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도의원, “감시와 처벌의 땅은 평등하지 않고, 보이는 손 있어 시장은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모두가 바라는 ‘자유와 평등’이 우리 인간 사회에서 늘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대립과 투쟁의 근본 원인이 되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에 대해 수많은 말들을 한다. 나는 인간 본성에 비추어서 그에 대해 생각한다. 본성은 자기 이익을 찾고,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자유와 평등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절규하거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목놓아 외치거나, 그 중심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있다.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자기가 차별 받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의 문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무인도에 홀로 살면서 자유와 평등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 속에 홀로 있다고 자유롭다고만 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구속받는 조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자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자유가 남의 자유와 대립될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평등이 남이 생각하는 평등과 어긋날 수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역사이고 오늘도 확인하는 실상이다. 그때,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본성은 남의 자유를 해치더라도 자기의 자유를 지키려 한다.
평등의 문제를 봐도, 자기가 남에게 차별을 받을 때는 분노하고 반발하지만, 자기가 남을 차별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하기 쉽다. 이러니 자유와 평등의 과실을 두고도 사람은 서로 맞서 있는 꼴이 된다.
사실, 이렇게 사람이 서로 맞서 있는 문제가 사상을 낳고 정치를 낳는다. 어떻게 하면 자기 이익을 내세우며 맞서는 사람들이 어울려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사상가와 정치가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끌어안고 있는 숙제이다. ‘자유’를 앞세우는 자본주의와 ‘평등’을 앞세우는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도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나온 결과물이다.
이미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 과제를 다 풀었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은 신자유주의니 신좌파니 하는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은 그 과제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학법개정도 그 중 하나다. 무엇이 그 과제를 푸는 열쇠가 될까? 사람의 본성으로 인해 생긴 문제이니, 그 본성을 살리면서 푸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을 인위적으로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감시와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체제도 그런 이유로 생긴 것이다.
권력자가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라며 어떤 틀을 제시한다. 그런 후에, 누가 자기 본성을 드러내며 그 틀에서 벗어나는지를 감시한다. 그리고 벗어나는 것이 확인되는 대로 처벌한다.
그렇게 해서 평등 사회를 이루었는가? 역사와 현실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른 후에야, 그런 식으로는 평등한 세상이 되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감시와 처벌의 땅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사람의 본성을 억누르는 폭력이 사회를 얼어붙게 만들었을 뿐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는 체제의 현실은 어떤가?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시장에서 볼 수 있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과 거래를 통해 자유로운 삶을 구현하고자 한다. 본성에 따라 자기 이익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이익을 두고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고 거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살리면서 즉, 개인의 이익을 살리면서 사회 전체의 이익도 살리는 길을 시장에서 찾는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유경쟁시장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사회 전체의 이익과 일치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신의 역할도 그렇게 비유한다.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익 추구를 인류 일반의 이익이 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에 대해 나는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 어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경우를 적잖게 보았다. 그러나 확신하는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손’이 함부로 시장에 개입해서, 시장의 원리를 왜곡시키면, 그 결과로 개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을 해친다는 것이다. ‘보이는 손’의 몸통은 정부이다. 정부가 시장의 원리를 왜곡하면서 주도적으로 나서면, 시장에서는 자유로운 경쟁과 거래가 위축된다.
단순히 위축되는 것만이 아니다. 왜곡된 시장에서 정부가 의도한 바가 실현되기는커녕 온갖 폐해가 드러나게 된다. 신문들은 연일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다. 한 신문 칼럼은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짚어낸다. ‘(……) 노무현 정부는 일자리 창출, 투자 촉진이라는 명분 아래 출범 초부터 최근까지 410건의 규제를 신설하고 285건을 강화했다. 5년 전보다 17.7% 늘어난 수치다.
그래도 일자리와 투자는 늘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험악해지는 게 민심이다. (……)’ 한 신문 사설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나온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오히려 집값과 땅값을 상승시켰음을 지적한다. ‘(……) 정부는 친기업, 친시장 정책을 통해 돈이 생산적 투자로 흘러가도록 해야 하는데도, 분배와 균형을 앞세워 기업 투자를 위축시키는 정책을 고집했다.
결국 분배 문제는 개선되지 않은 채, 돈은 부동산 투기와 해외로 몰려갔다. (……) 땅값 상승은 기업의 경쟁력 저하로 직결된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임금이 9배, 땅값이 3.6배, 법인세가 1.8배라고 한다.
한국 공단의 ㎡당 토지구입 가격은 14만7000원인 데 비해 중국 개발구는 4만740원이다. 미국 앨라배마 주는 현대자동차에 공장부지 210만 평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고임금과 고율의 세금, 각종 규제 때문에도 기업하기가 힘든데 땅값까지 올려놓는 것은 기업을 해외로 몰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땅값 상승은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또 국책사업의 토지보상비를 늘려 국민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킨다. (……) 정부는 지금이라도 정책 실패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시장의 심리와 원리에 따르는 정책 대안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언론의 공정성은 모든 언론 매체에게 주어진 과제이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를 이른바 보수 언론의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보는 것은 오만이다.
정부의 어설픈 정책에 대해, 이 정부를 적극 지지했던 사람들도 실망감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는 손’은 여전히 시장의 원리를 왜곡시키며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그 보이는 손에 의해 시장은 자유롭지 않다. 시장의 원리가 만능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의 원리에 따른 결과가 끼치는 폐해도 있다. 그러나 그 폐해보다는 인위적이고 왜곡된 정책이 부르는 폐해가 더욱 심각하다. 감시와 처벌의 땅은 평등하지 않고, 시장은 보이는 손이 함부로 개입해 자유롭지 않다. 자유와 평등,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만, ‘감시와 처벌’이나 ‘보이는 손’에 의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본성을 억누르면서 생겨난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성공할 수 없다.
그러면 어쩔 것인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본성을 똑바로 보고, 기존의 온갖 개념들이 갖고 있는 기만성을 밝히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본성을 살리면서 사는 새로운 삶의 원리, 공동체의 원리를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 사람들에게 주어진 오늘의 과제이다.
그 과제를 풀려면 인위, 즉 사람이 만든 것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야 할 것이다. 자연, 다양성이 서로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 원리를 우리는 배우고 따라야 한다.
불협화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연의 합창을 들으며 아름다운 화음을 익힐 수 있다. 사학법에서 인위를 본다.
2005, 12. 22
국회의원 배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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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