사상서로 높이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허준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서너 가지에 불과하다. 먼저 `선조실록'에는 허준에 대해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가 높은 벼슬에 올라간 후에는 “허준의 위인됨이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했다”(선조실록) 등의 험담이 발견된다. 신박사는 “아마도 정치적으로 허준을 공격하기위한 평가로 보이며 허준이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죽어지내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당당히 행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허준은 과감한 인물이다. 광해군이 왕자 시절, 두창에 걸렸을 때 다른 의관들이 모두 후환을 두려워해 치료를 하지 않았으나 허준이 나서서 처방을 내리고 병을 고쳤다. 또 선조가 위독할 때 다른 의관들이 책임을 모면하기위해 두리뭉실한 처방을 선호했으나 허준은 설사를 시키는 센 약을 처방했다. 전자는 그의 나이 52세, 후자는 70세 때였으므로 자신의 지위를 잃을 수 있는 모험을 감행한 셈이다. 신박사는 “두창을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만으로는 이런 행동을 설명할 수 없으며 허준의 성격이 과감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허준은 또 집념이 강한 인물이다. 동의보감을 편찬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14년만에 임무를 완수한다.
신박사는 “사료를 종합해보면 허준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고 솔직하고 과감한 성품을 지녔지만 깐깐한 면도 갖고 있었다”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말한 허준의 인간상 중에 의술에 대한 집념은 비슷하지만 다정하고 인자스러웠다는 인상과는 거리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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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9일 0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