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학술심포지엄 개최

천안--(뉴스와이어)--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6월 9일(금) 오후 2시부터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6·10만세운동 8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과 관계 연구자들이 모여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6·10만세운동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역사적 위상을 제고하는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일반인들에게는 ‘학생운동’으로만 알려진 6·10만세운동을 그 차원을 넘어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함께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조명하고자 한다. 6·10만세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에 대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모여 6·10만세운동 전반에 대해 검토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총 3개의 주제발표가 있으며, 제1주제로 국민대 장석흥 교수가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 발표를 통해 6·10만세 운동에는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였고 민족혁명을 위해 사회 ·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어 갔던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광주대 한규무 교수는 ‘6·10만세 운동이 학생운동에 미친 영향’ 발표에서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후반 이후 학생운동에게 큰 영

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설명하고, 성균관대 이준식 교수는 ‘6·10만세운동과 통일전선운동’ 발표에서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의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전선 운동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실천에 옮겨진 운동이었으며 신간회의 창립(1927년), 광주학생운동(1929년) 등 이후 전개된 통일전선 운동은 모두 6·10만세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제 발표에 이어 김희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열리며, 이번 학술대회에는 학계 연구자와 일반인 등 약 200여명이 참석하여 6·10만세운동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주제발표 요약문]

<제1주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

장석흥(국민대 교수)

제2의 만세운동인 6 · 10만세운동에는 다양한 주체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주체들의 세력을 집단별, 성격별로 구분해 보면 사회 인사들로서 국외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병인의용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국내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학생들로서 국외의 일본 유학생, 국내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通洞系’와 지방의 보통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6 · 10만세운동의 주체들이 갖는 특성은 이같은 다양성에서보다 이들 주체가 상호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연대 내지는 결합되었던 점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6 · 10만세운동의 주체의 계획과 추진과정을 전체적 구도에서 살필 때, 각기의 주체들은 서로 연결되면서 유기체적 연대를 이루며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혁명을 위해 사회 ·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어 갔던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즉, 6 · 10만세운동에서 보여준 민족통일전선의 실천은 이후 국내외 민족세력의 최대 당면과제로 부상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서막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6 · 10만세운동은 무엇보다도 민족독립의 이론을 성숙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운동이었다. 6 · 10만세운동에서 보여준 지도 노선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서로 상치되거나 대립되기 보다는 민족혁명을 위해 결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6 · 10만세운동은 3 · 1운동과 운동의 주체 및 이념적 측면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6 · 10만세운동의 추진 주체들은 깊은 연대아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운동의 최초 계획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구상되어졌지만,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맡아 나갔다. 여기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만세운동의 점화역할인 서울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통동계는 당초 계획은 달리 했어도 추진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연대를 이루며 연합만세시위의 대오를 형성해 갔다. 그리고 국외에서는 임시정부와 병인의용대가 연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주목할 것은 그 계획의 성패 여부보다도, 이들 주체들이 융희황제의 국상을 당하여 3 · 1운동 때와 같은 전 민족적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또 목적의식적으로 운동을 추진해 갔던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제2주제>

6·10만세운동이 학생운동에 미친 영향

한규무(광주대 교수)

6.10만세운동은 그 자체로서뿐 아니라 1920년대 후반 이후 학생운동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촉발되고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데는 학생조직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는데, 이같은 학생조직은 6.10만세운동 이후 활발히 조직되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6.10만세운동의 사상/조직/인맥이 이후 학생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것이 항일운동사에서 갖는 의의를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각종 선행연구들의 성과를 종합·정리하고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6.10만세운동과 이후 학생운동의 상관관계를 검토하였다.

<제3주제>

6·10만세운동과 통일전선운동

이준식 (성균관대 연구교수)

육십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의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전선 운동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실천에 옮겨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처음에 기획한 조선공산당은 이미 국민당이라는 이름 아래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과의 통일전선 운동 방침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침의 연장선상에서 육십만세운동 과정에서도 천도교(구파), 노동자, 학생층을 중심으로 전 민족이 참여하는 대중 시위를 구상하고 있었다. 육십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만든 '격고문'이라는 격문은 통일전선 운동으로서의 육십만세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신간회의 창립(1927년), 광주학생운동(1929년) 등 이후 전개된 통일전선 운동은 모두 육십만세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통일전선 운동으로서의 육십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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