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식시장의 주도 세력이 외국인 투자자에서 국내 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가의‘내국인 연합’으로 바뀌었다는 주장까지 들린다. 실제로 올 들어투자주체별 일간 순매수 금액과 종합주가지수 간상관계수를 계산해 보면 외국인의 경우만 음수로 나온다. 주가와 반대로 움직인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2003, 2004년에는 외국인만 양(陽)의 수치를 나타낸 바 있다.
노후불안이 초래한 조용한 재테크 혁명
내국인들의 주식투자 열기가 높아진 배경은 무엇일까? 은행 예금 및 적금의 실질수신금리를 2~3년 동안 0% 부근에 머물게 한 초유의 저금리 상황과‘10.29’,‘ 8.31’등 잇달아 쏟아진 메가톤급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재테크 여건 변화와 맞물린 것이 재테크 마인드 변화다. 외환위기 이후‘고령화’,‘ 조기퇴직’,‘ 국민연금 파산’등 노후에 대한 불길한 얘기들을 귀따갑게 들어온 중장년층들이 마침내 본격적으로 자구책을 찾아 나섰다.
고령화로 여생은 길어지는데 봉급 만으로는 노후자금 마련이 어림없고‘ 노후는 걱정 마라’고 큰소리치던 국민연금까지 휘청거리니 남은 건 오직 하나, 재테크에 승부를 건 것이다. 대표적인 고수익-고위험 자산인 주식에 매월 일정금액을 장기투자하는 적립식 펀드가 이번 대세상승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점에서 지금의 주식투자 열기가 단순한 여윳돈 불리기 차원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노후불안에 따른 주식시장 호황’의이면은‘투자자 노후의 주식시장 불안’이다. 중장년층 주식투자자들이 은퇴 이후 생계비를 대기위해 주식을 대거 현금화한다면 주가는 하락 압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우려의 극단적인 표현이 이른바‘자산시장 붕괴 가설(AssetMeltdown Hypothesis)’이다.
자산시장 붕괴 가설과 외국 사례
자산시장 붕괴 가설은 1990년대 미국 월가의 증시 분석가들이 처음 제기했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주가의 급등세는 베이비부머 세대(1946~1964년 생)가 그 때쯤 재산 형성기(40~64세)에 진입한 것과 관련이 깊다고 봤다. 같은 맥락에서 베이비부머들이 은퇴기로 접어드는 2006~2010년 이후 주가는 하락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자산시장 붕괴 가설은 소비 및 저축 행태에대한 생애주기(Life Cycle) 가설을 바탕에 깔고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합리적 개인은 소비를 평생 동안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반면 소득은 나이가 들수록 점차 증가하다가 특정 시점을 지나면 감소하는 역(逆) U자형을 띠는 게 일반적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대개 생애 초기에는 빚을 내 생활비를 충당하거나 부모에 생계를 의지한뒤 한창 때인 중장년기에 돈을 벌어 빚을 갚음은 물론 노후 생활자금까지 축적해 놓고 은퇴 이후 그 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헐어 쓰며 여생을 보낸다는 것이다. 대다수 개인이 이런 패턴을 따른다면 경제 전체의 저축률은 인구의 연령 구조에 좌우되게 된다.
한편 저축된 돈은 금융회사의 중개를 거쳐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자산에 투자된다. 이에 따라 인구 구조는 각 자산에 대한 수요 변화를 통해 자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 등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상당수 실증분석 결과는 이런 이론적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이를테면‘40~64세 인구 비중이 증가하는 경우주가는 상승세를 보였다’는 보고가 많았다. 하지만‘인구구조 변화가 주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채권이나 부동산 가격과는 상관관계가 없었다’거나‘분석 기간을 좁히면 상관관계가 뚜렷한데 넓히면 별다른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적지 않다.
상관관계가 관찰되는 경우에도 인구구조 요인이 자산가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공감을 사기도 했다. 실제로 자산 가격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경제성장률 등 다른 요인이고 인구구조 요인은 우연히 같은 양상으로 변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 한편 자산시장 개방은 인구구조 요인이 자산 가격에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예컨대 한국 투자자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주식이나 부동산에 적극 투자한다면 고령화에 따른 국내 자산가격의 변동 폭은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작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1963년 생)의 은퇴가 절정에 이를 2015년경 외국인들이 한국자산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면 국내 자산 가격에 대한 하락 압력은 한층 약화될 것이다.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산 보유 집중도한국에서 자산시장 붕괴 가설은 얼마나 잘 들어맞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인구와 자산 보유 면에서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의 경제 내 비중과△평균적인 가구의 자산 축적 및 처분 패턴을 살펴봐야 한다.
베이비부머들의 인구 및 자산점유비중이 높을수록 자산시장에서 이들의 영향력은클 것이다. 또한 생애주기 가설이 시사하는‘젊어저축, 늙어 소비’패턴이 뚜렷이 나타날수록 자산시장 붕괴 가설이 맞아 떨어질 확률은 높아진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구 비중을 살펴볼 때 한국은 미국,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학계에서는 출생연도가 △한국 1955~1963년 △미국1946~1964년 △일본 1947~1949년인 사람들을‘베이비부머’로 통칭한다. 여기서는 국제 비교가 가능하도록 2000년 현재 35~54세인 사람들을‘베이비부머 세대’라고 정의한다. 이 경우 베이비부머 세대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 29.3% △미국 29.4% △일본27.8% 등으로 큰 차이가 없다.
각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주식 등 금융자산보유 비중을 비교해보면 한국이 가장 낮다. 한국에서 가구주가 베이비부머 세대인 가구의 주식보유 비중은 2004년 말 현재 전체 상장 및 등록주식의 11.1%로 추정된다. 이는 일본 베이비부머가구의 유가증권 보유 비중(1999년 5% 안팎)보다 다소 높지만 미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주식 보유 비중(2001년 28.8%)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편 부동산 자산의 경우 한국 베이비부머세대의 보유 비중이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행정자치부의 연령대별 부동산 보유 비중(면적 기준) 조사에 따르면 2004년 12월 31일현재 30, 40대는 토지의 26.3%와 건물의 48.7%를 보유하고 있다. 40, 50대의 보유 비중은 토지42.2%, 건물 58%로 조사됐다.
일본의 경우 30,40대가 전체 주택 및 택지 자산액의 26.9%를 차지하고 40, 50대는 37.5%를 점하고 있다. 한편미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주거용 자산 보유 비중은 2001년 현재 47.1%이다. 여기 소개된 3개국데이터는 항목과 연령 기준이 달라 직접 비교하기 곤란하다. 하지만 대체로 한국 베이비부머의 부동산 보유 집중도가 미국과 엇비슷하고 일본보다 다소 높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분석 결과로 미뤄볼 때 자산 가격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영향력 측면에서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는 적어도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보다 한 수 아래라고 하겠다.
한국 가계의 자산 축적 및 처분 패턴
자산시장 붕괴 가설이 잘 들어맞으려면 자산, 즉부(富)의 축적 및 처분 형태가 생애주기 가설에부합해야 한다. 그리고 생애주기 가설 검증에는개인별 부 데이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부는 일반적으로 가구 기준으로 조사된다. 결국 가구 수준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가구주 연령대별 부(총자산-부채)의 평균값은 55~64세에 정점에 이른 뒤 점차감소하는 모습(역 U자형)을 띤다. 이는‘중장년기에 재산을 모으고 은퇴 후에 이를생활자금으로 쓴다’는 생애주기 가설의 추론을뒷받침하는 사례다. 미국에서는 가구별 저축률곡선도 대체로 역U자형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가구별 부 데이터가 없다. 가구별 저축률 데이터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통계청 도시 가계조사 데이터를 이용해 도시 전 가구의 가구주 연령별 저축률 곡선을 그려보면 기대와 달리 역 U자형이 아니다. 저축률은 40대 중반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후 상승한다. 그런데 동시대에 살고 있는 여러 가구들의 저축률을 한 눈에 보여준다. 반면 생애주기 가설은‘한 개인은 나이가 듦에 따라 저축 행태가 변한다’는 논리다. 따라서 이 그림만 갖고‘한국에서는 생애주기 가설이 들어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는 한 개인 또는 가구의일생을 추적하면서 같은 항목을 수십년 동안 조사한 데이터(패널 데이터)가 없다. 다른 방법을 쓸수밖에 없다. 즉 1970년에 11세였던 가구주는1980년에 21세, 1990년에는 31세가 된다는 점에착안해 가상의 장기 패널 데이터를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림 11>이 그 결과다. 가구주의 일생을 추적한 <그림 11>에 나타난 저축률 곡선 역시 역U자형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림 10>의 횡단면 분석에서처럼 40대 중반에 저점을 형성한 뒤 다시 증가하는 모습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가계의 저축률 곡선은 생애주기 가설에서 기대하는 역U자형이 아니라 N자형임을 알 수있다. 즉 적어도 가구수준에서는 생애주기 가설이우리나라에 잘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N자형 저축률 곡선은 은퇴 이후 축적된 자산을 연간 어느 정도 비율로 소진시켜 가는지를나타내는 부의 처분율이 높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의 60세이후 부의 처분율이 1% 미만으로 추정됐다. 미국의 3~8%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이는 우리나라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 의지가강한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은퇴수년 뒤 자녀세대들의 부모 부양 의지 약화, 노후에 대한 사회보장 미비 등 취약한 노후 여건을 절감하면서 새삼 허리띠를 죄는‘은퇴에 따른 공황(恐惶)심리’또는‘은퇴의 경각 효과’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에서 고령화가 자산 가격에 미칠 영향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우리나라에서 베이비부머세대 은퇴에 따른 자산 가격 변동 양상을 시론적으로 전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식시장. 베이비부머 세대의 주식 보유 비중이 미국 등 금융시장이 발달한 나라들에비해 매우 낮다. 따라서 한국에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 후 자산 처분이 금융자산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을 전망이다. 또한 앞으로 교육 수준 향상, 소득 불안정성 해소, 노후대비 필요성에 대한 인식 제고 등으로 베이비부머다음 세대의 주식투자가 확대되면서 이 세대가 베이비부머 세대의 매물을 무리 없이 소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2004년 말 현재 보유주식의 시가총액비중이 40.1%에 이르는 외국인 투자자들이‘주식회사 한국’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유지할 경우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에 따른 영향을 상당부분 상쇄할 수 있다. 아울러 주식투자 비중을 점차 늘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인 국민연금이 베이비부머세대의 주식 매물을 대거 받아갈 수도 있다. 주식시장보다는 부동산 시장이 상대적으로더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주식보다 부동산을 더욱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고 부동산시장은 주식시장처럼 외국인이나 국민연금의 참여가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이 부의 귀착점 역할을 한다는 점, 즉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형적인 재테크 행태가 여윳돈이 생기면 정기예금, 펀드 등에 넣어 목돈을 만들고 그 돈을 부동산으로 옮겨 재산을 불리는 식이라는 점도 이런 심증을 굳혀준다. 하지만 부동산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유산(遺産) 목록 제1호로 꼽힐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나라 부동산시장에서는 양떼 행동(herdbehavior)이 주식시장보다 드물게 나타나며 공급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 가격의 하방경직성이강하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 은퇴가 부동산 시장의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은 우려만큼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인구구조 변화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산시장 관점에서 베이비부머 세대는 붕괴 요인은 아니지만 교란요인이나 위협요인은 되고도 남는다.
사실 지금까지 자산시장 붕괴 가설의 타당성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산시장 붕괴의 개연성을 최대한 줄이려는 시장참여자들의 노력과 정부의 정책적인 대처는 이미각각 하나의 설명변수로 취급됐다. 정부와 시장관계자들은 고령화 추세에 맞는 장기 금융 및 부동산 투자 상품을 개발함은 물론 자산시장의 변동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인프라를 개선하고, 투자자들은 해외투자를 확대하면서도 그에 따른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투자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자산시장이 짧으면 5년, 길면 10년여 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에 따른 후유증을피해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LG경제연구원 이철용 정책분석그룹 부연구위원
웹사이트: http://www.lge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