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도 의원-스크린 쿼터 문제등에 대하여
“반대! 결사 반대!”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작금의 현실이다.
농민들은 외국 농산물 수입 개방을 반대한다.
노동자는 외국 자본을 유치할 경제 특구 건설을 반대한다.
교육자는 외국 교육 시스템을 수입할 교육 개방을 반대한다.
영화인은 외국 영화의 수입 확대를 불러온다며 스크린 쿼터 폐지나 축소를 반대한다.
이밖에도 각계에서 외국의 그 무엇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모두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가 있고, 또 개방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는 옳은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 반대할 것인가? 개방이 되어도 생존할 수 있는 자생력이 생길 때까지? 흔히들 그렇게 말하는데, 만약 개방하지 않고는 실질적인 자생력도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개방을 막는 것이 진정 자생력을 키우는 방법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혹시 자생력보다는 보호막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개방으로 인해 당장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게 가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냉정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고통이 개방으로 인해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정책 실패로 생기는 것인가?
농산물 수입 개방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전에는 과연 농민이 잘살았던가? 잘살다가 어느 날 수입이 개방되니 갑자기 못살게 된 것인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농촌은 신음했다. 젊은 일꾼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수입 개방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농업 정책이 실패한 탓이다. 소 값 파동이 나면 소를 키우던 농부가 자살하고, 돼지 값 파동이 나면 돼지를 키우던 농부가 삶의 의욕을 잃었다. 기껏 땀 흘려 한 해 농사를 지어봐야 생산비를 따지면 남는 게 없는 수확을 거두었다.
그것은 정부의 정책이 농민을 살리지 못한 결과이지, 애초부터 수입 개방 때문에 비롯된 일이 아니다. 그런 시각에 대해 농민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물론 정부의 정책 실패로 농민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수입 개방이 그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러니 농산물 수입 개방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틀린 말만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살기 힘든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살고 있는 농민의 자식들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수출과 수입을 자유롭게 해야 살 수 있는 생존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자동차를 수출해야 먹고사는 자동차 회사의 어느 노동자들은 농민의 자식들이다.
수출을 해야 자식들은 살고, 수입을 반대해야 농민이 사는 구조 속에서 우리의 이익만 따져 수출은 하되 수입은 하지 말자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논리를 과연 타국인들이 받아들일까?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중국산 마늘의 수입을 제한한다면 자신들도 한국산 휴대전화기의 수입을 제한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세계 시장의 룰이기에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냉철하게 봐야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농민이 수입 개방을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먼저 정부의 정책, 농민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한 정책이 없이 무작정 수입 개방을 반대만 한다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세계화의 흐름은 개방을 반대하는 나름의 당위성마저 무너뜨릴 만큼 거세다. 당위성만 가지고 현실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엄연한 생존 조건이다.
농업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책으로 생존의 길을 찾는 것과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현실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 바탕 위에서 생존의 길을 찾는 것이 실익을 가져다준다.
농산물 수출입 자유화를 재촉하는 WTO 체제에 반대하며 이국 땅에서 자살한 한 농민운동가의 사연은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오죽하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지며 그러한 주장을 했을 것인가. 그러나 농민의 주장이 수입 개방 여부로 모아져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수입 개방 문제에 가려져 정부 정책의 실패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수입을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또 다른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농민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정책을 만들어야, 실제로 농민을 살릴 수 있다.
단언하건대, 정부는 세계화의 흐름을 타는 정책을 세울 것이고 세울 수밖에 없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 속에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민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 토대 위에서 생존과 발전 논리를 마련해야 살 수 있다. 수입 개방을 반대하는 것이 애국자의 모습으로 포장되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농민을 살리는 길도 아니고 나라를 살리는 길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이 주장한다. “스크린 쿼터를 사수해 한국 영화를 살리자!” 그들이 극장에서의 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규정한 스크린 쿼터의 축소나 폐지를 반대하는 것에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외국, 딱 꼬집어서 말해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가 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국의 문화를 지키겠다는 것은 일단 자주성을 갖춘 태도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의지 덕분에 자국 영화 상영 비율이 50퍼센트에 육박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비율은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까지도 부러워할 지경이다. 그만큼 미국 영화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은 현실이다.
영화인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언제까지 스크린 쿼터라는 보호막으로 생존해야 하는 것인가? 자국 영화 상영 비율이 얼마나 되어야 그 보호막을 걷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영화가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 분다는 한류 열풍을 자랑하며 그들 나라에 우리의 영화를 수출하려고 애를 쓴다. 아니, 그 아시아의 몇몇 나라를 넘어 전세계에 수출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들 나라가 자국의 영화를 보호하겠다며 한국 영화의 수입을 제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국의 문화를 보호하겠다는 그들의 자주성을 높이 사서 영화 수출을, 그 꿈을 포기할 것인가?
굳이 세계화의 논리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문화의 교류는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강제력을 동원해 막을 수는 있다 해도 그것이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시인과 소설가는 자신의 생존, 자국 문학의 생존을 위해 외국의 시와 소설이 들어오는 것을, 그것도 거의 무제한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 적이 없다. 화가와 음악가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생존 자체까지 위협받는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면서도 그런 식으로 생존의 방식을 찾지는 않는다.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문화의 자유로운 교류를 적극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사는 길을 택한다.
영화인들은 영화는 다른 예술과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바라봐야 한다고 말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수지를 맞출 수 없으면 영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영화에는 분명 그런 산업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세계 시장의 틀 속에서 보면 영화 산업만이 아니라 모든 산업이 그러한 운명에 놓여 있다. 수지를 맞추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지를 맞추기 위해 그렇게 피땀 흘리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영화 산업만이 보호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 영화를 보호막 속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인 것처럼 선전을 하는 것인가? 왜 마치 제국주의 문화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인가? 그것은 일부 영화 자본의 논리를, 일부 영화인 자신의 생존 논리를 포장하는 것은 아닌가?
상당수의 영화인들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어떤 영화인들에게는 상업성을 따지며 작품 제작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인기 있는 주인공 한둘에게 노동자들이 평생 일해도 모을 수 없는 거액을 영화 한 편의 출연료로 지불하는 제작 시스템은 영화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 아닌가? 상업주의 영화가 판을 치는 것 역시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 아닌가?
세계화를 반대하기는커녕 다른 분야에서의 세계화로 인해 생기는 이점은 톡톡히 누리면서, 왜 자신들의 분야만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진정 이 땅의 문화 현상을 걱정해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의 영역만은 지키겠다는 이기성의 발로인가?
보호막 속에서 장사를 잘하는 그 상업 영화들이 진정 문화의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창작품인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영화 관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옳다. 한국 영화든 외국 영화든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하면 된다. 문학 독자들이 한국 작품이든 외국 작품이든 자신이 읽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읽듯이 관객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이 더욱 높아져 세계 시장으로 나갈 수도 있지 않겠나. 보호막 속에 있다고 살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농업을 살리는 길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외국 영화의 수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영화를 실질적으로 살리는 정부의 정책, 문화를 지원하는 나라의 의지를 세우도록 촉구하고 거기서 근본적인 생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농업과 영화 분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6, 2. 1
국회의원 배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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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