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소(소장 김수남) 주최로 11월 24일(금) 오전 10시 경상대학 8층 세미나 A실에서 열리는 ‘제6회 영·호남 4개대학 인문학연구소 합동학술대회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주제로 사학적 측면, 철학적 측면, 문학적 측면에서 오늘의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심층적 접근을 시도한다.
먼저 영남대에서는 최재목 교수(철학과)가 ‘소프트웨어로서의 고전, 그 대중적 가능성’, 동아대는 정봉석 교수(문예창작과)가 ‘박찬욱 영화의 복수담론 고찰-<올드보이〉를 중심으로’, 원광대에서는 이주천 교수(사학과)가 ‘한국대중문화의 특성과 문제점-90년대 민주화 이후를 중심으로’, 조선대에서는 김형중 교수(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가 ‘문학과 영화: 소설의 외출’을 각각 발표하며 조영철 원광대 교수(유럽문화학부), 이상우 영남대 교수(국어교육과), 박종탁 동아대 교수(유럽어문학부), 나희덕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가 토론자로 참석한다.
영·호남 4개 대학 인문학연구소 합동학술대회는 조선대·동아대·영남대·원광대 등 4개 대학 인문학자들이 인문학 연구의 활성화를 위하여 철학과 사학, 문학, 언어학 등 인문학의 전 영역에 걸쳐 연구 이론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화·발전해오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이를 통해서 21세기라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 부응하는 인문학 연구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날 발표되는 논문을 요약해 소개한다.
△소프트웨어로서의 고전, 그 대중적 가능성(최재목 영남대 교수)=고전(古典)을 소프트웨어로 보자는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인문학 위기 논쟁에 대한 실천적 대안 제시의 일환에서 이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 선언은 안주하는 지식인들의 관행적 행태를 보여주는 전형이기도 하다. 가만히 앉아서 어디선가 지원만 해주면 인문학이 활성화된다는 낭만적 하소연으로서는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절박할수록 인문학 시장개척에 적극 앞장서야 할 것이다. ‘먹고 산다’는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빼놓은 ‘청담(淸談)의 인문학’ 논의는 그만두자. 인문학도 사람이 먹고사는 방식의 하나이므로 그 자체로 곧 형이하학이며, 동시에 먹고사는 방식에 대한 탐구와 교육이므로 곧 형이상학이기도 하다.
고전이라는 브랜드는 첨단 과학기술에 의해 찬밥 신세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매력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고전 속에는 리얼한 인간사가 들어 있으며, 시장바닥 같은 복잡함에서 여과된 번득이는 인간적 지혜와 재치, 배신과 의리, 사랑과 우정, 삶과 죽음 등등 ‘사람 냄새나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고전은 상담과 치유의 효과도 갖는다. 나아가 고전은 직관, 상상력, 비유로 가득하다. 중간자의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가 말했듯이, “고전은 문명의 회춘에 기여”할 수 있다.
고전을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보고, 일상적 인식으로서 고전의 근엄함, 경건함을 벗어나 첨단과학기술 등의 다양한 영역들과 어울려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로 이어져 대중과의 친화력을 높여가는 방안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찬욱 영화의 복수 담론 고찰-<올드보이>를 중심으로(정봉석 동아대 교수)=박찬욱의 영화가 대중들뿐만 아니라 비평의 양면에서 호응을 받는 것은 그 내면에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 구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담론을 내밀하게 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이 그의 작품들을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모순 구조는 주로 사회적 금기로부터 비롯된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한국 사회의 모순구조가 낳은 인간 소외의 현실을 복수라는 대중적 코드로써 고발하는 작품들이다. 복수는 모든 액션 장르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장치이지만, 그것이 대중적인 영화의 핵심적인 코드가 되는 이유는 사실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제도화된 금기의 벽에 막혀 그 욕망이 내재화된 상태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액션 영화가 대체로 복수를 위한 활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박찬욱의 영화가 그것을 넘어서는 변별력을 지니는 것은 바로 그 복수의 욕망을 억압하는 현실에 내재된 금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담론을 중층적으로 구조화시키는 것에 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전으로 불리는 <오이디프스대왕>의 명성을 현대적 의미에서 고스란히 되살리고 있는 작품이다. 박찬욱은 원작 만화가 암시하는 것에 그친 ‘그리스 비극에 필적할 만큼 무시무시한 어떤 사건’을 오이디프스 서사의 본질을 이루는 비극의 중층구조를 원용함으로써 개연성 있는 동시대의 서사로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올드보이>에 있어 복수의 대상은 표층적으론 비루한 개인 오대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무심한 개인에게서 발화된 ‘말’이 점차 사회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잔혹한 복수를 잉태하는 비극이 맺어진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핵심 코드인 ‘복수’는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경지를 보인다. 즉 이우진의 복수는 오대수의 가벼운 말에 대해 그 책임을 묻는 사적인 징벌이라기보다, 근친상간을 금기하는 정언명령으로서의 사회적 담론과 그 담론이 작용하는 폭압적인 구조에 대한 저항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대중문화의 특성과 문제점’(이주천 원광대 교수)=90년대 이후 대중문화는 인터넷에 익숙한 신세대가 주도한 것으로 이데올로기적 압박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며, 탈이념적, 포스트모던적 소비행태를 보이면서, 80년대 이전의 세대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인다.
우선 대중문화의 긍정적 측면은 9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한류현상과 연관된다. 한류는 아시아 대중이 미국문화 중심의 종속적이고 수직적인 문화구도를 벗어나 주변부의 수평적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시작됐다. 한류 열풍은 한국 대중문화의 정체성, 나아가 한국 문화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열광하는 ‘타자(他者)’를 통해, 그들의 ‘타’로서 우리 문화를 되돌아보게 됐다. 한류가 한국 대중문화의 부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점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비친 90년대 대중문화 현상을 바라 볼 때, 권력과 언론 매스컴에 의해 대중의 판단력이 교묘한 대중선동과 대중조작에 좌지우지되어 한국사회의 좌경화에 악용되지 않았는지를 심각하게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90년대 대중문화는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대중조작의 수단으로서 철저하게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기부터 한국사회에서 거세게 불기 시작한 좌경 민족주의의 바람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했으며, 결국 무엇을 결과했는지를 곰곰이 반추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열정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그 열정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가까운 곳에서의 열정은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자신들이 다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어쨌든 90년대 이후 대중문화는 급속히 변화되는 탈냉전적 국제정세의 흐름과 민주화 물결을 타고 번지는 자유분방한 국내적 사회환경 속에서 기존의 모던적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이 형성된 포스트모던적 행태를 보인 소비지향적 문화로서 21세기에도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문학과 영화: 소설의 외출’(김형중 조선대 교수)=소설은 무엇보다도 언어를 고민해야 한다. 어떤 논자들은 종종 소설의 핵은 ‘서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사는 영화에도 연극에도 TV 드라마나 만화에도 있다. 소설의 서사는 그냥 서사가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지는 서사다. 그럴 때 고민할 것은 다른 장르들과 구별되는 언어 예술로서의 소설에 대한 자의식이다.
찾아보면 그런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배수아의, 모든 서사를 삭제한 에세이적 소설 쓰기가 있다. 인물로부터 모든 행위를 삭제하고, 문장으로부터 모든 서사 가능성을 삭제한 채 오로지 웅얼거리는 언어만을 남겨두는, 정영문의 소설 쓰기가 있다. 의미 대신 리듬을 찾아 유영하는 언어들로만 이루어진, 한유주와 김태용의 소설도 있다. 그리고 영상 시대 주체들의 습성을 공유하면서도, 도저히 영상으로는 옮길 수 없는 현미경적 묘사로 문학의 활로를 찾은 하성란의 글쓰기가 있다. 특별히 하성란의 예가 중요한데 문학이 이제 영화 장르와의 횡단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란 사실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필수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횡단이란 일방적인 수용이나 흉내 내기가 아니다. 횡단이란 자신의 합리적 핵심을 유지한 채 이질적인 다른 영역과의 마주침을 통해 역동적인 효과를 산출할 때만 의미가 있다. 하성란의 문장들은 지극히 시각적인 방식으로 시각 예술에 저항하는 문학 언어의 전범을 보여준다. 요컨대 하성란의 언어는 영상 시대에 문학의 어떻게 시각 매체와 횡단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예에 속한다.
우려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씌어진 작품을 이미 영상 문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우리 시대 독자들 중 몇이나 읽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문학이 자신의 자율성을 고수하고 ‘문학’이라는 이름을 지키는 방식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모든 항상 그랬듯이 모든 위대한 문학은 독자의 수를 미리 고려하지 않고, 훌륭한 독자는 ‘그래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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