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파주 덕진산성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개최
이번 발굴현장 자문회의 및 현장설명회에 관심있는 학자 및 지역주민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
자세한 내용은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02-2197-2622, 016-452-7020)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관심있는 학자 및 지역주민 : 현장설명회 당일 파주시 파평면 소재 전진교에 도착(육군사관학교에서 수송 예정)
* 언론사 기자 : 2004.9.18(토) 10:00까지 참석여부 통보(017-697-5774, 이장호)
■ 현장설명회 개최 계획
1. 일시 : 2004년 9월 19일(일) 10시
2. 장 소 : 파주 덕진산성 발굴조사 현장
3. 참석대상 : 자문위원, 조사위원, 발굴조사기관, 지역주민 등
■ 발굴조사 개요
1. 조사기간 : 2004년 5월 21일~ 2004년 10월 2일
2. 조사지역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덕진산성 우물지, 내성의 면석, 외성의 단면 등
3. 조사기관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국방유적연구실)
■ 발굴조사성과
ㅇ 내성 서문지(추정) 옆의 성벽 상부에 내측에서 외측부로 넣은 트렌치 조사에서 지표상에서 약 50cm 전후의 지하에 깔린 자연석과 그 하부의 토축을 확인하였다. 토축 외측부에는 적심석축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부에는 잡석을 쌓아 올리면서 진흙을 이겨 넣은 흔적이 나타난다. 부분적으로 교란되어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려우나 무너진 성벽 하부를 관찰하여 보면 외면은 석축으로 마무리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렌치 서단부에 성벽 방향으로 늘어선 적심석축 밖으로 약간 돌출한 토석혼축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어떤 성곽시설과 관련이 있는 유구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양한 기와편과 토기편, 도자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ㅇ 내성 서문지(추정)에서 약간 북쪽 성벽의 내측에서 우물터 방향으로 넣은 트렌치에서 전토층에서 출토되며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의 기와, 토기, 도자기편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는 나뭇잎무늬를 찍은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ㅇ 내성 서문지 내측에 위치한 우물터의 북쪽에 남북 방향으로 설치한 트렌치조사에서 표토로부터 지하로 220cm 정도되는 지점에서 석렬이 나타났다. 석렬은 대체로 동서로 나타나고 있는데, 서측부는 교란되어 있고 반치석한 다소 큰 석재가 섞여 있다. 이곳에서 우물지 방향으로 약 30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석축렬이 나타나며, 우물지 쪽으로 6단 정도의 석축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두 번 정도의 단을 이루고 있다. 이 석축렬은 우물지 주변에 구축한 석축의 일부로 보이나 표토에서 2m 이상 아래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시대에 와서 우물을 개수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유구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와편, 토기편, 도자기편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귀목문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ㅇ 외성의 북쪽 문지 부근의 성벽을 가로 지른 트렌치 조사에서 상부는 모두 동일한 황갈색토층이고, 하부에는 마사토가 섞인 보다 연한 황갈색 토층이 나타났다. 성벽 외측에는 치석하지 않은 석재가 다소 불규칙하게 나타나는데 토성 외측 하부에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 성벽은 내성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능선을 적당히 삭토·성토하여 구축하였으며, 다른 토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외측에 부분적으로 석축을 하였다. 성벽은 정교하기 보다는 거칠게 조성되었다. 유물은 어골문·격자문 기와편과 회색 토기편이 주로 출토된다.
ㅇ 내성 성벽(외벽)은 덕진산성 내성에서 석축이 비교적 가장 잘 남아 있는 지점으로 치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성벽의 외측을 조사하였다. 조사전에는 상부의 일부 석축만이 4~6단 정도 노출되었었는데, 외측에 쌓인 붕괴된 석재를 걷어내니 외측 하부로 내려가면서 계단식의 석축이 드러났다. 이 지점은 산성내에서 비교적 취약한 부분이어서 성벽을 높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벽의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 보축과 함께 계단식 석축공사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재는 장방형으로 적당히 치석하거나 반치석한 석재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최상부층 석축에서는 보수흔적이 관찰된다. 성벽 하단부는 잡석과 진흙을 이겨 넣어 보축공사를 하였다. 유물은 주로 격자문, 선문 계통의 와편이 출토되었다.
Ⅰ. 조사개요
1. 개 요
□ 조사유적명 : 파주 덕진산성
□ 유적의 위치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산 13번지
□ 조사 목적 및 조사 성격 : 학술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발굴(시굴)조사
□ 조사범위 및 면적 : 우물지, 내성의 면석, 외성의 단면 (116㎡)
□ 조사기간 : 2004년 5월 21일 ~ 2004년 12월 16일 (210일, 지표조사 포함)
□ 조사기관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국방유적 연구실)
2. 조사경위
□ 최초 확인 및 지표조사
1992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실장 : 조유전 박사)조사단이 최초 확인 및 조사 후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지표조사 보고서』(2000년)에 조사내용을 수록함.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의 지표조사
1994년 육군박물관이 파주군의 관방유적을 조사하여 『경기도 파주시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1994년)에서 덕진산성 조사내용을 수록함.
□ 한양대 박물관의 조사
한양대박물관이 발간한『파주시의 역사와 문화』(1999년)에서 덕진산성 조사 내용 수록.
□ 파주시청의 덕진산성조사 발주
2004년 파주시청은 임진강 북안의 고성인 덕진산성의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보존·정비하기 위하여 덕진산성 정밀지표조사 및 발굴(시굴)조사를 추진하게 됨.
3. 조사단 구성
파주시와 2004년 5월 18일 「덕진산성 정밀지표조사 및 시굴조사」학술용역 계약을 체결한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의 국방유적연구실은 본 발굴(시굴)조사의 목적을 감안하여 국내의 산성연구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조사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조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지도위원
박경식(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장)
심정보(한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문화재위원)
조유전(전 문화재연구소장, 문화재위원)
차용걸(충북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최몽룡(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조사위원
백종오(경기도박물관 학예사)
심광주(토지박물관 학예실장)
□ 조사단장
강성문(육군사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책임조사원
이 재(육사 역사학과 교수, 육사 화랑대연구소 국방유적 연구실장)
□ 조사원
김규호(양구선사박물관장, 육사 국방유적연구실 연구원)
유재춘(강원대 사학과 교수, 육사 국방유적연구실 연구원)
이우형(연천군 사료관장, 육사 국방유적실 연구원)
□ 조사보조원
곽경인(육사 국방유적연구실 연구보조원)
송남선(육사 국방유적연구실 연구보조원)
□. 보조원
김규준(국민대학교 국사학과 4년생)
안민엽(국민대학교 국사학과 4년생)
Ⅱ. 조사내용
1. 산성의 위치와 문헌 검토
덕진산성은 초평도의 서북쪽,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파주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전곡방면으로 가다가 세일고개를 지나면 임진강을 건너는 전진교가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 일월봉을 우회하여 장단쪽으로 가다가 1:25,000지형도상의 대추포라 명명된 지점에서 좌측으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500m 정도 가면 좌측에 덕진산성이 보인다.
덕진산성은 해발 65m인 비교적 낮은 산의 정상부와 이에서 이어지는 능선을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해발고도가 낮지만 임진강의 북안에 위치하여 있고,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넓은 지역이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남동쪽에 있는 초평도는 임진강을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으며, 덕진산성은 이 길목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중공군 주력부대의 남하루트이기도 하다. 또한 초평도의 서쪽에 있는 수내나루는 동편의 임진나루와 함께 조선시대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덕진산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발간된 지리지에 단편적이나마 이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일제 강점기에 발간된『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A.『東國輿地志』장단도호부 고적조(1670년대)
덕진고성은 석축성으로 산을 잘라 걸쳐 있고, 단수(湍水)를 굽어보며 제압하는 형세를 지니고 있다. 오래 전에 허물어져 성 둘레는 알 수 없고, 광해군시 장단도호부사 이서(李曙, 1580~1637)가 수축하였으나 다시 허물어졌다.
B.『大東地志』장단 성지조, (1864)
덕진고성은 장단 남쪽 15리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해군시 고성을 수축하였다.
C. 『增補文獻備考』여지고 관방조,(1909)
덕진산성: 장단도호부의 서쪽에 있는 석축으로 오래 동안 허물어졌었다. 광해군시 수축하였지만 지금은 허물어진 상태이다.
D.『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1943)
덕진산성이라 칭하고 있으며, 석축의 둘레가 약 600간이며, 도처가 붕괴되었고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광해군시 수축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덕진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사용하다 후대 어느시기에 폐기되었다가 광해군(1609~1623)대에 일시 修築되었으나 광해군의 몰락이후 다시 폐허화되어 이후 修·改築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이렇다할 방어시설이 없어 왜군이 손쉽게 임진강을 도하하자 이에 대한 반성과 대비책으로 임진강변의 요충지인 이곳 덕진산성을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들어 이 산성은 1994년 육군박물관에 의하여 처음 조사되어 고구려유적으로 알려진바 있으며, 陸軍士官學校 陸軍博物館, 京畿道 坡州郡 軍事遺蹟 地表調査 報告書(遺蹟調査報告 第1 輯), 1994, 28~35쪽. 그후 파주군에 대한 광역지표조사과정에서 역시 조사가 이루어졌고, 한양대학교박물관, 파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2001년에는 경기도 박물관에서 임진강에 대한 학술조사과정에서 다시 조사된 바 있다. 경기도 박물관, 임진강, 2001.
2. 산성의 주요 현황
덕진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성은 최고봉인 해발 85m되는 봉우리와 임진강변쪽의 해발 65m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 능선을 따라 돌며 구축되어 있다. 내성의 전체 모양은 표주박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내성 전체 길이는 481m(전체 면적 약 10,590㎡)이다. 석축을 하였으나 서문지 옆의 트렌치 조사에서 토성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개축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은 편축식으로 쌓았으며 성벽상단에는 폭 5m 정도의 회곽도가 조성되어 있다. 성벽남쪽의 회곽도 안쪽에는 해발 65m의 뾰족한 소봉이 위치하는데 정상부나 주변에서 별다른 유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주민들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예전에 내성 소봉의 북쪽 사면에는 주초석 4개가 있었는데 반출되었고 이곳에는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두 봉우리 사이의 성 내부는 완경사를 이루며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다.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는 직경 15m 깊이 5m 정도의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바닥에 3.2m×3.4m 정도의 석축부분이 있는데 현황으로 보아 우물지나 집수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성은 임진강 방향을 제외하고는 군데 군데 석축이 남아 있고 특히 서벽 북단부와 서문지 부근 등에 비교적 석축이 잘 남아 있다.
외성은 내성 북벽의 동단지점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다가 다시 임진강 방향으로 회절하면서 강안에 이르러 내성 남단쪽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성벽은 삭토와 성토 방법으로 토성을 구축하였는데 부분적으로 성벽 외측에 석축한 흔적이 보인다. 전체 길이는 948m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임진강에 연접한 219m 정도는 지뢰 위험 때문에 확인·측량이 어려운 상황이다. 성벽 높이는 4m 전후이나 이보다 낮은 지점도 있다. 외성에는 두 개의 문지가 완연하게 남아 있고 성가퀴로 추정되는 부분이 두군데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곡저부가 형성되어 있고 완경사를 이루며 강변으로 연결되어 배를 접안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서는 대체로 삼국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기와편이 다량 채집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고구려 토기편과 와편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1999년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할 당시 성 내부의 북동쪽 봉우리 정상부에서는 도로개설로 인하여 노출된 단면의 지표로부터 약 50㎝ 정도되는 아래 지점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당시 주거시설의 바닥이나 벽체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짚이 섞인 소토덩어리와 탄화된 쌀과 철기편 등도 수습되었다.
3. 발굴(시굴)조사 내용
이번 조사는 덕진산성에 대한 전반적인 지표조사와 함께 부분적인 발굴(시굴)조사를 시행하도록 계획되었기 때문에 내성 서벽 중간지점의 문지로 추정되는 부근과 우물지(혹은 집수지)로 추정되는 곳과 함께 비교적 석축이 잘 남아 있는 서벽 북단부 지점을 조사하였고 , 그리고 외성의 축조방식을 조사하기 위해 외성 북쪽 문지의 서쪽 지점을 선택하여 조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트렌치 Ⅰ
내성 서문지(추정) 옆의 성벽 상부에 내측에서 외측부로 넣은 트렌치이다. 지표상에서 약 50cm 전후의 지하에 자연석이 깔려 있고 그 하부는 토축으로 되어 있다. 토축 외측부에는 적심석축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부에는 잡석을 쌓아 올리면서 진흙을 이겨 넣은 흔적이 나타난다. 부분적으로 교란되어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려우나 무너진 성벽 하부를 관찰하여 보면 외면은 석축으로 마무리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1트렌치 서단부에는 성벽 방향으로 늘어선 적심석축 밖으로 약간 돌출한 토석혼축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어떤 성곽시설과 관련이 있는 유구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양한 기와편과 토기편, 도자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2. 트렌치 Ⅱ
내성 서문지(추정)에서 약간 북쪽 성벽의 내측에서 우물터 방향으로 넣은 트렌치이다. 제1트렌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지표에서 약 50cm 정도를 전후하여 성벽과 수평을 이루며 자연석이 갈려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약 3m 하부에 이르면 우물지쪽으로 성벽과 나란한 석렬이 나타난다. 성벽층은 대체로 표토층과 황갈색토층, 흑갈색토층으로 나누어 지며 토층은 성벽 상부에서 하부쪽으로 경사진 형태를 하고 있다. 유물은 전토층에서 출토되며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의 기와, 토기, 도자기편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나뭇잎무늬를 찍은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3. 트렌치 Ⅲ
내성 서문지 내측에 위치한 우물터의 북쪽에 남북 방향으로 설치한 트렌치이다. 폭 2.5m 설치한 이 트렌치 조사에서 표토로부터 지하로 220cm 정도되는 지점에서 석렬이 나타났다. 석렬은 대체로 동서로 나타나고 있는데, 서측부는 교란되어 있고 반치석한 다소 큰 석재가 섞여 있다. 이곳에서 우물지 방향으로 약 30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석축렬이 나타나며, 우물지 쪽으로 6단 정도의 석축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두 번 정도의 단을 이루고 있다. 이 석축렬은 우물지 주변에 구축한 석축의 일부로 보이나 표토에서 2m 이상 아래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시대에 와서 우물을 개수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유구일 가능성도 있다. 유물은 트렌치 Ⅱ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와편, 토기편, 도자기편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귀목문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4. 트렌치 Ⅳ
외성의 북쪽 문지 부근의 성벽을 가로 질러 넣은 트렌치이다. 이 트렌치는 외성의 축조법을 조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상부는 모두 동일한 황갈색토층이고, 하부에는 마사토가 섞인 보다 연한 황갈색 토층이 나타난다. 성벽 외측에는 치석하지 않은 석재가 다소 불규칙하게 나타나는데 토성 외측 하부에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렌치 조사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외성 성벽은 내성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능선을 적당히 삭토·성토하여 구축하였으며, 다른 토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외측에 부분적으로 석축을 하였다. 성벽은 정교하기 보다는 거칠게 조성되었다. 유물은 어골문·격자문 기와편과 회색 토기편이 주로 출토된다.
5. 내성 성벽(외벽) 조사
덕진산성 내성에서 석축이 비교적 가장 잘 남아 있는 지점으로 치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성벽의 외측을 조사하였다. 조사전에는 상부의 일부 석축만이 4~6단 정도 노출되었었는데, 외측에 쌓인 붕괴된 석재를 걷어내니 외측 하부로 내려가면서 계단식의 석축이 드러났다. 이 지점은 산성내에서 비교적 취약한 부분이어서 성벽을 높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벽의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 보축과 함께 계단식 석축공사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재는 장방형으로 적당히 치석하거나 반치석한 석재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최상부층 석축에서는 보수흔적이 관찰된다. 성벽 하단부는 잡석과 진흙을 이겨 넣어 보축공사를 하였다. 유물은 주로 격자문, 선문 계통의 와편이 출토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덕진산성 내성에는 임진강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의 성(혹은 보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동쪽에 임진나루가 있고, 서쪽에 수내나루가 있으며, 초평도를 통해 비교적 쉽게 임진강의 도하가 가능한 지점이므로,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의 도강을 막기 위해서 이곳에 성을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한 이후 이곳을 개수하여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광해군대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쉽게 임진강을 도하하여 북진하였던 점을 고려하여 이곳에 성을 확장·수축하였으나 곧 그 전략적 기능이 사라지면서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성은 인근의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호로고루나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등과 함께 임진강의 북안에 설치된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는 점에서 그 학술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특히 이 성곽의 경우 임진강 하구 방면에서 전략적 입지가 매우 중요하여 조선시대에 다시 외성을 확장 수축하여 사용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재청 개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온 문화재 체계,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제정된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60년간 지속된 문화재 체계가 국가유산 체계로 변화한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고정된 가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국민의 참여로 새로운 미래가치를 만드는 ‘국가유산’.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은 국민과 함께 누리는 미래가치를 위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국민과 공감하고 공존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를 지키며 과거와 현재, 국내와 해외의 경계를 넘어 다양성의 가치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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