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 ‘58년 개띠’로 살아온 이야기
첫 번째 십이지(十二支 1958-1969)
58년에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베이비부머(Baby Boomer)세대의 막내꼴이다. 이것은 58년 개띠의 첫 번째 정체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나에게는 위로 누나 셋, 형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3남3녀다. 3형제는 세례명이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이다. 3대천사에서 따 온 것이다.
흔히 강원도 사람들은 영동선과 경춘선의 시발역이 청량리역이기 때문에 동대문구 중랑구에 많이 모여 산다. 우리집은 서부역 뒤편에 터를 정했다.
64년, 서울에 처음 올라와 기가 죽기도 했지만 형제 남매가 의지가지가 되어 당당했다. 씩씩하게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주변에 베트남 파병 갖다 온 친척이 없어 초콜렛, 바나나 구경 하기 힘들었지만 당시 유행이었던 전쟁놀이 열심히 하면서 형제끼리 힘을 합쳐 웬만한 동네싸움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2년 위인 형이, 강원도 산골에서 국민학교 2학년때 전학을 왔는데 전교에서 1등을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입학을 할때부터 유명해졌다. “저 노랑머리가 *** 동생이래”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묵묵히 대소변을 7년간 받아내셨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고 혼자 상상하는 것을 즐겨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학급반장으로 선출되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시다가 중학교 1학년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향우회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은 것은 내게 매우 인상적인 일이었다. 어머니는 지방에서 근무하시는 이버지가 혹여 갑자기 들르실까봐 항상 아버지 식사를 차려놓고 있었다. 아랫목에 항상 아버지 밥 공기를 넣어놓고 따뜻하게 해 놓으시고는 나의 손을 잡고 양정학교(손기정공원)까지 가서(말하자면 동구 밖)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거의 매일 그랬던 것 같다.
2주마다 한번쯤 들르시는 아버지는 우선 할아버지한테 큰 절을 올리고, 약간은 귀가 먼 할아버지께 ‘상세보고’를 하신다. 은행원으로 평생을 사신 아버지는 ‘상세보고’에 대해 강한 집념을 갖고 계신다. 아버지가 오신 날은 우리들 밥상에 돼지고기가 든 김치찌개가 올라온다.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젓가락을 들고 찬스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첫 숟갈을 떠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는 매일 먹으니까 너희들이나 실컷 먹으라”고 하신다.
국민학교 시절 누구나 만화방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마 10원을 내면 만화 5권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TV도 볼 수 있었다. 4학년때 우리 집도 처음으로 TV를 샀다. 나는 그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세웠다. 도둑이 들어와서 TV를 훔쳐갈까봐 정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형이 중학생이 되어서 “선생님이 그러는데 TV는 바보상자래, 보면 안된대”라고 학교에서 들은 말을 전한 이후에는 거의 TV를 보지 않고 살았다. 5학년때 처음으로 우리 집에 전화가 놓였다.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후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의 저녁 밥 공기를 아랫목에 놓아 데펴두는 수고를 하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서울에 오실거면 전화를 하실테니까.
어머니는 6.25때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서울로 끌려가시자 혼자 서울 곳곳을 돌며 그를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그때 명동성당의 종탑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우리 집안 모두 천주교 신자다. 셋째 누나는 수녀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어머니는 하루 종일 기도를 하신다. 기도의 주제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위로 누나 셋은 번갈아 각종 입시를 치러야 했다. 한해에 두명씩 입시를 치른 경우도 있다. 고 박정희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배려 덕분에 형 때부터 중학입시가 없어졌다. 나도 덕분에 4학년때부터 입시에 시달리지 않고, 대개 책읽기(1년에 50권-100권 정도)나 딱지치기, 구슬놀이, 전쟁놀이로 소일할 수 있었다. 또 4학년때는 반장선거에도 나갔다. 차점자는 부반장이나 학생회장 중에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내가 차점자가 되자 선생님이 “남의 밑에 있는 것이 아냐, 회장을 선택하라”고 지도해주셨던 기억이 유난히 오래 남는다.
첫 번째 십이간지는 그렇게 지나갔다. 명절때 500원짜리 오리온 종합선물셋트를 받으면 한없이 즐거워했고, 설빔으로 받은 신발을 갖고 밑창이 헤어지도록 축구를 하고, 장마철에는 고무신으로 흙탕물 도랑에서 뱃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면서도 한없이 행복했다.
친척 어른들이 오셔서 “그 녀석 대견하다, 많이 컸구먼, 아휴 고마워라 고마워”하는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춘궁기를 겪다가 이제 막 경제성장으로 옮겨가던 그 시절, 어른들은 그저 아이들이 성하게 크는 것만 봐도 고마워했던 것이다.
두 번째 십이지(十二支 1970-1981)
두 번째 십이지는 누구에게나 성장기이다. 58년 개띠의 성장기는 어떻게 보면 가장 시대적인 특징이 농축되어있다. 평준화 1기이다.(서울과 부산의 경우) 80년 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나는 조금은 넓은 경쟁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공동학군(4대문 안 구역)에 있는 대동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강남 같은 곳이다. 저절로 1,2등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혼자서 열등감도 극복하고 도서실을 오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당시는 성장이 느껴지는 시대였다. 서울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때 어머니가 큰 결단을 하셨다. 나와 병석에 계시는 할아버지와 함께 구로동에서 장사를 하셨다. 나는 갑자기 모든 친구들과 단절되었다. 새벽 첫 버스를 차고 광화문까지 가야 했다. 그리고는 걸어서 30분을 다시 가야 했다. 단절이나 절박감은 나를 변화시켰다. 고독을 씹게 만들었고, 책에 빠지게 했다. 다시 중학교 2학년때 중림동으로 이사를 해 성당친구들 품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성당에서 고등부 독서모임에 들어가 성경공부와 독서토론을 하는 것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불교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불교수업시간도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형이 자력으로 명문 용산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형이 명문고를 갈려면 제2외국어를 일찌감치 하라고 해 2학년때부터 독일어학원을 다녔는데 갑자기 온 교실이 떠나갈 듯한 소식이 들려왔다. 고교입시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고 박정희대통령의 덕을 보면서 소년기와 청년기의 초반을 지낼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때였다. 부여로 수학여행을 갔다. 갑자기 선생님들이 뒷짐을 지고 오가시며 걱정을 하셨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또 한번 엄청난 일이 터진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울의 찬가’를 부르며 다시 부모님의 품에 안겼다.
연합고사를 마치고 1974년 1월 드디어 학교배정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은행알을 굴렸다.그래서 ‘뺑뺑이’라고 한다. 궁금해서 학교로 가고 있는데 길에서 만난 친구가 나의 번호를 묻길래 ‘5번’이라고 하자 “너 경기고됐다”고 답을 해주었다. 아직 발표도 안했는데 믿을 수가 없어서 학교까지 가봤다. 정말 경기고였다. 우리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전화기를 처음 개설했을 때보다, 형이 명문 용산고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기뻐하셨다. 정말 구름 위를 날아다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당시에 원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경기고의 다이아몬드 뱃지와 명찰은 나를 기분좋게 했지만 길 가다가 지갑을 주운 기분은 아니었다. 나라고 경기고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나는 인생을 늘 그런 약간은 허황된 자신감으로 살았다.
경기고에 들어가서 나는 신문반에 들어갔다. 주간 경기는 2주일에 한번 타블로이드 4-8면으로 발행되는 신문이었다. 나는 신문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수업을 빠지는 것이 용인되었다. 당연히 신문은 저항을 키웠다. 성당에서의 독서토론도 나를 세상에 저항케 했다. 토요일이면 친구들 집에 모여 밤새 술을 마시면서, 폐렴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간 저항시인을 사모했다. 아침이면 친구의 칫솔 하나를 모두 돌려 쓰며, 칫솔을 함께 쓸 수 있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정통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은 나를 지루하게 했다. 왜 똑 같은 문제를 몇 번씩 풀어야 할까. 8번 이상을 해야 서울대학에 간다고 하는데.... 나는 영어와 수학의 끝장이 무엇인지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단계 높은 참고서를 보고, 다시 또 한단계 높은 참고서를 사서 보고, 안풀리면 해답을 보고.... 나는 그때 ‘학교는 죽었다’는 책을 우연히 사서 읽어보았다. 일본 책인데 학교가 상상력과 창의력의 창고가 아니라 대학입시와 암기창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 공감했다.
그 시절 평준화는 아마 세대적으로 그전과 단절을 경험하게 했다. 아마 서울과 부산에서 태어난 58년 개띠의 공통경험이었을 것이다. 명문고에 배정된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별을 경험했다. 비명문고(당시에는 명문고 아니면 대개는 똥통고로 구분되었다)에 간 아이들은 자기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아마 그러면서 58년 개띠들은 그 전으로부터의 ‘독립’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전의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고민했을 것이고 ‘자립’을 더 강요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적 특징을 안고 일부는 대학에 가고, 일부는 삶의 현장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을 보면서 자랐다. 물론 그 당시 운동권의 맹아가 자라나고 있는 학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단절된 운동의 역사를 새로이 만들고 쓰고 확산시키고 그런 역할을 58년 개띠세대 전후가 해냈다. 그들은 참 무던하다. 그리고 다시 노동운동의 현장으로 갔다. 절차적 민주화가 완성되는 87년까지 그럼 삶을 살았다. 그리고 꽃다운 청춘이 다 지나갔다.
그들은 민주혁명을 꿈꿨지만 헌신을 규율로서 체득했고, 소영웅주의자로서의 자신을 용납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민주화운동을 매명의 발판으로 활용하지 않도록 자신을 규율했다. 80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광주를 경험한 세대지만 조명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의 영역을 개척했다.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섰든지, 아니든지 그 당시의 동년배는 궁정동과 서울역광장과 금남로와 신군부로 기억되는 공포와 전진의 희망을 동시에 기억하며 대학문을 나왔다.
81년 5월 나도 학림사건으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성동구 행당동 무학여고 뒷편 산동네에 숨어 살았다. 최근에 아들 학교 때문에 그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81년 그 달동네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 민주화시대의 고통과 독재의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세 번째 십이지(十二支 1982- 1993)
58년 개띠의 세 번째 십이지는 어땠을까. 사실 나는 두 번째 십이지의 후반기에서 궤적을 이탈했기 때문에 그들의 세번째 십이지를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끊임없이 도망다녔고, 교도소에 들락거렸고, 그 와중에 결혼도 했다.
1986년 1월 25일에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결혼을 했으니까 조금 있으면 결혼 20주년이 다가온다. 그때 여기 저기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던 선후배 친구(대개는 지하운동권)들이 하객으로 왔다. 모두 힘든 시절이었다. 신랑 신부의 친구 선후배들이 아마 3백명 이상은 온 것 같았다. 5백명까지 되었을까. 내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 1인당 1만3천원짜리 잔치음식을 준비했는데, 친구들 중에서 축의금을 낸 사람이 모두 합쳐 7명이었다. 아버지는 경악하셨다. 어머니는 그래도 친구들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라고 남들이 위로했다고 하셨다. 내년 1월25일에는 중림동 성당에 가서 온 가족이 미사를 함께 보고, 어디 온천으로 만화책이나 빌려갖고 가서 쉬고 싶다는게 우리 부부의 소망이다.
학교 다닐적에 쉼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쓴 덕분에 여기 저기 잡지사에서 간혹 일을 한 적이 있다, 또 사회과학 출판기획사를 차린 일도 있다. 그 덕택에 경력기자로 문화일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문화일보의 분위기는 독특했다. 훈련된 기자들의 기자정신과 나처럼 훈련되지 않은 기자들의 자유분망함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하루 종일 일했고, 하루 종일 문화일보 친구들과 묻혀 살았다. 나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기획을 하는 일이 좋았다. 신문을 무척 좋아했다, 온갖 실험과 그 반향을 즐겼다.
나는 간난신고의 시절 가끔 우리 58년 개띠들의 소식을 들었다. 대개 인생의 세 번째 십이지에서는 잘 나가는 친구들만 모임에 나가고, 또 쪼금 앞서가는 친구들의 성공담이 그들 사이에서 바람결에 퍼지는 때이다. 그런 소식에 때로는 질투심을 느끼기도, 자극을 받기도 했을 것이며 미래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80년대 초중반 사회에 안착한 우리의 동기들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3저호황과 주택200만호 건설을 거치면서 안정적 생활을 해나간다. 그들은 선배들을 깍듯이 모시는 문화에 익숙해 있고, 밑에서 후배들이 버릇없게 치고 올라왔지만 세상을 관용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는 인류 최초의 동굴벽화에 그려진 글씨를 해독하면 “요즘 아이들은 싸가지 없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대차는 몇만년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58년 개띠를 전후한 세대야 말로 ‘낀세대’라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되는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네 번째 십이지(十二支 1994-2005)
베이비 부머세대의 마지막 세대인 58년 개띠는 이제 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이 40이 되어서 한참 도약할 때 그들은 IMF관리체제를 맞는다. 수출주도의 성장시대에 선배들은 40이 되면 이제 부장에서 중역으로 승진을 기대하고 정년은 보장되었다. 그런데 58년 개띠들은 나이 40 불혹(不惑)의 나이에 할 수 없이 직장에서 쫓겨나 여기 저기 기웃거려야 하는 유혹의 강제를 경험했다.
그리고 세상은 급속도로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고령화가 아니라 고령사회가 되었다. 세계화는 가파른 속도로 진행된다. 부모도 모셔야 하고, 아이들은 유학을 보내야 하는 기러기 아빠들의 중심세대,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숙자의 중심세대가 된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이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은 건강뿐이라며 마라톤에 빠져들기도 한다.
네 번째 십이지를 보내면서 인생의 승자로 살아남은 58년 개띠가 있고 패자가 된 개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5번째 십이지가 시작되는 내년, 병술년 개띠해에는 모두 행복했으면 한다.
다섯 번째 십이지(十二支 2006-2017), 그리고 그 이후
아마 58년 개띠로 태어났다면 앞으로 세 번의 십이지 정도를 살 게 될 것이다. 네 번의 십이지, 48년을 보냈고 앞으로 36년 정도를 더 살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십이지(49세-60세)는 마지막 도전의 시기일 것이다.
여섯 번째 십이지(61세-72세)는 사회적 활동을 종료하는 시기일 것이다.
일곱 번째 십이지(73세-84세)는 인생을 관조하며 마무리 하는 시기일 것이다.
이제민 신부님이 쓴 ‘제3의 인생’이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지지난주 성당에서 천향길 수녀님이 서울대교구 주보에 쓰신 칼럼에서 봤다.
제1의 인생은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시기이고,
제2의 인생은 힘의 한계와 좌절을 체험하는 시기이며,
제3의 인생은 그 힘을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와 내적 충만을 누리는 시기라고 한다.
지금 58년 개띠는 제2의 인생과 제3의 인생 사이에 있는 것 같다. 다섯 번째 십이지를 시작하는 내년, 나는 안주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의 비전을 분명히 세우고 도전하는 한해로 만들려고 한다. 58년개띠 친구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우리 사회의 중심가치로 세우고, 희망을 우리사회의 중심정서로 만들어 나가는데 서로 협력했으면 한다.
웹사이트: http://www.bdm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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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의원실 02-788-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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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6일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