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도의원, “국회 파행에 대하여”
지난 12월 이후 국회는 공전하고 있다. 아니 공전이 아니라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무엇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는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국회 의원회관 2층 발코니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나는 그 답 하나를 생각한다. 왜 사는가?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사물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 그 모든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 맺은 관계를 발전시켜, 좋은 관계가 주는 행복을 맛보려고 사는 것이 아닐까?
존재는 곧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를 맺지 않고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 존재는 완성을 꿈꾼다. 사랑을 말하면 사랑의 완성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니 관계의 완성, 그것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를 완성시키기 위해 나는 산다. 나와 너의 관계가 소멸된다면 우리의 의미는 사라진다. 우리가 함께 사는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정치도 크게 다를 수 없다.
사람의 희로애락은 관계가 만들어내는 감정들이다. 누군가와의 관계에 막힘이 있으면 심란해지고, 그 관계가 파괴되어 고립되면 불행에 휩싸이게 된다.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 할까? 그 첫걸음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존재하듯 상대방도 존재한다. 나에게 귀중한 생명이 있듯 상대방에게도 귀중한 생명이 있다. 내가 자기 이익을 구하듯 상대방도 자기 이익을 구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면, 관계는 멀어지고 불행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행복을 찾는 인생의 법정에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유죄이다.
자기중심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으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죄를 저지르기 쉽다. 사랑도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면, 이기성과 자기 욕망의 충족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현대인의 정신적인 황폐함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와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와의 관계이다.’ 날카로운 지적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우울하고 비관적인 견해가 아닌가.
사랑함에 있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죄를 짓는다면 그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무시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극단적인 예를 소설 〈죄와 벌〉에서 볼 수 있다. 주인공인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나폴레옹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나폴레옹 같은 특별한 인물은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갖는다고 믿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도 그런 특별한 인물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인물의 돈을 빼앗아 사회에 유익하게 쓰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한다.
그래서 무가치해 보이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그녀의 돈을 빼앗는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후에 그는 죄의식과 불안에 시달린다.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 아니고, 또 특별한 인물이라 해도 그런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전당포 노파를 무가치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권리가 없다. 그 노파를 죽일 권리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나폴레옹에게도 전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일 권리는 없다. 그 모든 일이, 자기중심의 시선으로 보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매춘부인 소냐와의 관계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를 갖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 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노예가 자신과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처럼 다루는 것은 개로 인정하는 것이고, 돼지처럼 취급하는 것은 돼지로 보는 탓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대립각을 팽팽하게 세운 채,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하고, 흉기를 휘두르고, 그래서 멍이 들고, 피를 흘리고, 상처를 내고, 죽고 죽이는 일이 끊이질 않는 것도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음을 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의 개인적인 불행이나 인류 일반의 불행이나 그 바탕에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침해하면서 생기는 관계의 파괴가 깔려 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과 상대방 사이의 관계를 완성시키려고 정성을 다한다. 야당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만을 관철하려는 국회에서 나는 또 다른 독재의 슬픔과 기만을 본다.
2006.1.25
국회의원 배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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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