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을사조약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사조약에 대한 韓,中,日 三國의 인식'

서울--(뉴스와이어)--올해는 을사조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을사조약은 20세기 전반기 한국사에서 국권상실의 불행한 경험을 열은 단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다시 되새겨볼 역사적 의의가 있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동안 을사조약에 대한 기억은 ‘망국의 조약’ ‘국권침탈의 조약’이라는 총론적 표현 속에서 단일한 기억으로 일관하여 왔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갖는 역사성을 이해하고 현재의 우리에게 살아있는 역사교훈이 되게 하기위해서는 보다 다양하고 실체적인 내용을 밝혀야 하리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을사조약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하겠다. 그 가운데 특히 필요한 것이 을사조약을 일국사적인 관점이 아닌 동아시아적인 관점으로 확장하여 한국, 중국, 일본이 을사조약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였는가를 구명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중간에는 2002년 이래 東北工程과 고구려사 왜곡 문제가 양국간 역사인식의 대립각으로 남아 있고, 간도협약 문제도 미구에 닥칠 외교현안으로 잠복되어 있다. 한일간의 근대사 인식의 차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최근 독도를 둘러싼 논란과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가히 외교전쟁이라도 벌일 만큼 상호 인식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때 우리가 한·중·일 3국의 을사조약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마련한 것은 을사조약이야말로 한·중·일 동아시아 3국간의 관계가 오랜 전통질서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위상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동아시아 3국의 전통질서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변화의 단초를 마련하였지만, 이후 러시아가 끼어들어 러·일간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물러난 순간 한반도의 운명은 일본의 보호국화로 결정되었고 을사조약 체결의 국제법적 효력 여하와 상관없이 동아시아 3국의 향후 진로도 결정되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침략의 길에 나서 제국주의화의 첫발을 내딛었고, 중국 역시 오랜 사대교린 관계에 의거하여 속방화를 기도했던 한반도를 확실히 상실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권에 최종적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병합을 앞둔 대한제국의 집권세력이나 국민들에게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동아시아 3국 모두의 현안이기도 하였다.

이에 본 학술회의에서는 한국인들이 을사조약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를 비롯하여 을사조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 각 세력의 반응, 淸國 및 日本의 을사조약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토론하는 자리를 가져보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을사조약의 조문 하나 하나를 가지고 법적인 효력과 의미를 따지는 작업과는 달리 보다 거시적으로 동아시아 3국 근대사의 견지에서 을사조약을 조명하고 이를 계기로 3국간 역사인식의 공통 분모를 추출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학술회의와 관련된 국내·외 연구 동향

1) “「을사조약」은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가”라는 주제는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명논설 「시일야방송대곡」 이래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자명하여 연구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하기에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연구 자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만, 국제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강제성, 기만성과 침략성 여부 등에 대해서는 이미 1905년 단계부터 지적된 이래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상식적인 사실로 되어 왔다(이선근, 최영희, 윤병석, 강동진). 특히 1990년대 초반 이후 이태진교수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래 한국이나 일본의 역사학자, 법학자 등에 의해 최근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김기석, 백충현, 사카모토 시게키, 사사카와 노리가츠, 운노 후쿠쥬, 아라이 신이치). 논란의 핵심은 을사조약이 국제법적으로는 유효하지만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는 인식에 대하여 을사조약은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았기에 유효·무효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며, 을사조약 전후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다섯 개의 조약 모두가 일본의 기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인식이 상호충돌하는 것이다. 따라서 을사조약이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가는 여전히 연구 공백의 상태이며, 위와 같이 조약 자체의 정당성과 유무효에 대한 인식론적 싸움만 전개되고 있는 형편이다.

2) 을사조약에 대한 기존연구는 일제의 강제성, 불법성 등에 초점이 맞춰져 왔고, 한국민의 대응에 대해서는 주로 고종과 측근세력의 저항이 부각되어 왔다(이태진, 1995,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보호조약에서 병합조약까지』, 까치, 서영희, 2003, 『대한제국정치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을사조약의 불법성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국제법적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그 절차상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규명하였고, 고종 및 측근세력의 대응 연구도 을사조약의 위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한 외교적 노력에 대해 주로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 결과 적어도 한국민 사이에서는 을사조약의 강제성이나 불법성에 대해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 연구자나 국제학계에서는 이의가 제기되고 있으며, 그러한 문제점들이 모두 해결될 때 연구사적으로 완료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을사조약 연구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조약의 불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실제로 조약을 계기로 대한제국이 보호국체제에 들어간 만큼 그것이 당시 한국민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어떠한 파장을 가져왔는가이다. 사실 이 문제는 조약의 법적인 타당성을 묻는 연구보다 더 시급하다고 볼 수 있는데, 불법적인 조약이라도 실제로 대한제국에서 유효하게 적용되었다면 현실적으로 그에 대한 대응책이 모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고종황제의 국권수호외교와 광범한 반일여론에 기반한 의병항쟁 등을 조명하는데 그치고 보호국체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향후 정세 전망, 대응 방안 모색 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3) 을사늑약 이후 국내외에 조직된 각종 정치·사회 단체의 동향(이른바 계몽운동)에 대해서는 기왕에 많은 연구업적이 축적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보호국체제하에서 한국인들이 어떻게 학회를 조직하고, 신문·잡지를 출판하며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했는지, 그리고 그 주도자와 구성원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등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구명되었다. 동시에 그들이 추구했던 국권회복의 방법론, 즉 자강운동, 실력양성론, 문명개화론 등에 관해서도 상당히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된 이후 국내외에 설립된 각종 정치·사회단체들이 통감부의 보호국 통치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거의 없다. 특히 해외에 조직된 애국적인 정치·사회단체들이 일제의 통감부 통치를 어떻게 인식·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 단체의 독립방략, 동아시아사회에 대한 전망을 등을 시기별로 나누어 접근할 필요를 느낀다.

4)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청관계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간도영유권을 둘러싼 한청간, 그리고 청일간의 협상에 주목하였고, 그 정점은 1909년의 간도협약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간도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것은 외교 이전의 영토문제 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청간 전반에 대한 연구는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즉 1894년 이후 한청관계에 대한 연구는 1909년 간도협약의 전사라는 측면만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영토 문제에 국한된 이 시기 한청관계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제설정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청양국간에는 영토문제를 넘어서, 전통시대의 국제관 잔영이 남아 있었고, 또한 한국의 재한 외국인 가운데 다수를 점하던 청국상인들이 존재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청국의 반응은 영토문제 만이 아니라 전통적 국제질서의 사실상 종결이라는 상황과 재한청상의 상권 유지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제기된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것에 대해 청국 언론과 양계초를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의 반응을 다룬 간단한 연구가 있지만, 중국 언론과 지식인들의 반응을 일률적으로 평가하여 청국 내의 다양한 반응에 주목하지 않았다.

5) 현재 을사조약을 비롯 한말 한일간 체결된 조약에 대해서는 조약의 유효성 여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이태진은, 을사조약이 고종의 비준을 거치지 않았음을 밝히고,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에 대해 ‘불성립’론을 제기하였다. 을사조약 및 병합 과정상 제조약의 체결에 대한 연구는, 강압적 조인과정의 설명, 조약의 내용 분석을 통한 침략성 고발과 일본 정부의 대조선정책, 외교정책 분석을 통한 한국병합의 과정을 분석한 글들이다. 이외 통감정치 및 ‘통감부체제’에 대한 연구 또한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을 밝히는 것들로써 주목된다. 을사조약에 대한 일본측의 동향과 관련하여서는 일본의 대조선정책이나 외교정책을 거시적으로 파악한 연구가 전부이다. 물론 일본의 대조선정책·외교정책에 대한 거시적 파악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고발하는 큰 틀을 마련하였으나, 이들 각각에 대해서도 일본 정치사의 특성을 고려한 각 정파간의 정견 차이 및 이를 대표하는 인물들 내부의 견해 차이에 따른 정책의 변화 양상 등이 적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가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병합정책’에 대한 일련의 과정이 단적인 이해에 그치고 있다.

▶ 학술회의 개최에 따른 기대효과 및 활용 방안

본 학술회의는 그동안 을사조약을 일본의 한국강점의 계기로만 파악해온 통설적 견해를 넘어 을사조약이 동아시아 삼국 공통의 기억의 장으로서 당대 각국의 정치·사회세력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던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일제의 침략과 한국인의 저항”이라는 단순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삼국의 다양한 인식 스펙트럼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또한, 을사조약을 둘러싸고 한일관계는 적대적 관계, 한중관계는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던 그간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본 학술회의는 그동안 을사조약을 민족간, 국가간의 관계로만 파악해온 인식틀을 벗어나 동아시아 삼국 내부의 다양한 정치·사회세력의 을사조약에 대한 인식을 최초로 종합 조명하는 계기가 되어 연구사적으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며, 최근 전개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단서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행사일정

○ 일정 : 2005년 11월 25일(금) 13:30~18:00
○ 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 주최 : 한국역사연구회, 국가보훈처

▷▶ 개회식 13:30~14:00
○ 사 회 : 이지원(대림대)
○ 개회사 : 오종록(한국역사연구 회장, 성신여대)
○ 축 사 :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연구발표 14:00~16:00
1. 을사조약은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가
발표 : 도면회(대전대)
2.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각 정치세력의 정세 인식
발표 : 서영희(한국산업기술대)
3. 통감부에 대한 국외 정치·사회 단체들의 인식
발표 : 오연숙(서울대)
4. 을사조약에 대한 청국정부의 인식
발표 : 은정태(서울대)
5. 을사조약을 둘러싼 일본내 각 세력의 인식
발표 : 천지명(숙명여대)
종합토론
사회 : 이영호(인하대)
토론 : 이윤상(창원대)
이민원(보훈교육연구원 연구부장)
왕현종(연세대)
이영옥(아주대)
오가와라 히로유키(小川原宏幸, 明治大)
▷▶ 폐회 : 오종록(한국역사연구회장)

웹사이트: http://www.webkoreanhistory.org

연락처

한국역사연구회 : 02-586-4855
연구위원회 간사 남기현 : 016-402-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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