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개봉 앞둔 다섯 편의 영화 제작 일지

서울--(뉴스와이어)--다섯 편의 단편 영화가 빛고을 광주에서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제1회 서울환경영화제 경선부분에서 수상한 각기 다른 색체의 다섯 작품이 영화제가 아닌, 개봉의 형식을 빌어 일반 관객들을 찾아간다. <우리 산이야(김성환 감독)>, <솔개 그 마지막 날개짓(박환성 감독)>, <우리 집이 여기야!(서석준 감독)>, <바람(민제휘 감독)>, <에스쎄티카002(송주명 감독)>가 12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모두 110분의 러닝타임으로 개봉하게 된 것. 독립영화 배급 활성화에 방점이 될 이번 개봉을 위해, 서울환경영화제 사무국과 광주극장, 그리고 다섯 감독의 그 남다른 제작일지와 각오를 소개한다.

성 준 기 (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램팀)
제1회 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램팀의 일원으로 일을 하며, 경선 부문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플로 스톤(워싱턴 국제 환경 영화제 집행위원장), 김노경(한국 시네마테크 협의회 사무국장), 달시 파켓(스크린 인터네셔널 특파원), 임순례(감독), 조경만(목포대 인류학과 교수) 등 국내외 저명한 영화인 5인의 심사과정을 거쳐 다섯 작품의 수상작이 결정되었다.

2000년부터 4년 여간 한국독립단편 영화와 관련한 일들을 해오며 보아왔던 독립영화 작품군에서도 최상의 작품들에 속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다섯 작품의 색깔이 매우 다양함 또한 수상작들의 큰 매력이다. 다섯 명의 감독들은 그 작품 색깔의 차이만큼이나 다양한 작품 이력과 서로 다른 작업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들이다. 김성환 감독은 90년대 초반 푸른 영상에서 출발하여 주로 의식 있는 사회운동 다큐작업을 해 오고 있으며, 박환성 감독은 생물학 전공의 제약회사 직원에서 미국 유학을 거쳐 본인 표현 대로 ‘짐승 다큐 감독’이 되었고, 영상원 사운드 전공 영화학도로서 서석준 감독은 꾸준히 작업해 오고 있으며, 민제휘 감독은 서울예대 출신으로 졸업 후 씨네포엠 형식의 다큐인 <바람>을 완성하였다. 시각디자인에서 시작하여 모션그래픽 애니메이션작업을 하고 있는 송주명 감독은 미술과 영화의 경계에, 전시와 상영의 경계에 있는 작가이다. 스스로 독립 영화계와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해 온 작가들도 있었고 오랜 기간 한국 독립 다큐계의 믿음직스러운 파수꾼으로 작업해온 감독들도 있었다. 다양한 작업 방식의 감독들의 작품을 발굴해 낸 것은 아마도 제1회 서울환경영화제의 가장 큰 수확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섯 편의 작품을 110분의 하나의 상영시간으로 묶어 광주극장에서 개봉하는 행사를 기획하는 마음은 이 행사가 단발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단편 영화 개봉의 물꼬를 텄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4년 여간 뉴욕과 한국에서, 영화제를 통한 배급의 업무를 하며 혹은 직접 참여한 독립 단편의 프로듀서 일을 하며 여러 답답한 상황들을 접해왔다. 감독들이 제작상의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작품을 통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음을 아쉬워하고 절망하기도하고 때론 자포자기하는 모습들을 보며 마음 아팠던 기억들이 많았다. 이제 이 단편 개봉의 시작이 그들에게 작지만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부지런히 작업을 하고 있을 수많은 독립단편 감독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 형 수 (광주극장 이사)
예술영화전용관은 1년에 219일 동안 예술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의 목적이 상업영화 위주의 상영구조에서 소외된 예술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다양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비주류 영화시장을 개발함으로써 장기적인 측면에서 한국영화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업 취지를 위해 예술영화쿼터 내에 한국예술영화쿼터를 별도로 두는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219일 중 약 3/5에 해당하는 126일을 한국예술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한국예술영화에 배정된 126일이 사업의 목적에 제대로 충실히 기능하고 있는 가는 의문이다. 이 사업이 2년에 접어 들어 심도 있게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더라도 과연 상영구조에서 소외된 비주류 한국영화들이 예술영화전용관을 통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는가를 자문을 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작년에 예술영화로 인정 받은 한국영화들 대부분이 일반적인 상업영화와 같은 배급구조를 통해 극장에 개봉이 되었다.(광역개봉) 배급주체를 갖고 적절한 마케팅 비용을 통해 전국의 많은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지만, 자본이 우선시 되는 극장산업구조에서 관객과 긴 호흡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이 영화들이 상영구조에서 결코 소외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영화들의 제작비를 감안하면 와이드 릴리스를 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산을 맞추기 힘들 수 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되는 한국영화들의 대부분은 일반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는 한국영화들과 전혀 다른 점이 없을 수 밖에 없다. 자칫 쿼터를 적절히 맞추지 못하면 하반기에 오직 일수를 맞추기 위해 프로그램의 원칙이 없이 무분별한 재상영 내지는 내키지 않는 기획상영을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반면 다양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만들어 지고 있는 독립영화들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왕성하게 제작이 되고 있으나, 정작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상영구조의 틀에 제대로 한 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소통이 단절이 되고 있다. 다행히 2004년 들어 김동원 감독 <송환>과 노동석 감독 <마이 제너레이션>이 예술전용관을 통해 관객과 만날 수 있었지만, 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나 이들의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기다림과 갈증해소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열리는 다양한 형태의 영화제를 통해 독립영화들이 소개가 되지만, 그 기간 이외에는 극장에서 만나 보기가 어렵다. 정기적이면서 상시적으로 전국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과 배급구조가 취약한 상태에서 이들 영화의 소통을 위해서,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의 목적과도 상응하기 때문에 각 관계자 또는 조직(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제작 주체, 극장 등)이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좀 더 적극적인 개발과 관심, 그리고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 싶다. 다양한 삶의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독립영화들이 좀 더 자주 극장을 통해 관객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 성 환 감독
다큐를 만들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어떤 사건이 있고 과정이 있고 결과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이야기를 다루려면 내가 느끼고 내 스스로의 한계 속이라도 철저한 이해 과정이 뒤따라야 나름대로 떳떳한 다큐를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세편의 다큐를 만들었다. 첫 작품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거의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돈벌이를 병행해야 하고, 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몸소 이해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좀 느리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 산이야>는 그렇지 않았다. 성미산사람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삶을 보면서 그 동안의 의문과 고민이 풀렸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평소 우리의 자연환경 내지 생활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레 다큐를 찍는 소재와 주제도 그 쪽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월댐을 백지화시켜 동강을 보존한다고, 외관순환고속도로로부터 북한산을 지켜낸다고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찬, 반 또는 환경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지킬 것이냐 개발할 것이냐.....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모든 환경문제도 그렇게 밖에 접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성미산 사람들은 스스로의 모습과 실천 속에서 답을 주었다. 환경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대상이 아닌 그 속에서 함께 누려야 할 우리의 존재 그 자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자연스런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다름 아닌 그 동안 단절되었던 우리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것. 인간은 지구를 콘크리트 또는 아스팔트로 재구성하는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생물들과 나란히 지구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앞집 사람과 손을 잡고 옆집 사람과 함께 나누는 성미산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성미산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성미산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성미산이 우리들을 지켜주고 있음을...다큐를 만들면 많이 배운다. 성미산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할 일도 생각해 본다. 배우고 느꼈는데 실천하지 않으면 뭔 소용인가. 내가 가진 건 뭐고 나눌 수 있는 건 뭘까. 내가 가진 걸 나눌 때 사람들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성미산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수업 시간에 <우리 산이야>를 본 대학생들이 쓴 수 십여 통의 쪽지를 받았다. 이런 독립다큐멘터리를 처음 봤다는 학생들이 많았다.
“오늘 수업시간을 통해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환경다큐멘터리 영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상황 그대로를 찍은 거라 그런지 더 감동적이었고 더 와 닿았습니다. 잘 봤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 만드세요.” 할리우드영화 외에 처음으로 본 영화가 <우리 산이야>이라니 순간 찡했다. 그 다음으로 많았던 내용은 <우리 산이야>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내지는 그런 기회를 만드는데 열심히 노력해줬으면 좋겠다는 사연이었다. 물론 <우리 산이야>를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과 자연의 소중함을 한번 더 인식하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작품을 보고 나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근데 그 쪽지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런 독립다큐멘터리의 ‘발견’에 대한 기쁨, 안타까움이랄까 뭐 이런걸 왜 이제 보게 되었을까. 왜 이런 영화를 쉽게 볼 수 없을까. 등등 이었다. 그 쪽지들을 다 읽고 난 뒤 스스로 그 학생들과 ‘공감’을 이루었다. <우리 산이야>를 만든 이유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성미산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서울시와 맞서 성미산을 지킨 주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미산으로 인해 서로의 관계를 되찾아가는 그 분들의 모습에서 참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큐를 만들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 배움을 나누고 싶었다. 성미산사람들을 보고 배운 것을 <우리 산이야>를 통해 서로서로 나누고 싶었다.짐작하건데 그 대학생들도 <우리 산이야>를 보고 그 마음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했을 것이다. <우리 산이야>가 광주극장에서 곧 개봉된다. 어떤 극영화도 자신을 울리지 않았지만 <우리 산이야>를 보고는 눈물을 글썽 그렸다는 한 학생의 글처럼, 다양한 영화들이 좋은 극장에서 개봉될 수 있는 작은 토대가 되길 바래본다.

박 환 성 감독
<솔개, 그 마지막 날개 짓>(이하 <솔개>)은 본인이 한국에 와서 제작한 첫 1시간짜리 자연다큐라 감회가 남다르다. 촬영하면서 내내 자연다큐 하나 재대로 배워보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 동네 유명PD며 촬영감독들 따라 옐로스톤(Yellowstone National Park, Wyoming)에서 최남단 에버글래이드(Everglade National Park, Florida)까지 5년여를 쫓아 다녔던 일들, 그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나름대로 응용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과한 욕심, 하지만 아직 그에 못 미치는 역량, 낯선 한국의 영상작업 시스템과 분위기 등이 어우러져 솔개를 제작하는 내내 참 많이도 넘어지고 자빠지고 했다. 어찌 보면 <솔개> 촬영 내내 솔개에 대한 생각보다 오히려 본인 자신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왜 나랑 별 상관도 없는 솔개란 새를 찾아 이 절벽을 오르고 있는가? 어찌하다 자연다큐를 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게 되었나? 미국엔 왜 갔으며 한국엔 또 왜 돌아왔나? 정말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긴 한 건가?” 뭐 이런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의 연속이었으며, 그 와중에 여기저기 힘없이 떠밀려 떠돌아다니는 솔개의 모습이 나 자신과 오버랩 되기도 하였다. 본인의 현재 전공은 자연다큐다. 본인은 자연다큐란 말보다 “짐승다큐”라 종종 말한다. “자연,” “동물” 이란 말보다 “짐승”이란 호칭이 본인에게 더 팍팍 와 닿는다. 그 속엔 자연과 야생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본인의 학교 때 전공은 생물학이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현미경이나 들여다보는 일에 별 흥미를 못 느껴 공부는 안했다. 그리곤 사회에 나와서 한 첫 일이 제약회사 약 장사였고, 두 번째 한 일이 비행기 승무원이었다. 둘 다 사람 만나는 게 일이었다. 약 가방 들고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의사들 상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약 선전하는 본인의 모습이 참 많이도 어색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본격적인 비즈니스는 그 뒤에서 이루어진다. 약의 효능이랑 전혀 상관이 없는 뭐 그렇고 그런 과정 속에서 계약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적응이 잘 안됐다. 그래서 1년도 못돼 관뒀다. 몇 달 백수로 놀고먹다 우연히 신입사원 모집광고를 보고 지원해 하게 된 일이 모 항공사 객실승무원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해외에도 처음 나가보게 되고 한동안은 재미있었다. 해외로 비행가서 2~3일 쉴 때 혼자 차 렌트해서 이곳 저곳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는 참 좋았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올 때는 너무 아쉬웠다. 차츰 비행기 안에서 손님들 대하는 일에 지쳐갈 즈음 미국이랑 영국에선 아프리카랑 아마존 정글의 짐승들 프로그램이 참 많이 나오고, 인기도 좋아 하루 종일 그것만 틀어주는 채널이 몇 개씩 되는걸 알게 되었다. 학교 때는 그저 노느라 내가 생물 쪽에 관심이 있는지 어땠는지 잘 몰랐는데 갑자기 그 일이 땡겼다. 일하면서 신기한 생물구경도 하고 세계 여기저기 여행도 하고 나에겐 ‘딱’인 것 같았다.

짐승들 지켜보는 일을 진짜 좋아했는지, 사람 대하는 일에 지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별 고민 없이 회사 사표 내고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미국으로 갔다. 자연다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갔다. 가면 무슨 길이 생기겠지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식한 방법으로... 그렇게 첫발을 내디딘 곳이 플로리다이고 거기서 랭귀지 과정부터 시작했다. 자연다큐를 하려면 우선 생물학을 계속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랭귀지 한 학기 마치고, 캘리포니아 샌디애고로 건너가 그곳 주립대(CSU San Diego)에서 돌고래 생태 전공하는 교수 밑에 석사과정으로 갔다. 그러면서 영화 쌩기초 한 과목을 수강했는데 그 과목 교수 충고로 생물 쪽 석사과정은 관두고 LA로 건너가 영화학교에 등록했다. LA와 San Jose의 영화학교에서 영화에 대한 기초를 배우며, 동시에 인근 국립공원의 야생동물 조사 인턴 일도 같이 했다. 그러다 우연히 자연다큐영화제가 몬태나와 와이오밍주에서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영화제 자원봉사 일을 신청했다. 거기에 가면 미국 영국 등 전세계 내노라하는 자연다큐 베테랑들이 다 온다니 뭔가 길이 보일 것 같았다. 그 영화제에 Volunteer로 일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 한 전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곳에서 우연히 자연다큐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지원해 좀 더 체계적인 자연다큐 공부를 하게 됐고, 그 영화제에서 알게 된 National Geographic, Discovery, BBC 등의 정상급 자연다큐 연출자 및 촬영감독들 조수로 삼각대며 무거운 짐 가방 들고 뒤따라 다니며 그들의 제작현장 노하우도 어깨 너머로 배우게 되었고...

그들이 만든 작품과 그 야생동물영화제에 출품된 많은 작품들이 나에겐 참으로 충격이었다. ‘짐승을 소재로 저렇게 재미나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것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순 오지로만 다니며 온몸을 던져 매진하는, 그러면서도 그 일 자체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나에겐 참으로 새롭게 느껴졌고 내 인생의 한 교본이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내 이름을 걸고 만들 1시간짜리 첫 장편 자연다큐에 슬슬 기대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왕이면 한국의 야생동물을 소재로 만들고 싶어 2년 전에 돌아와 만든 첫 작품이 바로 ‘솔개’다. 하지만 나의 첫 장편 자연다큐는 제작 첫날부터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에서의 영상물제작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제작비마련은 어떻게 해야 할지, 솔개에 대한 전문가는 누구인지, 한국의 방송에 내보내려면 누구를 만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하나에서 열까지 마치 쌩 초짜가 처음 일을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솔개는커녕 맹금류를 전공하는 학자조차 없다 보니, 혼자 얼마 되지 않는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솔개의 분포현황을 파악했으며, 그 결과 현재는 낙동강하구에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넓은 낙동강하구 중에서도 먹이 사냥은 주로 어디서 하는지, 무얼 주로 먹는지, 둥지는 어디에 트는지, 짝짓기는 어떤 환경에서 하는지, 새끼는 어떤 식으로 키우는지 등을 혼자 배낭 메고 촬영기간 10여 개월 동안 돌아다니며 일일이 그 생태를 파악하며 동시에 촬영을 진행시키는 일이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미국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나도 모르게 높아진 눈높이와, 현실에서 나 자신의 아직 부족한 역량, 초라한 주변 촬영여건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 극복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 헤매던 솔개 둥지를 우연히 발견 하던 날, 하루 종일 허탕치고 절벽 한쪽 귀퉁이에서 차갑게 식은 김밥 한 줄 먹고 졸다 지쳐 막 카메라를 철수하려 할 무렵 어디선가 날아 던 한 쌍의 솔개의 짝짓기 모습을 카메라에 담든 날, 그렇게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마무리 할 즈음에 운 좋게 방송 쪽이랑 연결이 돼 전국방송을 타던 날, 그리고 또 이렇게 환경영화제란 것이 생겨 극장에도 상영되고 하면서 자연다큐를 해보겠다는 선택이 썩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 새로운 힘이 솟는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번 <솔개>는 극장에 걸릴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제작기간 중 아쉬운 부분도 많았고 이런 걸 방송이나 극장에서 보여 진다는 게 많이 쪽 팔린다. 하지만 아직도 열악한 국내 자연다큐계에서 극장 쪽으로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한편으론 위안도 된다. 누구나 영상하는 사람들에겐 꿈이자 목표겠지만 본인도 제대로 된 극장용 자연다큐를 만들어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자 희망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도 이제 조금은 맛을 봤다. 사람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도 극장에 걸리기 힘든 판에 짐승을 소재로 한 것을 틀어줄 극장이 있겠으며 그 제작비 마련조차도 힘들 것이라 들 말한다. 국내 자연다큐 인재풀도 우선 수적으로 많이 빈약하다. 더욱이 필름카메라로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 영상작품이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갈 길은 참으로 멀어 보인다

남들은 왜 짐승다큐를 하느냐 종종 묻는다. 본인은 짐승다큐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저 한국 사람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고, 우리와 문화가 다른 외국 사람이 나오는 영화가 있고, 사람과 생김새는 많이 다르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이 있는 짐승영화(Wildlife Film)가 있은 것이며, 그기에는 사람들과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비슷한 구석도 많은 그들 나름의 살아가는 모습이 있고, 그를 통해 색다르게 사람들에게 와닿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양한 장르들 중 각자의 취향과 선호 정도에 따라 사람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극영화나 사람다큐를 하고, 나같이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기 좋아하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스트레스 받는 것 별로 안 좋아 하는 사람은 짐승다큐 쪽을 선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신에게 맞는 분야에서 한편 한편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다 보면 언젠가는 극장에서 좀 더 좋은 이야기와 그림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내 생각과 느낌을 같이 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서 석 준 감독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쉬운면서도 곤혹스러운 것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삼는 것이다. 지나온 과거와 자신을 조우하다 보면 온갖 부끄러운 기억들이 떠오르게 되고 또한 현재의 나의 삶을 반추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만들고 발언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과거의 책임뿐만 아니라 현재의 책임 혹은 미래의 책임까지 져야 하는 무거운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나의 영화관이다. <우리 집이 여기야!>에 대한 최초의 모티브는 곧 사라져 간다는 신림7동 재개발 지역에 대한 기사였다. 어렸을 때의 유년기를 난곡에서 보낸 나는 그 동네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몇 번의 기회에 재개발 지역을 가본 적이 있지만 , 주로 대학 근처에 인접한 왕십리 지역이었기에 성인이 된 후에 신림동을 찾아간 적은 거의 없었다. 막연히 초등학교 때의 기억과 대학에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한 후 찾아가 본 신림동 지역에 대한 느낌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제법 괜찮은 시나리오가 나왔다는 어줍잖은 자부심으로 찾아간 지역이었지만, 실제로 그 공간에 가고 시나리오에 대한 아이들의 마음가짐을 느껴보려고 애쓰려니 마음의 벽에 자꾸 부딪히게 되었다. “너는 가짜야.. 너는 거짓말쟁이야.. 너는 이들을 대상화려고 하고 있어..”등의 자책감 어린 목소리는 내내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었고 한여름의 산동네 정상에서 나는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신파적이고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감동적인 영화를 찍겠다던 나의 자신감은 이미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 온 것이 아니야. 나는 어렸을 때도 살았어. 나는 이들과 같이 화염병을 던져 본적도 있어‘라는 나의 변명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이들을 영화화하려면 진작에 6개월 전부터라도 아이들을 취재하고 같이 생활했었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고 뒤늦게 아이들과 얘기도 해보고 영화에 나오는 하교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보았으나 아이들의 마음속을 느끼기란 정말 힘들었다. 게다가 철거직전에 몰린 신림7동 재개발 지역엔 파파라치 같은 느낌의 사진기를 든 젊은이들이 사람들을 대상화하며 폭력적으로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저들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며 과연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접을까? 좀 더 진심으로 고민하고 경험한 후 내년에 찍을까? 등의 갖가지 생각들이 떠올랐고 거의 8월 한 달을 신림동과 집을 오가면 자책과 괴로움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는 것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일정이 있었으며 스텝도 있었고 배우들에 대한 오디션도 진행 중이었다. 나는 최대한 내가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만 영화로 찍기로 마음 먹고 시나리오를 대폭 수정했다. 자극적이거나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부분을 들어내고, 한 달 동안 학교에서 주인공 아이의 집까지 걸으며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감정에 대해서만 솔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여러 가지 디테일과 설정은 사라졌고 영화는 학교에서 산동네 아이의 집을 걸으며 느끼게 되는 아이들의 감정과 반응에 대해서만 집중하기로 했다. 영화에 나오는 3명의 친구들의 반응과 느낌들은 내가 그곳에서 한달 동안 걸으며 느꼈던 생각들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 그것은 매체나 형식에 대한 이해 외에도 영화의 내용을 책임질 수 있는 제작과정과 그것을 만들어 나가는 나의 삶에 대한 질문까지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민 제 휘 감독
어느 날 태풍이 우리나라를 덮쳤다. 신문에 조그마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사진 속에는 태풍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면서 방안에 작은 시냇물이 생겼다. 우리가 살고, 자고, 먹고, 지내는 방안에 작은 시냇물이란 생경한 풍경이었다. 그 풍경은 아무 말도 필요 없는 하나의 시나 다름없다. 그 사진을 보고 태풍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 <바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고민이 생겼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할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카메라로 다가설 때, 내가 과연 그들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웬걸..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들에 태풍이란 하나의 바람이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어찌 피해갈수 없는 바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현명하게도 바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추석연휴를 앞두고 교통대란을 피해 일찍 고향으로 내려가서 추석연휴를 맛보고 있을 때 난데없이 전화가 한 통 왔다.

지금까지 기다리던 태풍이 온다는 것이다. 난 호출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고, 태풍의 진로를 파악하여 예상경로를 찾아 거제도를 목표로 출발하였다. 봉고차 한대를 렌트 하고 서투른 운전으로 결국 목적지까지 왔다. 태풍인 줄 알고 열심히 찍었던 그림들은 결국 태풍이 아닌 비구름이었다. 한참 후 바람이 거칠어 지면서 큰 바람은 서서히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거제도에서 트라이포트를 세우고 큰 바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삶들은 재해 준비로 바빴고 우린 큰 태풍이길 바랬다. 문득 내 모습이 사고를 기다리고 있는 견인차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큰 바람이 왔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해일로 인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과연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짓을 하고 있는가, 조금만 실수해도 저 바람에 날라갈 것만 같은데...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서 피곤하고 또 피곤하였다. 상처 받은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게 촬영을 어렵사리 마치고 추석 귀경 행열에 합류하여 거제도를 떠나왔다. 휴게실에서 추석을 맞아 가족들을 보고 올라 오는 귀성객들과 우리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달랐다. -제작일지 중-

송 주 명 감독
자연에 대한 내 생각을 영상으로 옮겨보았다. 어떻게 하면 대자연을 보는 이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혹은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느낄 수 있게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내 주장, 혹은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싶지 않았고 보는 이 스스로가 내가 그려놓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 여행할 수 있고 내 생각 내 감정이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도록 작업했다. 이제 꽤 많은 매체를 통하여 애스테티카002를 선보인 것 같다. 다양한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에 감사한 생각이다. 환경영화, 환경을 이야기한다는 것. 상당한 책임감이 따르고 그런 부분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왠지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고 거대한 스케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자연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기가 막힌 스토리도 없고 뛰어난 연기도 없을 뿐더러 이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 정신 따위도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보는 이들이 자연에서 추출된 움직이는 그림을 보고 들으며 내가 제시한 미적 즐거움으로 인해 작품을 보기 전보다 혹은 보는 그 순간만이라도 자연을 좀더 가까이 할 수 있었다면 모션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생각한다.

이 작품은 소니의 후원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자연을 모토로 한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내 작업을 틀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고 소니의 프로젝트 일정에 맞추어 작품을 제작하였다. 소니라는 기업이 내 작품을 사용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업의 이런 움직임은 작가에게도 작업을 의뢰한 기업에도 그리고 사회 전반적인 문화의 움직임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 사회의 트랜드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작가라면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퍼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제작되자 마자 좋은 기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내 영상이 과연 '환경영화'의 범주에 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가지고 환경영화제에 출품하였다. 사실 내 작품이 필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다큐, 혹은 고발영화의 같은 말 그대로의 '영화'들이 대부분을 이룰 것이라 생각한 환경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고, 내 작품이 환경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계기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양한 영상을 접하고자 했던 작가로써의 욕심을 충족시켜주리라는 기대뿐이었다.

자, 이제는 극장개봉이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서 내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볼 지, 또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지…


서울환경영화제 개요
국내 최초로 ‘환경’을 테마로 하는 서울환경영화제는 2004년 10월에 첫 발을 디뎠으며 환경영화 사전제작지원 제도 등을 통해 수준 높은 환경 영상물의 창작과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gffis.org

연락처

서울환경영화제 사무국 02-725-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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