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그 희망의 증거 김영후 “나를 주목하라”
전반기 10경기 10득점이라는 통계적으로 본다면 경기당 평균 1골로 매 경기 때 마다 득점을 올리고 있는 신인으로서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 그의 기록은 이미 후기리그를 앞두고 내셔널리그 팬들의 관심과 흥미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김 영후 선수는 보인 정보 고를 거쳐 숭실대 4학년 재학시절 뛰어난 위치선정과 골 결정력으로 2005년 험멜 코리아배 추계 연맹전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주목받는 선수였으나 선수라면 누구나 뛰어 보고 싶은 프로 앞에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드래프트에서 지명 받지 못하며 현재 미포조선에 입단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기회의 발판으로 여기고 후기리그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김 영후 선수는 10골은 단지 기록에만 불과 하다는 듯이 오히려 더 자신을 채찍질 하며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었다.
“드래프트에 떨어지고 나서 막막했어요. 축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했었고요.제가 많이 힘들어 할 때 대학(숭실) 윤 성효 감독님과 고등학교 윤 선철 감독님이 당시에 장래성을 생각해서 많이 도와 주셨어요. 내셔널리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미포조선으로 입단이 결정 된 이후로는 더 이상 방황 하지도 않았죠. (웃음)무엇보다 윤 성효 감독님이 재학시절에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는데 졸업 할 때 가 되니까 전혀 그렇지 않으시더라고요.(웃음)”
이제 드래프트의 아픔은 훌훌 털어버렸다는 듯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방황은 어떻게 했냐는 기자의 엉뚱한 질문에 집에 혼자 있었던 게 다였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황이었다고 하며 멋쩍게 웃는다.
골을 넣으면 항상 기도 세레머니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김 영후 선수는 당시 신앙적인 힘도 컷 다며 지금도 화요일이면 최 순호 감독님을 비롯해 몇몇 선수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창원시청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지난 7월 남해에서 있었던 선수권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갔다. 4강에서 수원시청을 상대로 선취 골을 넣으면서 앞서 갔으나 후반 수원 한 동혁 선수와 이 중규 선수에게 역전골을 허용하며 결승행이 좌절 되는 듯 했다. 하지만 허성 선수의 종료 1분전 극적인 동점 골로 무승부를 만들며 승부차기에서 9대8까지가는 접전 끝에 결승에 안착 했다.
결승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국민은행을 꺽고 올라온 창원 시청을 상대로 전기리그 때 패했던 걸 설욕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 그러나 선수권리그 득점왕 이 길용 선수에게 선취 골을 허용한 뒤 정 민무 선수가 얻어 낸 페널티 킥을 김 영후 선수가 성공 시키며 우승의 문턱에 가깝게 다가가는 듯 했으나 후반 39분 선제골을 넣었던 이 길용 선수의 헤딩골로 또 다시 창원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결승에서 민무가 얻어낸 페널티킥 시도 할 때 많이 부담이 됐었어요. 하지만 대학 때부터 중요한 순간에 페널티킥을 많이 경험해 봐서 방향을 정해서 긴장 하지 않고 차려고 한 것이 동점 골로 이어 진거 같아요. 창원시청 박 말봉 감독님이나 최 순호 감독님 두 분 모두 내셔널리그에서 우승을 한번도 못해 보신 분들이잖아요. 창원은 창단 2년째고 저희 감독님도 내셔널리그는 처음 맡으셨고요. 전기리그 때 졌던 걸 되 갚아 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까도 말 했듯이 창원은 강한 팀 이었어요. 감독님께 우승컵을 안겨드리고 싶었는데....울산에서 남해까지 원정 응원 와준 서포터 분들에게도 죄송했어요.”
“감독님이 특별히 요구하시는 부분은 없으세요.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도 자신감 있게 플레이 하라고 하시고 믿고 맡겨 주시는 스타일이세요. 화도 잘 내시지 않고 경기 내용이 좋지 않을 때도 선수들에게 항상 칭찬으로 독려해 주세요.”
처음 접해본 내셔널리그를 직접 접한 소감에 대해 물어봤다
“솔직히 내셔널리그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제가 입단하게 되면서 대학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시즌에 임했지만 수준 있는 경기력과 예상보다 더 빠른 경기 템포나 파워, 체계적인 수비에 놀랐어요. 그리고 프로를 접하고 온 선수들도 많아 경험 면에서도 직접 차이를 실감했고요.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힘을 극복하려고 꾸준히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선수들의 열정에 놀랐어요.”
그런 그가 자신을 지명하지 않았던 프로팀을 향해 비웃기라도 하듯 김 영후 선수의 뒤를 따라 붙고 있는 부산의 천 대환 선수를 3골 차이로 2위로 따돌리며 득점 부분 1위를 달리고 있다.
“천 대환 선수와의 득점 경쟁은 글쎄요...생각해 본적 없어요. 솔직히 입단 첫해부터 주전에 대한 확신도 없었는데요(웃음) 열심히 한다면 기회는 오겠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10골을 넣기까지 팀 동료들이 많이 도와줘서 가능 했어요. 축구를 하면서 강릉시청과의 경기 때 해트트릭을 처음 해봤는데 당시에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특히 입단 동기 경춘 이와는 서로의 플레이에 대해 지적해 주고 조언도 해주면서 서로 대화를 많이 하고 있는 것도 단점을 보완하는 데 서로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거 같기도 해요(웃음)”
그렇지만 전반기 때 김 영후 선수의 활약과는 무관하게 의외로 미포 조선은 신생팀 창원에게 패하고 전반기 마지막 경기 부산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팀들에 비해 신생팀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으니까 오히려 고전 했던 거 같아요. 전반기 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상대가 창원시청이라고 꼽을 수 있을 만큼 수비수들 의 헤딩 능력이나 압박이 좋더라고요 공격수들을 가만히 놔두질 않던데요(웃음)”
김 영후 선수가 축구를 시작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실 제가 무남독녀 외아들이 예요. 처음부터 공식적인 축구부 과정을 밟았던 건 아니에요 그냥 동네축구에서 시작을 했다가 클럽 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선생님 추천으로 관악 초등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어요. 부모님이 축구를 하지 못하게 방에 가두기도 했고요(웃음)
당시 저희 집이 2층 집이었는데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뛰어 내리기도 했어요!
그 열정에 깜짝 놀라는 기자한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놀라셨어요? 그리 높지 않은 2층집이었는데.....(웃음)”
“중. 고등학교 때는 평범한 선수였어요. 고등학교 때 발목을 다쳤던 걸 제외하고는 대학 4년 내내 부상도 없었고요 고등학교 때는 일년 동안 수비수로 활동하기도 했었어요.
감독님이 공격수도 수비를 해 봐야 공격수의 길을 더 잘 안다고 하셨거든요.
수비수로 뛸 때도 틈틈이 공격적인 부분을 개인 훈련을 해 왔어요.
생각해 보면 전반기 때 10득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반기에 부상 없었던 것과 수비수로 활동 했던 것도 지금에 와서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작년 이맘때 즈음이네요. 험멜대회에서 우승했던 게...
지금은 윙에서 뛰고 있지만 대학교 때는 원 톱으로 뛰었어요.
지금 전남에서 뛰고 있는 홍열이랑 대학시절 유종의 미를 거두었던 게 기억나네요.
현재는 서로 다른 리그에서 뛰고 있지만 아직도 홍열이 와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요.
기회가 된다면 또 같이 뛸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아직은 젊은 나이이지만 자신이 걸어온 우여곡절 축구 인생을 되짚어 보며 표정에서 진한 아쉬움과 추억이 묻어나는 듯 보였다.
이번에는 김 영후 선수가 먼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중.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한번도 경기장에 오시지 않으셨어요. 섭섭한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부모님께 인정받기 위해 저를 더 강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조금만 하다가 힘들면 그만 둘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하지만 제 고집의 승리였죠. 그래도 대학교 때는 한두 번 응원 오시더니 지금은 매 경기 때 마다 응원 해 주고 계세요.(웃음)이제는 저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팬이 되셨어요.
무엇보다 프로로 가지 못하는 저를 보면서 더 힘들어 하셨을 텐데.. 내셔널리그로 오게 되었을 때 흔쾌히 받아 들여 주셔서 지금도 감사해요”
어린 나이에 상처가 되었을 법도 하지만 선, 후배 동료들의 부모님들이 다 똑같은 부모님 이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 뒤에는 비록 경기장에는 오시지 않았지만 자신의 뒤에서 조용히 기도로 응원해 주시는 부모님에 대한 믿음이 마음속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듯 보였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포기 하지 않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임했던 건 어쩌면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부모님에 대한 보답 이었던 것이다.
분위기를 바꿔 숙소 생활에 대해 물어봤다. 그런데 반대로 기자에게 숙소까지 어떻게 왔냐고 머쓱한 질문을 건네 온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어휴..저는요 처음 숙소에 들어올 때 울산에 도착해서 숙소 찾는데 버스타고 3시간 동안 울산 시내를 돌았어요(웃음) 택시 탈 생각을 왜 못했냐고요?
그건 아직도 미스 테리예요(웃음) 처음엔 집 이랑도 멀리 떨어진 지방인데다 서먹하기도 해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시내도 잘 나가요(웃음)”
휴식 시간에는 노트북으로 총 싸움이나 축구게임 플레이스테이션을 하기도 하고 시합 다음날 비행기 타고 서울 집에 다녀오기도 한다며 미소로 대답하는 모습에서 유니폼을 입지 않았을 때는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느 24살과 다를 바 없는 청년일 뿐이었다.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태권도 사범이 되어 있었을 것 같아요. 축구시작 하기 전에 태권도랑 축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체육관 관장님이 태권도 선수로 키워 주신다고 했었거든요(웃음) 축구 시작할 때 갈등되기도 했었는데 이상하게 축구에 끌리는 게 있었던 거 같아요.”
“별명이요? 같은 방에 있는 지훈이 형이 지어준 별명인데 킹콩 닮았다고 킹콩 이래요 정말 킹콩 닮았나요? 아니죠? 이미지 관리해야 하는데...큰일 났네 (웃음)”
서로 한참을 웃다가 조심스럽게 프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올해 경남 FC로 이적한 (전)상대 형이 숭실 대학교 1년 선배 예요. 미포에서 1년 동안 활동하다가 프로로 갔는데 어떻게 보면 저도 상대 형이랑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는데
상대 형도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올 거라고 말해 주더라고요 솔직히 프로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은 내년부터 시작되는 승강제도에 더 욕심이 나요.
후기리그 우승해서 저희 팀 선수들과 프로로 올라가고 싶은 목표를 꼭 이루고 싶어요.”
“후기리그를 앞두고 선수들 모두 의욕적으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또 저희 팀이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한 적이 한번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팀에 보탬이 되도록 열심히 할 겁니다. 그러고 나니 벌써부터 후기리그 기대 되는데요.”
인터뷰가 마무리 되어 갈 때 즈음 후기리그에 몇 골을 계획하느냐고 묻자 4골이라며 자신을 낮추었지만 더 넣어 달라는 철없는 기자 부탁에 수줍게 웃으며 7골로 넣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는 이미 떠오르는 내셔널리그 스타가 아니라 특유의 성실함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준비된 선수였다.
“득점왕 욕심이요? (웃음)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팀 우승이 먼저예요.
팀 성적이 좋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는 결과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크게 의식하지 않고 개인적인 목표 보다는 팀 승리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많이 움직이고 득점도 중요하지만 어시스트에도 주력할 예정 이예요.
팬 여러분들도 경기장 많이 찾아 주세요. 아참 미포 엔돌핀 서포터 분들에게 표현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 하고 있다는 거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후기리그를 앞두고 한층 더 성숙해진 김 영후 선수.
지금의 도전 정신과 어린 나이의 시련을 극복하고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품에서 묻어 나오는 침착함으로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목표와 확신을 가지고 내셔널리그의 희망의 증거가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무엇이든 과정이 있는 법이고 그 과정을 묵묵히 이겨낸 자만이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 하지는 못했지만 김 영후 선수는 조금씩 전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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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도자료는 National League(한국실업축구연맹)가(이) 작성해 뉴스와이어 서비스를 통해 배포한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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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1일 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